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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조선시대 검시, 선정(善政)을 향한 첫걸음
글. 김호(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교수)

<검시하고> | 기산 김준근(箕山 金俊根)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조선 후기의 대학자 정약용은 자신의 『흠흠신서』에서 살인 사건의 판결은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을 중시’하는 마음에서 비롯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건 판결은 천하의 저울이다.
죄수를 위하여 죽일 길을 찾아도 정의가 아니며, 죄수를 위하여 살릴 길을 찾아도 정의가 아니다.
그러나 살길을 찾고 죽을 길을 찾지 아니함은 진실로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으므로 살려 놓고 그 죽일 것을 찾아내더라도 오히려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죽여 놓고 살리기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살옥사건1을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죄수를 위하여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주)
1 조선시대에, 살인 사건에 대한 옥사(獄事)를 이르던 말.
사법 정의를 구현하는 원칙은 죄를 지은 자는 처벌하고, 그렇지 않다면 용서하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원리에 입각해 있다. 특히 국가는 ‘죽을 죄를 지은 자’들을 반드시 처벌[사형]하여 만천하에 정의가 구현되었음을 공표해야만 했다. 혹여 살인 사건의 조사가 명확지 않아, 살인자는 반드시 목숨으로 죗값을 치른다는 조선시대의 대원칙, 즉 ‘살인자상명(殺人者償命)’의 정의를 구현할 길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도리어 검시를 포함한 사건 조사가 허술할 경우, 자칫 억울하게 범인을 대신하여 생명을 잃는 이도 나타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의를 구현하려면 정확한 사건 조사는 필수적이었다.
검시 절차
조선시대에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기본적으로 두 번의 검시가 이루어졌다. 우선 사건이 발생한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 1차 조사[初檢, 초검]를 실시했다. 그리고 인근 지역의 지방관이 2차 조사[覆檢, 복검]를 실행했다. 이들 초검관과 복검관은 각각 관할 지역의 관찰사에게 살인 사건의 조사 내용, 즉 시신에 대한 검시와 사건 관련자 진술을 포함하는 보고서[검안]를 제출했다. 관찰사는 1, 2차의 조사 내용이 부합하면 사건 조사를 종결하고 자신의 심리 의견을 첨부하여 상부, 즉 중앙의 형조에 보고하여 공정한 판결의 자료로 활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 의심이 가는 경우 1, 2차 조사에 머물지 않고 3차 조사[三檢, 삼검] 혹은 그 이상의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의 철저함을 기하기 위한 것으로 다섯 차례 이상의 조사가 행해진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검시는 현대 의학의 해부학적 방법이 아닌 주로 육안을 통해 신체의 외상을 조사하거나 다양한 법물(法物)2을 사용하여 사인을 확정하는 방식이었다. 시체가 심하게 부패하거나 혹은 부녀자들의 경우 시신을 욕보인다 하여 중단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거의 예외 없이 검시가 이루어졌다.

은비녀
소장: 안동시립민속박물관
(각주)
2 사인을 조사하기 위한 다양한 재료들로 은비녀, 술지게미 등을 말함.
조선시대 살인 사건 조사의 지침서였던 『증수무원록언해』에 따라 검시 혹은 검험(檢驗)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살인 사건이 관청에 접수되면 해당 지역의 지방관은 의생(醫生)과 형리(刑吏) 및 군졸 등을 대동하여 현장을 방문하고,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면임(面任)이나 동장 등으로 하여금 사건 관련자들을 지방 관아로 인솔하도록 했다. 검시가 끝나면 이들을 대상으로 한 심문 절차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방관과 형리들은 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시체가 놓여 있는 장소의 주변 상황과 시체의 상태 등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조사관이 사건 현장을 묘사하고 시체가 놓여 있는 위치 등을 기록하고 나면, 시체의 옷가지를 하나씩 벗기면서 상태를 서술했다. 시체를 관찰하기 어려운 경우 사방이 트이고 밝은 곳으로 옮겨 조사하거나 이불을 덮고 있다면 천의 재질이나 크기 등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여러 겹의 옷을 입고 있는 경우 하나씩 벗겨 가면서 상세하게 묘사했다. 시체의 상태를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사인을 확정하여 시장을 작성했다. 시신의 훼손 상태와 사인을 확정한 법의학 문서, 즉 ‘시장(屍帳)’을 완료하고 나면 관련자들의 심문 내용과 합록하여 검안을 마무리했다. 무엇보다 살인 사건의 정확한 원인, 즉 사인을 밝혀내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은 평소에 『무원록』과 같은 법의학 관련 서적을 숙지하여 갑작스럽게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철저한 조사를 할 수 있어야 했다.
