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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봄, 여름호-수사반장]관찰사와 수령의 사법권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5-09-19 조회수 : 237

관찰사와 수령의 사법권


글. 이근호(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함흥전도

『함흥전도』, 시기 미상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감영에 설치된 옥사.


한국 역대 왕조가 국가 체제를 갖추어 가는 과정에서 주요한 관심은 중앙집권화와 지방에 대한 통제였다. 그리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군현제(郡縣制)였다. 다만, 역대 왕조의 정치 상황에 따라 군현제 정비의 내용이나 강도는 달랐는데, 대개 고려 말 이후 세밀하게 군현제가 정비되기 시작하여 조선 건국 이후 일정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군현제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조선의 군현제는 8도(道) 체계로 대변되며, 도 예하에 지역의 크기, 인구의 다소, 경제력 등을 고려하여 주(州)-부(府)-군(郡)-현(縣) 체계를 갖추었다. 상급인 도의 장관이 관찰사(觀察使)이며, 주·부·군·현에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수령(守令)이 파견되었다. 수령은 지역의 크기에 따라, 부윤(府尹)·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도호부사(都護府使)·군수(郡守)·현령(縣令)·현감(縣監) 등으로 호칭은 달랐다. 수령의 규모는 시기별로 약간의 편차는 있으나, 『경국대전』에 규정된 수령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다만, 이렇게 지역의 크기나 호칭이 달랐으나, 관찰사와 수령은 공히 국왕의 대행자로서 위상을 부여받았다. 관찰사는 한 도의 최고 통치자였고, 도내 수령의 감독자, 지시자였으며, 수령은 규모별로 권력의 크기에 차이가 있으나 국왕의 대행자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왕의 대행자, 관찰사와 수령



금월부

금월부(金鉞斧)

『세종실록』 132권 오례, 노부

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부월의 일례. 생살권을 상징한다.



경관(京官)은 왕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직분으로 삼거나 맡아서 지키는 것을 임무로 하므로 조심하고 근신만 하면 거의 죄가 되고 뉘우칠 일은 없다.

오직 수령(守令)만은 만백성을 주재하니 하루에 만기(萬機)를 처리함이 그 정도가 약할 뿐 본질은 다름이 없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자와 비록 대소(大小)는 다르지만 처지는 꼭 같은 것이다.


위 기록은 잘 알려진 정약용의 『목민심서』(부임, 제배조)의 일부 구절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수령의 역할을, 만기(萬機)를 처리한다는 것으로 명시한 부분이다. 만기란 국왕의 정사를 칭하는 용어로, 그 자체로 국왕을 상징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들어 수령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다만, 크고 작음이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관찰사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예하 수령의 관리 감독과 함께 도를 책임지는 장관으로서 도내의 민사와 군사를 지휘하며 일정 정도의 사법권을 행사하였다. 수령의 역할은 수령칠사(守令七事)에서 잘 드러나는데, 농상을 진흥시키고[농상성(農桑盛)], 호구를 늘리며[호구증(戶口增)], 학교를 일으키고[학교흥(學校興)], 군정을 잘하며[군정수(軍政修)], 부역을 고르게 하고[부역균(賦役均)], 사송을 잘 처리하며[사송간(詞訟簡)], 간사하고 교활하지 않게 할 것[간활식(奸猾息)] 등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역시 사법권 일부를 위임받아 처리하였다. 다음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대행했던 사법권의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즉결 처분권인 직단권(直斷權)과 형추(刑推)


조선시대 사법권의 최종 집행자는 국왕이지만, 일부 기관이나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이 위임받아 집행하였다. 관찰사가 임명되면 교서(敎書)와 부월(斧銊)을 주는데, 병장기인 부월을 주는 것은 생살여탈권을 부여한다는 의미였다.

관찰사와 수령이 수행하는 대표적인 사법권은 즉결 처분권이라고 할 수 있는 직단권(直斷權)이다. 직단권은 각각의 사법기관이 상부의 지휘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형벌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다. 조선시대 형벌은 태형(笞刑)·장형(杖刑)·도형(徒刑)·유형(流刑)·사형(死刑)인 오형(五刑)으로 대표된다. 태형이나 장형은 태(笞)나 장(杖)으로 치는 형벌이고, 도형은 원래는 노역형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노역 부과가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정배(定配)를 보내는 단기 유배형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유형은 유배형이다. 관찰사는 이들 오형 중 사형의 앞 단계인 유형까지를 직단할 수 있었다. 수령은 오형의 첫 단계인 태형을 즉결 처분할 수 있었고, 장형 이상 유형 이하의 범죄는 관찰사에게 보고하였고, 관찰사는 형을 집행하거나 수령에게 집행을 허가하였다. 이렇게 즉결 처분권을 행사하는 관찰사와 수령이지만, 사형에 해당하는 경우는 권한 밖의 일로 국왕에게 보고하여 집행하였다.

