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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조선 사회 변화에 대한 국가의 법적 대처와 민(民)의 법의식 변화
글. 조윤선(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연구교수)

<정소지어관가(呈訴志於官家)>, 『형정도첩』 | 김윤보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공공누리
우리 사회는 현재뿐 아니라 전근대 시대에도 공동체 유지를 위한 국가의 강제력이 법, 규범의 형태로 실행되었고, 민(, 백성) 또한 그 체제의 일원으로서 살아갔다. 사람들 간의 분쟁, 갈등은 시대를 막론하고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개인의 이해관계, 경제적인 이익 관계, 자존심이나 오기 등 감정적인 문제 등이 얽혀 합의에 이르지 못하게 되면 결국 ‘법대로 하자’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처럼 법을 신뢰하고, 법에 분쟁의 결과를 맡기자는 인식은 언제부터 형성된 것일까. 근대화 이후의 산물일까.
우리는 전근대 조선의 사회를 얘기할 때 법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낯설다. 전근대 조선시대의 법은 곧 국왕의 명령이며, 국왕이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조정하였을 것이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법의 영역에 국가의 행정, 형법 등 공법뿐 아니라 개개인의 문제를 규정한 사법도 포함된 법치적인 체제와 구조가 기본이었던 국가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어떠한 방식으로 법이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러한 법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지 살펴보면 좋을 듯하다. 우선 조선시대 법이 제정되는 과정을 보면 국가의 핵심 행정 기관인 육조(六曹), 의정부, 비변사 등 정무 기관, 군무 기관에서 각각 담당하는 여러 공적 사안들이나 문제점 등을 계(啓)나 상소(上疏)의 형식으로 올린다. 그러면 국왕을 위시하여 삼정승 등 조정 신료들은 그 문제점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타당성을 검토하여 해결 방안을 마련하며 결론을 도출한다. 그리고 그 최종 결과는 왕의 교지인 ‘수교(受敎)’로 제정되고 왕명으로 하달된다.
이 수교가 곧 제반 법령의 기초이고 법의 원천[pool]이다. 이러한 수교는 왕대별로, 시기별로 차곡차곡 모이며, 이 중에서 영원히 시행되어야 할 수교 등이 선택되어 조선의 법전에 실린다.
조례, 조령, 법령, 법규 등 여러 법적 조치들을 종합하여 상충되는 것을 조정하고 정리하여 하나의 체계를 갖추어 찬집(纂輯)한 것이 법전이라 하겠다.
법전의 편찬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총 4편의 법전이 편찬되었다. 즉 태조부터 고종 대까지 조선이 유지되고 운영되었던 법 체제는 총 4번에 걸쳐 제정되고, 수정·보완되었다는 의미다. 각 법전은 육조의 정부 체제에 따라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의 육전(六典)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최초의 법전은 『경국대전』으로 태조부터 내려진 주요 수교를 모아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것이고, 『경국대전』 이후의 수교를 모아 1746년(영조 22)에 편찬한 것이 『속대전』이다. 이로써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의 기본적인 법 체제가 세워졌다.
조선에서 법전을 편찬할 때 중요한 원칙이 ‘조종성헌존중주의(祖宗成憲尊重主義)’다. 선대인 조종(祖宗)에서 확고하게 제정된 성헌(成憲)은 고치지 못한다는 것으로, 세월이 흘러 조종에서 제정한 법이 의미가 없어지거나 폐지되었다 하더라도 그 법규는 계속 기록해야 했다. 그러나 『속대전』은 『경국대전』 이후의 수교를 편찬한 것이어서 『경국대전』의 조문은 싣지 않았기 때문에 완벽한 법전은 아니었다. 따라서 1785년(정조 9)에 『경국대전』과 『속대전』의 법규를 모두 합하고, 『속대전』 이후의 수교를 정리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고, 이어 1865년(고종 2)에 『대전통편』 이후의 수교를 추가하여 『대전회통』을 편찬함으로써 조선의 마지막 법전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편찬된 법전은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를 아우르는 결과물이고, 이 법전을 기본으로 조선 사회의 운영과 통치가 이루어졌다.
