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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봄, 여름호-수사반장]조선시대의 풍기 단속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5-09-20 조회수 : 415

조선시대의 풍기 단속


글. 박경(건양대학교 인문융합학부 교수)



신윤복-월하정인

<월하정인(月下情人)> | 신윤복

소장: 간송미술재단


신윤복이 한밤중에 남녀가 몰래 만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던 쓰개치마를 두르고 남성을 만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이 그림에는 “달이 깊은 밤 3경, 두 사람의 마음이야 두 사람만 알겠지”라는 구절이 쓰여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 행위들을 금지하는 규정을 제정하고, 위반할 경우에는 이를 단속하고 처벌한다. 고성방가 등 인근을 소란스럽게 한 행위, 술주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 과다한 노출 등에 대한 규제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70년대 건전한 사회 기풍을 정착시킨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은 당시 권위주의 시대의 사회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희대의 촌극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단속 규정들이 있었다. 『경국대전』 「형전」 금제(禁制)조에는 사족(士族) 부녀(양반층 여성)로 산간이나 물가에서 잔치를 벌이거나 야제(野祭), 산천, 성황, 사묘제(祠廟祭)를 친히 행한 경우 장 100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재 관점에서는 야외에서 잔치를 벌이거나 제사를 지냈다고 해서 처벌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야외 행사에서 남녀가 섞이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이들은 이를 남녀의 분별이 무너져 풍속을 크게 해치는 일로 인식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간통의 처벌


간통은 오랜 기간 범죄로 인식되고 처벌되어 왔다. 우리 사회에서 간통죄가 폐지된 것은 2015년, 불과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여성의 정절을 중시하고 남편에 대한 처의 도리가 강조되었던 조선시대에도 당연히 간통은 처벌 대상이었다. 당시에 형률로 활용되었던 『대명률』에는 남편이 없는 여성과 합의하에 간통하면 간통한 남녀 모두 장 80에 처하고, 남편이 있는 여성과 간통하면 장 90에 처하도록 했다. 친족 간 간통 등 간통한 남녀의 관계에 따라 형량은 이보다 무거워질 수 있었다. 이에 따르면 간통한 남녀가 모두 처벌 대상이었지만 간부(奸婦, 간통 당사자 중 여성)에게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형량에 차등을 둔 것을 볼 때 이 형률은 여성의 성을 규제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형률에서는 혼인하지 않은 남녀 사이의 간통을 포함한 혼인 외 성관계를 모두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자유로웠던 하층민들의 혼인 외 성관계를 처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양반들이 첩을 들이는 것도 규제하지 않았다.

반면에 사족 여성이나 관원의 처가 간통하면 매우 무겁게 처벌했다. 태종 대와 세종 대 초반에는 남편이 있는 사족 여성이 간통하면 참형에 처했다. 1427년(세종 9) 이후 이에 대한 처벌이 다소 완화되었지만, 성종 대에는 간통한 사족 여성을 교형(絞刑)에 처하는 방향으로 다시 선회했다. 중종 대에는 사족 여성의 간통에 대한 처벌이 법제화되어 『대전후속록』에 “사족 부녀가 음욕을 자행하여 풍속을 어지럽히면 간부(奸夫, 간통 당사자 중 남성)와 함께 교형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남녀의 접촉을 막기 위한 금령(禁令)


조선에서는 이렇게 사족 여성의 간통을 무겁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위의 『경국대전』 규정과 같이 남녀 간 접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단속 규정들을 마련하고 있었다. 1412년(태종 12) 사헌부의 건의에 따라 여성이 출입할 때 얼굴을 가리고 입모(笠帽, 너울을 드리우기 위해 쓰던 모자)를 걷어 올리지 못하게 했다. 1404년(태종 4) 예조에서는 여성이 평교자(平轎子, 사면이 트여있는 가마)를 타지 못하게 하고, 3품 이상 관원의 정처(正妻, 정실 부인)는 옥교자(屋轎子, 지붕과 벽체가 있는 가마)를, 나머지는 말을 타게 하여 종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건의했다. 그리고 사헌부에서 이를 규찰하게 하기를 청했다. 이 사안이 법제화되었음에도 잘 지켜지지 않자 1432년(세종 14)에는 사족 여성에게 옥교자를 타도록 명하고, 평교자를 타는 사족 여성들을 사헌부에서 단속하도록 했다. 이해 세종은 상의원에 2품 이상의 처가 탈 청색 옥교자와 3품 이하의 처가 탈 흑색 옥교자 견본을 제작하게 하여 사대부들이 참고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후 종친의 처와 딸, 당상관의 어머니, 처, 딸, 며느리는 옥교자를 타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국립중앙박물관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1638년(인조 16)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왕비의 연(輦, 가마) 주변으로 상궁과 시녀가 너울을 쓰고 말을 타고 가고 있다. 너울은 장옷·쓰개치마 등과 함께 조선시대 여성의 얼굴과 신체를 가리던 쓰개이다.


