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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봄, 여름호-수사반장]태·장·도·유·사: 조선시대 다섯 가지 형벌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5-09-20 조회수 : 1128

태·장·도·유·사: 조선시대 다섯 가지 형벌


글. 정진혁(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민백-09628_김윤보/형정도첩/사약어양반


<사약어양반(賜藥於兩班)> 『형정도첩』 | 김윤보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공공누리


조선시대의 형벌은 현대 사회의 형벌과는 달리 개인의 신체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현대 사회의 형벌이 주로 벌금을 통한 경제적 책임과 징역을 통한 자유 박탈이라는 사회적 제약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면, 조선시대의 형벌은 오형(五刑) 체제에 기초하여 주로 신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신체적 위해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오형을 구성하는 태형(笞刑)·장형(杖刑)은 각기 형구로 죄인의 신체를 타격하는 형벌이었고, 사형(死刑)은 죄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형벌이었다. 자유형의 성격을 띠고 있는 도형(徒刑)1·유형(流刑)2 역시도 신체형이 함께 부과되고 있었기에 조선의 오형(五刑)은 모두 신체 형벌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주)

1) 죄인을 중노동에 종사시키는 형벌.

2)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 거주하게 하는 형벌.



조선의 오형(五刑)


조선이 채택한 오형은 전근대 동아시아 사법의 표준적 형벌이었다. 중국 고대에서 시행된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뒤꿈치를 베는 월형(刖刑), 거세하는 궁형(宮刑) 등 잔혹한 육형(肉刑)이 제거되고 수·당나라 시기 이후 태·장·도·유·사의 5형 체제가 정착되었다. 신체를 절단하여 평생의 낙인을 씌우는 육형에 비하여 오형은 완화된 형태의 신체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오형은 다양한 범죄의 수위와 양상에 적절한 처분을 고려하여 규정되었다. 『대명률』에는 태·장·도·유·사, 오형의 각 등급과 처벌 기준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명칭

처벌 기준

등급 구분

태형(笞刑)

10·20·30·40·50

5개 등급

장형(杖刑)

60·70·80·90·100

5개 등급

도형(徒刑)

60·도배* 1~100·도배 3

5개 등급

유형(流刑)

100·유배 2,000~100·유배 3,000

3개 등급

사형(死刑)

교형·참형

2개 등급


* 도배: 도형정배(徒刑定配)의 줄임말, 도형에 처하여 귀양을 보냄.



대명률_오형지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G


『대명률』 「오형지도(五刑之圖)」 및 「오형명의(五刑名義)」

소장: 규장각한국학연구


태형은 태 10~50대까지 5등급, 장형은 장 60~100대까지 5등급, 도형은 장 60대·도배 1년~장 100대·도배 3년까지 5등급, 유형은 장 100대·유 2,000리~장 100대·유 3,000리까지 3등급, 사형은 교형·참형 2등급 등 모두 20단계의 형벌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범죄의 심각성에 따라 형벌의 가혹한 정도를 구분하여 체계화한 것이었다.


태·장·도·유·사 오형은 각 범죄에 별도로 적용되는 별개의 형벌이라기보다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체계적 형벌이었다. 같은 범주의 범죄에 대해서도 그 행위의 중함에 따라 태형→장형→도형→유형→사형으로 점층적으로 가중되는 연계성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 간 폭행 사건인 투구(鬪毆) 범죄에서는 그 행위의 중대함에 따라 태·장·도·유·사의 처분이 나뉘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을 폭행했으나 상대가 다치지 않으면 태형, 상대의 손발 뼈가 부러지거나 피를 토하는 등 상해가 중하면 장형, 갈비뼈를 부러뜨리거나 두 눈을 멀게 하면 도형, 영구적 장애를 남기면 유형,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면 사형으로 처분하였다. 위와 같이 오형은 하나의 연계된 체계 속에서 범죄 행위를 구분하여 처벌하는 정밀성을 지니고 있었다.



