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2025 봄, 여름호-수사반장]한양의 도적, 우리가 잡는다 -조선시대 경찰 포도청-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5-09-19 조회수 : 414

한양의 도적, 우리가 잡는다

-조선시대 경찰 포도청-


글. 차인배(연세대학교 법학연구원 교수)



민백-50264_형정도첩 중 종로결장치도곤타


<종로결장치도곤타(鍾路結杖治盜棍打)>, 『형정도첩』 | 김윤보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공공누리


절도는 인간의 약탈 본능을 억제하지 못해 표출된 반사회적 행위였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포스에서 신들의 불을 몰래 훔친 이야기부터,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는 고조선의 팔조법금에 이르기까지, 도적과 그에 대한 규제는 인류 역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조선시대 포도청(捕盜廳)은 도성을 중심으로 포도(捕盜, 도적 체포)와 순작(巡綽, 야간 순찰)을 주요 업무로 수행하기 위해 창설된 치안 전담 기구였다. 당시 동서양을 통틀어 도적을 단속하는 전문기구가 설치된 사례는 조선의 포도청이 유일하였다. 포도청은 치안 기구로서 명실상부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그 결과 조선 후기 직수아문(直囚衙門)의 지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포도청은 도성민들과 밀접하게 접촉하는 말단 기관이었기에 그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400여 년간 도성의 치안을 담당해 온 포도청은 19세기 들어 지나치게 권위적인 공권력으로 변질되었다. 공공기관이 시민들의 신뢰를 잃고 외면받게 되면, 그 존재 가치는 결국 부정될 수밖에 없다.

1894년 포도청은 서구식 근대적 경찰 조직인 경무청으로 개편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뚝섬 동민(洞民)의 포교(捕校) 살해 사건


1851년(철종 2)에 가설포교(加設捕校)1 유해룡이 포졸들을 이끌고 뚝섬(纛島)을 순찰하던 중, 고덕철을 도둑으로 의심하여 체포하였다. 이에 고덕철의 동생 고완철은 마을의 어른[존위(尊位)]인 홍희일(일명 홍낙철)에게 형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홍낙철은 마을 사람들을 모으게 하였고, 중임(重任)2인 이상길과 한종호 등이 앞서고 따르지 않는 자는 내쫓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이들 무리는 칼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효경교 천변에 설치된 포교 막사에 난입하여, 고덕철을 탈옥시키고 가설 포교를 구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당시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이 사건을 보고 받고 “이것은 참으로 큰 변괴이다. 그 심적을 궁구해 보면 족히 난리도 일으킬 놈들”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해동지도


『해동지도(海東地圖)』, 18세기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경도(京都,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 서울) 오부 북한산성 부도(부분)


(각주)

1 조선 후기 도성민의 생활공간이 한강유역까지 확대되면서 이곳 순찰을 위해 추가로 파견된 포교.

2 조선시대 서민의 마을 공동체인 동계나 촌계에서 최고 책임자인 존위의 지휘에 따라 마을 일을 담당했던 중간 간부.


포도청과 민간인 사이의 갈등 원인 중 하나는, 포교가 일반인을 도적으로 오인하여 체포하는, 이른바 ‘오착(誤捉)’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절도나 강도 사건 수사는 주로 목격자의 제보나 피해자의 신고로 시작되지만, 구체적인 단서나 증거 없이 강압적 수사가 진행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포교와 포졸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다각적인 탐문을 시도하지만, 범인을 특정할 확실한 증거[진장(眞贓, 도둑질한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할 경우에는 행동이나 말투가 의심스러운 자를 우선 체포하여 조사하는 사례가 많았다. 따라서 포도청 수사의 특성상 밀행성과 신속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직관적 판단에 따른 무단적 체포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나아가 일부 포교들은 자신의 단속 실적을 높이기 위하여 무고한 사람을 고의로 도적으로 지목한 후 체포하여 근무 실적을 쌓기도 하였다.

이 사건 역시 포교가 고덕철을 도적으로 의심하여 체포한 오착에서 비롯되었다. 포교가 형을 잡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고완철은 존위 홍희일(홍낙철)에게 형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홍희일은 즉각 중임 한종호에게 일제히 동민을 모아 포도청에 등소(等訴)3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자제력을 잃은 동민들은 몽둥이와 칼 등의 물리력을 동원하여 고덕철을 탈옥시키고 포교들을 구타하였다. 포교를 살해한 범죄는 일반 살인 사건과 비교할 수 없는 공권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좌우포도청은 합동 수사본부를 꾸렸고 2월 27일 범죄의 핵심 용의자인 존위 홍희일과 중임 한종호, 고덕철의 동생 고완철 등을 체포하여 신문과 대질을 마친 후 이 사건을 살인 사건 대신 강도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수창(首倡)4과 수범(首犯)5은 군문(軍門)6에 보내 효수하여 군중에게 경계하고, 나머지 종범 11명은 형조로 이관하여 처벌해야 한다는 계목(啓目)7을 올렸다.

