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조선 정치의 요체이자 통치의 기초, 법과 법전
글. 손경찬(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경국대전』 표지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는 천의(天意)와 인심(人心)에 순응하시어 나라를 이룩하시고는 큰 법도를 세우며 작은 기율(紀律)을 마련하시니, 규모가 원대하셨으며, 그 후 정종·태종·세종께서 연이어 훌륭한 법을 만드시어 후손에게 전해 주시니, 제도가 밝게 갖추어졌으며, 세조께서는 신성하신 생각과 밝은 지혜로 훌륭히 제작(制作)한 것이 모두 전칙(典則)에 맞고 천고(千古)에 뛰어나셨다. 전하께서는 총명하시어 선왕(先王)이 만들어 놓으신 법을 그대로 지키고 행하시고, 금과옥조(金科玉條)를 구슬에 새기어 영원히 빛을 남기시니, 아! 아름답고 거룩하다.
- 『경국대전(經國大典)』 서문(序文)
『경국대전』 서문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국가 체제의 정비를 위해 법전 편찬에 주력하였음이 드러난다. 태조의 유지를 계승한 후대 왕들은 원전 존중의 원칙인 ‘조종성헌존중주의(祖宗成憲尊重王義)’의 원칙을 준수하여 법전과 법령집을 계속하여 편찬하였다. 조선은 영구히 지켜야 할 법령은 ‘전(典)’에 수록하고 일시적으로 시행할 법령은 ‘록(錄)’에 수록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며, 입법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며 법전 및 법령집을 제정하였다. 『경국대전』의 반포는 조선시대 법치의 기틀을 마련한 계기였다. 『경국대전』은 이후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으로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일시적 법령을 수록한 법령집으로 『대전속록(大典續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등이 반포되었고, 시대 변화에 따라 신식 법령이 제정되어 대전 규정의 모순과 미비점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형사에 관해 중국의 『대명률(大明律)』을 수용하여 형법의 보통법(普通法)으로 『경국대전』보다 우선 적용하였다. 또한 법전 및 법령집과 별도로 관리들의 실무상 편람(便覽)을 위한 법률서(法律書)가 등장하였다. 관에서 공간을 한 『전록통고(典錄通考)』 등과 개인이 편찬한 『사송유취(詞訟類聚)』 등 법률서는 실무 관리들에게 지침이 되었다. 조선시대 법전과 법령집의 편찬은 조선왕조 통치 규범 체계의 확립에 이바지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법전의 편찬은 판례법·관습법 등 고유의 법을 성문화하였다는 의미가 있고, 중국법 침투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조선시대를 법사학적으로 평가하자면, 조선은 통일 법전의 제정과 계속적 편찬 및 중국 『대명률』의 포괄적 수용(受容)에 의해 법치주의 통치를 한 국가라 할 것이다.
조선의 건국과 국가 체제 정비를 위해 법전 정비 시작, 『경제육전(經濟六典)』과 『속전(續典)』의 편찬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88년(우왕 14)부터 당시까지 법령 중 중요한 것을 법전으로 편찬할 것을 명령하였고, 조준(趙浚, 1346~1405)이 주도하여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1397년(태조 6)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공포·시행하였다.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통일 성문법전이었다. 이 법전은 법령의 공포 연월일과 고유의 이두(吏讀)와 방언(方言)도 그대로 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짧은 시일 안에 완성하였으므로 법조문이 추상화·일반화되어 있지 못하고 소략한 것이었다. 이후 1412년(태종 12) 『경제육전(經濟六典) 원집상절(元集詳節)』 3권과 『속집상절(續集詳節)』 3권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를 검토하여 1413년(태종 13) 2월에 『경제육전원전(經濟六典元典)』·『경제육전속전(經濟六典續典)』으로 각각 공포·시행하였다. 전자를 『원육전(元六典)』 후자를 『속육전(續六典)』이라고 하거나, 혹은 『원전』·『속전』이라고 부른다.

