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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봄, 여름호-수사반장]조선의 형사 절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5-09-20 조회수 : 322

조선의 형사 절차


글. 임상혁(숭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민백-50260_형정도첩 중 잡기죄인착거

<잡기죄인착거(雜技罪人捉去)>, 『형정도첩』 | 김윤보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공공누리


일반적으로 형사 절차라고 하면, 수사기관이 스스로 범죄를 인지하거나 고소·고발을 받아 수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검찰에서 기소를 결정하면 법원은 검찰의 기소 내용을 심리하여 유죄인지 무죄인지, 유죄라면 어느 형벌을 얼마나 부과할지를 선고하는 과정이다.

확 줄여서 말하자면, 수사로써 밝혀진 범죄를 처벌하는 절차로 보는 것이다. 이런 점은 조선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다만 시대의 차이가 있는 만큼 다른 기관과 제도로써 진행되었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재판이라고 하면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고 호령하는 사또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형사소송의 모습이 기본적으로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민사소송은 없거나 있었어도 형사 절차처럼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놀랍게 조선에서는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이 개념적으로도, 제도로도, 실무에서도 뚜렷이 구분되어 저마다의 절차가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 관념이 형성된 데에는 지방의 관아에서 행정, 수사, 형사소송, 민사소송을 다 맡아서 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도 한 법원에서 민사소송, 형사소송, 행정소송 등을 모두 관장하고, 법관들도 이 업무들을 두루 돌아가면서 맡게 된다.



조선의 형사소송


조선시대에 형사소송은 법전에서 ‘결옥’(決獄)이라 하였고, ‘옥송’(獄訟)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민사소송은 ‘사송’(詞訟)이라 하였다. 중앙에서는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의 담당 기관이 분리되어 있었다. 부동산은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가, 노비에 관해서는 형조의 특별관청인 도관이, 풍속과 관련된 사안은 사헌부가 맡았고, 형사소송은 형조가 담당하였다. 사안이 다르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절차 또한 달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의 중심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도 당연히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에 관한 용어들을 서로 구별하여 규정한다.

현실에서 하나의 사건이 민사와 형사 양면에서 법적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허다하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행정처분에 그치지 않고 형사 처벌의 논란까지 번지며, 거기에 민사상 배상의 문제까지 겹치는 것은 흔히 보게 되는 일이다. 원칙적으로는 이 골칫덩이들이 저마다 서로 다른 절차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오히려 불편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범죄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피해와 치료비의 배상을 형사 절차에서 명할 수 있는 배상명령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갑인년화민안극소지

갑인년(1734년) 화민 안극의 소지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탁처: 광주 기곡 광주안씨 순암 안정복 종가)


공신 가문의 선산에 딸린 토지로서 매매가 금지된 토지가 몰래 팔린 것을 간신히 되찾았으나 소작인이 임료를 내지 않는다고 안극이 호소한 데 대하여 경기도 광주부의 유수는 세를 지급하도록 명하면서 지급하지 않을 때에는 잡아다 처벌할 것이라는 처분을 내린다.(소지의 여백에 적혀 있는 것이 처분이다.)


조선시대에 지방에서는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이 같은 기관에서 다루어졌을 뿐 아니라, 수령은 태(笞) 50대까지, 관찰사는 유형(流刑)1 이하의 형을 직접 판결하여 집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한 사안에서 생기는 민·형사상 호소를 묶어서 함께 제기할 수 있었다. 


(각주)

1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 거주하게 하는 형벌.


이럴 때는 아마도 하나의 절차로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한 소장(訴狀)2에 침해된 권리의 구제뿐 아니라 가해자의 처벌까지 더불어 청구하기도 한다. 1557년 정 씨 여인의 아래 소장 내용에서도 그러한 예를 살필 수 있다.


“삼가 아뢰옵니다. 흥해에 사는 조종손이라는 사람이 안강 양좌동에 소재한 적(跡)자 지번의 집터를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자기 땅이라며 팔길래, 남편이 돈을 마련하여 구입하고서는 지난해 11월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마을에 사는 이응기가 그 밭은 조종손의 것이 아니라 제 집터라고 해서 알아보니 조종손이 남의 밭을 속여 판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지불한 돈을 조종손에게서 도로 추징해 주시고, 속여 판 일에 대하여는 벌로 다스려 주시옵기를 바랍니다. 1557년 10월 일.”


(각주)

2 소를 제기하기 위하여 제일심 법원에 제출하는 서류.

※ 소송이란 소를 제기하여 그 소가 종료할 때까지의 과정을 이르는 말. 소는 법원에 재판을 신청하는 행위.



