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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1 - '국가유산 열 개의 길' 여행기 관동 풍류의 길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 - 여행경로 소개 - 출발 - 평창 월정사 - 강릉 경포대 - 강릉 오죽헌 - 강릉 선교장 - 양양 낙산사
프롤로그 / 하늘을 지붕 삼아 떠도는 나그네처럼


  여행의 좋은 점이야 셀 수 없이 많겠지만, 나는 그중 최고는 역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시나마 ‘생존 경쟁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물론 현실적으로 계획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살아가는 데에 무척이나 필요한 자세이다. 그러나 나는 종종 머릿속이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는 것에 체증을 느낄 때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입에서 현실적인 말들만 나오는 게 무섭다. 이런저런 복잡한 숫자들을 너무 자주 보고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그래서 그럴 때는 멀리 깊은 자연 속으로 떠난다. 최대한 속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는 그렇게 아득히 비현실적인 자연의 풍경 앞에서 하염없이 뭉그러지는 순간이 좋다. 어느새 거듭 다짐하게 된다. ‘어딘가 붙들려 매여 있다 생각하고 살지 말아야지.’ ‘나 스스로 작은 것에 구속하며 살지도 말아야지.’
아마도 자연의 고귀한 아름다움은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황홀한 풍경은 그것 자체로도 사람 정신의 얼룩진 부분을 깨끗이 씻어내므로.

  이번에 내가 여행할 길은 강원도 ‘관동 풍류의 길’이다.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 관동 지방은 예로부터 당대의 문인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찾던 곳이다. 그래서 나도 이번 여정은 풍류의 정신을 생각하며 여행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자연을 가까이하는 것, 멋을 아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람과 물이 흐르듯 유유자적 즐기는 것. 그런 다짐으로 동쪽으로 향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 - 관동 풍류의 길 평창 월정사
  관동은 대관령의 동쪽을 가리킨다. 그러니 대관령은 관동 풍류의 길을 여는 길목이라 할 수 있다.
그 옛날 신사임당은 강릉에 계신 모친을 그리며 어린 율곡과 대관령옛길을 건넜고, 관동팔경을 화폭에 담은 김홍도 역시 붓을 들고 대관령 고개를 넘었다.
그러나 대관령을 따라 백두대간을 넘기 전 방문하면 좋을 곳이 있는데, 바로 산 전체가 불교 성지로 되어있는 오대산의 사찰 월정사이다.

일주문 사진
금강교 사진

  사찰의 첫 번째 산문인 일주문을 지나 울창한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2km 가까이 되는 꽤 긴 거리지만, 수령 80년 이상 1,800여 그루의 전나무 숲길이 근사하게 조성되어 있어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마침내 맑고 투명한 냇물 위로 금강교를 건너면, 산속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가 모습을 보인다.

월정사 사진
팔각 구층석탑 사진
  월정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중심의 팔각 구층 석탑이다. 그리고 석탑 앞에는,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자세로 공양하는 자세를 취한 보살상이 놓여 마주 보고 있다.
그리고 구층 석탑을 제외하고는 사찰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끼기가 어려운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7세기에 창건된 월정사는 긴 역사가 있지만 세 번이나 전소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은 고려 충렬왕 때, 두 번째는 조선 순조 때.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비교적 최근인 6.25 전쟁 당시이다.
여기엔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데, 마지막 화재는 우리 손으로 의도적으로 불태운 것이다. 1·4후퇴 당시 북한군이 이 절에 머물 것을 염려해서 대한민국 국군이 월정사를 불태우고 내려갔던 것이다.

월정사 부감 사진
  만약 나처럼 ‘관동 풍류의 길’을 따라 여정을 시작하려는 사람이라면, 처음 시작은 월정사에서 하길 추천한다. 월정사는 국가유산으로서의 가치만으로도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지만, 오대산의 수려한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장소이다 보니 이제 막 도시를 떠나온 여행자가 마음 비우기 좋은 장소이다.
나는 그렇게 잠시 월정사를 둘러보다, 이제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향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8 - 관동 풍류의 길 강릉 경포대
  동해가 빚어내는 황홀한 비경, 관동팔경 탐방의 시작을 경포대에서 가졌다.
간혹 경포대라고 하면 부산의 해운대처럼 지역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경포대는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자리한 누각의 이름이다. 한때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경포대 그림
경포대 정자 옆 그림
  언덕을 오르자, 경포대 정자 옆에 익숙한 그림들이 보였다. 경포대는 예부터 동해를 찾은 수많은 시인 묵객이 다녀간 명승지로서, 명사들의 수많은 시와 글, 그림이 남아있다.
분명 전에도 봤던 그림들이지만 실제로 묘사한 지역이 눈앞에 있으니 집중해서 다시 보게 됐다. 수백 년 전의 자연이나 지금의 자연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앞에는 경포호수가 있고, 그 뒤로 가늘고 긴 땅이 바다와의 경계를 구분짓고 있다. 
경포대 정자와 해변경포대 정자 사진경포대 정자 내부 사진
  고등학생 시절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할 때,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쓴 [관동별곡]은 그렇게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아무리 빼어난 문장으로 관동팔경의 경치를 칭송한다 해도, 옛 한글로 쓰인 고전문학이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까.