다만 태조가 조선을 처음 세웠을 때 형률은 『대명률(大明律)』1을 따른다고 하여 형벌을 시행해야 할 경우는 『대명률』이 기본법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시기가 지날수록 조선의 실정에 맞는 형률이 새롭게 제정되면서 각 법전의 「형전」에 실리게 되었고, 『대명률』과 조선 법전의 「형전」에 실린 형률이 상충되는 경우는 조선의 「형전」 조문을 우선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조선의 법전은 명실상부한 통치 기준이 되었다.
(각주)
1 중국 명나라의 형법전으로 당나라의 법률을 참고하여 편찬했다.
사회를 반영한 법전의 변화

『속대전』 「형전」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러한 네 종류의 법전 중 조선의 시기적 변화상을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법전은 『속대전』이다. 『속대전』은 『경국대전』 이후 18세기까지 조선 사회의 변화에 따라 제정된 법규가 실려 있는데, 『경국대전』에 비해 가장 많은 조문이 증보된 부분은 「형전」이다. 『속대전』 「형전」은 28편 264조로 『경국대전』 「형전」 24편 71조보다 내용 면에서의 큰 증가를 보인다. 특히 새로 신설된 ‘살옥(殺獄)’, ‘검험(檢驗)’, ‘간범(姦犯)’, ‘사령(赦令)’, ‘속량(贖良)’, ‘보충대(補充隊)’, ‘청리(聽理)’, ‘문기(文記)’, ‘잡령(雜令)’ 등은 조선 사회의 변화상을 읽을 수 있는 항목이다.
사람 간에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살인이나 상해(傷害) 등 인명에 관한 범죄로 시대가 변화할수록 관련 범죄가 증가하고 그 양상도 다양해졌다. 따라서 수범(首犯)과 종범(從犯) 등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확실하게 하고,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등 형사 사건 처리에 대한 여러 기준이 필요했고 그 결과 ‘살옥’과 ‘검험’ 항목이 마련되었다. ‘살옥’은 살인 사건을 처결할 때 신중히 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비롯해, 구타당한 사람의 상처가 나을 때까지 범인에 대한 처벌을 보류하던 보고기한(保辜期限), 부모·계모가 자식을 죽이거나 처부모·처상전을 살해하거나, 관에 아뢰지 않고 함부로 노비를 죽이는 등 다양한 인명 범죄에 적용할 조문이 담겨 있고, ‘검험’은 현재의 검시(檢屍)와 같은 의미로 초검(初檢)과 복검(覆檢) 등 검험에 대한 방식과 절차 등을 규정하였다. 형사 사건 처리의 가장 기본적인 두 항목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간범’은 강간, 간음 등에 관한 조문으로 사족(士族,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좋은 집안)과 천인의 간음 범죄에 대한 규정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임산부를 범한 경우, 사족이 시마(緦麻)2 이상의 친족을 간음하거나, 사족 부녀가 음란한 범행을 자행하거나, 비부(婢夫, 여종의 남편)가 처상전을 간음하거나, 사족 처녀가 겁탈당한 경우 등에 대한 조문이다.
(각주)
2 유교의 상복제도(喪服制度)는 망자(亡者)와의 혈통, 친소관계의 원근에 따라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다섯 등급으로 정해졌다. 3년을 입는 참최(斬衰), 대상에 따라 3년·1년·5개월·3개월을 입는 자최(齊衰), 9개월을 입는 대공(大功), 5개월을 입는 소공(小功), 3개월을 입는 시마(緦麻)이다. 즉 시마복 이상을 입는 관계의 친족을 간음할 경우에 대해서 관련 조문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분을 넘어선 남녀 간의 간음 범죄는 유교적인 기준에서도 엄격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기도 했고, 새롭게 항목을 마련하고 관련 조문을 실어야 할 만큼 사건의 빈도도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속대전』 「살옥」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속대전』 「속량」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령’은 사면 절차와 방식, 대상자에 대한 기본적인 규정이다. 사면은 왕의 예치적 흠휼(欽恤, 죄수를 신중하게 심의함) 차원에서 시행되었던 제도로 유배·정배자나 관직 제수가 정지된 자, 뇌물을 받은 자들에 대한 사면 규정을 담고 있다. 여기서 당시 조선 사회의 감옥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볼 수 있겠다. 조선의 감옥은 사형 등 집행을 기다리던 기결수 외에 죄를 조사하고 판결해야 하는 미결수를 수금(囚禁)하는 곳이었다. 현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자리의 전옥서(典獄署)가 공식적인 감옥이었다. 감옥에 많은 죄수가 갇혀 있음으로써 여러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조선시대 내내 감옥은 증설되지 않았다. 