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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조선시대 사법기관, 삼법사(三法司)
글. 정긍식(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규장각한국학연구원장)

『도성도(都城圖)』 부분, 18세기 후반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재 광화문 부근 6조 거리에 삼법사 – 형조(刑曹), 한성부(漢城府), 사헌부(司憲府)가 보인다.
본 『도성도』는 남쪽이 위로, 북쪽이 아래로 배치되어 있다. 왕이 수도를 바라보는 시점에 맞춰 그려져, 왕이 정사를 보는 곳에 걸리는 어람(御覽)용으로 추정된다.
살다가 보면 본의 아니게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고 또 입기도 한다. 그럴 때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화해하면 평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꿈같은 세상이 있을 수 있을까? 다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현실적이다. 범죄의 예방과 처벌은 사회의 안전과 존속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범죄의 처리 과정과 결론은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도 수긍해야 한다. 그래서 당사자와 무관한 제3자가 분쟁에 개입하여 해결해 왔다. 현재는 행정과 사법이 구분되어 행정기관인 경찰에서는 수사를, 검찰에서는 수사와 기소를, 법원에서는 재판을 한다.1
(각주)
1 검찰은 경찰의 수사에 근거하여 기소하며 또 직접 수사도 할 수 있다. 검찰권을 견제하기 위해 2021년부터 검찰의 수사권을 제한하였다. 2025년 7월 현재 경찰 등이 수사를 하고 검찰은 기소를 하는 수사와 기소 분리가 논의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와 달리 모든 기관에서 수사를 할 수 있었다. 가령 세금을 납부하지 않은 자는 호조에서, 성벽 수리에 참여하지 않으면 공조에서 수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기관에서는 죄수를 직접 구금할 수 없고 형조(刑曹)로 이송해야 했다. 직접 구금할 수 있는 기관을 직수아문(直囚衙門)이라고 하는데, 『경국대전』에는 “병조, 형조, 한성부, 사헌부, 승정원, 장예원, 종부시, 관찰사, 수령” 등을 규정하였으나 후대로 갈수록 늘어났다.
대부분 직수아문은 기관의 업무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수사를 하고 죄수를 구금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형조 등은 거의 모든 범죄에 대해 수사하고 죄수를 그 관서에서 구금할 수 있었고, 이를 통칭하여 ‘삼법사(三法司)’라고 하였다. ‘삼법사’라는 용례는 『승정원일기』에는 1656년(효종 7)에, 『조선왕조실록』에는 1684년(숙종 10)에 처음 보인다. 하지만 구체적인 관서를 언급하지 않은 점에서 17세기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사용된 듯하다. 『속대전』에서는 ‘삼법사’를 “형조, 사헌부, 한성부”라 하였다[「형전」 금제(禁制)].2
‘삼법사’는 형사와 소송, 노비 등을 관장하는 형조, 수도의 행정을 맡은 한성부(漢城府), 관리의 비리를 규찰하는 사헌부(司憲府)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조선의 제도는 1485년(성종 16)부터 시행된 『경국대전』에 완비되었다. 아래에서는 『경국대전』을 기본으로 서술한다.
(각주)
2 의금부(義禁府)는 반역과 강상(綱常) 사건을 전담하는 중요한 수사기관으로, 비상설 기관이다. 강상 범죄는 발생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따라서 상설 기관으로 둘 수 없다. 상설 기관이라면 반역과 강상 범죄의 존재와 발생을 전제하는 것으로 인정(仁政)과 교화를 부정하는 것이다.