  그러나 경포대에서, 문득 그때 나를 괴롭혔던 [관동별곡]이 생각나더라. 새삼 정철이란 사람이 그리 오랜 역사 속 인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나와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느낀 것을 적었다고 생각하니까. 김홍도도 그렇고, 정선도 그랬다.
경포대에서 내려다보는 호수와 바다의 조화는 기품 있고 우아했다. 교과서에서 봤던 그 작품들이 왜 탄생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살면서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언젠가 내가 익혔던 지식이 실제의 경험과 합쳐질 때 오는 즐거움이란 몹시나 특별한 것이다.

경포대 누각 천장 시인의 글
  누각 천장에는 경포대에 관련된 시인 묵객들의 글이 게시되어 있다. 숙종이 직접 지은 ‘어제시’도 있고 강릉 부사를 역임했던 문관 조하망의 ‘상량문’도 있다.
그리고 사진에 보이는 글은 유년을 강릉에서 보냈던 조선 학자의 ‘경포대부’라는 글이다. 경포대의 특징적인 풍경을 계절별로 구분하여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통해 성정을 다듬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데에 힘쓸 것이란 포부도 담겨있는 명문이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글이 무려 열 살 나이에 지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의 글인지 예측할 것 같은데, 답은 이 다음 여정에 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15 - 관동 풍류의 길 강릉 오죽헌
  오죽헌은 경포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보니,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열 살 아이가 경포대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나 보다.

율곡이이 동상
  오죽헌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율곡 이이의 동상이다.
동상 앞에는 율곡이 금과옥조처럼 품고 실천한 ‘견득사의’가 적혀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로,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율곡이 형제 가족들까지 거둬 식솔이 100명이 넘는 대가족이었던 때가 있다. 하지만 벼슬을 관뒀을 때는 식솔들과 함께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인 황해도 재령 군수 최립이 쌀을 보낸 적이 있는데, 율곡은 ‘관아의 곡식을 보낸 것 같아 도저히 받을 수 없다’며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그만큼 이득과 손실 보다는 옳고 그름을 우선시하는 율곡이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17-문성사 사진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18-배롱나무 꽃 사진
  오죽헌 가장 안쪽에는 율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가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백 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수령이 무려 600년이 넘어, 율곡이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낼 때도 같은 자리에서 꽃을 피웠던 나무라고 한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19-몽룡실 외부 사진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0-몽룡실 내부 사진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1-검은대나무 사진
  문성사 옆에 있는 건물에는 신사임당이 율곡을 출산했던 방 몽룡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을 오죽헌이라는 이름답게 검은 대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율곡은 조선 역사상 제일 가는 천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보니, 율곡의 비범함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가령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도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라든지.