감옥을 증설하는 것은 범죄인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이는 왕의 교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감된 죄인 중 미결수는 소결(疏決)이라는 방식을 통해 수시로 죄를 처결하여 풀어 주었고, 감옥 역시 수감 상황을 점검하여 가벼운 죄의 경죄수는 즉시 풀어 주었다. 형의 집행을 기다리던 중죄수도 죄인 수감 정책의 한계로 사면 혜택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사면이나 소결 등을 통해 당시 유교적 형정 제도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속량’3, ‘보충대’는 조선 후기 신분제도의 변화가 담긴 항목이다. ‘속량’은 공천[公賤, 죄를 지어 종이 되거나 속공(屬公)되어 관아에 속하게 된 종]의 속신(贖身) 규정을 비롯하여 노비 자손의 속량 여부, 이미 속량한 노비에게 선물을 구실로 침탈하거나 선대(先代)에 속량해 주었던 노비를 자손 대에 와서 도로 빼앗아 가는 경우에 대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속량’과 관련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노역을 마치면 양인이 될 수 있는 제도가 ‘보충대’다. 조선 후기에 경제적으로 부를 쌓았던 노비, 천인 등은 돈으로 양인 신분을 획득한 경우가 증가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법규 제정이 필요했고, 이 두 항목 역시 조선시대 사회적 신분제도의 변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각주)
3 조선시대 노비에게 대가를 받고 그들의 신분을 풀어 주어 양인(良人)이 되게 하던 제도이다.

「내수사입안(內需司立案)」, 1720년(숙종 46)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마지막으로 ‘청리’, ‘문기’는 조선 사회의 변화를 보여 주어, 특히 법적 시각에서 살필 때 주목할 만하다. ‘청리’는 소송을 듣고 판단한다는 의미로 민사소송에 관한 조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소송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항목이다. 실제 ‘적성권축(積成卷軸)’이라는 표현이 사료에 자주 등장한다. 소송이 장기화되면서 양측이 서로 제출한 문서가 쌓여 책을 이룰 만큼 되었다는 뜻이다. 백성에게 있어서 소송은 소유권의 주장,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이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소송이 계속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에게 혈기가 있기 때문이라거나, 이치가 아닌 것으로 소송하기를 좋아한다는 ‘비리호송(非理好訟)’이라는 표현으로 당시 소송 문화를 부정했다. 유교적 이념에서 이상적인 국가는 소송이 없는 무송(無訟)의 사회였으나, 조선 전기에도 장례원(掌隷院)의 노비 소송 900여 건이 적체되어 있었다. 이를 처리하기 위해 1481년(성종 12)에 단송도감(斷訟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여 소송을 처리하고 무송의 상태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소송은 계속 적체되었으므로 점차 소송 적체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커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소송 절차법 제정이라는 방향으로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중종·명종 이후 관련 수교가 계속 내려졌으며, 이것이 하나로 정리된 결과가 『속대전』의 ‘청리’조다. 이는 ‘이상적인 무송(無訟)’에서 ‘현실적인 청송(聽訟)’으로, ‘단송도감에서 소송법의 정비’로 발전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때 정리된 소송절차법은 세 번 소송해서 두 번 이기면 최종 승리한다는 규정인 삼도득신법(三度得伸法), 소송 당사자가 직접 소송 장소에 출두하지 않으면 패소한다는 내용의 취송친착법(就訟親着法) 등 다양한 절차적 규정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절차법은 소송을 판결할 때 기본적 기준이 되었고, 백성들도 그러한 절차적 기준을 이해하고 지켜야 했다.
아울러 소송 판결의 기준이 되는 문서에 관한 규정을 실은 ‘문기’ 역시 ‘청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부모 노비의 화회문기(和會文記)4에 대한 서명의 완결, 외조부·외조모 유서(遺書)나 계모가 전하는 문기의 효력 인정, 문기 위조 시의 처벌, 노비에 대한 입안(立案)5 발급 등의 규정이 담겨 있다. 당시 “소송의 곡직(曲直)이 문기 위조 여부를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사실 관계의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만 문기가 위조되었는지의 여부가 가장 우선적인 판단 기준이 된다는 의미다. 당시 문서 위조가 성행했고 도장의 인적(印跡)이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으므로 정확한 근거가 될 문기나, 판결 후 결과를 공증화하는 입안과 입지(立旨)6 등의 문서에 관한 법이 필요했다.
