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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봄, 여름호-수사반장]민정(民政)을 위한 극한 직업, 암행어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5-09-20 조회수 : 238

민정(民政)을 위한 극한 직업, 암행어사


글. 박동욱(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교수)



마패(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마패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악정(惡政)을 규명하고 민정을 살핀 임시 관직으로 수의(繡衣)·직지(直指)라고도 불리었다. 암행어사 하면,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이나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 주거나, 어사출도와 함께 탐관오리를 색출하여 봉고파직(封庫罷職)을 명하는 등 서늘한 위엄을 갖춘 정의의 화신으로서의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아마도 널리 알려진 『춘향전』이나 박문수의 일화 그리고 암행어사를 다룬 드라마들이 이러한 이미지에 한몫했을 것이다.


박래겸(朴來謙, 1780~1842)은 125일간 4,915리를 이동했다. 하루 평균 40리(21㎞)를 이동한 셈이다. 박영보(朴永輔, 1808~1872)는 201일 동안 5,050리, 구강(具康, 1757~1832)은 174일 동안 5,595리를 다녔다. 암행어사는 육체적으로 상당히 고된 강행군을 해야 했다. 오죽하면 암행어사가 임무 수행 중에 순직하기도 하였을까. 게다가 숙식(宿食)마저 여의찮았을 뿐 아니라, 아는 사람을 치죄(治罪)해야 하거나 옛 친구를 만나도 신분 노출 우려 때문에 모른 척해야 하는 인간적인 고뇌도 컸다. 암행어사는 육체적·정신적으로 모두 녹록지 않은 직책이었다.



암행어사 임명


암행어사 임명은 국왕이 극비로 단독 임명하는 경우와 대신의 천거로 임명하는 방법이 병행되었다. 암행어사 후보자가 결정되면 승정원을 통해 곧바로 후보자에게 연락이 갔고, 후보자가 연락을 받으면 입궐하게 된다. 통상 당하관(堂下官)의 젊은 관리가 암행어사 대상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암행어사 일기를 보면 꼭 그렇지만 않았다. 박영보 39세, 박래겸 43세, 박만정 49세여서 대부분 40줄이었고, 구강은 무려 56세였다.

출발하기 전에 봉서(封書)와 마패를 받는다. 봉서는 그 자리에서 뜯어보는 것이 아니라 사대문 밖에 나가서 뜯는다. 보안상의 이유에서였다. 봉서를 뜯어보는 것을 개탁(開坼)이라 한다. 봉서에는 암행할 곳이 미리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추생지(抽牲地)다. 추생지 이외의 규찰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추생지를 미리 선정하는 이유는 사적인 감정으로 함부로 출동하거나, 다른 어사 간에 중복 출도를 우려해서였다. 따라서 임무를 받아 추생지로 가는 도중 직접 보게 된 비위(非違, 법에 어긋남) 사실에는 출도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암행어사 수행원


암행어사는 종인(從人)과 역졸(驛卒)을 대동하였다. 그들은 서로 역할을 분담하여 움직였다. 때로는 몇 개의 무리로 나눠서 탐문하고, 다시 합류하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몇 명으로 구성되었고, 어떤 일들을 맡았을까?


