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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가을, 겨울호-가족오락관]새로운 놀이의 등장과 변형, 일제강점기에 유행한 아동놀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6-03-18 조회수 : 241
새로운 놀이의 등장과 변형, 일제강점기에 유행한 아동놀이
글. 서종원(한국민속예술연구원 학술원장)

비단 놀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놀이 문화의 흐름 과정에서 근대(近代)는 여러 면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외부에서 유입된 다양한 사상과 문물로 인해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놀이가 유입되기도 했으며, 그 전부터 이어져 오던 적지 않은 놀이가 이 무렵에 사라지거나 혹은 다른 형태의 놀이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근대 무렵에 사라진 놀이는 ‘풍쟁쌈[두레풍물]’과 ‘꽁밥[성년식]’이 해당된다. 두 놀이는 농경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즐겨했으나 근대에 오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근대에 변화한 전통놀이 중 하나는 오늘날의 하키와 유사한 ‘장치기’가 있다. 해당 놀이는 나무를 하러 다니는 아이들이 산이나 들에서 즐겨하던 놀이인데, 근대적 사고와 스포츠의 개념이 유입되면서 이전과 달리 일정한 룰에 따라 놀이가 행해졌으며, 놀이 장소가 산과 들이 아닌 경기장으로 옮겨왔다. 물론 이 무렵 놀이문화의 전개 양상을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내용만으로 정리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가 포함된 근대는 우리나라 놀이문화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시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풍속화(구슬치기)
풍속화(구슬치기)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일제강점기 놀이 문화의 전개양상

보는 관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근대 혹은 근대 시기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이 무렵 놀이문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시기의 전반적인 특징을 살피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구슬치기와 같은 놀이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으며, 일본이 시행한 다양한 문화정책으로 전통적으로 해오던 줄다리기와 석전 같은 전통놀이가 단절 혹은 중단되기도 했다. 또한 앞선 시기에 해당하는 개화기의 영향으로 이전 시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놀이문화가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사정은 아동들이 즐겨하던 놀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에는 이전과 달리 복잡한 형태로 놀이문화가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놀이가 외부에서 유입되었다. 그리고 아동들이 즐기던 놀이문화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주목할 내용은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아동놀이 가운데 상당수가 이 무렵에 새롭게 등장했거나 혹은 외부에서 유입했다는 점이다. 이들 놀이 중 적지 않은 것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나 어찌 되었든 일제강점기는 아동놀이가 이전에 비해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아동들은 전통적으로 전해오던 우리네 놀이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놀이를 하며 힘든 시기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본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아동놀이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놀이 가운데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특징을 가진 대표적인 놀이 몇 가지를 소개하고, 이러한 내용을 통해 이 시기 아동놀이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슬
구슬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아동들의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은 서구식 완구(完具: 장난감)

영어로 ‘toy’라고 표현하는 완구(完具)는 아이들이 노는 데 쓰는 여러 가지 도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장난감’이라는 용어로 총칭되는 놀이도구이다. 아동들의 놀이 도구인 완구는 시대적으로 그 개념과 범주가 차이를 보이긴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일제강점기 무렵에 서구식 완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나라에 유입이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일제강점기 이전 시기인 조선시대에도 우리네 전통 완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자 아동들이 가지고 노는 풀각시를 포함해 몇 가지 놀이도구가 있었다. 하지만 이 무렵에 소개되었거나 외부에서 들어온 서구식 완구는 이전의 것을 가지고 놀던 아동들에게 신문물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당시의 신문에는 현대를 살고 있는 아동들에게도 무척 친숙한 완구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는 내용과 서구식 완구에 수많은 사람이 호기심을 가졌다는 내용이 담긴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난생처음 접한 완구에는 장난감 병정을 비롯해 오뚝이, 권총, 나팔, 하모니카, 바람개비, 세발자전거, 인형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아동들이 가지고 놀던 서구식 완구 가운데 유독 많은 아동과 어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 바로 인형이다. 특히 파란 눈을 가진 인형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었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인형과 완구를 중심으로 한 ‘완구전람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1920~30년대 어린이를 향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오늘날처럼 어린이날 혹은 성탄절 등에 아동에게 완구를 선물하는 풍속이 생겨나게 된다. 다만 워낙 가격이 비싼 탓에 아동들이 완구를 접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대부분 사람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서구에서 유입된 인형이나 완구를 접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주변의 친구 중에 간혹 인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었긴 하나, 이들은 대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의 자녀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장난감과 인형
장난감과 인형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조선가정에서는 엇더한 작란감을> 조선일보, 1932년 5월 27일자
<조선가정에서는 엇더한 작란감을> 조선일보, 1932년 5월 27일자

1930~40년대에 접어들면서 완구가 아동들의 성장 및 발달 과정에 무척 중요하다는 인식이 학부모들 사이에 퍼졌고, 본격적으로 완구가 유행하게 된다. 서양식 교육의 영향과 일정 부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개 아이들의 교육에 완구를 가지고 노는 것이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당시의 신문에 소개된 완구의 장점은 아동들의 지혜 개발, 좋은 습관과 성격 양성, 미적 감각 증가, 지식 습득, 과학적 사고 배양, 사회성 발달 등이었다. 물론 이러한 효과나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완구를 가지고 놀기보다는 신체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더 좋다거나 혹은 완구를 가지고 놀다가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반대 논리를 펼쳤다.