  그러나 오죽헌에서 내가 떠올렸던 일화는 율곡이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한 일화다. 율곡은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상복을 벗었음에도 모친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19세에 속세를 떠날 결심까지 하고 불교에 심취해 절에 들어간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오죽헌에서 율곡의 유년 시절은 무척이나 행복한 기억들로 가득했을 것만 같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2 - 관동 풍류의 길 강릉 선교장
  오죽헌을 둘러본 후에는 근처의 선교장으로 이동했다.
선교장은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 형태를 잘 보여주는 전통가옥이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3-선교장 외부 사진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4-선교장 내부 사진
  선교장은 개인소유의 국가민속문화유산이고 지금도 300년째 대대로 후손이 사는 주택이다. 그 때문에 오죽헌처럼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며 점차 증축되고 중건되었다. 그래서 전체적인 통일감이나 짜임새는 조금 결여되어 있으나, 지속해서 사람이 생활해 온 탓인지 거대한 규모에 비해 소박하고 인간적인 풍취가 느껴졌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5-자연환경과 선교장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6-연못과 선교장 정자
  주변 자연환경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처마 뒤로 우뚝 솟은 소나무도 근사하고, 입구에 지어진 인공 연못과 정자는 그야말로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라는 것을 단번에 느끼게 한다.
  정자의 이름은 활래정. 여러 사람 둘러앉으면 끝날 작은 방이지만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자에서 연못을 향해 난 창문에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여유롭게 음풍농월을 즐겼을 옛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곳이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7-활래정 안에서 본 연못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8 - 관동 풍류의 길 양양 낙산사
  강릉을 벗어나 계속해서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오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낙산사로 향했다. 자비로 중생을 보살핀다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관음성지 홍련암, 그리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의상대가 있는 역사 깊은 천년고찰이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9-낙산사와 동상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0-해수관음상 동상 사진
  해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솔숲을 지나 오봉산 정상으로 걸어갔다. 오봉산은 낙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낙산은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타락가산’의 의미다. 그만큼 낙산사는 관세음보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낙산사는 신라 시대 고승인 의상대사가 직접 관세음보살을 마주하고 창건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오봉산 정상에는 높이 1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해수관음상’이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해수관음입상은 비교적 최근인 1970년대에 세워졌는데, 그 당시 동양 최대의 불상이었다고 한다.
나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 경치가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동해의 넓은 해안선이 보였고, 해수관음상 뒤편으로는 저 멀리 설악산의 대청봉과 울산바위가 보였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1-의상대로 가는 길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2-의상대 정자 사진
  그러나 정철의 관동팔경에 기록된 4경은 정상 아래쪽 해변 가까이에 있다.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할 때 참선했던 의상대이다. 원래는 이곳에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워 두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3-의상대 정자에서 본 홍련암
  의상대 정자에 올라 왼쪽을 바라보면, 낙산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암자 홍련암이 보인다. 홍련이라는 것은 붉은 연꽃을 의미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데에는 전해지는 창건 설화가 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4-홍련암 사진
  신라 문무왕 12년 때, 의상대사가 우연히 이곳에서 신비한 파랑새를 목격하고 새를 쫓아갔다. 그러나 새는 바다 위의 석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의상은 석굴 앞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나체로 정좌하여 지성으로 7일 7야를 기도 드렸다. 그러자 바닷속에서 붉은빛의 홍련이 솟아 올랐고, 그 안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5-홍련암에서 본 바다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6-홍련암의 풍경 사진
  현재 홍련암의 법당 내부에는 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한때 2005년에 오봉산에 거대한 산불이 일어나 낙산사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된 적이 있는데, 다행히도 홍련암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불길을 피했고 소실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7-낙산사 부감 사진
관동풍류의길 에필로그

오봉산의 낙산사를 마지막으로 관동 풍류의 길도 마무리짓는다.
이번 여행은 한국 고유 산천의 아름다움을 물씬 느낄 수 있었던 길이었다. 예로부터 강원도에 왜 많은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지, 백두대간과 동해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이해하게 됐다.

  혹시 ‘알랭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을 읽어보셨는지? 그 책에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말이 있다. “현실을 힘들게하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다면,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 그것을 이겨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이런 문장이다.
  나는 늘 생각한다.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늘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다 보면, 우리 인생의 조금의 스트레스나 문제만 있어도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를 뒤덮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이 현재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보는 것도 때때로 큰 도움이 된다. 강원도 관동 풍류의 길은 그런 면에서 참 매력적인 여행이다.