『경국대전』 「형전(刑典)」 첫머리 용대명률조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왕조 법전 편찬의 기본 원칙, ‘조종성헌존중주의’
조선에서는 육조(六曹)에서 사무 처리에 필요한 사목(事目, 공사에 관하여 정한 규칙)이나 조건을 보고 하였으며, 왕이 승인한 국왕의 명령이 법의 기본 형태였다. 그러므로 법령의 수가 매우 많았고, 동일한 사항에 대하여 전후 규정이 다르거나 각 관청 상호 간에 법을 달리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에서는 국가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법전 편찬이 필요하였고, 또한 법 실무상 법령들이 모순·중첩되는 사태를 해결하여 법적 안정성과 통일성을 위해서도 법전 편찬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법전을 반포하더라도, 법전에 규정되지 못한 규정이 드러나거나, 기존 법전과 모순되는 법령을 개정할 필요가 발생하기도 하고, 신구 법전의 조문 사이에 모순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1415년(태종 15) 8월, 법전 편찬에서 매우 중요한 원칙을 마련하였다. 즉 모든 법령은 항상 원전의 규정을 존중하여야 하며, 원전의 규정과 모순되거나 개정된 속전의 규정은 모두 삭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원전의 규정은 그대로 두고 그 조문 밑에 할주(割註)로 작게 표시함으로써 법전상의 모순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법전 편찬에서 원전 존중의 원칙이다. 달리 말해 원전인 『경제육전』은 창업주인 조종(祖宗, 시조가 되는 조상)이 만든 성헌(成憲)이므로 절대로 존중해야 하며, 새로 만든 법령으로 원전을 개폐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종성헌존중주의’이며, 조선시대 법전 편찬의 기본 원칙이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처음 만들어진 법령이 법전에 수록됨으로써 이상적·형식적으로는 영구불변으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옛 법은 좋고 아름다운 법[양법미의(良法美意)]’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새 법을 제정하는 것에 엄격하였고, ‘새로운 법을 제정하면 그에 따르는 또 다른 폐단이 생긴다[법립이폐생(法立而弊生)]’는 사상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조선 초에 만들어진 법전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모순이 발생할 수 있고, 기존 규정이 변경될 필요가 있거나 폐지될 필요도 있을 수 있었다. 실제 『경국대전』 이후 수많은 법령집과 법전이 새로 간행된 점을 볼 때, 현실에서는 각 시대의 사회적 사실을 반영하여 법전을 개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 때 또 다른 법전 편찬 원칙이 마련되었다. 이는 영구히 지켜야 할 법령이 있다면 ‘전(典)’에 수록하고 일시적 필요에 따라서 시행할 법령은 ‘록(錄)’에 수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에 수록된 법령은 영구히 변하지 않는 조종성헌이 되었다. 이 ‘전’과 ‘록’의 구별은 후세에까지 법전 편찬의 원칙으로 지켜졌다. 예컨대, 『대전속록(大典續錄)』은 ‘록’이고, 『속대전(續大典)』은 ‘전’이므로 속대전이 조종성헌이 되는 식이다.
당시 제정법의 기본이 되는 것은 국왕의 명령이었다. 국왕의 명령은 황제의 명령인 제조(制詔)·성지(聖旨)·칙지(勅旨)에 대비하여 교(敎)라고 하였다. 그리고 형식화된 것을 처음에는 왕지(王旨)라고 하고, 후에는 교지(敎旨)라고 하였으며 각 관청에 내려진 교지를 시행하는 뜻에서 수교(受敎)라고 하였다. 국왕의 명령인 수교가 쌓이면 『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의 법령집을 간행하였고, 이러한 수교는 『속대전』 등의 법전에 반영되었다. 그러므로 법전 편찬은 기존 법전을 전면적으로 개정[Revision]하는 방식보다 기존 법전을 증보[Amendment]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법은 원칙적으로 민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주로 관계 관청을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대부분 법전 규정은 행정 기구와 그 운용에 관한 행정법이며 관청 또는 관리에 대한 직무명령 또는 준칙이었다. 물론 민사에 관한 규정도 적지 않으나 그것은 오늘날과 같이 개인 상호 간 법적 관계를 조정하는 순수한 사법(私法)이 아니라 민중에게 작위·부작위를 명령하는 강제 법규인 점에서 관리가 지켜야 할 행정 법규로서 민사법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법이 개별적인 왕법과 관습법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조선시대 법전 편찬의 특징은 통일 법전의 제정과 승계한 증보식 편찬 및 중국 『대명률』의 포괄적 수용(受容)에 의한 법치주의 통치라는 점이다. 따라서 조선시대를 통일 법전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조선시대 국전(國典)으로서의 지위, 『경국대전』의 편찬 과정과 그 내용
『경국대전』의 편찬 과정은 다음과 같다. 1433년(세종 15) 1월에 정전(正典) 6권과 등록 6권으로 된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을 완성하여 공포하였다. 그리고 1460년(세조 6) 7월에 「호전(戶典)」이 완성되어 이를 『경국대전 호전』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1461년(세조 7) 7월 「형전(刑典)」을 완성하여 공포·시행하였다. 1466년(세조 12)에는 나머지 4전(典)도 완성하고 전면 시행하기로 하였으나 세조의 사망으로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후 예종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1469년(예종 원년) 9월에 『경국대전』을 매듭지어 이듬해인 1470년(예종 2)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최초로 공포 시행된 『경국대전』이다. 이후 1471년(성종 2) 1월 1일부터 제2차 『경국대전』이 시행되었다. 그럼에도 누락된 조문들이 있어 개수하여 1474년(성종 5) 2월 1일부터 제3차 『경국대전』을 시행하였다. 이때 개수한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서 시행할 필요가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그러나 1481년(성종 12) 9월에 재검토하여 대전과 속록을 개수하게 되었으며, 1484년(성종 15)에 완성하고, 1485년(성종 16) 1월 1일부터 제4차 『경국대전』을 시행하였다. 현존하는 경국대전은 이 제4차 『경국대전』이다.