여러 논란과 담론이 있었긴 하나 일제강점기 이후 완구는 우리나라 아동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놀이도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완구가 시중에 유통이 되었으며, 어린이날이나 생일날에 아동들에게 완구를 선물하는 풍습이 이 무렵부터 서서히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에 우후죽순처럼 유입된 완구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놀이도구이자 놀이문화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등장한 실내유희(室內遊戱)

일제강점기 무렵에 널리 유행했던 새로운 형태의 놀이 가운데 실내유희(室內遊戱)라는 것이 있었다. 실내유희는 말 그대로 야외가 아닌 실내에서 즐기던 놀이로 인식된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다리세기 및 공기놀이 등과 같은 전통의 실내놀이가 아닌 이 무렵에 오면서 서양과 일본 등에서 유입된 또 다른 놀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매일신보, 1937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 1937년 2월 15일자

일제강점기 무렵 외부에서 유입된 실내유희의 역사와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하긴 어렵지만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실내유희’라는 이름으로 이전에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놀이가 많이 소개되거나 혹은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놀이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3·6·9 게임’과 유사한 ‘뻐스’이다. 이 놀이는 여러 사람이 숫자를 세다가 ‘7’ 혹은 ‘일곱’이라는 숫자 대신 ‘뻐스’를 외치는 것이 특징인데, 만약 ‘뻐스’를 말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3·6·9 게임’처럼 사전에 정해 놓은 벌칙을 받아야 한다.
실내유희에 해당하는 것은 앞서 소개한 ‘뻐스’ 이외에도 무척 다양하며,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도 적지 않다. 당시에 유행했던 실내유희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면 언어유희, 신체유희, 도구유희, 숫자유희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신체유희, 도구유희, 숫자유희에 해당하는 놀이를 소개하고자 하며, 해당 놀이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체유희: 손바닥탑>

몇 사람이라도 좋으나 네다섯 사람이면 더욱 좋습니다. 먼저 책상 위에 모인 사람의 왼쪽 손을 덮어서 차례대로 겹쳐 놓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손을 그 위에다 또 차례대로 얹습니다. 그러니까 네 사람이면 손바닥이 여덟 개 겹체 팔층 탑이 됩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의 손이 전부 엎어 가다 맨 밑에 깔린 사람은 얼른 그 왼편 손을 빼어 맨 꼭대기로 올려다 부칩니다. 그러면 역시 그 다음 다음 차례대로 빼어 올리고, 올리고 하는 유희인데, 이야기로는 쉬운 거 같은데 급히 하면 나중에는 그만 뒤범벅이 되어 자기 차례도 아닌데 손을 빼려고 애를 쓰는 등 별별 우스운 일이 다 생깁니다. 만약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는 말로 노래나 이야기를 시킵니다. - 『매일신보』, 1937년 2월 15일자


<도구유희: 세 번 돌고 나서 동그라미를 꾹>

우선 종이에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 벽에 붙여 놓으십시오. 그러고 나서 위의 그림 모양으로 단장을 짚고 엎드려서 그대로 빙빙 세 번을 돕니다. 돌고 나서 벽 쪽으로 걸어가 종이게 그려 있는 동그라미를 손가락으로 꾹 찔러 보십시오. 꾹 찔러 동그라미를 만지는 사람은 백에 한 사람쯤입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얼굴을 들어 벽을 본다거나 벽 앞에 가서 한참 있다 마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 「어서 한번 해 보십시오」 ,『어린이』 12권 2호, 1934년 2월 20일


<숫자유희: 양초문제>

여기에 다섯 개의 양초가 있다. 모두가 불이 붙어서 훤하게 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일진의 바람이 불어와서 다섯 개 중에서 두 개가 불이 꺼져버렸다. 그러면 남아 있는 양초는 몇 개 인가? 이것은 어느 학교의 멘탈 테스트에 낸 문제, 다섯 개가 남았다고 대답하면 문제없이 낙제는 면치 못할 것이다. - 「無風圈」, 『조광』 7권, 7호, 1941년 7월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등장한 실내유희는 위에서 소개한 놀이에서 알 수 있듯 우리네 전통놀이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실내유희라는 용어를 사용하긴 하나 반드시 실내에서만 즐길 수 있는 놀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5~6명 정도의 소수 인원이 실내나 실외 상관없이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놀이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유행했던 실내유희는 우리네 전통놀이와 여러 면에서 이질감이 있었다. 그런데도 상당수의 놀이가 지금까지 전승되어 아동들의 놀이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은 여러 면에서 의미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교와 마을에서 처음 접한 다양한 놀이들

