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가짜가 진짜를 흔들다
: 불법 주조와 위조 그리고 조선의 대응
글. 유승희(연세대학교 법학연구원 연구교수)

『속대전(續大典)』 「형전」, 위조조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위조는 조선시대 다양한 범죄 가운데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중죄였다. 위조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문서, 인신(印信)1, 화폐 등을 임의로 만들어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어서 돈이 되는 것이면 모두 위조가 가능했다. 따라서 위조 대상과 이를 범하는 죄인의 신분층은 매우 다양했다. 특히 민간의 사주전(私鑄錢)2 제작은 가짜 동전을 만들어 이를 행사하는 게 가장 큰 목적으로, 동전 주조에 필요한 장비와 기술을 가진 사람에 의해 전문적으로 계획, 실행된 범죄였다.
동전 주조에 필요한 원료와 장비 마련을 위한 재원도 상당해 문서 및 인신 위조, 가짜 인삼 제조 등 여타 위조 범죄와도 성격이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공공의 신용을 위태롭게 하고, 거래 질서를 문란케 하는 위조 행위에 대해 사형이라는 강력한 칼을 들고 범죄인을 처벌했다.
(각주)
1 도장이나 관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2 개인이 사사로이 돈을 주조함, 또는 그 돈.
조선, 위조 행위에 대해 규제하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가짜 인신으로 만든 홍패(紅牌)3·교지(敎旨)·관문(關文, 관청에서 발급하던 허가서) 등 각종 공문서 위조에서 화폐, 호패, 토지 및 집문서, 고가 물건의 가품(假品)까지 위조의 대상은 매우 다양했다. 하지만 오늘날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위조를 한 자에게 사형이라는 중벌을 내렸다. 인신을 위조해 가짜 공문서를 만들거나, 가짜 화폐를 만드는 행위에 대해 법전에 규정을 만들어 강력히 처벌했다.
인신을 위조한 사람은 인문(印文, 도장을 찍은 형적)의 완성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참형에 처했으며, 아내와 자식은 지방 고을의 노비로 삼았다. 화폐를 위조한 자는 교수형으로 처벌했다. 조선은 태종 대 민가에서 유통되고 있는 포화(布貨, 화폐로 사용하던 베)의 통용을 금지하고, 국가에서 발행한 지폐인 저화(楮貨)4를 유통했다. 이에 저화를 위조하거나 위조된 저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화가 기술이 필요한 동전보다 제작이 쉬워 대량 위조 및 발매가 쉬웠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저화 위조범을 교수형에 처했을 뿐 아니라 이들을 잡거나 신고한 자에게 포상금과 함께 범인의 재산까지 지급했다.
(각주)
3 문과의 회시(會試)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던 증서. 붉은색 종이에 성적, 등급, 성명을 먹으로 적었다.
4 고려 말기·조선 전기에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돈.
조선 후기에 이르면 동전 전용으로 정부의 통화정책이 전환되어 화폐 위조범에 대한 처벌은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는 가짜 동전의 주조를 도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인식하고, 사주전을 제작하는 죄인, 이른바 사주범(私鑄犯)을 절도에 관한 법률인 적도율(賊盜律)따라 참형에 처했다. 가짜 동전을 만든 장인과 도와준 사람을 모두 참형에 처했으며, 함께 모의하여 이득을 챙긴 관련자들도 사형에 처했다. 이와 함께 가짜 은을 제조한 자도 참형에 처했는데, 가짜 은 제조가 동전 사주보다 죄상이 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문(關文)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1872년(고종 9)에 전라도 관찰사가 강진(康津)의 수령에게 보낸 공문서.
어보(御寶)5를 정교하게 위조한 이조 서리
영조 대 포도청으로 제보 하나가 전해졌다. 죽전동(竹前洞)에 사는 송규성(宋奎成)이 통정대부(通政大夫)6와 가선대부(嘉善大夫)7 등의 공명첩(空名帖)8을 지방 고을 사람들에게 내다 판다는 내용이다. 포도청은 즉시 군관을 보내 그를 체포한 후, 집을 수색했다. 크고 작은 가짜 나무 도장인 관자인(關字印), 첩자인(帖字印) 등이 발견되었고, 싸리 바구니 속에서 납철(鑞鐵)로 만든 가짜 어보도 찾아냈다. 아울러 위조 도장으로 만든 가짜 공문서 수십 장도 압수했다.
(각주)
5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사용하던 임금의 도장.
6 조선시대에 둔, 정삼품 문관의 품계.
7 조선시대에 둔, 종이품 문무관의 품계.
8 성명을 적지 않은 백지 임명장.