포도청이 이 사건을 강도 사건으로 규정한 이유는 살인 범죄는 개별 처벌만 가능하지만, 강도 사건은 집단 처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중임 한종호는 수창자로, 중임 고완철은 수범으로 결정되어 군민을 모은 백사장에서 효수하여 무리에게 경계로 삼았다.


(각주)

3 여러 사람의 이름을 이어 써서 관청에 올려 하소연함.

4 우두머리가 되어 제일 먼저 주창함.

5 공동으로 죄를 범한 경우 발의·주모한 자.

6 조선시대 군대를 이르는 말로 조선 후기 서울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삼군문이 있었음.

7 중앙의 관부에서 국왕에게 올리던 문서 양식의 하나.



도적 단속 전담 기구의 등장과 직수아문 편입


포도청은 이름 그대로 ‘도적을 잡는 관청’이었다. 이처럼 직설적인 명칭 때문에, 당시 관료들조차 ‘포도’라는 관직명이 후세에 조롱거리가 될 것을 우려하여 포도관 설치를 꺼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무안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도적 장영기는 백여 명이 넘는 무리를 모아 관군과 대적하였고 심지어 관아를 습격하여 일당을 탈옥시키는 대담함을 보이는 등 떼도적의 피해는 날로 심해졌다.

급조된 지방군만으로는 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추격을 따돌리던 이들 무리를 진압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에 조정은 이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잔당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전문 장수를 서울에서 파견했다. 경장(京將, 서울의 장수) 파견은 농번기에 진압군을 동원해야 하는 부담을 져야 했지만 도적 진압에 전문 전술을 펼칠 수 있었다. 특히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에게 ‘포도’라는 명칭을 부여한 결과 직무 성격과 목표가 선명해짐에 따라 진압 실적은 월등히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성종 대부터 지방에 등장한 군도를 단속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을 ‘포도장(捕盜將)’이라 명명하고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포도장은 오로지 지방에서 발호한 떼도적을 단속하기 위해 파견되었기 때문에 진압이 완료되면 즉시 해체되는 일종의 권설 기구였다. 그러나 중종 무렵 지방 도적 단속을 위해 운영되었던 포도장과는 별도로 도성의 치안 유지와 범죄 단속을 위해 포도청이 설치되었다. 포도청은 좌·우로 나뉘어 각각 종사관과 군관·부장, 그리고 포졸 등이 조직되어 포도와 순작을 주요 업무로 하는 기구로 자리 잡았다. 포도청과 같은 전문 치안 기구의 설치는 당대 역사상 유례가 없었으며, 조선의 고유한 형정사적 특징과 의미를 지닌다. 이는 형사 사건을 일반 범죄와 특수 범죄로 구분하고 절차적 차별화를 통하여 형정(刑政)의 전문성과 체계화를 구축하려는 일환이었다.

1686년(숙종 12), 포도청은 비변사와 함께 전격적으로 직수아문(다른 기관을 거치지 아니하고 직접 죄인을 가둘 수 있는 기관)에 편제되었다. 이는 포도청이 죄수에 대한 수사, 체포, 수금 등의 사법적 권한을 부여받아 정식 사법기구로서 지위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포도청의 직제가 『속대전』 「병전」에 명시되면서 조직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공식 관청으로서의 위상도 확립되었다. 특히 포도대장에게는 태형 50대 이하 범죄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직접 처벌할 수 있는 자단권(自斷權)이 부여되어 포도청의 사법적 권한이 한층 강화되었다.



야간 순찰과 범야자(犯夜者) 단속


조선시대 야간의 도성은 인정(人定, 초경 3점)에 맞춰 종루에서 28번의 종소리를 울려 모든 대문을 닫고, 파루(5경 3점)에 다시 33번의 종소리로 대문을 열 때까지 출입과 통행이 통제되었다. 도성 문이 닫힌 후에는 공무, 질병, 사상(死喪), 출산 등 불가피한 사유를 제외하고는 관인은 물론 일반인 누구라도 출행을 불허하는 야금(夜禁, 야간 통행금지)이 시작되었다. 야금이 발효된 동안 포도청은 구역을 나누어 순찰하며 각종 범죄를 감시하고 야금을 위반한 자(犯夜者)를 단속하였다.