(각주)
4 가족이 함께 재산 분배에 관하여 합의한 문서.
5 입안(立案)은 개인의 청원(請願)에 따라 토지·가옥·노비나 기타 재산의 매매, 양도, 결송(決訟) 등을 확인하여 이를 관에서 공증해 주는 문서이다. 토지·가옥·노비 등을 취득한 자가 관에 신청하면 관에서 재주(財主)와 증인, 집필(執筆), 관계인의 진술을 받아 확인한 뒤 성급(成給)해 주었다.
6 입지(立旨)는 토지·노비문기를 도둑맞거나, 불에 타 버렸거나, 분실했을 때 청원하면 관에서 이를 확인한 뒤에 내주던 문서이다. 입안은 별지의 단독문서이나 입지는 청원서인 소지(所志)의 말미에 제사(題辭)로 적은 것이므로 소지와 입지가 함께 있는 형태이다. 입안은 강력한 공증력, 지속적인 효력을 갖는 데 반해 입지는 상대적으로 일시적인 문서 형식이다.(최승희,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입증할 문기가 없으면 양반이라 하더라도 패소했고, 천인이나 평민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문기를 확보하고 있으면 소송에서 유리했다. 토지나 노비 등 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두고 다투는 소송에서 피고, 원고의 신분이나 경제력, 힘의 여부가 아닌 공증할 수 있는 문기가 중요한 판결 기준이 되었다. ‘문기’ 항목 신설이 가지는 의미라 하겠다.
副司直 李光憲 宅 奴 同伊 [左寸]
右所志爲白內等 奴矣上典祿官敎 未及成出是如乎 受祿時
憑考次 立旨成給事 行下爲只爲
行下向敎是事
兵曺 處分
丁亥 六月 日 所志
【題音】
立旨成給向事 卄
堂上(揮筆) [押]
(官印 一個處)
부사직 이광헌(李光憲) 댁 종 동이(同伊)[좌촌(노비의 수결)]
이 소지를 올리는 일입니다. 저의 상전의 녹관교(祿官敎)를 아직 성급해 주지 않으셨으니, 녹을 받을 때 빙고(憑考, 사실에 근거하여 자세히 따지고 검토함)할 수 있도록 입지(立旨)를 성급하도록 처분해 주십시오.
처분해 주실 일입니다.
병조 처분
정해년 6월 일 소지
【뎨김】
입지를 성급할 것. 20일.
당상 [압]

이광헌소지입지(李光憲所志立旨)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법을 이용하는 사람들
이처럼 인명사건을 체계적으로 판단하고 가해자를 확정하기 위한 형벌 기준,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강간·간음에 대한 규정, 사면 관련 규정, 사회적 신분제도 변화에 대한 대응책 등이 『속대전』 「형전」에서 새로 증설한 항목으로 정리되었다. 이상이 국가의 대민 정책에 대한 법규로 볼 수 있다면 반대로 백성에게 있어서 법은 국가가 자신에게 가하는 형벌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었다. 토지의 소유권 확보를 위한 토지소송, 묘지에 관한 산송(山訟), 노비가 속량하여 양인이 된 후 옛 노비주들과 벌이는 소송, 채무(債務) 관계 소송 관련, 그리고 문기의 공증성에 대한 법규 등은 조선 후기 사회적, 경제적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시대 법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강압적으로 활용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법은 백성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고, 백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법에 대한 지식이 없는 백성들을 위한 현대 변호사의 역할을 하는 외지부(外知部) 등의 등장 역시 자연스러웠다. 백성이 소장(訴狀)을 꾸밀 때는 간신히 ‘남의 손을 빌려서’ 자신의 간곡한 속사정을 적어 내는데 백성의 소장 작성에 도움을 주는 자들로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서당의 훈장을 지목하였다. 그러나 율례(律例)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보다 전문적인 사람들이 존재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쟁송(爭訟)을 교사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파악하고 ‘외지부’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말과 문자에 능한 직업적인 전문인으로서, 법률 지식을 가르쳐 주고, 소송을 유도하며 대신 소송해 주기도 하였다. 한글인 언문(諺文)으로 작성된 소장은 접수가 안 되었으나 소송관의 관심을 끄는 데는 효과가 있어서 일부러 언문 소장을 쓰도록 지시하기도 하고, 상언(上言)이나 격쟁(擊錚)으로 이어지도록 유도하였다.