포도청에 체포된 송규성은 전직 이조 서리였다. 그는 이조 서리로 근무할 때 80세가 안 된 사람에게 노인직(老人職)9으로 가자(加資)10하는 문서를 발급해 주려고 하다가 충주(忠州)로 유배되었던 사람이다. 송규성은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생계가 막막하자, 어보를 비롯한 각종 도장과 계자인, 관자인, 첩자인 등을 과감히 위조하여 집 안에 몰래 숨겨 두었다. 그러다가 문서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위조해 요구하는 대로 값을 받고 판매했다. 송규성이 그동안 위조 도장으로 만들어 판매한 공문서는 총 255장이었다. 포도청은 각처에서 사기를 당해 구매한 공문서를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등지에서 찾아와 위조 인신과 함께 모두 소각했다. 이처럼 공문서를 위조하여 사람들에게 판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위조문서에 사용한 가짜 어보는 황랍(黃蠟)이나 나무 조각, 무 등으로 만들었다. 위조문서의 판매도 일회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송규성은 어보를 철제로 위조하여 10년 동안 숨겨 두고 사용했으며, 많은 문서를 마구잡이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판매했다. 이러한 양상은 1736년(영조 12) 어보를 위조한 서행덕도 마찬가지였다. 서행덕은 어보 1개와 병조 장예원의 인신을 흙으로 구워낸 후 자루에 숨겨서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사용했다.
(각주)
9 조선시대 양인이나 천인을 막론하고 80세 이상된 노인에게 제수하던 산직(散職).
10 조선시대에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 또는 그 올린 품계.
조선시대 문서 위조는 신분 상승 욕구와 경제적 이득을 이유로 발생했다. 포도청에 압수된 위조 공문서는 대부분 납속첩, 관직 임명 관련 교지, 홍패(紅牌), 백패(白牌), 각종 관문(關文)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국가에서 빈민 구제나 군수 물자가 부족한 경우 각종 재물을 국가에 바친 사람에게 납속첩(納粟帖)을 주었다. 이들이 양반일 경우 관직의 기회를, 양인일 경우 역을 면하거나 신분 상승의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납속첩은 위조범의 주요 위조 대상이 되었다.
특히 위조범들은 앞의 송규성처럼 문서를 잘 아는 서리를 비롯해 부류가 다양했다. 1807년(순조 7) 강윤상은 황해도 송화 사람으로 훈련도감 승호 포수로 서울에 왔다가 가짜 어보를 만들어 홍패를 위조해 한용선에게 50냥을 받고 팔았다.
정조 대 위조범 박창욱은 양인이지만, 글을 쓰고 읽을 줄 알아 이것으로 벌어먹는 사람이었다. 그가 위조한 문서는 무려 135장이었으며, 이를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총 250냥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위조를 가업으로 삼는 자도 있었다. 정조 대 황용서는 아버지 대부터 위조를 일삼아 자식이 이를 물려받아 생업으로 삼은 경우다. 황용서는 진짜 교지를 구해 어보가 찍힌 곳을 칼로 오려 나무 조각에 붙여 놓고 글자를 새긴 뒤 문서를 위조해 판매했다.
경제력이 약한 양반도 위조에 참여했다. 1847년(헌종 13) 남부 원정동에 사는 윤범기는 양반이었다. 그는 집이 가난했으므로 공문서를 위조해 판매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신분 상승과 경제적 이득 때문에 부유한 평민들이 이와 관련된 문서를 자주 요구하자, 윤범기는 어보를 위조해 공문서를 만들었으며, 연죽상을 하는 손순흥과 이손철이 판매상으로 함께 참여했다.

첩(帖)’ 자 인과 ‘관(關)’ 자 인
소장: 국립고궁박물관
가짜 돈이 판치다: 사주전(私鑄錢)을 만든 사람들
위조 행위는 공문서만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동전이 제조되어 유통되기 시작하자 가짜 동전을 주조하는 사주전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짜 돈 주조는 19세기에 들어 극심해졌다. 사주범들은 관의 기찰을 피해 몰래 동전을 주조해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산골짜기나 바닷가 섬을 사주 장소로 이용했다. 산과 동광이 많은 함경도에서 사주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인천을 비롯해 인근 섬 또한 주요 사주 장소가 되었다.
경종 대 선갑도에서 체포된 사주범 변위신, 황길선 등은 대량의 주전 원료와 연료를 가지고 동전을 주조했다. 이들은 모두 돈을 주전할 줄 아는 전문 장인이었다. 영종첨사11는 이들에게서 생동(生銅) 3000근, 연철(鉛鐵) 2000근, 숯 200석, 약간의 동전, 주전 기계 등을 몰수한 후, 포도청으로 이송했다.
(각주)
11 조선시대에 경기도의 영종진에 배치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로, 종3품의 관직.(출처: 한국고전용어사전)
전라도 진도와 나주 부근의 섬에도 사주범이 들어가 동전을 몰래 주조했다. 이에 전라 병사가 군사 2인을 섬에 파견해 사주범의 동태를 살폈다가 도리어 살해되기도 했다.
불법 사주는 고종 대 당백전, 당오전 등 고액 환의 발행으로 더욱 극심했다. 당시 민간에서 가짜 당백전 주조가 얼마나 활발했는가는 포도청에 체포된 사주범 신응수의 진술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 거주하는데, 인근 마을에서 가짜 동전을 주조하기 위해 야로를 설치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7촌 숙부의 말을 듣고 사주를 범했다고 자백했다. 심지어 경기도 양근에서는 민병렬 등 6인이 산간에 주전 화로를 설치하고 사주를 하는 데도 관속이 뇌물을 받고 금단하지 않아 사주범과 함께 관속까지 처벌했다.