태형 –

가벼운 잘못에 대한 기본 체벌



민백-09623_김윤보/형정도첩/군수태벌죄인(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출처 공공누리)


<군수태벌죄인(郡守笞罰罪人)>, 『형정도첩』 | 김윤보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공공누리


태형은 범죄 중 가장 경미하다고 판단되는 행위에 적용된 형벌이다. 태(笞)는 작은 가시나무의 마디나 옹이를 깎아 내고 관에서 내려 준 교판에 따라 굵기와 길이를 규정에 맞추어 제작했다. 길이는 3자 5치(109㎝)고 가장 굵은 부분은 직경 2푼 7리(0.84㎝), 가장 가는 부분은 직경 1푼 7리(0.53㎝)였다. 직경이 가는 부분으로 볼기를 때리도록 하였다.

태형은 10대에서 50대까지 5등급이 있었는데, 10대를 1등급으로 간격을 10대씩 더하거나 줄였다. 태를 몇대 때리는지 여부는 위반행위의 정도에 따라 달랐다. 관원이나 향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숙직하지 않으면 태 20대, 제수된 관원이 정해진 기한 안에 부임하지 않으면 1일당 태 10대씩을 부과하면서, 직무태만에 대한 견책의 의미로 활용하였다.

개인과 개인 간 관계에서 분쟁을 처벌하는 데에도 태형이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상호 다툼의 종류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부과하는 식이었다. 타인을 욕하거나 상호 간 욕하면 태 10대, 상대와 다투다가 손·발로 때려서 다치게 하면 태 30대, 고의로 사람에게 화살·돌 등을 던지면 태 40대, 머리카락을 지름 1촌(약 3㎝) 이상 뽑으면 태 50대를 부과하였다. 이를 보면 상대를 크게 다치게 할수록 처벌 수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개인 거래 간 신의를 배반하는 경미한 경제 범죄에 대한 처벌로도 활용되었다. 이자를 원금보다 많이 받으면 태 40대, 다른 사람이 거래할 때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이익을 취하면 태 40대, 빌린 돈을 정해진 기한의 3개월 이상 갚지 않으면 태 10대부터 시작해 1개월마다 1등급씩 올려 태 40대까지 부과하였다. 이처럼 태형은 개인 간 교우·거래 관계에서 발생하는 범법 행위들을 일정하게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장형 –

강한 고통을 가하는 체벌



죄인태장 맞는모양(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김준근 풍속화 모사품, 국립민속박물관)


<죄인 태장 맞는 모양>, 『풍속도첩(風俗圖帖)』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김준근 풍속화 모사품


장형은 조금 중대한 죄를 범하였을 때 적용된 형벌이다. 태와 마찬가지로 장 또한 큰 가시나무의 마디나 옹이를 깎아 내고 관에서 내려 준 교판에 따라 굵기와 길이를 규정에 맞추어 장을 제작했다. 길이는 3자 5치(109㎝)고 가장 굵은 부분은 직경 3푼 2리(0.99㎝), 가장 가는 부분은 직경 2푼 2리(0.68㎝)였다. 직경이 가는 부분으로 볼기를 때리도록 하였는데, 그 이유는 치명상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장형은 60대에서부터 100대까지 총 5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로서 충·효 가치를 중시하였고, 이에 대한 위반을 장형으로 치죄하였다. 예를 들어 첩이 남편·본처를 욕하면 장 80대, 처가 남편을 때리면 장 100대를 부과하였는데, 여기에는 본처 중심·남편 중심의 가족 제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한편 남편 역시도 장인·장모를 욕하면 장 60대를 맞게 되어 있던 점에서 웃어른을 공경하는 윤리 구조가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야간에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의 집에 침입하면 장 80대, 타인을 때려서 치아를 부러뜨리거나 뼈를 부러뜨리면 장 100대, 타 인을 위세로 핍박하여 죽게 하면 장 100대를 부과하는 것처럼 타인의 재산권·생명권을 침해하는 경우에도 장형이 집행되었다. 한편, 도박 역시 장형의 대상이 되었는데, 민간인의 경우 장 80대, 관원의 경우 장 90대로 가중처벌하였다.

장형 대상부터는 견책 수준을 넘어선 일정 수준 이상의 범죄로 인식되었다. 지방 수령들은 장형에 대해 직단할 수 없었고, 장형 이상에 해당하는 경우는 형이 확정될 때까지 인신이 구속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형은 태형 다음으로 흔한 형벌이었으나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였기에, 일정 이상 중대한 범죄에 적용되었다.