『경국대전』은 육분(六分) 방식을 따랐으며 「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의 순서로 구성된다. 그리고 각 전마다 필요한 항목을 분류하고 규정하였다.
①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官制),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면, 사령(辭令)에 관한 것이 규정되어 있다.
② 「호전」은 재정 경제에 관한 사항으로서, 호적제도·토지제도·조세제도·봉급·통화·부채(負債), 상업과 잡업(雜業), 창고와 환곡(還穀), 조운(漕運), 어장(漁場) 등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토지·가옥·노비·우마(牛馬)의 매매 및 그 취소 기한과 오늘날의 등기에 해당하는 입안(立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것 등 민사 규정들이 포함되어 있다.
③ 「예전」에는 과거(科擧), 관리의 의장(儀章)·외교·제례(祭禮)·상장(喪葬)·묘지(墓地)·관인(官印),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상복 제도[친족의 범위], 봉사[봉축(奉祝), 제사 상속], 입후(立後, 양자 제도)·혼인 등 친족법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④ 「병전」에는 군제(軍制)와 군사(軍事)에 관한 규정이 있다.
⑤ 「형전」에는 『대명률』에 대한 특별 형법으로서의 형벌, 재판, 공노비(公奴婢), 사노비(私奴婢)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재판에 관한 규정과 사노비에 관한 규정 중에는 재산 상속법이 포함되어 있는데 「형전(刑典)」에 들어 있는 이유는, 당시 재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노비 관련 분쟁이 주로 상속에 관한 분쟁이었으며 그것이 판결을 통해서 판례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⑥ 「공전」에는 도로·교량·도량형·식산(殖産)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중국의 형법이 조선의 형법으로, 『대명률(大明律)』의 수용(受容)

『대명률』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고려 말 이래 형사 실무에서 혹형(酷刑)을 과하는 예도 있었고, 동일한 범죄에 대해 관리에 따라 형벌 경중의 차가 심해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태조는 건국과 동시에 형법의 정비를 급선무의 하나로 생각하고, 모든 범죄를 처결함에는 반드시 중국의 『대명률』을 적용한다고 선언하였다. 즉 법전 편찬 전에 『대명률』 전체가 포괄적으로 수용되어 일반적 형사법으로 적용되었다. 이는 역사상 단행 외국법전 자체가 전체적으로 수용된 최초의 사례다.
1395년(태조 4)에는 난해한 『대명률』을 일반 관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이두를 섞어 번역한 『대명률서(大明律書)』가 출간되었으며, 이를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라 한다. 이는 『대명률』 조문을 원본 그대로를 직역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이두를 섞어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쉽게 풀어쓴다고 한 『대명률』도 해독하기 쉽지 않았고, 당시 관리들도 율문(律文)의 뜻을 잘 몰라 형사 실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신식 『대명률』보다는 기존 익숙한 관습 형법이나 원나라의 형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대명률직해』에는 조선의 실정에 맞춰 풀이된 조문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명률』은 원래 중국의 사정을 기초로 해서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에서 조문 전체를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 『대명률』에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미비한 조문도 있었으므로, 조선에만 적용되는 조문도 새롭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중국 율령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며, 건국 초의 조선에서는 『대명률』을 포괄적으로 수용한 것은 정치적·법 실무적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 『경국대전』 「형전」의 첫머리의 용률조(用律條)에 의하면, ‘대명률을 적용한다[用大明律, 용대명률]’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 후 『속대전』 「형전」에도 이 취지를 덧붙였다. 따라서 『대명률』은 조선시대 건국 초부터 1905년[광무(光武, 대한제국 연호) 9]에 『형법대전(刑法大全)』이 공포될 때까지 500여 년 동안 형사 보통법(普通法)으로 우선 적용되었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른 법전의 변천, 『경국대전』 이후 조선법전 편찬의 역사

『대전속록』 「형전(刑典)」 결옥일한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경국대전』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개정될 수밖에 없었으며, 왕의 명령이 법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는 사회에서는 새로운 법령이 쌓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1492년(성종 23)에는 『경국대전』 시행 후에 공포된 법령을 수록한 법령집인 『대전속록(大典續錄)』이 편찬되었다. 그리고 1543년(중종 38)에는 『대전속록』 이후의 법령집인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이 편찬되었다. 1555년(명종 10)에는 『경국대전』의 조문 가운데 해석하기 어려운 조문이나 용어에 대한 공적 주석서(注釋書)인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가 편찬되었다.