한성부: 수도의 질서를 유지하라
조선시대에 수도를 관할하던 한성부는 중앙관직으로 정2품아문(正二品衙門, 정이품의 벼슬아치를 장관으로 하는 관아)이다. 업무는 서울의 호적, 시장, 상점, 가사, 토지, 산림, 도로, 교량, 수로, 공금횡령, 채무, 싸움, 순찰, 수레, 마소(말과 소)의 망실(亡失) 확인 등 도시 생활과 관련된 일상생활 전반을 대상으로 하였다. 한성부의 직책은 판윤과 좌·우윤, 서윤, 판관, 주부, 참군을 두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금지 행위를 규정하는 금령(禁令)의 발령은 형조 소관으로, 「형전」 금제에 개별적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후대로 갈수록 확대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유생과 부녀의 상사(上寺, 불공을 드리려고 절에 올라가 묵던 일), 야제(野祭, 길가나 들에서 잡신을 위해 드리는 제사), 무속 행위, 의복과 음식의 사치, 폭리행위, 무격(巫覡, 무당과 박수)의 도성 출입 등을 규정하였다. 『속대전』에서는 서울 10리 이내 묘지 설치, 원릉(園陵, 왕과 왕비·왕족의 무덤)의 수목 벌채 및 토석 채취·경작 금지 등 도성 경관 보존, 마소의 재살(宰殺, 짐승을 잡아 죽임), 서인(庶人,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의 승마 등 신분 위반 행위, 승려나 무격의 도성 출입, 집단 음주, 무속, 물가 농단, 난전 행위, 매춘 등을 규정하였다. 도성 거주인의 거의 모든 일상생활을 규제한 셈이다.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
소장: 서울역사박물관
한성부 관할권인 도성 안과 성의 밑 10리 이내에서 소나무의 벌채를 금지하고, 장지(葬地)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표석을 세운 경계를 표시한 지도.
금령을 위반한 행위는 대개 형조에서 관할하지만, 도성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초기부터 한성부에서 담당하였다. 태종 대부터 형조가 소송의 처리에 주력하면서 사소한 사건은 한성부로 이관하려고 하였으며, 사헌부도 이에 동조하였다. 한성부에서는 채송(債訟, 채권이나 채무에 관한 소송) 등 소송의 폭주를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결국 기관의 특성상 금령 위반 행위까지 맡았다. 한성부는 도성의 각종 행위를 규제하여 금령을 공포하고 그 위반자를 처벌하면서 초기부터 자연히 사법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직수아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15세기, 한성부는 사법기관의 역할을 했고, 이는 행정과 사법이 명확하게 제도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사와 재판을 순차적으로 할 수 있는 효율적인 면이 있었다.

한성부 결송입안(決訟立案) 시작 부분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경국대전』에 의하면 한성부는 도성 내의 토지에 대한 민사소송만 관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소송은 기술적이며 게다가 당사자들은 승소를 위해 문서위조 등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래서 실무경험이 없는 송관(訟官)은 위조문서나 위증을 분별하여 제대로 재판을 하기 어려웠다.
15, 16세기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소송 대상 토지는 대부분 도성에 있었을 것이다. 계속된 토지소송을 처리하면서 한성부의 관원은 저절로 전문 능력을 축적할 수 있어서 어느 순간 한성부는 전국의 토지송(土地訟)을 관할하는 중앙 기관으로 확대되어 『속대전』 「형전」 청리(聽理)에서는 형조와 함께 토지송을 관할하는 기관으로 규정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오늘날 민사 판결문인 1661년(현종 2) 한성부 결송입안(決訟立案)이 소장되어 있다. 폭 42.5㎝, 길이 10.30m, 총 6,800여 자로 방대하다. 이 결송입안은 조선시대의 재판이 ‘원님 재판’이 아니라 철저하게 당사자와 증인의 진술과 증거에 바탕을 두고 법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형조: 최고의 사법 행정기관, 분쟁이 없도록
형조는 정2품의 중앙 관서로, 법률, 상언(詳讞, 형사 사건의 심리 판결을 자세히 함) 소송, 노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최고의 사법 행정기관이었다. 사형수의 상복(詳覆)3을 담당하는 상복사(詳覆司), 율령(律令, 형률과 법령)을 검토하는 고율사(考律司), 형옥(刑獄, 형벌과 감옥)과 금령(禁令,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관장하는 장금사(掌禁司), 노비를 처리하는 장예사(掌隷司)가 하위부서였으며, 범죄 수사는 장금사의 관할이었다. 판서와 그 아래 참판, 참의, 정랑, 좌랑이 있으며 당상관과 낭청으로 구분하여 실무를 집행하고 합의제로 운영하였다. 실무가인 별제(別提)와 법률 전문가인 율학교수(律學敎授)·겸교수(兼敎授)와 명률(明律), 심률(審律), 율학훈도(律學訓導), 검률(檢律) 등을 두어 전문성을 갖추었다. 『추관지』에 따르면 형조에는 서리와 사령, 구종(丘從)4 등 233명의 이예(吏隷, 벼슬아치의 종)들이 배속되어 집행기관 역할을 하였다. 관사는 광화문 6조 거리에 있었다.