도형 –

신체형을 동반한 강제 노역형


도형은 태·장형과는 성격이 조금 다른 형벌로, 무거운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강제로 노역을 시키는 형벌이다. 도형은 단순히 일정 기간 노역을 시키는 것뿐 아니라 장형이 일정 횟수 이상 추가되었다. 도형은 장 60대·도배 1년~장 100대·도배 3년까지 5등급으로 나뉘었고, 장 10대와 반년을 1등급으로 삼아 더하거나 줄였다.

조선 전기의 기록에 따르면 도형 죄인들은 한양 및 지방의 여러 관청에 배속되어 일정한 잡역을 맡았다. 관아의 수위 역할을 하는 청직(廳直), 종이 제조 일을 하는 도침군(擣砧軍), 전국의 역참에 배속되어 잡일을 하는 역일수(驛日守) 등으로 동원되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점차 강제 노역형으로서의 성격이 희미해지고 단기 유배형의 성격으로 변화했다. 이처럼 국가의 필요에 따라 시기별로 도형의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태·장형과 달리 어느 정도 자유를 제약하는 성격의 도형은 태·장형보다 중대한 범죄에 대해 부과되었다. 예를 들어 역모 혐의를 고발하였는데 관원이 즉각 대응하지 않으면 장 100대·도 3년, 국가의 멸망을 논하는 참위서를 보관만 하더라도 장 100대·도 3년이 부과되는 등 역모 혐의를 방치·조장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 도형의 대상으로 취급되었다. 한편, 타인에게 호패를 빌려주었다가 발각되거나 마패를 분실한 자는 장 100대·도 3년에 처하는 등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발급한 증명서를 잘못 활용할 때도 도형에 처해졌다.



유형 –

지방으로의 추방형



위리안치


<위리안치(圍籬安置)>, 『형정도첩』 | 김윤보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공공누리


유형은 무거운 죄를 저질렀으나 차마 죽일 수는 없을 때 먼 지방으로 추방하여 죽을 때까지 그 지역에서 거주하도록 하는 형벌이다. 유형은 장 100·유 2,000리~장 100·유 3,000리까지 3등급으로 나뉘어 있었고, 도형과 마찬가지로 장형이 부과되었다는 점에서 신체 형벌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국왕이 거처하는 한양으로부터 2,000~3,000리(약 800~1,200㎞)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해야 했으므로, 유형 죄인들은 함경도 삼수갑산, 전라도 강진, 제주도 등 변방 잔읍(殘邑, 황폐한 고을)으로 다수 배치되었다.

유형은 원칙적으로는 평생 그 지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종신형의 원칙을 지닌 형벌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조선에서 유형이 평생 유지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실제로 정치 대립 속에서 유형을 받은 정치범이 특별 사면을 받거나, 권력 교체로 인해 복귀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았다. 그렇지만 유형이 항상 양반 관료에게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양반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역시 일정 이상의 죄를 지으면 유배형에 처해졌다.

유형은 도형과 달리 특정한 노역형을 요구받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관아에 정기적으로 출석하여 확인받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다만 해당 군현 내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변방 군현 자체를 경계로 거주지가 제한되어 있었다. 유배인들은 전혀 연고가 없는 외딴 군현에서 죄인이라는 신분으로 노동력이나 학식 등을 활용하여 생계를 꾸려가야 했으므로 경제적·사회적인 부담의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유배인의 생활 자체가 하나의 형벌로 기능했다.



정배가는 죄인(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김준근 풍속화 모사품, 국립민속박물관)


<정배가는 죄인>, 『풍속도첩(風俗圖帖)』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김준근 풍속화 모사품


유형은 범죄 중에서도 사형에 처하기엔 충분치 않지만, 중대성이 큰 범죄들에 대해 집행되었다. 예를 들어 가족 간 손아래 동생이 손위 동기를 구타하여 크게 다치게 하는 경우, 타인의 두 눈을 멀게 하거나 팔·다리 두 군데 이상을 부러뜨리는 경우, 타인을 약취하여 노비가 되게 하는 경우 모두 장 100대·유 3,000리 처분을 받았다. 이뿐 아니라 조선에서는 정치적 분쟁에서 실각하는 정치인들이 유배에 처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조선시대의 유력 정치인들은 짧든 길든 유배 생활을 겪는 일이 잦았다.