『경국대전』에는 절에 올라가는 여성을 장 100에 처하게 했다. 이에 따르면 일반 여성뿐 아니라 니승(尼僧, 비구니)도 처벌 대상이었다. 여성이 절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한 법은 1404년(태종 4) 처음 제정되었는데, 이 법에서는 형량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령(違令)조에 의해 태 50으로 처벌했다. 1447년(세종 29)에 여성이 절에 올라가면 가장을 장 100에 처하도록 하고, 가장이 없으면 장자, 장자가 없으면 차자, 차자가 없으면 장손, 장손이 없으면 차손, 가장과 자손이 없으면 위반한 여성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후 『경국대전』 규정에서는 세종 대에 제정된 법 그대로 형량을 규정하되 위반 당사자를 처벌하도록 했다. 조선 전기에 성녕대군 부인 성 씨, 광평대군 부인 신 씨 비롯한 여러 양반 여성이 절에 올라가는 일이 발생했는데, 사헌부에서 조사를 담당하여 법에 따라 처벌했다. 다만 대군 부인과 같은 왕실 여성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또한 양반 여성들이 왕의 행차나 중국 사신의 행차를 관람하는 것을 금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1488년(성종 19) 사헌부 지평 성세명은 왕이 거둥(擧動, 행차)할 때 양반 여성들이 길가에 막을 설치하고 관광(觀光, 왕의 행차, 사신의 행차 등을 관람하는 것) 한다며, 이를 금하기를 청했다. 성종은 여성들이 막사에서 묵지 않는다면 해가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성세명은 거둥하는 시간이 일러 묵지 않으면 관광할 수 없으며, 배치된 군사들과의 사이에 발 하나만 있을 뿐이라며 다시 한번 금지하기를 청했지만 왕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 다음날 그는 이곳에서 추문이 일어날 수 있다며 또다시 금지하기를 청했지만 윤허를 받지 못했다. 며칠 후 성세명은 양반 여성들이 중국 사신 행차를 관람하는 것을 금하기를 청했다. 이번에는 중국에 여성들이 행차를 관람하는 풍속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성종은 천 리의 풍속이 같지 않고 팔방에 모두 풍속이 있다며, 양반 여성이 행차를 관람하는 것도 우리나라의 풍속이니 의(義)에 해로울 것이 없다고 답했다. 다만 관람할 때 발을 걷어 올려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금지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그런데 중종반정 후인 1511년(중종 6)에 사족 여성들의 관광이 엄금되었다. 이후 사족 여성이 관광하면 가장을 치죄하고, 가장이 없으면 위반한 여성을 처벌하도록 했다. 따로 형량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역시 위령조를 적용하여 태 50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남녀의 접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법들이 제정되었고, 이를 위반하면 단속하여 처벌했다. 이 금령들의 제정에 사헌부 관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위반자 단속이나 조사도 사헌부에서 담당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헌부에서는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르게 하고, 억울함을 풀어 주고, 참람(僭濫)하고 거짓된 것을 금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사헌부의 업무 중에는 풍속을 바르게 하는 일, 즉 유교 윤리를 훼손하는 일을 미리 방지하고, 적발하고, 조사하고, 형량을 구형하는 일이 있었다.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양반들이 처를 버리는 등의 부모·자녀 관계, 부부 관계 윤리를 훼손하는 행위를 적발하고 형량을 구형했을 뿐 아니라 위와 같이 여성의 활동 반경을 제한함으로써 남녀의 접촉을 막는 금령 제정, 단속, 조사 등의 역할을 했다.



금령 위반을 단속하던 기관


조선시대에는 사헌부, 형조, 한성부 세 관사에서 금령 위반을 단속했다. 사헌부에서는 조선 초부터 관사의 업무와 관련된 풍속, 신분에 관한 금령 위반을 중심으로 단속했다. 금령 위반자를 적발하여 수속(收贖)하거나 형조에 이문(移文, 이관)하여 처벌하는 방식이었다. 1688년(숙종 14) 사헌부, 형조, 한성부 세 관사의 자의적이거나 무절제하거나 중복된 금령 단속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 절목(節目, 항목을 만들어 규정한 법이나 규칙)으로 반포되었는데, 이 절목에는 다음 표와 같이 각 관사에서 담당할 단속 사안이 수록되어 있다.