(각주)
3 사형에 처할 죄인의 죄상을 자세히 거듭 살펴서 심의하는 일.
4 말을 타고 갈 때에 고삐를 잡고 끌거나 뒤따르는 하인.

<형조 관아도>, 『추관지』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시대에는 수령이 태형(笞刑)을, 관찰사가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을 직단(直斷, 직접 처단함)할 수 있었고 사형은 형조에서만 할 수 있었다. 또 형조는 유형 이하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해 최종심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형사법은 중국의 형사법전인 『대명률』을 따랐다. 『대명률』의 규정이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아 수정할 때는 형조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형률의 조선화에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생명 존중에 입각하여 사형수에 대해서는 절차를 신중히 하여 세 번 심리하는 삼복제(三覆制)를 시행하였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시체 발견지의 수령이 1심을, 관찰사가 2심을 맡고, 형조에서 3심을 하였다. 관찰사는 수령의 사죄(死罪)에 대한 심리 결과를 형조에 보고하고 형조는 이를 의정부에 보고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국왕은 상복 기간 내에 참여하는 대신들에게 3차에 걸쳐 재심하고 합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상복을 관장하는 형조는 국왕의 애민과 흠휼(欽恤, 죄수를 신중하게 심리함) 사상을 실천하는 기관이었다.
사헌부: 청백리는 우리의 이상
사헌부는 종2품 아문(衙門, 상급 관아)으로 현실 정사를 논평하고, 모든 관료를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 잡고, 억울함을 풀며, 외람되고 거짓된 것을 금지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대사헌이 책임자이며 집의, 장령, 지평, 감찰로 구성되었다. 핵심 업무는 관료의 비리를 규찰하고 5품 이하의 관원 임명에 대한 서경(署經)5을 하는 것이기에 상대(霜臺), 오대(烏臺), 백부(柏府)라고도 불렀다. 정사의 논평과 관리에 대한 탄핵은 언론과 관련되는 것으로 지평 이상만 할 수 있었으며, 후에 사간원, 홍문관과 함께 언론 삼사(三司)로 통칭하였다. 사헌부에서는 원래의 임무인 관료의 비리 규찰에서 더 나아가 민간의 풍속 교정, 사기 등 범죄 방지, 소송 처리 등을 담당하였다. 『사헌부장고(司憲府掌攷)』(1790년대 필사 추정) 「금제」에서 45개조를 나열하고 있는데, 이는 한성부와 형조의 그것과 중첩된다.
육조 권한의 강화와 함께 형조는 집행기관에서 사법(司法)을 총괄하는 정책 기관으로 확대되어, 국가의 각종 금령을 제정·집행하면서 동시에 재판 기관으로 기능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업무 영역의 확대로 관원의 비리를 규찰하는 사헌부와 다툼이 생겼다. 형조는 재판의 독립성을, 사헌부는 백성의 신원(伸冤)6을 강조하여 갈등이 빚어졌다. 일반적으로 억울함이 있는 백성은 형조 등 담당 관서에 호소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하소연하며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신문고를 치도록 하였다[『경국대전』 「형전」 소원(訴寃)]. 재판에서는 사헌부가 형조보다 상위기관임을 분명히 하였는데, 현재의 재심과 유사하다.
(각주)
5 임금이 새 관원을 임명한 뒤에 그 성명·문벌·이력 따위를 써서 그 가부를 묻던 일.
6 가슴에 맺힌 원억(冤抑: 억울함)을 풀어 줌.