포도청의 야간 순찰은 좌우포도청 각 8패, 총 16구역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좌포도청에서는 동부·남부·중부의 8구역을, 우포도청에서는 서부·북부의 8구역을 순찰하였다. 순라 구역은 대부분 도성 내부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는데, 우포도청의 5~8패와 좌포도청의 7패는 도성 밖을 순찰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마포나루를 통해 세곡선이 드나들던 한강~숭례문과 동대문 일대로 인구 유입이 꾸준히 증가해 도시 공간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한양도


『한양도』

소장: 서울역사박물관

좌포도청(붉은색)과 우포도청(푸른색)의 야간 순찰 구역.


범야자를 단속하기 위하여 포도청은 각각 포교 16명과 포졸 38~60명을 순라군으로 배정하여 밤새 16개 구역의 순라(巡邏)를 돌았다. 한 구역마다 포교 1명과 포졸 2~4명이 1패로 조직되었다. 순라는 포교가 철편(鐵鞭)8을 찰랑거리며 앞장섰고, 포졸이 방울(또는 딱따기, 격탁, 경탁, 야탁)과 조족등(또는 도둑등)을 흔들며 뒤따랐다. 범야자에 대한 처벌은 시간별로 초경에 위반한 자는 곤장 10대, 2경은 20대, 3경은 30대, 4경은 20대, 5경은 10대로 3경을 정점으로 처벌 수위가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졌다.

1767년(영조 43) 윤 7월 2일 영조의 명령으로 좌변포도대장 김성우와 우변포도대장 구선행이 직접 초경부터 오경까지 하룻밤 순찰하여 범야자를 단속한 결과 좌포청이 16건, 우포청이 15건 등 총 31건을 단속하였다. 그 가운데 하급 관료의 위반 사례가 가장 많았다. 또한 1769년(영조 45) 4월 20일 영조가 직접 건명문에서 야금 단속을 지휘하였는데, 위반자 가운데 학생(學生) 정이화와 유학(幼學) 서계수가 범야자로 체포되었다.

영조는 “선비의 신분으로 막중한 야금을 어긴 것은 야심토록 전좌(殿坐)9하는 임금을 속이는 것”이라고 꾸짖고, 각 곤장 15대와 16대를 때린 후 충군(充軍)10하여 일벌백계하였다. 


(각주)

8 포교가 가지고 다니던 도리깨 형식의 무기.

9 임금 등이 정사를 보거나 조하를 받으려고 정전이나 편전에 나와 앉던 일.

10 죄를 범한 자를 벌로서 군역에 복무하게 하던 형벌.


영조는 하급 관료의 야금 위반을 근절하는 조치로 충군이라는 강력한 처벌을 내놓기도 했다. 그 결과 포도청 보고 내용을 보면 1770년(영조 46) 5월까지 범야자 체포 사실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야금에 대한 영조의 강력한 정책이 일시적으로 실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순라군의 야금 단속 과정에서 승정원 사령과 별감 등은 그들 소속 관청의 권력을 뒷배로 삼아 단속을 거부하고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사례도 많았다. 순라군에 대한 반항 중에서도 특히 밤의 무법자로 불린 별감들의 횡포가 가장 심각했다. 별감 천수강은 인정 후 술에 취해 좌포청 문 앞까지 찾아가 포교와 포졸에게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창기와 술을 마시고 통금을 어긴 별감 백세장은 그를 단속하던 나졸을 생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구타하는 등 행패가 도를 넘었다. 이는 순라군에 대한 경시 풍조 때문이었다. 영조는 “선비와 벼슬아치가 포교를 마치 종놈 다루듯 부리는데, 이와 같으면 누가 포교를 하겠는가?”라며 순라군에 대한 하대 풍조를 비판하였다.

1770년(영조 46) 어느 날 저녁, 궁문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영조는 포교를 불러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포교는 왕 앞에서 무릎을 꿇는 예를 갖추지 않고, 똑바로 선 채 무례하게 보고하였다. 이에 영조가 무례한 태도를 보인 까닭을 묻자, 포교는 당당히 “통부(通符)를 찼기 때문에, 비록 국왕 앞이라도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일화는 통부가 국왕이 부여한 권한임을 상기시키며, 그것을 소지한 자는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할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영조는 그의 무례함을 벌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용기와 기지를 칭찬으로 격려하였다. 더 나아가 이 일화를 널리 알려 포교들의 사기를 북돋기도 하였다.