먼저 박래겸의 경우를 살펴보겠다. 종인(從人) 6명, 역졸(驛卒) 6명과 종 1명을 대동하였다. 박래겸은 종인들의 일정과 일화를 기록하고 종과 역졸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종인들은 이미 안면이 있던 사람 중에서 뽑았다. 박래겸은 서장관과 북평사로 나갔을 때도 종인들을 자신이 뽑은 인원으로 구성하여 데려갔다. 역졸은 종인들의 단순한 보조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만정은 종인 1명, 역졸 4명, 종 1명으로 총 6명을 대동하였다. 종인 중에서 김성익에 대해서만 기록을 남겼고 다른 이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박만정은 김성익과 함께 여러 사안에 대해 많은 의논을 하고 있다. 수행원들은 2~3개 조로 나뉘어 활동하며 필요에 따라 다시 합류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일단 대규모의 사람들이 이동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 눈에 쉽게 발각되고, 여러 고을을 조사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몇 개의 무리로 나누어 각자 여러 곳을 조사하게 하고, 다시 특정한 장소에서 합류하기를 반복한다. 정보를 취득할 때는 한 사람의 말만을 듣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세 사람이나 다섯 사람에게 물어서 그들이 모두 좋다고 하거나 나쁘다고 할 때만 믿을 것을 주문해서, 정보의 오류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이재(李縡)의 『서정록(西征錄)』에도 매우 신중히 여러 경로로 이야기를 청취하고도 확신을 가지기가 어렵다고 토로하고 있다.1 조사가 적당히 끝난 시점부터 일행 중에 불필요한 인원들은 먼저 돌려보냈다.


(각주)

1 書吏以渠所聞來告, 則幷余所聞, 隨卽錄取, 諸條中, 再聞者, 則下二點, 三聞者, 則下三點, 三點以上, 則斷然非無苗脉者, 而猶不能自信.



신분 노출의 위험성


출발하면서 폐포파립(敝袍破笠, 해어진 옷과 부서진 갓) 차림으로 코스프레(위장)를 한다.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은 어디 가나 주목을 받았다. 박래겸의 『서수일기』를 보면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한 고군분투가 눈물겹다. 예전에 유람했던 고을을 지나다 평소 안면이 있던 관리들을 만나자, 자신의 목적지를 둘러대기도 하고, 신분을 속이며 고을 수령과 만나기도 한다. 또 역졸이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을 보고서 의심을 하여 탐문을 당하고, 뱃사공이 자꾸만 캐물어서 곤욕스러운 상황에 처했으며, 또 암행어사가 성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어사 자신이 직접 듣게 되는 등 난감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이처럼 암행어사의 출현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 밖에도 고을의 수령이 옛 친구였지만 신분 노출을 우려해 만나지 못한 일, 자신의 신분에 대해 밀고한 이를 잡아 가둔 일, 일행이 너무 많아 신분 노출의 위험이 있어 일부 사람들을 먼저 돌려보낸 내용 등을 통해 신분을 숨기는 것은 암행어사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암행(暗行)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도 그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암행어사 임명 과정부터 정보가 누출되는 경우가 있으며, 같은 시기에 다른 암행어사들이 파견될 경우 추생 지역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해당 도(道)는 알 수 있을 정도로 보안에 취약했다. 암행어사 임명 과정에서의 정보 누출, 수행원들의 신분 노출, 각 지역 이속(吏屬)2이나 관민들의 염탐을 모두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래가 적은 궁벽한 마을에 등장한 낯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이나 고을의 아전, 뱃사공, 기녀 등에게 수시로 눈에 띄었고 그것이 고을의 수령에게 직간접으로 전달되었으리란 사실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특히 기녀들은 평소에 많은 사람을 상대하여 눈치가 여간 빠른 것이 아니었다. 41살의 퇴기(退妓) 빙심(氷心)은 박래겸의 초라한 행색에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예를 갖춰 대접한다. 그의 딸 경란(鏡鸞)이 뒤늦게 찾아와서 부용과의 일화를 들어 암행어사의 신분을 짐작한 듯한 태도를 취하자, 서둘러 자리를 뜨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처럼 신분을 끝까지 들키지 않으려는 암행어사의 고군분투가 곳곳에 보인다.


(각주)

2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속한 하급관리.