1688년(속종 14) 절목에 수록된 형조, 한성부, 사헌부의 금령 위반 단속 사항


관 사

단속 항목

공동 단속 사항

소나 말의 도살

경성 5리 내의 신사(神祀)

형 조

난전

말을 할 때 농간 부리는 것

지혜(紙鞋)

한성부

별송(別松) 벌목

호패를 차지 않는 행위

도성 내에서 서인(庶人)으로서 말을 타는 행위

사헌부

관직 사회 기강 확립

분경

새로 소속된 사람 침학(侵虐)

의복, 탈 것, 기물, 음식 등의 사치 금지(신분에 따른 금제 포함)

종친의 처나 딸, 당상관의 어머니, , , 며느리, 유음(有蔭), 신부(新婦) 외에 옥교자를 타는 행위

헌수(獻壽), 혼례, 제사 외에 유밀과를 쓰는 것

신부가 시부모를 뵐 때 술 한 동이, 음식 5그릇 외에 수효를 더하는 것

사대부 발인 시에 소방상(小方床)을 사용하는 것

서인 분묘에 석인, 망주석, 표석이 2척 넘는 것[들은 대로 소재관에 이문하여 사문(査問). 금리(禁吏)는 보내지 않음]

당상관이 장복 외 장의(漳衣)에 무늬 있는 비단을 사용하는 것

사족 부녀로 수놓은 의복을 입는 것

사부(士夫)의 첩이나 얼속(孼屬), 의관, 역관, 잡직(雜職) 등의 처가 교자를 타는 것, 담비 가죽 모자를 쓰는 것

상한(常漢) 여성이 사라능단을 착용하는 것(의녀, 기생은 금하지 않음)

서인의 상에 향정자(香亭者), 전도곡비(前導哭婢), 유밀과를 쓰는 것

도성 내에서 서인으로서 말을 타는 행위

서인이 사립(絲笠), 어린 양가죽, 누런 족제비 가죽, 붉은 여우 가죽 등으로 만든 털옷, 백저의(白苧衣), 8승 이상 포의 옷, 명주옷, 자적대(紫的帶), 검은색으로 염색한 여우 가죽 당담보(唐儋甫), 이엄, 모단(毛段), 구름무늬 앞코 신발을 착용하는 것

상한이 혼인할 때 사모를 쓰는 것

3인 이상이 모여 술을 마실 때 안주를 갖춘 경우 음식을 마련한 주인 치죄

치안

여염집에 본 주인을 내쫓고 들어가는 행위

도성 내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것

불교 규제

도성 내에 공적인 일이 아닌데 승려가 머무는 것


* 박경, 「조선 후기 사헌부 출금의 성격」, 『사학연구』 140, 2020, 303~304쪽 【표1】 참조.


이 중 사헌부의 단속 사항을 살펴보면, 혼례, 제례 등의 의례를 행할 때, 혹은 일상생활에서 사치스러운 의복, 기물, 음식 등을 사용하는 것을 단속하는 내용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 중에는 신분에 맞지 않는 참람한 의복을 착용하거나 물건을 사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안들은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사헌부의 업무 중 풍속을 바르게 하는 일이자, 참람하고 거짓된 것을 금하는 일이기도 했다.



해치흉배(고려대학교 소장)

해치 흉배

소장: 고려대학교박물관

해치는 시비와 선악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조선시대에 해치를 수놓은 흉배는 사헌부의 장관인 대사헌만 착용할 수 있었다.


사헌부의 금령 단속에 관해서는 숙종 대에 일어났던 유명한 사건이 있다. 1688년(숙종 14) 희빈 장 씨가 소의 시절 왕자를 출산했는데, 그 어머니 윤 씨가 산구완(출산과 산모의 산후조리를 돕는 일)하기 위해 입궐하면서 옥교자를 탔다. 이를 본 홍문관 교리 윤덕준이 사헌부에 통지하자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금리(禁吏)1를 보내어 옥교자를 빼앗고 윤 씨의 종을 잡아 다스렸다. 그리고 숙종에게 궁위(宮闈)를 엄하게 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사헌부에서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소의 장 씨의 어머니가 천인으로 옥교자를 탈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장소의의 아버지도 역관으로 당하관이라 당상관 처에 해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숙종은 임금의 명으로 출산하는 딸을 보살피기 위해 출입하는 후궁의 어머니를 모욕했다며 관에 윤 씨 일행을 단속한 사헌부 금리와 조례(皂隸, 관아에서 부리던 하인)를 잡아들여 죄를 다스리게 했다. 숙종은 형신(刑訊)2한 후 유배 보내도록 했는데, 이들은 옥에서 나오자마자 사망했다.

사헌부에서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 옥교자를 타고 궁궐에 들어온다는 제보를 받고 이를 단속하는 본연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숙종은 고대했던 왕자를 출산한 후궁의 산구완을 위해 왕명을 받고 입궁한 왕자의 외조모를 욕보였다는 데 격노했다. 좌의정 조사석과 3사의 관원들이 사헌부의 조치는 법대로 한 것이라고 진언하자 숙종은 하리(下吏)3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왕명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문제 삼았다.

조선에서는 남녀 사이에 분별이 있게 하고, 사치를 규제하고, 신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금령을 제정하고 단속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해 나갔다. 근대 이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큰 규정들은 차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지만, 현재도 경범죄 처벌법은 존재한다.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법이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하는가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논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도성 안의 범법 행위를 단속하던 서리(胥吏).

2 신장(訊杖, 죄인을 신문할 때에 쓰던 몽둥이)으로 때리며 심문하는 것.

3 관아에 속하여 말단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