포도청의 수사 방식과 사건 조작


형사사건의 심문에서 범죄를 입증하기에 가장 중요한 사안은 죄수의 자복(自服)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최종 판결문인 결안(結案)에 반드시 그 내용이 포함되어야 심리가 종결된다. 죄수의 자백을 받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형벌을 사용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이른바 고신(拷訊)이 허용되었다. 의금부와 형조, 수령 등은 주로 신장(訊杖)11을 사용하였고, 포도청은 별도로 치도형이라 일컫는 난장(亂杖)과 주뢰(周牢, 주리의 원말) 등을 사용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고신 사용은 “1차 30대를 넘을 수 없으며, 3일 내 다시 시행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여 지나친 남용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포도청이 고신으로 사용하였던 난장은 가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도적을 다스리는 데 이르러서는 난장이라는 것이 있는데, 두 엄지발가락을 묶은 다음 두 정강이 사이에 나무를 세워 발을 위로 매달아 놓고 발끝을 때리는데 (그 결과) 열 발가락이 다 빠지기도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각주)

11 죄인을 신문할 때 쓰던 몽둥이.



민백-50254_형정도첩 중 사죄인학무


<사죄인학무(使罪人鶴舞)>, 『형정도첩』 | 김윤보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공공누리



난장이 가혹하게 남용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포도관원의 사사로운 감정에 악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1733년(영조 9), 포도종사관 김성팔은 주막에서 이지영과 말다툼 끝에 시비가 붙었다. 그는 개인적인 감정을 품고 이지영을 무단으로 포박한 뒤 포도청에 가두고 난장을 가하여 결국 숨지게 하였다. 이에 이지영의 처는 형조에 소장을 올려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 달라고 호소하였다. 형조는 김성팔을 비롯해 관련된 포도관원들을 소환하여 사건의 내막과 직접적인 사인을 조사하였다. 결국 형조는 여러 목격자와 증인들의 진술을 통해 김성팔이 고의적으로 난장을 가하여 이지영을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내 그를 처벌할 수 있었다. 당시 포도청의 수사는 고문에 의해 조작될 가능성이 컸지만, 이지영 사건처럼 형조가 재조사하여 진실을 밝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결국 1770년(영조 46), 영조는 난장이 지나치게 가혹할 뿐만 아니라 죄수의 발가락을 훼손해 불효자를 양산하는 폐단이 있다고 지적하며 이를 폐지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써 포도청이 사용한 악명 높던 난장은 폐지되었지만, 주뢰형12과 치도곤13은 그대로 존속되어 고신을 대체하였다.


(각주)

12 죄인의 두 다리를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끼워 비트는 형벌.

13 포도청에서 도적을 다스리기 위해 사용했던 곤장.


한편, 1823년(순조 23), 신인득 의물 투절 사건을 통하여 포도청의 은밀한 수사 관행을 확인할 수 있다. 연호궁 수직군인 신인득은 정당 내에서 의물을 훔친 혐의로 포도청에 붙잡혔다. 포도청 심문 과정에서 그는 촉대, 향로, 향합 등의 의물을 훔쳐 철물상에 팔았다는 사실을 순순히 자백하였다. 이에 포도대장은 그의 죄상이 명백하다고 판단하고 수사 계목을 작성하여 국왕께 보고한 후 사건을 형조로 이관하였다. 그러나 형조 신문 과정에서 신인득은 포도청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허위 자백을 하였다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형조는 그의 주장이 일정 부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포도청의 수사 과정을 철저히 재조사하였다.

그 결과, 포교 조덕행과 홍순량이 확실한 증거 없이 신인득을 서소문 밖 향도도가(香徒都家)라는 별도의 장소로 데려가 학무(鶴舞)라는 고문을 가해 사건을 날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사건 조작 과정에서 포교의 끄나풀인 ‘딴꾼(일명 땅꾼)’이라는 자들이 사건 조작을 주도적으로 도왔다는 점도 밝혀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포도청은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민중에 대한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공권력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시대적 변화에 맞춰 기능과 조직을 적극적으로 개혁하지 못한 점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 공공기관이 시민들의 신뢰를 잃고 외면받으면, 그 존재 가치는 결국 부정될 수밖에 없다. 당시 도성민들은 극심해진 포도청 관원의 불법적 폭압에 집단 항거로 저항하였다. 그 결과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개화파는 포도청을 폐지하고 근대적 경찰 제도인 경무청을 도입함으로써 치안 질서의 개편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개새쥴이트는모양(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김준근 풍속화 모사품, 국립민속박물관)

<개새쥴이트는모양>, 『기산풍속화첩(基山風俗畵帖)』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김준근 풍속화 모사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