숙식의 어려움


암행어사는 격무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암행어사를 괴롭힌 것은 숙소 선정과 식사 조달이었다. 암행어사 일기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숙소는 구하기도 어렵고 구한다 해도 열악했으며, 식사는 아는 사람을 수방(搜訪, 찾아서 가 봄)해서 조달해야 했기에 매번 쉽지 않았다. 신분 노출을 하지 않으면서 숙식을 해결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의 인맥(人脈)을 통해 지방관의 도움을 손쉽게 받으면 되겠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신분을 간접적으로 노출하는 결과이기 때문에 불가능했고, 상황에 맞춰 현지 조달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대개 숙소는 여염집이나 객사(客舍)가 주를 이루었다. 여염집은 양반보다는 평민의 집이 많았다.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청해도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는 관에 속한 객사(客舍)를 주로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숙소를 구하는 수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서수일기』에는 날이 저물어 마땅히 숙소를 정하지 못해 길가에 있는 작은 집에 유숙하기를 청하는데, 다름 아닌 관노(官奴)로 일하고 있는 종의 집이었다는 일화가 나온다. 또, 박만정의 『해서암행일기』에도 병든 아이와 한 방에서 자면서 악취 때문에 힘들어하다 숙소를 옮긴 사연이 나온다. 박영보의 『수부기정(繡斧記程)』에는 빈대와 모기, 더위에 시달리면서 이날 밤의 괴로움이 평생에 제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불결한 숙소는 격무에 지친 암행어사 일행에게 안락한 휴식의 공간이 되지 못했다.



서수일기(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박래겸의 『서수일기』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암행어사 출도야!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암행(暗行)이 주가 되었지만, 자신의 신분을 노출한 채 조사하는 명행(明行)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 명행을 했을까? 부득이하게 신분을 노출할 수밖에 없거나 더 이상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을 때 했다. 출도(出道)는 출두(出頭)라고도 한다. 암행어사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출도 장면은 빈번히 등장하고 극적으로 표현되곤 한다. 일반인이나 연구자들 모두에게 암행어사 하면 출도 장면이 떠올려지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암행어사 출도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구강의 기록에 나오는 출도의 장면은 극적(劇的)이기보다 대부분 건조하게 서술되어 있다. 출도한 장소는 객사(客舍), 누대, 성(城) 등 다양했는데 객사와 누대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박래겸은 총 21개 고을을 조사하며 8개 고을에서 출도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인접 고을에서 순차적으로 출도를 하지 않고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진행했다. 아마도 보안상 이유인 듯하나, 짧은 기간 평안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도했었기에 실효가 있었을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주로 저물녘에 암행어사 출도를 외쳤고 고을 수령의 부재에 크게 개의치 않았으며, 장소는 높은 문이나 관아의 문 앞에서 행해졌다. 암행어사 일기를 보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압도적인 출도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고마운 암행어사


암행어사는 여전히 민중들에게는 고마운 존재였다. 지방관은 해당 지역에서 사법권을 비롯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기에 그가 지닌 자질 여부에 따라 해당 고을 백성들이 느끼는 삶의 질은 현격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호소할 기관이 마땅치 않았고, 이럴 때 암행어사가 출도해 지방관을 징치(懲治, 징계하여 다스림)해 준다면 그 고마움과 반가움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민중들의 억울함이 많을수록 암행어사는 격무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민중의 열망을 잘 알면서도 당사자는 고역에 가깝다는 속내를 솔직히 토로하고 있다.

고을의 관장(官長)이 비행이나 부조리를 저질렀을 때 출현한 암행어사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구세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대면해서 호소하거나 어떤 식의 방법이든 억울한 사정을 알리려고 애썼다. 박만정의 『해서암행일기』에서도 아전으로 추정되는 이가 수령의 죄상을 알리는 방문(榜文)을 붙여 놓고 암행어사 일행을 불러 그것을 보게 한 뒤 달아났다는 사연과 황주(黃州)의 성문에서 어느 아낙이 남편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고 알리자, 일의 정황을 알아보고 조처를 했던 일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구강의 기록을 보면 치죄(治罪)의 과정이 상세히 나온다. 치죄의 대상은 대부분 이서(吏胥)와 향임(鄕任)이 차지하는데 실명(實名)을 적시했다. 여기에 관노(官奴)와 기생도 포함된다. 처벌은 엄형(嚴刑), 형(刑), 이수(移囚, 죄를 다른 곳으로 옮김), 곤(棍, 곤장), 귀양 등으로 나누어 집행했다. 구강의 일기 이외의 기록에는 가수(枷囚), 환수(還囚), 보수(保授) 등의 처벌도 보인다.