1698년(숙종 24)에는 『대전후속록』 이후의 법령집인 『수교집록』이 1740년(영조 16)에는 『수교집록』 이후의 법령집인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이 편찬되었으며, 이들 법령집은 경국대전과 함께 공적인 법원(法源)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법령집에는 전후 모순된 규정이 있는가 하면, 이미 효력이 상실된 법령도 있어 법의 적용에 혼란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조는 속록과 집록 중 당시까지 행해지고 있으면서, 앞으로 영구히 행할 법령을 골라 법전으로 편찬하여 1746년(영조 22) 4월에 『속대전(續大典)』을 편찬·시행하였다.
1786년(정조 10)에는 『경국대전』, 『속대전』 그리고 『속대전』 이후에 공포된 법령을 하나로 통합한 법전인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시행하였으며, 1865년(고종 2)에는 『대전통편』 이후의 현행법령을 추가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편찬·시행되었다. 『대전회통』은 조선시대 최후의 통일 법전이었다. 『대전통편』과 『대전회통』에서는 개정 또는 폐지된 『경국대전』 조문들도 삭제하지 않고, 오히려 큰 글자로 수록하고 『속대전』 이후의 조문은 그다음 작은 글자로 수록함으로써 ‘조종성헌존중주의’를 준수하였다.

『대전회통』 「형전(刑典)」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관리들의 실무상 편람(便覽)을 위해, 법률서(法律書)의 등장
관리들이 실무를 할 때 각종 법령을 편람(便覽)하기 위해, 1706년(숙종 32)에는 『전록통고(典錄通考)』, 1740년(영조 16)에는 『증보전록통고(增補典錄通考)』, 1786년(정조 10)에는 『전율통보(典律通補)』, 1796년(정조 20)에는 『백헌총요(百憲總要)』, 1808년(순조 8)에는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이 편찬되었다. 그리고 1867년(고종 4) 5월에는 중국의 회전(會典) 방식에 따라 행정 법규와 사례를 수록한 『육전조례(六典條例)』가 편찬·시행되었고, 이들은 법 실무에서 법전과 함께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이 밖에도 왕명에 따르거나 혹은 개인 스스로 만든 『사송유취(詞訟類聚)』,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 『추관지(秋官志)』, 『춘관지(春官志)』,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법률서(法律書)가 편찬되고 널리 이용되었다.
그중 『사송유취』는 조선시대 민사소송인 사송(詞訟)의 처리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필요한 법령을 편집한 소송 지침서였다. 이 책은 재판 당시 적용 조문을 찾기 위해 여러 법전을 번거롭게 찾아야 했던 불편을 해소하고, 필요한 조문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한눈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조선 중기 이후 여러 곳에서 출간되어 수령을 비롯한 청송관(聽訟官, 송사를 처리하는 관원)의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이후 유사한 내용의 『결송유취(決訟類聚)』 또는 『청송지남(聽訟指南)』 등이 출간되기도 하고, 또 이를 증보하여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법전 편찬의 의의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의 법전 편찬은 “정치(政治)의 요체(要諦)는 법(法)에 있으며, 또 고려 말부터의 문란한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법전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한 태조의 이상(理想)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태조의 강렬한 의지가 계승·발전된 『경국대전』은 조선 최고의 법전으로 국전(國典)이라 할 것이다. 왕에 의한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는 법치주의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었으며, 그 정치를 실현하는 최대의 도구, 즉 국가의 정책을 구현하는 수단이 법인 것이며, 따라서 통일적·획일적 법전의 편찬은 통치의 필연적 요청이었다.
『경국대전』의 편찬은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 즉 통치 규범 체계가 확립되었다는 데에 큰 뜻이 있다. 법전의 편찬은 판례법·관습법 등 고유의 법을 성문화하여 그것에 조종성헌이라는 성격이 부여됨으로써 중국법의 침투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한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생소하고 혁명적인 법을 제정하거나 그것을 강제함으로써 법의 실효성을 잃는 것보다는 전통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인 지배자 및 민중의 법의식을 존중함으로써, 법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중국법을 계수(繼受)하는 것은 건국 초에 정치적·법 실무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법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지 않고 조선의 특유한 사정에 맞추어 필요한 조문을 보충하여 수용하였음은 큰 의의가 있다. 조선의 법전과 법령집의 편찬사는 바로 조선왕조의 존속을 위한 기본 토대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