  이제 해가 지는 방향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처음에 말했던 ‘생존 경쟁의 제약’이 있는 삶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아아, 풍류는 이제 끝났다. 몸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현실적 모드’ 스위치를 켤 시간이다.
  그러나 다시 속세에 돌아가는 게 마냥 싫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나는 잠시 이렇게 풍류를 즐기러 떠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늘 경계에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현실과 이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물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는 삶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서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8 - 관동 풍류의 길의 맛 초당순두부 & 오징어 순대
관동 풍류의 길에 어울리는 맛이라 하면, 응당 머릿속에 바다가 떠오는 맛이어야 할 것이다. 음식을 입속에 넣는 순간 멀리서부터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기왕이면 술이랑도 잘 어울리는 음식이면 좋겠다. 한국의 풍류를 이야기할 때 음주가무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추천할 관동 풍류의 맛은 ‘초당순두부’와 ‘오징어순대’이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9 - 초당 순두부
초당순두부만큼 동해바다를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음식이 있을까. 바닷물을 간수로 하여 만드는 초당두부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로 유명한 초당 허엽 선생에게서 기원했다고 한다.
잘 만든 초당순두부는 파도가 치고 나타나는 하얀 포말처럼 몽글몽글 부서진다. 한입 가득 입 속에 넣으면 썰물처럼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젊은이들 입맛을 겨냥한 짬뽕 순두부도 별미이지만, 바다 향 깃든 순두부의 정수를 느끼고 싶다면 하얀 순두부를 추천한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40 - 오징어 순대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 오징어순대는 말 그대로 오징어 몸통에 소를 채워 넣어 쪄낸 요리이다. 어떻게 이런 요리를 생각해 냈는지 기발하기도 하지만, 사실 세계 각지에는 오징어에 속을 채워 만든 유사한 음식들이 꽤 있다. 그만큼 보장된 요리법인 것이다.
요즘엔 그냥 쪄내는 것이 아니라 계란물을 부어 전처럼 부쳐내기도 하는데, 이러나저러나 중요하지 않다. 결국엔 맛만 좋으면 되는 법.
오징어순대를 맛있게 먹는 방법의 하나는 포장해서 숙소에서 먹는 것이다. 손 시릴 정도로 차가운 술과 함께라면 더욱 좋다. 침대가 옆에 있으니 걱정도 없다. 오징어순대 한 점과 술 한 모금이면 세상은 어느새 행복으로 허물어져 간다.
현대에는 아마 이런 것조차도 관동 풍류의 일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박성호 작가 사진
by 여행작가 박성호
국가유산 열개의 길 여행기 - 산사의 길 -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산사의 길 여행경로 소개 - 공주 마곡사 - 순천 송광사 - 순천 선암사 - 합천 해인사


프롤로그 / 왜 절은 산에 있을까?

  오늘날 한국의 절은 대부분 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절을 떠올리면 늘 함께 계곡이나 숲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동시에 도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산 속에 은둔하며 불경을 외는 승려의 모습. 떠들썩한 속세와는 다른, 평온하고 신비로운 모습.
이 때문에 다른 불교 문화권 나라들을 여행하다 보면 이따금 신기할 때가 있다. 중국이나 일본, 태국이나 스리랑카에서 그랬다. 외국에서는 도심 번화가에서도 쉽게 사찰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도시 여기저기에 성당과 교회가 있는 것처럼, 편의점과 식당 사이 골목에도 사찰이 숨어있고는 하다.

  그런데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우리도 절이 도심 길거리에 흔히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불교는 약 1천년간 국교의 위치에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불교의 교리는 지배계층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당시 왕들은 수도에 더 크고 영향력 있는 절을 짓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예컨대 신라 진흥왕은 경주에 궁궐보다 높은 황룡사를 지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평양에만 9개의 절을 지었다. 심지어 불교의 권력이 가장 강했을 고려 말에는 전국에 절이 1만 3천 곳 남짓 있었다고 한다. 그때 승려 수만 해도 15만여 명으로 추정하니, 당시 인구가 400만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지금처럼 절이 대체로 산에 있게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억불’ 정책 탓이다. 이는 조선의 핵심 건국 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와 태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원래 시대가 변하면 이전에 가장 강력한 세력부터 청산하는 것이 필수적인 절차이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성리학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한 책, ‘불씨잡변’을 써내기도 했다.
결국, 도심의 사찰들은 차례차례 산지로 강제 이전 당하거나 폐쇄되었다. 유교 교육을 위한 향교나 서원으로 용도가 변경되기도 했다. 또한 천민으로 전락한 승려들은 도성 출입마저 금지되었다. 심지어 절에 걸린 범종은 떼어내어 무기로 만들기도 했다. 이때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도 철거될 위기에 처했었으나, 이는 임금인 세종이 따로 지시해 막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러니 만약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한국엔 시내 곳곳에 사찰이 무수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는 것이니, 절이 주로 산에 위치하게 된 지금의 모습은 한국 불교의 독특한 형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우리에게 산에 있는 사찰, ‘산사’라는 말이 익숙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과거 때문이다. 지금은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산사의 길 - 공주 마곡사
하늘 에서 본 구릉 지역

  서울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천안 아산 사이 39번 국도를 지나면 그때부터 공주, 청양, 보령에 걸쳐 광활한 구릉 지역이 나타난다. 구릉은 완만한 기복의 낮은 산이나 언덕이 이어져 있는 지형을 말한다. 계속해서 좁고 꼬불꼬불한 길이지만, 그만큼 천천히 주변 경치를 둘러보기에 좋다. 이번 ‘산사의 길’은 사찰 여행인 동시에 대한민국 산 여행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하늘에서 찍은 공주 마곡사 드론샷
 
  오늘의 첫 번째 장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태화산 자락에 자리 잡은 마곡사이다. 신라 10대 불교 성인 중 하나인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마곡사는 1400년 가까운 긴 역사가 있는 천년 사찰이다.