형사사건에 적용되는 법률


형사소송은 형법을 실현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그래서 형법을 실체법, 형사소송법을 절차법이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민사실체법은 민법, 상법이 되고 민사절차법으로는 민사소송법, 민사집행법이 있다. 형법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범죄와 형벌에 관한 법이라 한다. 곧, 형법이라는 법전에는 무엇이 범죄가 되는 행위인지, 그에 대해서는 어떤 형벌이 부과되는지가 규정되어 있다. 이들을 미리 법률로 정해 놓음으로써 사회 일반이 뚜렷이 인식하여 행위 규범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3의 이상이다.

동양의 법제도 그 나름의 죄형법정주의를 추구하였기에 조선의 법전에서도 범죄와 형벌을 규율한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과 달리 하나의 범죄에는 하나의 형벌밖에 없다는 점이다. 현행 체제는 한 조문에서 처벌의 수위를 다양하게 정하고 있는 데다가 법관의 재량이 작용할 여지도 둔다. 이 때문에 형량은 명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판사의 재량이 특정 부류에게만 너무 온정적으로 작용한다는 비판까지 받는 일도 있다. 법원은 대법원 양형위원회를 두어 유사 사건들 사이의 형량 차이를 줄일 수 있는 기준을 만들려 애쓴다.


(각주)

3 어떤 행위가 범죄인가 아닌가, 또는 그 범죄에 대하여 어떤 형벌을 내릴 것인가 하는 것은 법률에 의해서만 정할 수 있다는 원칙. 형벌권의 자의적 행사를 방지하는 인권 보장의 표상이며, 근대 자유주의 형법의 기본 원칙이다.


살인죄를 사례로 들어 보면, 피고인에게는 최고형인 사형이 선고될 수도 있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실제 그런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전통 법제에서는 살인죄에 대하여 사형이라는 형벌 하나밖에 없다. 조선에서 작량감경(酌量減輕)4의 권한을 가진 이는 오직 국왕뿐이며, 지방 수령은 물론 고위 대신이라 해도 임의로 형을 감면할 수는 없다. 정해진 대로의 형벌만 선고하여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죄형법정주의라는 면에서만 살피자면 오히려 오늘날보다 철저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경국대전_목록 형전 부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경국대전』 목록, 「형전」 부분 목록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의 법전들은 이·호·예·병·형·공전이라는 육전 체제다. 이는 모든 행정 각부에 해당하는 육조(六曹, 국가의 정무를 나누어 보던 여섯 관부)의 편제와 업무를 중심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서 국정 전반을 통일적으로 규율하려는 목적에서 편성된 것이다. 『경국대전』이 각 조(曹, 관부)의 업무를 중심으로 한 편제이다 보니, 형조에 소속된 장예원의 업무도 「형전」에 들어가서 노비제의 운영, 노비 상속 따위처럼 형률이라기보다는 민사실체법이라 할 규정들도 다수 들어가게 된다. 「형전」에서는 형률로서 적용할 부속 법령을 『대명률』로 규정한다. 그럼으로써 형사법 조문들을 하나하나 다 규정하는 수고와 번잡을 덜어 내면서, 최상위 중심 법전으로서의 묵직한 면모도 유지했다.

조선은 명나라의 형률인 『대명률』이 유교 이념을 반영한 체계라 여겨 건국 초부터 이두(吏讀)5로 번역하여 활용하였다. 이를 형사에 기본적으로 적용하는 일반 형률로 『경국대전』이 채택한 것이라서, 명나라에서 『대명률』 조문이 개정되더라도 원칙적으로 그것은 직접 조선에 적용되지 않았다. 형사 규정들은 『경국대전』을 비롯한 그 밖의 대전들에도 실려 있는데, 그것들은 당연히 부속 법령인 『대명률』의 조문보다 우위에 있다. 그리고 국왕의 명령 형식으로 제정되는 단행법령인 수교에도 형사실체법과 형사 절차를 규정하는 것들이 있었다.


(각주)

4 법률적으로는 특별한 사유가 없더라도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법원이 그 형을 줄이거나 가볍게 하는 것=정상 참작.

5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표기법.


조선에서는 반드시 여러 법전과 수교에서 규율하는 형사실체법들에 의거하여 형을 선고하고 집행하였다. 이것이 민사 절차와 다른 점이다. 민사법 영역에서는 법전에 수록된 실체 규정들이 매우 적고 관습법의 규율에 맡긴 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예법이나 조리에 따른 판결도 가능하였다. 따라서 소송을 담당하는 고을의 수령들은 민사재판을 매우 어렵게 여겼다. 이를 돕기 위해 일찍부터 민사소송 매뉴얼들이 만들어졌고, 이미 16세기에 『사송유취(詞訟類聚)』와 같이 완성도 높은 실무 법률서들이 민간에 여럿 돌아다녔다. 지방관의 재판을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송 법서가 사회 일반에서 보편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들을 통해 독자적인 민사소송의 체계와 함께 당시 소송 이론의 수준까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사송유취』를 바탕으로 형사소송까지 포함시킨 『결송유취보』가 만들어졌다.