『수선전도(首善全圖)』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왼쪽부터 혜정교(惠政橋), 파자교(把子橋), 통운교(通雲橋)다. 혜정교는 종로1가에 있었고, 이 다리 옆에 우포도청이 있었기 때문에 포청다리라고도 불렸다. 파자교는 종로2가 사거리에 있었고, 주변에 철물전이 많았기 때문에 철물전교, 철교라고도 하였다. 통운교는 창덕궁에서 조회를 파하고 나오는 벼슬아치들이 이 다리를 건너 마을로 돌아가게 되어서 일명 파조교(罷朝橋)라고도 하였다. 동북쪽에 좌포도청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백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언, 격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임금이 행차하는 길목에서 상언, 즉 글을 써서 올리거나 글을 모를 경우 징을 치는 격쟁으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알렸다. 격쟁은 원래 궁궐 안의 차비문(差備門)에서 하는 차비격쟁(差備擊錚)이었으나 정조 대에 가면 임금이 궁궐에서 나갈 때, 임금 행차를 호위하는 권역 밖에서 하는 위외격쟁(衛外擊錚)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1771년(영조 47), 신문고(申聞鼓)도 부활하여 창덕궁의 진선문(進善門)과 경희궁의 건명문(建明門)에 설치되었으나 이는 궁궐을 드나들 수 있는 신분이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일반 백성의 주된 소원(訴冤, 억울한 일을 당하여 관에 하소연함) 방식은 상언과 격쟁이었다. 정조는 특히 상언이나 격쟁을 통해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주였다. 법전의 규정상 위외격쟁이 허락된 장소는 혜정교(惠政橋), 파자교(把子橋), 통운교(通雲橋)의 삼교였으나 정조는 이 장소에 대해서도 탄력적으로 해석하였다. 격쟁이 허락된 삼교는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대로(大路)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여 광통교까지 그 범위를 넓게 해석하여 가능한 격쟁과 상언을 많이 받아들였다.
소송과 더불어 이러한 상언, 격쟁에서도 어김없이 외지부는 등장했다. 상언을 위탁 받고 대행해서 문권을 작성해 두었다가 수시로 접수시키는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상언과 소지(所志)의 초고가 상자에 가득하고 교외(郊外)에 1년에 한두 번씩 제사 등으로 거둥(擧動, 왕의 행차)할 때는 먼 지방의 사람이 서울에 와서 기다리는 것은 그럴 수 있으나 내일 거둥한다고 오늘 명이 내린 경우에도 경기뿐 아니라 여러 도의 상언이 모두 서울에서 접수되었다. 이는 외지부 등이 먼저 부탁을 받고 직접 이러한 일을 맡아 한 것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본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호적을 제출하고 직접 나타나도록 하는 대책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격쟁, 상언을 전담하는 부류가 생겼고 관에서는 이들을 ‘서울에 살면서 이익을 쫒는 자들[경거사리지도(京居射利之徒)]’이라고 파악했다.
법의식 성장과 주체성의 확립
소송에 있어서 부정행위나 금전 수수 등의 문제가 법으로 금지되고 있음에도 ‘쟁송위업자’들의 존재가 후대에까지 확인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백성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성이 법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면서 소송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을 법의식의 발전으로 이해한다면 거기에는 이들 ‘외지부’, ‘쟁송위업자’들이 담당했던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 사회의 법은 국가와 백성에게 모두 필요했던,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국가는 유교적 통치 기반의 정비, 사회적 안정, 질서 유지 등을 수행할 수 있었고, 백성들은 법의식 성장을 바탕으로 권리 확보를 위한 노력 등을 지속해 나감으로써 사회적 변화에 상응하는 민사적 법규 마련을 끌어냈다. 조선시대 법은 공법, 행정법 위주의 강압적인 도구가 아니었고, 왕의 자의에 의해 마음대로 법이 운영되는 구조도 아니었다. 민사법, 민사소송법은 일반 백성도 법적 수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전근대 조선 사회의 법적 주체의 확대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