검시의 실제
19세기 후반 황해도 신계군 백성 박봉록의 죽음을 조사했던 검안을 살펴보자. 박봉록은 동네의 보부상들로부터 돈을 갈취당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 피해자였다. 초검관 윤태길은 검시를 위해 사건 현장으로 출동했다. 하지만 현장은 이미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 박봉록의 주검은 사망한 장소에서 옮겨져 가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윤태길은 무덤 주변의 풍경을 서술하고 시체의 위치를 알 수 있도록 동서남북의 건물이나 나무 등으로부터 거리를 측정했다. 박봉록의 시신은 집 근처 대지에 묻혀 있었다. 무덤의 길이는 6척 4촌, 깊이는 3척, 넓이는 1척 7촌으로 무덤 내부가 너무 협소하여, 박봉록의 시신을 집 마당으로 옮겨 조사하기로 했다. 판자 위로 시체를 옮기고 염습한 천과 옷들을 하나씩 풀어 보니 19척 길이 5승염포(五乘殮布)로 시체를 싸매 두었는데 피가 흥건했다. 초록색의 저고리를 벗겨 내니 역시 피가 어지럽게 묻어 있었다. 시신의 얼굴을 싸맨 면모(面帽) 역시 피로 물들어 있었다. 염습한 천과 옷가지를 차례로 정리하니, 무명 바지 한 벌에 명주 적삼과 행전, 버선, 토수(吐手) 등이었다. 이들을 모두 풀어낸 후 자세히 검사하니 대략 50세 전후 남자로 신장은 5척 7촌이었다. 흩어진 두발(頭髮)을 재어 보니 1척 8촌이었다. 입과 눈을 모두 감은 채, 치아 역시 다물어 혀는 나오지 않았다. 양손은 주먹을 쥔 자세였으며 배 부분이 움푹 꺼졌고 음경은 늘어져 있었다.
초검관 윤태길은 오작사령으로 하여금 법물을 가지고 시체를 세척하도록 했다. 사인을 확정하려면 찬찬히 시신의 상태를 관찰해야 했다. 그리고 『무원록』의 양식에 맞추어 시장을 작성했다.
앞면: 정수리(頂心)부터 양쪽 눈두덩이에 이르는 부위는 자적색(붉은 자줏빛)이다. 눈은 평상시와 같고 광대뼈 근처와 입술 부위는 자적색이다. 위아래 이빨을 굳게 다물었고 혀는 내밀지 않았다. 턱 아래는 자적색, 목 좌측에 졸린 액흔이 한 군데 있다. 길이 3촌 2푼, 자적색으로, 손으로 만져 보니 딱딱하다. 인후 우측으로 액흔이 한 군데 있다. 길이 2촌 4푼, 자적색으로 약간 들뜬 듯하나 손으로 만지니 딱딱하다. 식도 부분도 자적색이다. 어깨뼈로부터 가슴 부위는 청홍색(푸르스름한 붉은 색)이고 양손부터 손가락은 평상시와 같다. 가슴부터 배꼽부위는 청홍색, 넓적다리는 약간 붉은 색을 띠고 음경은 좌측으로 늘어지고 신낭은 평상시와 같다. 무릎 위에서 발뒤꿈치까지 약간 붉은 색이다. 발은 평상시와 같다.
시체의 앞부분을 모두 묘사한 후, 곧바로 뒷부분을 기록해 나갔다.
뒷면: 두뇌부터 목 위까지 자적색이다. 어깨 뒤에서 손등까지 약간 붉은 색이다. 양 손등에서 손톱에 이르는 부위는 평상시와 같다. 척추에서 갈빗대 부위는 청홍색이다. 갈빗대는 청흑색이다. 잘록한 허리 부분부터 신장 부위는 약간의 붉은 색이다. 똥이 나와 있고, 대퇴부에서 복숭아뼈에 이르는 부위는 약간의 붉은색이다. 다리부터 발까지는 평상시와 같다. 항문을 은수저로 시험하니 색이 변하지 않았다.