관찰사와 수령은 형추(刑推)를 형벌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형추란 형벌의 집행자가 피의자에게 유죄의 의심이 있어 심문하였으나 자백하지 않았을 때 고신(拷訊, 즉 고문)을 가하여 사안의 실체에 접근하는 강제 수단이다. 



고부군지도

『고부군지도』, 1872년 작.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고부군의 옥사.


형추의 적용 대상에 대해서, 문무 관리나 사족 부녀 등은 관찰사가 임금에게 보고한 뒤에 허가받아 행하도록 하였으나, 지방 사회에서는 형추가 형벌의 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헐거운 태형이나 장형보다는 형추가 효과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몇 차례 형추’라는 형식의 판결을 통해 고문 수단이자 형벌의 일환으로 활용하였다. 원칙적으로 일차적인 집행자인 수령은 자신의 재량으로 형추를 시행할 수는 없었고, 반드시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찰사의 지시나 묵인 아래 수령이 군현 내에서 형추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춘향전』의 이본 중 하나인 『열녀춘향수절가』에서 남원 부사 변학도가 형리에게 명령하여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을 매질하여 물고장(物故狀)을 올리라고 으름장을 놓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형추는 수금 기간 내에 여러 차례 시행된 예도 있는데, 개성의 차정득(車正得)은 1830년 4월 김순항(金順恒)을 발로 차서 죽게 만든 죄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차정득은 이후 34년간 수금(囚禁)되었는데, 이 기간에 1,558차례의 형추를 받고도 살아남은 바 있다. 관찰사도 직접 형추를 가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감영에서 형추의 집행은 대개 관찰사 예하의 검률(檢律)이 실무를 맡았다.



죄인 수금(囚禁)과 옥수(獄囚) 관리


관찰사는 죄인의 수금(囚禁)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장형 이상의 죄수는 구금하되 문무관이나 내시부의 내시 및 사족 부녀·승려 등은 임금에게 보고하고 구금하며 사죄(死罪,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를 범한 자는 먼저 구금한 후 임금에게 보고한다”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병조(兵曹)·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사헌부(司憲府)·승정원(承政院)·장예원(掌隸院)·종부시(宗簿寺)·관찰사(觀察使)·수령(守令) 외에는 형조로 이송하여 구금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관찰사나 수령은 공히 죄인을 가둘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상 범죄는 공사(公事)를 포함하여 강도, 살인 등이 해당하였으나, 일부 조항에 대해서는 제한 규정이 함께 명시되었다. 여기서 공사란 조운(漕運, 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이나 세곡 운송 등 부세 및 문서를 내는 일과 관련된 사안이었다.

단, 관찰사가 죄가 의심되어 직접 구금하지 못할 때는 국왕에게 보고하여 판단을 받았다. 1466년(세조 12) 5월 경기 관찰사가 도내에서 불효(不孝)한 실상을 보고하였다. 내용은 고양의 사망한 만호(萬戶) 송이(宋釐)의 아내 박 씨(朴氏)가 그 아들 송인례(宋因禮)가 불효한 짓을 했다고 고발한 것이다. 관찰사가 이 고발 건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아내 박 씨가 증인으로 신청한 시비(侍婢) 잉질덕(芿叱德)과 박 씨의 조카 박계조(朴繼祖)가 모두 아들 송인례가 불효한 일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소송은 약 4개월 정도가 지체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송인례가 또 다른 아들인 송유례를 불공죄(不恭罪)로 고발하게 되었고, 동생 송유례가 노모를 부추겨 형을 불효죄로 몰아간 것이었다. 

해당 사건에 대해 경기 관찰사는 정상(情狀)이 의심스럽다며 국왕에게 상주하였고, 결국 형조에서 논의하도록 하달하였다. 이처럼 죄의 정상이 의심스러운 경우에 관찰사는 국왕에게 보고하여 판단을 구하였다.