『경국대전』 한성부와 사헌부의 업무와 직제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관할의 중첩을 해소하라
형조나 한성부와 달리 사헌부에서는 금령을 발할 수 없고 사후적으로 위반 행위를 규찰할 수 있을 뿐이다. 형조나 한성부 역시 관할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이렇게 관할이 중첩되는 상황에서는 특정 행위에 대해 삼법사가 모두 관할을 주장해서 한 행위로 세 번 처벌받을 우려가 있다. 또 삼법사마다 처벌 여부가 다를 수 있다. 법 집행의 불일치 내지 혼란은 금령 자체에 의문을 품어 법질서를 흔들 가능성도 있다. 이런 난맥을 예방하고자 『사헌부장고』에서는 사헌부가 형조나 한성부보다 상위기관이라고 규정하였다. 즉 “형조나 한성부에서의 조치는 헌부에서 수정할 수 있으나, 상위인 헌부의 조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헌부에서 단속하여 조사한 후 형조에 이송하여 결죄한다”라고 하여 삼법사 간의 위상을 분명히 하였다. 같은 직수아문이더라도 사헌부와 한성부는 수사와 함께 조사를 위한 구금만 할 뿐, 처벌은 형조에서 하였다.

『사헌부장고』 삼법사 관할 부분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단속 관리의 폐단을 막아라
금령 위반 행위를 단속하는 관리의 횡포 역시 문제였다. 신분 질서를 유지하고 근검절약을 강조하려면 단속을 강화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관리가 백성을 핍박하여 인정의 실현에 방해가 되었다. 백성을 생각하면 단속을 느슨하게 해야 하는데, 그 대신 국법 질서는 무시되었다. 그래서 중용의 방도를 찾아야 했다. 1743년(영조 19) 영조는 ①한 달에 6차례만 단속하고, ②사헌부는 가급적 단속을 자제하며, ③단속 대상을 기재한 금패(禁牌, 범법 행위를 단속할 때에 내보인 패)를 패용하여 사특(邪慝, 부정한 일)을 금지하고, ④수석 당상관이 단속 관리의 순번을 정하며, ⑤난전 위반자의 속전(贖錢, 죄를 면하기 위하여 바치는 돈) 징수를 금지하고 ⑥난전 위반자의 뇌물 방지를 위해 단속 인원을 분명히 하도록 하였다. 『속대전』에는 위 규정과 함께, 단속하는 금리(禁吏, 범법 행위를 단속하던 하급 벼슬아치)가 평인(平人)을 구금하면 장 100에 처하고, 금리를 사칭한 자는 국경 부근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금령의 단속과 이를 둘러싼 관리의 부패는 끊이지 않았다.
억울한 죽음이 없게 하라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진범을 찾아 그의 목숨으로 망자의 목숨을 갚는 상명(償命)이 형사 사법의 이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인(死因)을 규명하는 것이 핵심이어서 세종은 1438년(세종 20) 검험지침서인 『신주무원록』을 간행하였고, 1442년(세종 24)에 『무원록』의 「검시규식(檢屍規式)」에 따라서 검시하도록 하였다. 서울(한양)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5부에서 초검(初檢)을, 한성부에서 복검(覆檢)을, 형조에서 삼검을 하여 사인과 정범(正犯) 등이 일치하면 종결하였다. 만약 검험의 결과가 다르면 4검, 5검까지 하였다. 검시 보고서에는 사인만이 아니라 피살자의 친족인 시친(屍親)들의 진술, 사건 목격자나 연루된 자인 간범(干犯)의 진술 그리고 범인으로 추정되는 정범의 진술을 기록하고, 시체의 상태와 증거, 진술 등을 종합한 검험관의 판단을 기재하여 복검관과 형조에서 사후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영조는, 초검과 복검은 상급인 한성부와 형조의 관원이, 삼검에는 형조의 다른 관원이 참여하도록 하여 신중한 절차를 추구하였다. 그런데 형조와 한성부의 근무일이 일치하지 않거나 금형일(禁刑日, 죄인에 대한 고문, 형벌의 결정 및 집행 따위를 금하여 하지 않던 날)이 있으면 검험이 미루어지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 신중한 심리는 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게 되는, 체옥(滯獄)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신중한 재판과 신속한 재판, 이 모순된 두 이념에서 중용을 찾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