1867년(고종 4) 이사선은 김의환, 백원규 등과 사주를 모의하다 포도청의 기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당백전을 사주할 계획으로 유철(鍮鐵) 100근을 마련한 후, 섬으로 들어가려고 염창(鹽倉)에 있다가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1884년(고종 21)에는 유경복, 손치범 등이 배를 빌려 남양부 섬에서 400냥을 사주하고 인천항으로 돌아와 정박하다 배 안에 주전 기계가 있다는 첩보를 받은 화도진 군졸에게 체포되었다
사주범들이 만든 가짜 동전은 대개 유기, 반상, 요강, 옛 동전 등을 녹여서 만들었으므로 품질이 좋지 못했다. 사주범들은 이것이 가짜인지 잘 모르는 민간에 유통했다. 대부분 시장에서 물건을 사거나 밥값을 지불하는 데 썼으며, 빚진 돈을 갚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사주범을 효수(梟首)12하다
민간의 불법 사주는 문서 위조와 다르게 다수의 인원이 참가했다. 호기심이나 호구지책으로 인한 단순 사주범도 있었지만, 대부분 기술과 물력을 가지고 전문성을 갖춘 다수의 사람이 작업을 분담해 조직적으로 했다. 따라서 체포된 사주범 가운데에는 주조에 능숙한 땜장이, 두석장(豆錫匠) 등 장인과 상인 등이 포함되었다.
관인이나 양반이 사주 공모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영조 대 내포(內浦)에서 발생한 사주 행위에는 사족이 가담해 체포되기도 했다. 헌종 대에는 군기감 관원인 염처옥이 각종 군기와 총을 훔쳐낸 후 무뢰배와 함께 이를 화로에 녹여 동전을 주조했다. 염처옥과 함께 사주에 참여한 사람은 박중도, 박문홍, 김종각, 안사의, 이원수, 허천 등 6명이었다. 헌종은 군기 절도와 사주를 모두 범한 염처옥을 효수했으며, 화로를 설치한 후 군기를 녹여 동전을 주조한 박중도, 김종각, 안사의를 수범으로 파악하고 참형에 처했다.
(각주)
12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음. 또는 그런 형벌.
총을 운반하거나 매입한 이원수와 주조할 집을 빌려준 허천은 교수형에 처했다. 고종 대에는 서소문 밖 신교에 사는 양반 이봉하가 김인택, 오명칠, 노비 완복과 함께 자기 집 대청 뒷방에서 당백전을 주조했다. 이봉하 등은 나중에 다시 주조하기 위해 주전에 사용했던 납[鉛], 유철, 함석, 석탄, 풍구(風口) 등을 편자동에 사는 조재길에게 맡기기도 했다. 아울러 선전관 김찬구가 이운익, 이주헌, 노비 억쇠와 함께 당백전을 주조해 유배되기도 했다.

상평통보 당오전
소장: 정읍시립박물관
19세기 중엽부터 정부는 사주범들을 효수라는 극형에 처했다. 1846년(헌종 12) 함경도 명천부(明川府)에서 사주범 14명이 체포되었다. 수범인 황철운은 사주를 주동했으며, 주달용은 화로 제작, 채홍석은 구리 매입, 김진섭과 전응협은 동전 틀을 제작해 돈을 주조했다. 그 밖에 조윤섭과 김화겸은 화롯불을 피워 연마했고, 임국신과 김신원은 연료인 석탄을 사 왔으며, 유영관·윤상범은 집을 빌려주었다. 이들은 수범 황철운을 중심으로 화로 제작, 구리 및 석탄 매입, 돈을 주조할 전판 제작, 동전의 연마, 사주 장소 제공 등 작업을 분담해 조직적으로 사주를 계획, 실행했다. 헌종은 황철운·주달룡·김진섭·전응협 등 4인을 수범으로 간주해 효수했으며, 나머지 8인은 유배형에 처했다.
고종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866년(고종 3) 고종은 사주전 수범인 이영운과 김문호를 효수했다. 또한, 이듬해 김여성이 낫을 녹여 주전의 원료로 삼고, 풍로를 빌려 사주한 당백전 3냥 가운데 1냥을 시장 사람들에게서 엽전 100냥으로 바꾼 후 사용하는 등 주전 정황과 사주전 행사가 드러나자 효수했다. 이 밖에 전주의 사주범 이기화, 김진성 역시 효수했으며, 좌포청에서 체포한 신규원, 김척선, 이중석, 안금손, 지흥득 등 5명도 모두 수범으로 효수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통제하에 인신 및 공문서의 위조, 민간 내 불법 사주 등 각종 위조 행위를 엄격히 금지했다.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 사주를 주동한 장인 및 조역인 등 수범에게는 법전 형벌인 참형이 아닌 효수에 처하여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었다. 이는 공문서의 경우 국가나 국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며, 화폐는 국가 외에는 누구도 공유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를 문란케 하여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위조 행위에 대해 사형이라는 중형으로 처벌함으로써 이를 방지하고자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