검시가 끝나자 초검관 윤태길은 사망 원인[實因, 실인]을 목을 매서 자살한 것으로 결정하고, 시체를 원래 상태로 덮어 둔 후 군졸에게 지키도록 했다. 복검관이 조사를 위해 현장을 방문할 때까지 현장과 시신을 잘 보존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인은 목을 매 죽은 것이 분명하다. 시신을 옷과 천으로 다시 입혀 장판에 올려 그의 집 사랑방에 두고 괴목 2개로 덮은 후 망석 1개로 덮고 회를 세 군데 뿌려 봉인했다. 군졸을 정해 수직케 했다. 목을 맨 방을 살펴보니 동향의 초가 단칸으로 방 안의 물건은 동쪽 벽에 소나무 시렁 1개, 작은 창문 1개, 서쪽 벽에 좌우로 문이 하나씩이다. 남쪽 벽에 소나무 시렁이 있으니 목을 맨 장소다. 방 구들에서 시렁까지 높이 3척 9촌, 길이 6척 3촌이다.
초검관 윤태길은 시장을 작성한 후 신계군 관아로 돌아가 사건 관련자들을 한 명씩 불러 심문했다. 모든 심문과 관련자들의 진술은 아전들이 받아 적었다. 취조가 끝나자 초검관은 아전들의 기록을 다시 한번 관련자들에게 읽어주었다. 각자의 진술이 일치한다는 관련자들의 확인을 다짐받은 후, 윤태길은 시장과 심문 기록을 함께 황해도 관찰사가 있는 감영으로 보냈다. 초검을 마친 후 곧바로 복검이 이루어졌고, 복검안 역시 황해도 감영으로 보고되었다. 황해감사는 두 번의 조사가 문제가 없자, 자살 사건으로 마무리하겠다고 형조에 보고서를 올렸다.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 「시형도(屍型圖)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실한 관행들
정조는 누구보다 정확한 조사[검시]에 기초한 공정한 심리를 강조했다. 정조가 신하들에게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임금께서 사람 살리기를 좋아하여 쉽게 용서하신다’는 칭찬 아닌 칭찬이었다. 다산이 기억하는 한 정조는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자를 죽이지 않으려던 것일 뿐, 무작정 죄지은 사람을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 사법 정의는 처벌받아 마땅한 자를 처벌하고, 단 한 사람의 억울한 희생자도 만들지 않는 데서 가능했다. 다산 역시 정확하고도 철저한 사건 조사를 매우 강조했다. 정의 구현은 살인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려는 지방관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물론 현실은 이와는 달랐다.
18세기 후반 황해도 강령의 백성 김윤서가 장막봉을 구타 살해한 일이 벌어졌다. 장막봉이 술에 취해 욕을 하자 김윤서가 발로 장막봉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담뱃대로 관자놀이를 때린 것이다. 시름시름 앓던 장막봉은 일주일 만에 사망했다. 당시 세 차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초검관 강령군수는 장막봉과 김윤서는 친척 사이라 특별히 죽일 마음이 없었을 것으로 단정했다. 구타 후 장막봉이 관아에 드나드는 등 정상적으로 생활한 것을 보면 감기에 걸려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장막봉의 왼쪽 이마의 까진 상처를 확인했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뇌수가 흘러나오지 않았으며 살갗이 벗겨진 정도라는 점이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후일 초검안을 살펴본 다산은 강령군수의 허술한 조사를 질타했다. 관자놀이는 급소[必死處, 필사처]에 해당하여 살갗이 터질 정도면 충분히 사망할 수 있으며, 상처 깊이가 1푼에 이르는데 이를 단지 긁혔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비판이었다. 또한 장막봉이 관아에 드나든 사실이 있다고 해서 이를 들어 병사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오류는 복검 때도 반복되었다. 복검관 역시 장막봉의 죽음을 숙환과 음주 그리고 구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결정했다. 구타를 중대한 사인의 원인으로 보지 않았음은 초검관과 마찬가지였다. 다산은 복검관의 허술한 조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초검은 살갗이 터졌다 하고 복검은 살이 터졌다 했으니 살이 터진 상처는 살갗이 터진 것보다 무거운 상처다. 『무원록』에 상처가 필사처에 해당하면 10일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이제 과연 7일 만에 죽었으니 무엇 때문에 사인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가? 초검에서는 싸운 뒤 행동이 정상이었다고 하고 복검에서는 다음 날 병들어 누운 뒤 일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행동이란 게 싸운 곳에서 걸어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방에 가서 누운 데 불과하다. 이를 정상적으로 관아에 드나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산은 장막봉이 평소에 술주정이 심했고 혈혈단신의 신세였기에 구타당해 죽었는데도, 군수와 서리들 모두 장막봉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처리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사법 정의를 위해서는, 죽은 자의 신분이나 평소의 몸가짐과 상관없이 모든 조사가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런데 삼검관의 보고서는 더욱 형편없었다. 애초에 구타 등은 거론조차 않았던 것이다. 장막봉이 감기를 앓은 데다 술에 취해 냉방에 누웠다가 묵은 병이 도져 죽은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이었다. 다산은 삼검안은 흠결이 너무 많아 일일이 논의할 수도 없을 정도라고 비판했다. 부실한 조사는 해당 군수들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황해 감사의 보고서도 엉터리였다. 황해감사는 담뱃대로는 사람을 때려죽일 수 없다며 병사를 주장했다. 다산은 황해감사가 그저 꿈을 꾸고 있을 뿐[夢想, 몽상]이라고 비난했다.