물에 비치는 마곡사의 다리
나무사이로 보이는 마곡사 석탑과 사찰

  예로부터 공주 일대에 전해지는 말로,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란 말이 있다. 봄은 태화산 마곡사가 가장 아름답고, 가을은 계룡산 갑사가 가장 아름답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내가 마곡사에 방문했을 당시는 초가을이었다. 당연히 ‘춘마곡’이 자랑하는 봄의 싱그러운 정취는 없었다. 그러나 추운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은 한결 차분하고 낭만적인 계절인 터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마침, 평일이라 사람도 없어 느긋하게 걸어 들어갔다.

석탑이 보이는 마곡사의 모습
마곡사 대광보전 정면 모습

  마곡사는 그리 크지 않은 절이다. 창건 당시에는 30여 칸이 넘는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대웅보전, 대광보전, 영산전, 사천왕문, 해탈문 정도만 남았다. 중심 건물인 대광보전 앞마당에는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 석탑이 있고, 가장 높은 곳에는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보전이 있다.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는 마곡사를 정면으로 하늘에서 본 모습

  마곡사가 위치한 지역은 휘어 흐르는 마곡천의 흐름과 산세가 태극 모양 같다 하여 ‘십승지지’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십승지지(十勝之地)’는 풍수지리상 전쟁의 참화를 면하고 몸을 보전하기 좋은 명당 열 군데를 말한다. 그만큼 밖에서 접근하기 힘들고 은둔하기 좋은 곳이란 건데, 이 때문인지 마곡사에는 관련된 이야기도 몇 가지 전해오고 있다.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마곡사

  1453년, 조선에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에 3일을 통곡한 인물이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명민하기 유명했던 김시습이다. 그는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로서 평생 방랑 길에 오른다.

  그러나 수양대군 세조는 어떻게든 김시습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5세에 이미 ‘중용’과 ‘대학’을 익히고 세종에게 찬사를 받기도 한 그는, 한성부 도성 내의 소문난 천재였다. 그런데 마침 세조가 명산대찰을 찾아 전국을 다니던 시기, 김시습이 마곡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무주 덕유산 백련암에 십여 년간 있다가 마곡사로 왔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는 직접 마곡사로 향했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왕의 행차를 들은 김시습이 미리 마곡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마곡사에는 현재까지도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타고 다니던 가마 ‘세조대왕연’이 보관되어 있다.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마곡사에 들렀던 세조가 이곳에 남기고 간 것이다. 또한 마곡사에 남겨진 ‘영산전’ 현판도 세조가 사액한 것이다.

마곡사 영산전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있다. 구한말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도 젊은 시절 한동안 마곡사에 머물렀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1896년, 20세의 젊은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라는 지역에서 일본인 상인을 군인으로 의심해 살해했다. 이는 ‘백범일지’에도 자세히 기록된 내용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벌어진 일이다. 결국 김구 선생은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도중 탈옥을 감행한다. 그리고 은신하게 된 곳이 이곳 마곡사였다. 원종이라는 법명까지 받아 출가하고 승려 생활을 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후 김구 선생은 다시 속세로 돌아와 농촌 계몽운동을 거쳐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1946년 광복 이후, 임시정부 주석이 된 김구 선생은 사찰 경내를 둘러보며 백범일지에 이런 회고를 적었다.
"사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상으로 나를 환영하여 주나, 48년 전의 승려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마곡사에는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이 심었던 향나무가 여전히 남아있다.  

물이 흐르는 마곡천  
 
 마곡사의 서쪽 길로 빠져나와 마곡천에 닿으면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걸을 수 있다. 크게 숨차지 않는 평탄한 길이라 무리하지 않고 산보하기 좋은 길이다. 김구 선생도 이곳 바위에서 삭발을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하니, 삼국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역사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길이다.

산사의 길 - 순천 송광사
천이 보이는 순천 도시를 위에서 본 모습

  이번에는 충청도를 벗어나 전라남도의 최대 도시, 순천으로 왔다. 조선 시대 간행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순천의 산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운 탓에 소강남이라고 일컫는다.”
순천의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풍요롭기로 유명한 중국의 강남과 비슷해, ‘작은 강남’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만큼 순천은 오래 전부터 빼어난 경치로 소문난 곳이다.