형법의 적용이 마치 오늘날의 죄형법정주의를 방불케 하지만 한계는 있었다. 죄형법정주의의 중요한 요구가 유추해석의 금지인데, 『대명률』에는 꼭 맞게 적용한 법조문이 없으면 취지를 같이하는 유사한 조항을 끌어다가 적용한다는 조항이 있다. 법의 공백을 메우려는 것이긴 하지만, 현행 형사법에서는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는 유추해석을 허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죄라는 것도 있어 법전에는 아직 없지만 사회의 질서나 선량한 관념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였다고 판단되는 경우 태형을 부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이론의 테두리 속에 있긴 했지만, 조선은 일찍부터 체계화된 형법을 운영해 온 동아시아의 전통 속에서 성리학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시의와 환경에 맞는 형사법 체제의 운영을 위해 애써 왔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수사와 재판


앞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오늘날 수사는 주로 경찰이 하고, 이를 바탕으로 검찰에서 기소를 결정하고, 법원에서 그 당부(當否)6를 따지는 과정으로 형사 절차가 구성된다. 인권의 보호를 위해 나뉜 절차마다 담당하는 기관을 달리하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기관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물론 관할은 있었지만,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어 있지 않던 시기이기 때문에 사건의 지역적 분장은 원칙적으로 서울과 지방의 행정 담당 범위와 일치한다. 지방의 경우, 지방관은 자기가 맡은 고을의 사건을, 관찰사는 담당하는 도의 사건을 관할한다. 중앙에는 도둑을 잡는 포도청, 임금의 하명으로 중대 사건을 수사하는 의금부 등의 특별 수사기관도 두었다. 심급(審級)7과 관련해서는 당시 민사사건은 요즘과 비슷하게 수령의 판결을 관찰사에게 항소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이루어진 판결에 대해서도 중앙에 호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형사 절차는 달랐다.


(각주)

6 옳고 그름 또는 마땅함과 그렇지 않음.

7 하나의 소송사건을 서로 다른 종류의 법원에서 반복적으로 심판하는 경우, 그 법원들 사이의 심판 순서.


지방의 수령은 작은 사안, 소사는 직접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었고 앞에서 살폈듯이 태 50 이하의 사건을 직단(直斷)하였다. 관찰사는 중사, 곧 유형 이하의 사건에 대하여 직단할 수 있었다. 사형에 해당하는 대사는 서울로 보내야만 한다. 앞서 살폈듯이 범죄의 구성요건마다 하나의 형벌만 규정되어 있는 형법 체계이기 때문에 대·중·소사의 판단은 어렵지 않다. 서울에서는 지금의 구청에 해당하는 동·서·남·북·중부의 5부로 나눈 행정구역이 있었고, 여기에서도 소사를 직단할 수 있었다. 이러한 3단계 시스템은 결국 상급 기관으로 호소해 가는 구성이 아니라 죄의 경중에 따른 심급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신문고를 두드려 억울한 형사판결이라며 국왕에게 애원하는 방법 등이 있긴 하였다. 또 임금이 지나가는 길에 꽹과리를 두드리며 엎어지는 관행도 있었는데, 이는 결국 제도화되었다.

범죄 사건이 일어나면 경찰이 출동하여 현장을 보존, 감식하고 목격자를 확보하는 수사를 진행한다. 조선시대에 변사 사건과 같은 범죄가 발생하면 관할 지방관은 검시관인 오작인 등의 수행원을 대동하여 현장으로 가서 시신을 검시하는, 검험을 행한다. 검험한 내용, 목격자와 관련자의 진술 등의 수사 기록을 주검의 그림과 함께 작성한 것을 검안이라 한다. 



국유정담2025v1_10_재판과소송

<금부난장(禁府亂杖)>, 『형정도첩』 | 김윤보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공공누리


이런 수사 과정의 실무 지침서라 할 수 있는 『증수무원록』과 같은 서적이 제작되었으며, 이 책은 한글판도 있었다. 증거 수집을 거쳐 피의자가 확인되면 당연히 잡아 가둔다. 피의자가 도주하면 가족을 가두어 자수를 강박하기도 한다. 피의자의 신병이 확보되면 그에 대한 조사 단계로 넘어간다.