복검관 정약용
살인 사건의 조사가 정확지 않자, 살인자가 열녀로 둔갑하는 일도 발생했다. 정조 치세의 일이다. 황해도 수안군의 창고지기 최주변이 동료 민성주와 장난하던 중 칼에 찔려 죽자 최주변의 아내가 민성주를 복수 살해한 사건이었다. 초검관 수안 군수는 원수를 갚은 안 씨를 열녀로 표창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당시 36세의 젊은 곡산 부사 정약용에게 수안군 살인 사건에 대한 복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다산은 조사 결과 최주변이 민성주와 장난치던 중 칼에 다쳤고 조섭(調攝, 건강이 회복되도록 몸을 보살핌)을 잘못해 죽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민성주가 최주변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최주변의 아내[안 씨]가 민성주를 죽인 일은 남편을 위한 복수가 아닌 살인일 뿐이었다.
다산의 검시는 민성주가 최주변을 칼로 찔러 죽일 마음[고의]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데로 향했다. 다산은 차례로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민성주의 칼은 떡을 써는 용도로 애초에 날카롭지 않았다. 둘째, 칼에 다친 최주변이 한 달 동안 짐을 나를 정도로 건강했다. 마지막으로 민성주가 죽이려고 찔렀다면 발등의 상처가 조그맣고 깊어야 하는데 최주변의 상처는 옆으로 길게 나 있다. 이로 보아 칼로 찌른 것이 아니라 칼이 떨어지며 다친 상처가 분명하다는 결론이었다. 다산은, 민성주가 최주변을 죽이려고 칼로 찌른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장난치다가 최주변이 칼에 맞았고 이후 조섭을 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일하다가 병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초검관이 범범하게 사건을 조사한 결과, 살인범은 열녀로 둔갑되어 있었다. 민성주의 억울함은 조금도 신원되지 않은 상태였다. 안 씨를 열녀로 둔갑시킨 초검관 수안 군수야말로 사법 정의를 해치는 형편없는 목민관이 분명했다.
민성주의 범행이 반드시 죽이려는 마음에서 나왔고 칼날의 상처가 반드시 죽는 급소에 해당한다면, 안 씨가 칼을 품고 복수한 사실이 어찌 찬란히 빛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본 사건은 그렇지 않다. 이번 사건은 장난에서 비롯하였고, 상처는 복사뼈 아래에 불과하다. 또한 상처를 보면 칼을 옆으로 하여 때린 것이지 찌르지 않았다. 최주변의 죽음은 상처를 조섭하지 않고 찬바람을 쏘인 때문이다. 불행히 남편이 죽자 아내 안 씨가 모진 칼로 목구멍을 찌르고 다듬이 방망이로 민성주의 머리와 얼굴을 어지럽게 내리쳤으니 그 잔인함과 악독함은 최주변이 다친 것보다 백배나 더하다. 만일 안 씨가 함부로 사람을 죽인 사실에 죄가 없다고 판결한다면 이후 뒤따를 폐단이 끝이 없을 것이다.
‘생명 존중’의 사법 제도
사법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제대로 된 사건 조사가 선행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무원록』을 숙지하고 사건 관련자들을 정확하게 심문하여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했다. 조선 후기에 많은 지방관들은 사건을 신중하게 조사하지 않은 채 상식적으로 판단하거나 범인이나 간증의 진술에 의거하여 성급하게 결론짓기 일쑤였다. 그 결과 살인자가 열녀로 둔갑하기도 했다.
사실, 조선은 개국 이래 ‘태장도류사(笞·杖·徒·流·死)’의 오형을 줄곧 유지했다. 사형을 제외하고는 노동형이나 유배형 그리고 태와 장을 치는 형벌만을 시행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고대의 신체형[肉刑] 가운데 오직 사형 하나만이 남았을 뿐이라며 조선의 사법 체계를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사형 집행조차 최소한만 시행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결국 사형에 처할 중범 죄인을 결정할 검시 과정은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산의 비판대로 현실은 이상과는 다르게 흘러갔지만, 생명을 중시하는 선정(善政)의 의지야말로 조선의 검시 제도를 유지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덕목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