조계산 도립공원 안내도
산의 풀숲사이로 흐르는 계곡물
높고 곧게 뻗은 나무와 돌멩이들을 쌓아 올린 작은 돌탑들

  순천에서 찾아갈 산은 호남의 명산이라 불리는 조계산이다. 소백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조계산은 해발 889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맑은 계곡과 울창한 숲, 폭포와 약수를 품은 다채로운 산이다. 
또한 산 전체가 잎이 넓은 낙엽활엽수로 덮여 있어 철 따라 계절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봄철의 벚꽃이 대단하고 가을철의 단풍이 훌륭하다. 산세도 험하지 않으니 사시사철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조계산에는 자연경관보다도 더욱 유명한 것이 있다. 동·서 양면에 걸쳐 자리 잡은 대한민국의 양대 거찰, 송광사와 선암사이다. 조계산은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담은 기록장이자 그 문화유산의 전시장이다.

산에 둘러쌓여있는 송광사를 위에서 본 모습
송광사로 들어가는 입구                 
  나는 먼저 조계산 북서쪽 기슭에 자리한 송광사를 찾았다. 한국에는 ‘삼보(三寶)사찰’이라고 불리는 세 개의 절이 있다. 삼보는 문자 그대로 불교의 세 가지 보물을 뜻한다. 첫째는 부처님을 뜻하는 불(佛),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경전을 뜻하는 법(法), 셋째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정진한 스님, 승(僧). 그러니 ‘삼보사찰’은 이 세 가지 보물을 상징하는 불보·법보·승보의 사찰을 말한다.
불보사찰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양산 통도사. 법보사찰은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 그리고 승보사찰이 지금 만나 볼 순천의 송광사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송광사에서 나라의 최고 승려인 국사가 16명이나 배출됐기 때문이다.

삼청교 다리와 본찰
송광사  
 
송광사의 대표적인 경치로 손꼽히는 우화각과 삼청교를 건너 본찰로 들어갔다. 평일 이른 낮의 송광사에는 방문객이 거의 없어 고요하고 한적했다. 이렇게나 유명한 사찰을 유유히 둘러볼 수 있다는 것에 기분 좋았다.
송광사는 신라의 승려 혜린선사에 의해 길상사라는 명칭으로 창건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후 계속해서 수리와 중창을 거치다, 고려 시대의 승려 지눌이 이곳에서 가르침을 베풀며 발전했다. 고려의 승려 지눌은 한국 불교의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을 창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계산이라는 이름도 원래의 송광산에서 이때 개칭되었다.

꽃이 핀 배롱나무
큰 초록잎 사이로 보이는 송광사


  절의 면적이 지금까지 가본 절 중에 손꼽을 정도로 컸다. 하나의 절에서 국사가 16명이나 배출된 것은 아마 이런 규모의 덕도 크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이 많아야 뛰어난 인물도 나오기 쉬워지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고려시대 승려의 영향력은 대단히 강력했으니, 16 국사가 배출된 사찰의 명성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전국에서 수많은 청년이 송광사에 승려가 되기 위해 몰려들었을 것 같다. 절 마당에 ‘비사리 구시’라 해서 송광사 스님들의 공양을 돕던 밥통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크기가 욕조만 하다. 얼핏 보면 왜 나룻배가 산사 마당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또 이전에는 ‘십육조사진영’이라 해서 16 고승들의 초상화가 국사전 건물에 전시되어 있었다 한다. 하지만 70여 년 전, 안타깝게도 도둑이 들어 세 점을 제외한 나머지 영정들이 전부 도난당했다.


송광사 처마 아래에서 본 단청과 그림

  그렇게 송광사를 전부 돌아보는 데 한참이 걸렸다. 사람이 없으니 오히려 더 유심히 둘러보게 된다.
그러면서 중국인 서래와 한국인 형사 해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을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 서로에게 핸드크림과 립밤을 발라주는 모습. 법당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린 서래에게 손수건을 건네준 해준의 모습.
사실 내게 송광사는,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헤어질 결심’ 속 장면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박찬욱 감독님은 송광사의 어떤 면에 반해 이곳에서 영화의 가장 낭만적인 장면을 찍게 되었을까. 탕웨이님은 이후 송광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며 스님들과 아침 공양도 했다던데, 새소리만 남은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들다.
하기야 ‘헤어질 결심’뿐이 아니지. 천 년도 넘은 아득한 과거에는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승려가 목욕재계하고 불공을 드렸을지. 드높은 명성만큼이나 시간 속에 파묻힌 수많은 이야기가 궁금한 곳이다.