과거 동서양이 공히 그랬듯이 조선시대의 수사에서도 자백을 중시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과 달리 수사상 고문이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자백을 받기 위한 고문을 고신이라 하였는데, 법에는 신장이라 하는 회초리로 무릎 아래를 때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경국대전』에는 이에 대한 인권적 고려가 등장한다. 하루에 30대 이상 치지 못한다. 한 번 고신을 하면 사흘 뒤에야 다시 할 수 있다. 신장의 규격도 정해져 있고, 너무 어리거나 연로하면 고신을 하지 못한다. 이래서는 원하는 자백을 얻어낼 수 없겠다고 생각하는 수사관들도 있었다. 위법한 고문이 적지 않았고 그 자욱이 우리 언어생활에 남은 경우도 많다. 흔히 쓰는 난장판이라는 말에서 난장은 여럿이 달려들어 신장으로 피의자의 몸을 가리지 않고 때리는 것을 말한다. 사극에서의 수사는 한결같이 주리를 틀면서 시작하는데, 주리는 다리를 묶고 두 개의 몽둥이를 끼워 벌리는 ‘주뢰’라는 말이 변한 것으로 이 또한 불법적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감옥은 자유형을 집행하는 오늘날의 교도소와 같은 곳이 아니다. 형이 확정될 때까지 가둬 두는 곳이다. 사형수인 경우에는 형이 집행될 때까지 수금하는 곳이긴 하다. 현재 교도소 복역은 징역형이 선고되었을 때 하는 것이고 재판 중인 피고인은 구치소에 수감된다. 그러므로 조선의 감옥은 구치소의 성격을 갖는다. 무죄가 나올 사안이라면 죄도 없이 억울하게 감옥살이하는 게 되니, 빨리 판결이 나야 한다. 그래서 사건의 경중에 따라 심리 기한을 정해 놓았다.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은 30일, 도형과 유형에 해당하는 사건은 20일, 태형과 장형에 해당하는 사건은 10일 안에 처결하도록 하고, 지연하는 관리에 대한 처벌 규정도 두었다.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아서 자주 문제가 되었다.



유죄 판결에 따른 형벌


재판 결과, 유죄로 확정이 되면 그에 따른 형벌이 부과된다. 형벌은 판결로 부과되는 처벌이라는 점에서 자백을 얻기 위한 수사 과정에서의 가혹 행위인 고문과 구별되는 것이고, 조선시대에도 이런 인식은 뚜렷했다. 사극에서 이들을 구분하지 않는 일이 종종 보이기는 한다. 죄의 경중에 따라 태·장·도·유·사의 다섯 등급의 형벌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장형과 태형은 형량과 매의 형태가 다를 뿐 모두 볼기를 치는 신체형이다. 도형은 1년에서 3년까지 노역을 부과하는 형벌로서 징역과 비슷한 면이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도 징역형을 도형이라 한다. 자유에 제한을 받고 노역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징역형과 같지만, 형량까지 고려해서 보자면, 노역장 유치 정도가 되지 않을까도 여겨진다. 현재 벌금형을 대신하는 노역장 유치는 최대 3년까지로 되어 있고, 조선시대의 도형은 금품을 바쳐 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구나 조선시대 도형은 지금의 징역처럼 교도소에 들어가서 감금되어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형수들은 일터가 있는 지역에 배치되어 소금이나 기와, 숯을 굽기도 하고 종이를 만들거나 대장간 일을 하였다. 가족이 내왕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유형은 중앙으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는 형벌이다. 흔히 귀양이라 하며 유배 생활을 귀양살이라 한다. 정적들을 중앙 정치에서 배제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점잖은 형벌로 많이 이용되었기에 귀향이라 표현되던 것이 음운 변화하여 귀양이 되었다고 한다. 유형을 선고받아 배소(귀양지)로 떠나는 것을 유배 간다고 하였고, 도형을 받아 일터가 있는 지역으로 가는 것은 도배라 하였다. 조선에는 온 가족을 함께 변방으로 보내는 전가사변형이 있었는데, 특수한 유형이라고 할 만하다. 새로 개척한 사군과 육진 등의 국경을 채우려는 국방 정책적 성격도 있었는데, 많은 원성을 사다가 북방이 어느 정도 채워진 영조 때 페지되었다. 영조 임금은 “전가사변을 없애던 날 밤에 나는 다리를 쭉 펴고 잤다”고 하였다. 사형에는 목을 매는 교형과 머리를 베는 참형 두 종류가 있었고, 신체가 분리된다는 점에서 참형이 더 중한 형벌이었다.



민백-09618_김윤보/형정도첩/감옥 내부

<감옥>, 『형정도첩』 | 김윤보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공공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