사형 –

생명 박탈의 최고 형벌


사형은 죄인의 생명을 박탈하는 형벌로서 조선시대 최고 법정 형벌이었다. 주로 강도·살인·역모 등 사회질서를 중대하게 위반하는 범죄에 대해 선고되었다. 조선 사회는 백성의 생명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사형 집행에서도 신중한 절차를 거쳤다. 사형 집행을 앞두고 사안에 대해 세 차례 재검토하도록 하여 억울하게 사형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였다. 사형은 가을철 추분부터 봄철 춘분 사이에만 행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만물이 생장하는 계절을 피해 생명의 기운이 수그러지는 때에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민백-09629_김윤보/형정도첩/역적참항

<역적참항(逆賊斬項)>, 『형정도첩』 | 김윤보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공공누리


사형 방법은 공식적으로는 목을 밧줄로 졸라 죽이는 교형(絞刑)과 칼로 목을 베어 머리와 몸을 분리시키는 참형(斬刑)으로 구분되었다. 두 사형법 모두 목숨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동일했으나 그 형벌로서의 층위에는 차이가 있었다. 『대명률』에서는 교형에 대해 ‘전기지체(全其肢體)’, 참형은 ‘신수이처(身首異處)’라고 설명했는데, 글자 그대로 ‘사지가 온전히 붙어 있다’와 ‘몸과 머리가 따로 떨어진다’를 의미했다. 조선시대에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하여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온전히 보전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으므로, 같은 사형이라 할지라도 목을 분리하는 참형이 더 중한 형벌로 여겨졌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 가혹한 사형 방식으로는 능지처사(凌遲處死)가 있다. 능지처사는 죄인의 몸을 여러 조각으로 찢어 죽이는 신체 절단 사형법이었다. 사형수 중에도 극도로 흉악한 강상살인·역모와 같이 인륜을 저버린 범죄에 대해 집행하였다. 중국에서의 능지처사는 칼로 살을 발라내어 수백 조각을 내는 방식이었으나, 조선에서는 사지를 분리하는 거열형의 방식으로 이뤄졌다. 거열형 역시 몸통·팔·다리·머리를 분리한다는 점에서 절단형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실제 법률에서도 교형-참형-능지처사는 점증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를 들어 노비가 가장을 욕하면 교형이었으나, 구타한 경우에는 참형으로 등급을 올렸고, 만약 살해하였으면 능지처사로 가형하였다.

이러한 신체 관념의 연장선에서 신체를 보전해 주는 특별한 사형 방법인 사사(賜死), 즉 사약(賜藥)을 내리는 방법도 있었다. 사약은 말 그대로 임금이 내려 주는 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별히 왕족이나 고위 관료 출신 죄인 중 그들의 체면을 보존해 주면서 목숨을 거두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사형은 강상 및 사회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범죄들에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강간을 하면 교형, 타인을 구타하여 살해하면 교형, 강도질하여 재물을 빼앗으면 참형을 하는 등 타인의 신체와 재산을 심각하게 침해할 때 사형에 처했다. 이뿐 아니라 타인을 저주하는 저주물을 만들면 참형, 타인의 관을 파내어 시신을 드러내면 교형을 하여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사형으로 처벌하였다. 국가 전복을 꾀하는 역모에 대해서는 주동자·추종자 모두 능지처사하고 그의 아버지와 아들도 교형에 처하면서 가장 강력한 수위의 처벌을 집행했다.



죄와 벌 그리고 조선


조선의 형벌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방법이었다. 태형에서 사형에 이르는 20단계의 형벌 체계는 범죄의 성격에 따라 그에 걸맞은 형벌을 집행하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충효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체벌 위주의 형벌이 가혹해 보일 수 있으나 조선 후기 사회 변화에 조응하여 생명권을 보장하는 형태로 점차 변화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형벌 체계를 살펴봄으로써 그 시대 사람들의 정의로움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