산사의 길 순천 선암사

  조계산 서편의 송광사에서 반대쪽 선암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차를 타고 가는 방법. 같은 산에 자리한 사찰이라 금방 갈 것 같지만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산을 빙 돌아가야 하는데 거리만 30킬로미터에 달하니 적어도 40분은 생각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걸어가는 방법이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조계산 도립공원 등산로를 통해 서로 이어져 있다. 다행히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산 중턱을 둘러 가는 길이라 경사도 적당하고 경치를 감상하기도 좋다.

 선암사로 향하는 개울
누각 강선루

  선암사로 향하는 개울을 따라 걷다 보면 무지개 돌다리 승선교와 누각 강선루를 볼 수 있다. 두 문화유산 모두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주변 환경과 운치 있게 어우러져 있어 많은 방문객이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곳이다.
그런데 선암사, 승선교, 강선루, 이름에 전부 신선 선(仙) 자가 쓰였다. ‘선암사’는 절 서쪽의 평평한 바위에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놀았다는 유래에서 만들어졌고, ‘강선루’도 신선들이 내려와서 노는 누각이다. 또 ‘승선교’는 신선들이 놀다 아침 해 떠오르듯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온통 신선들의 놀이터다.
그만큼 이 일대가 생로병사로 가득 찬 인간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의 부처님 세계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불교에서 무지개다리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산에 둘러싸인 하늘에서 본 선암사
사찰안에 있는 두개의 석탑
송광사의 돌담

  이번에도 경내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송광사에 비해 한결 더 차분하고 아담해 보였다. 과거 선암사는 건물만 100여 동 있었던 큰 절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부분 화재로 소실되고 20여 동만 남았다.
고요한 사찰인 선암사는 수행 총림이다. 승려들이 모여 함께 배우고 수행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사찰이란 뜻이다. 주변을 둘러싼 우거진 숲과 맑은 기운이 더없는 평온함을 선사하니,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수행이 될 듯하다. 사람보다 다람쥐 만나기가 더 쉬운 곳이다.

템플스테이 문
창문에 달린 동종

  사람이 사는 세계는 온갖 고통과 생사윤회가 끝없이 반복되는, 생로병사의 세계다. 그러나 불교에서 절은 부처님이 살고 있는 극락의 나라, 불국토(佛國土)이다. 이곳엔 근심, 걱정, 시기 질투, 증오와 원망이 없다. 오직 마음의 집착을 끊은 자만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절에 갈 때는 잠시나마 원래의 사바세계를 떠난다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 좋다. 일주문을 지나며 세속의 나를 떼어놓고, 해탈문을 지나며 모든 번뇌와 깨달음이 사실 하나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인생이란 본디 몸부림치면 칠수록 수렁은 깊어지고,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첩첩산중이라 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집착 번뇌를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기 위해 깊은 산사를 찾는다. 아예 사찰에 머물며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고 예불을 행하기도 한다. 정신건강적인 측면에서 과학적으로도 효과가 있다고 입증되는 ‘템플스테이’다. 선암사에서도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에 참가했던 사람 중에는 나의 아버지도 있었다.

물이 흐르는 개울가
물이 세차게 떨어지는 개울

  사실 내게 선암사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나는 몇 년 전, 가족 모두와 함께 선암사를 찾은 적이 있다. 나와 어머니, 아버지, 누나 이렇게 넷이 서울에서 차를 끌고.
주차장에서 절까지 가는 길이 꽤 길어서 넷이 한참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셋이었다. 당시 근심이 많았던 아빠에게 엄마가 템플스테이를 하는 게 어떻겠냐 권했고, 결국 아빠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암사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론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지 않는다. 기억에 짙게 남게 된 이유는, 그로부터 며칠 뒤 예고 없이 아빠가 집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빠는 불과 며칠 만에 절에서 탈출했다. 편의점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는 산 속에서,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버린 것이다.