통상 다른 일기에는 지방 수령을 징치하는 내용이 많지 않다. 그런데 박만정의 일기는 수령의 비위를 적발해서 처리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백성들로부터 취합한 정보를 통해 일차적으로 비위 사실을 인지한 후, 출도 후에 문서를 통해서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한다. 이렇게 명확하게 비위가 사실로 드러나면 봉고(封庫)3를 한다. 그런 다음 수령의 인신(印信, 도장이나 관인)과 병부(兵符)4를 압수하여 업무 정지 상태를 만든다. 


(각주)

3 부정한 일을 한 고을의 원을 파면하고 관가의 창고를 봉하여 잠금.

4 병사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명부.


업무 공백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이웃 고을 수령이 임시로 업무를 맡아보는 겸관(兼官)이 된다. 후에 암행어사의 서계를 통해 파직(罷職)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박래겸의 일기에는 봉고(封庫)가 봉폐(封閉)라고 나온다. 5월 16일 순안(順安)과 5월 29일 개천(价川)에서 각각 실행했다. 자신이 직접 집행한 것은 아니지만 7월 22일에도 “전 수령은 경기도의 암행어사에게 봉고가 되었다”라고 했다. 일기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봉고는 한두 번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자주 실행되지 않는 강경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곧 봉고는 드물게 이루어졌으며, 어사가 직접 파직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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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별단(書啓別單)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1874년(고종 11) 충청좌도의 암행어사에 임명된 김명진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쓴 서계.



암행어사 제도의 문제점


암행어사의 존재 이유는 중앙 정부에서 파악하기 힘든 지방 관리들의 부정과 학정을 포착해서 최고의 권력자에게 직보(直報)5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암행어사의 성공 여부는 조정 내부와 해당 지역의 보안 문제가 관건이다. 그래서 먼저 봉서(封書)와 개탁(開坼) 등을 통해 외부 노출을 차단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임명 과정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거나, 같은 시기 다른 어사들로 인해 해당 도(道)의 정보가 공유되는 등 보안상 한계가 명확했다. 물론 각자 암행어사로 복명하는 처지에 해당 고을 지인(知人)들에게 미리 연통해서 정보를 누설했을 리는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암행어사로 임명되면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곧바로 길을 떠나야 한다. 개탁하는 장소에 액정서(掖庭署)6 하인을 보내 곧바로 임무를 수행하는지 점검하기도 했다.7 보안상의 이유로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진행했으나 짧은 기간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출도했으며, 지방관들 간에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움직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이동 도중에 기생과 뱃사공 등에 의해 의심을 받기도 했는데, 해당 관아에 보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타지에서 여러 사람이 무리 지어 이동하는 것 자체가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추생지가 미리 선정되어 있더라도 암행어사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피검자와의 색목(色目)이나 친소(親疏, 친함과 친하지 아니함)가 징치와 전혀 무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 암행어사의 서계(書啓)를 통해 처벌이 이루어졌고, 엄중한 처벌이 과도하다고 여겨져 역풍(逆風)을 맞는 때도 있었다. 또, 암행어사 활동이 종료된 뒤 이루어지는 보고와 처리는 최고 실권자인 임금과 암행어사의 독대(獨對)와 다를 바 없었다. 독대가 갖는 또 다른 위험성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과 권위가 될 수 있고, 거기에 보고하는 사람의 사적인 감정이 개입될 때 걸러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문제점을 내포한다.


(각주)

5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아니하고 상부에 직접 보고함.

6 내시부에 속하여 왕명의 전달과 안내 및 궁궐 관리 등을 하던 관아.

7 박만정, 『해서암행일기』, 3월 7일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