관찰사는 사법권의 차원에서 옥안(獄案, 예전에 옥사의 심리에 관한 조서)의 보고와 옥수(獄囚, 옥에 갇힌 사람)에 대한 검찰을 담당하였다. 각도 관찰사는 부임한 지 3개월이 되면 도내의 옥안을 모두 열람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단, 기록하여 보고한 지가 오래되었거나, 형이 확정된 옥사라 하더라도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마지막 부분에 품의하여 처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옥안의 경우 국왕의 하명으로 수정, 보완하여 올리는 때도 있었으나, 대개는 정기적으로 형조에 보고하며, 형조에서는 이를 종합해서 국왕에게 전달하였다. 즉, 서울에서는 사헌부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감옥의 죄수를 검찰하는 책임자였다. 관찰사는 분기 마지막 달에 옥안을 보고하였다.

관찰사는 투옥 중인 죄수를 검찰할 책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죄수가 사망하면 치사한 근본 원인과 죄인의 병을 치료한 실상을 국왕에게 보고하고 매 계절 말에 죄인, 죄명, 처음 구류된 월일, 고신 및 범죄 판결수를 국왕에게 보고해야 했으며, 죄인들이 죽거나 도망하면 이의 실상을 조사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것도 책무였다.



소지(所志)와 의송(議送)의 처리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소송을 제기하며 소장(訴狀)을 제출하거나 민원 등을 담은 청원서나 진정서 등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특정 분야에 한정되지 않아, 소장의 경우는 전답이나 노비의 소유권 분쟁을 비롯해 상속 분쟁, 산송(山訟) 등으로, 민원을 담은 청원서나 진정서 등은 세금 면제를 비롯해 권리 인정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에 해당하는 문서가 소지류(所志類)로 분류되는 소지(所志), 등장(等狀), 발괄(白活), 의송(議送) 등이다.

소지는 군현 단위의 수령에게 제출하는 것이다. 소지는 담당 아전이 접수하며, 증인이나 관련자의 진술을 받거나 질의서를 보내 답변을 받은 뒤 처분한 내용인 뎨김[題音]을 적어 입안(立案)을 작성하는 등 관련 절차를 모두 처리한 다음에 수령에게 최종적으로 확인을 받아 민원인에게 전달한다.

소지나 등장, 발괄 등이 군현 수령에게 민간인이 제출한 것이었다면, 상급의 관찰사에게 제출하는 것은 의송이라 칭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소지 형식으로 청원서, 진정서 등을 제출하기도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군현 단위에 제출하는 소지와 구별하기 위해 관찰사에게 제출하는 것은 의송으로 통칭하였다. 관찰사에 올리는 의송은 대개 고을 수령의 판결에 불복하여 상급자인 관찰사에게 항소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수령에게 제소하지 않은 채 관찰사에게 바로 의송을 제출하면 처벌되었다. 관찰사는 의송이 접수되면 사안을 조사하여 바로 처분하기보다는 대개 예하 수령들에게 ‘재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한 다음 처분을 지시하였다.



의송(議送, 탄원서)(국립중앙박물관)

의송(議送)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전라도 구례현(求禮縣)에 사는 유학(幼學,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

김영조(金英祚)가 전라도 관찰사에게 올린 소장(訴狀).


재조사 지시는 해당 사안에 대해 처음으로 처분한 수령에게 하달하거나 그 주변의 다른 수령에게 하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찰사는 군현 수령이 재조사하여 보고하면, 군현 수령의 판단을 존중하여 최종으로 처분하였다.

조선시대 사법권의 최종 집행자는 국왕인데, 관찰사와 수령은 국왕의 대행자로서 사법권의 일부를 위임받아 집행하였다. 직단권이나 형추를 집행하거나 죄인을 수금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옥과 옥수(獄囚) 등을 관리, 감독하였으며 소송이나 민원 등을 처리하였다. 지면상 수록하지 않았지만,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검시관(檢屍官)의 역할도 하였다. 그런데, 다산 정약용이 통렬하게 비판한 바와 같이 관찰사가 법령을 정확히 꿰고 있지 않거나, 은폐와 잘못된 대처가 있거나 형벌이 남용되는 예도 없지 않았다. 정약용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옥사의 지침서 격인 『흠흠신서(欽欽新書)』를 편찬하였고, 안정복(安鼎福)은 『임관정요(臨官政要)』, 홍양호(洪良浩)는 『목민대방(牧民大方)』, 박지원(朴趾源)은 『칠사고(七事攷)』 등 목민서(牧民書)를 편찬하여 공정한 법 집행을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