개별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아동들은 전통놀이를 비롯해 외부에서 새롭게 유입된 다양한 놀이를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본인을 비롯해 외국인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지역에 거주했던 아동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제강점기 무렵 새로운 형태의 놀이를 접할 수 있는 장소 및 공간 가운데 하나는 근대식 학교이다. 내국인만 다니는 학교보다는 일본인을 비롯해 외국인이 다니는 학교에서 새로운 놀이를 접할 기회가 더욱 많았다. 이러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역이 울산광역시 동구에 속한 방어진(方魚津)이다. 이 무렵 방어진에는 어업과 상업 등을 목적으로 찾아온 수백 명의 일본인이 거주해 있었는데, 학교를 다니던 이곳 아동들은 일본인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다양한 놀이를 자연스럽게 접하였다. 물론 이러한 교류가 비단 학교에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의 공터와 골목 등에서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방어진에 살던 한국인 아동들이 새롭게 접한 대표적인 놀이로는 ‘갠또바시’라 부르는 깡통차기가 있었다. ‘가이상’ 혹은 ‘가이셍(센)’, ‘따까리’의 하나인 ‘오징어놀이’도 이 무렵 학교와 마을 등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다마치기’라 부르는 구슬치기를 비롯해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오자미(콩주머니놀이) 등도 방어진에 살던 일본인들을 통해 알게 된 놀이였다. 학교를 다니던 아동들은 학교 선생님에게 줄넘기와 땅바닥탁구를 배울 수 있었는데, 이들 놀이는 이전에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울산광역시 방어진의 사례를 일반화시키긴 어렵지만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아동들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아동놀이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어진처럼 외국인들을 자주 접할 수 있는 지역에서는 그러한 양상이 두드러지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에 거주하는 아동들은 직접적인 교류보다는 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새로운 놀이를 접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된다.

개별 지역의 구체적인 실상은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보다 소상하게 밝혀야 하겠지만, 일제강점기 아동놀이를 살피는 과정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무렵 우리네 아동들이 새롭게 접한 상당수 놀이가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개별 아동놀이의 기원이나 유래 및 역사는 구체적으로 알긴 어려우나 방어진의 사례를 통해 앞선 시기에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놀이가 이 무렵에 널리 유행했다는 내용만은 분명한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이상 놀이, 2011년
가이상 놀이, 2011년
사진: 서종원
일제강점기 아동놀이의 전반적인 특징과 이면

앞서 소개한 것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에 행해졌던 아동놀이는 무척 다양하다. 석전대회를 비롯해 쥐불놀이, 연날리기, 팽이치기, 썰매타기 등의 전통놀이도 아동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승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는 여러 형태의 아동놀이가 공존한 시기이자, 아동놀이의 전성기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무렵에 오면서 여러 형태의 아동놀이가 생겨나고, 이들 놀이가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서양에서 유입된 다양한 문물과 사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동에 대한 인식이 이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점과 근대식 교육이 이 무렵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중요한 이유라 생각된다.

일제강점기 고물줄놀이에 사용한 고무줄 모양
일제강점기 고물줄놀이에 사용한 고무줄 모양
사진: 서종원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아동놀이가 일본의 정책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명확하게 연관성을 밝혀내긴 어렵지만 이 무렵에 유행했던 일부 놀이에서 조심스레 그러한 내용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사방치기나 깡통차기처럼 일정한 규율[규칙 및 놀이 방법]을 숙지하지 못하면 해당 놀이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놀이 과정에서 일본의 창가 혹은 군가를 부르는 것 역시 일정 부분 그러한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오징어놀이를 일정 부분 일본의 영향을 받은 놀이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으론 이들 놀이가 일본에서 맨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 주장이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 무렵 일본에 의해 소개되거나 유입된 놀이가 적지 않은 사실만은 결코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여러 논란이 있고 해당 놀이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긴 하나,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던 여러 형태의 아동놀이가 지속과 변화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는 부분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던 여러 형태의 놀이가 언제까지 그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유입된 다양한 형태의 놀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으면 한다. 여러 논란이 시원하게 해결될지 모르겠지만 일제강점기와 1990년대 이전의 아동들이 그러했듯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미래 세대의 아이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어느 곳에서나 다양한 놀이를 즐기며 한층 건강하고 밝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 『네이버백과사전』. 『매일신보』. 『어린이』. 『조광』. 『한국의 근대놀이문화』, 서종원, 2015. 채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