  차 없이 나오기 워낙 힘든 곳인데, 아빠가 어떻게 서울까지 돌아왔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아빠 말로는 무작정 산에서 내려오니 순천 시내로 가는 차가 있어 얻어 탔다고 한다. 그 다음 여차저차 터미널을 찾아 고속버스를 타고 왔단다.
하여튼 도시로 돌아온 아빠는 전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한 편으론 아직도 그럴 에너지가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산사의 길 - 합천 해인사
산에 안개가 낀 해인사를 멀리서 본 모습

  서울에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경상남도 합천으로 갔다. 도착하고 바로 차를 빌려 북쪽의 가야산으로 운전해 갔다. 산골짜기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올라갔다. 합천 해인사는 가기 쉽다, 하고 말하기에는 양심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지금이야 그나마 도로가 잘 닦여 있지만, 예전, 이 지역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방문할 가치가 있나?’ 묻는다면 이건 대답이 쉽다. 예로부터 "조선 팔경"의 하나로 알려진 가야산은 수려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다 보니 수목이 울창하며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고, 신라에 편입된 후에는 국가의 제사를 지낸 명산이라 하니 경치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가볼 만한 곳이다.

계곡에 물이 흐르는 모습
숲이 우거진 등산로

  그리고 그러한 가야산 깊은 곳에 자리한 해인사는 내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해인사는 대한민국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해인사가 이전에 소개했던 순천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 중 하나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해인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여 보관하는 ‘법보사찰’이다.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전 기념석
해인사로 가는 길

  사실 해인사는 원래부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절은 아니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지만, 해인사는 이보다 400년 이른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이다. 더군다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은 조선 시대에 와서야 지어졌다. 본래 강화도에 보관하던 대장경을 조선 태조 때에 옮겨오면서 지은 것이다.
지금도 해인사 입구에선 창건 당시에 심었다는 나무를 볼 수 있다. 서기 802년, 승려 순응과 이정의 기도로 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감사하여 식수한 느티나무다. 두 스님은 이때 왕의 도움을 받아 해인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나무의 온전한 모습까지 볼 수는 없다. 그저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무려 1,200여 년 같은 자리에 서서 해인사 방문객들을 맞다가, 1945년 수령을 다해 고사했다.

산안개가 있는 해인사
옆에서 바라본 해인사
 
  느티나무의 마중을 받으며 해인사에 들어섰다. 가야산 두메산골에 파묻혀 있는 그윽한 산사다.
해인사는 귀중한 의미와 역사만큼 수많은 문화유산을 소유한 사찰이다. 국보는 6점, 보물은 21점을 소장하고 있다.
거쳐 간 이름난 인물들도 많다. 희랑 스님은 후백제 견훤의 제안을 뿌리치고 고려의 태조 왕건을 도왔는데, 이후 태조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해인사를 고려의 국찰로 삼고 중건을 지원했다.
또 조선 중기의 유정 스님도 해인사에서 입적했다. 임진왜란이 닥치자 몸소 뛰쳐나와 의승을 이끌고 왜군을 무찌른 그는, 우리에게 ‘사명대사’라는 존경심 담은 이름으로 익숙하다.
신라 말 ‘삼최’ 중 한 사람이자 뛰어난 문장가 최치원도 해인사에서 말년을 보내다 숨을 거두었다.
또 1817년 순조 17년에는 해인사의 수많은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적 있는데, 그때 당시 경상감사 김노경의 아들이 재건을 축원하는 의미로 ‘가야산 해인사 중건상량문’을 지었다. 뛰어난 서예와 그림 실력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 실학자, 추사 김정희다.

매달린 등에 둘러 싸여있는 석탑
해인사 내부 불상

  나는 늘 새로운 절에 방문하면 마지막으로 중수한 것이 언제인지 확인하고는 한다. 나무로 된 사찰 건물들이 화재에 취약하기도 하고, 임진왜란이나 6.25를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새롭게 지어진 경우도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긴 시간 화마를 피해 온전히 보전 중인 문화유산을 만나게 되면 반가우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해인사 역시 화재로 인해 7차례나 중수한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중수한 것은 조선 후기라 한다.

해인사의 계단
해인사 문사이로 보이는 스님의 모습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신기하게도 팔만대장경을 봉안하는 장경판전 건물만큼은 늘 화마를 피해 갔다는 것이다. 심지어 6.25 전쟁 당시에는 해인사 전역이 우리 군의 폭격 대상으로 지정된 적도 있었다. 좌익 성향 무장 테러 조직인 조선인민유격대가 기지로 삼기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의 긴박한 상황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지리산, 가야산 일대의 ‘빨치산 잔당 토벌’ 명령이 내려졌다. 명령을 받은 공군 김영환 대령은 전투기를 몰고 편대원들과 출격했다. 먼저 나섰던 미군기가 연막탄을 떨어뜨려 폭격 지점을 지정했고, 대한민국 공군의 임무는 그곳에 폭격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영환 대령은 편대원들에게 폭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전시 상황에서의 명령 불복종은 즉결 처분에 처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항명했다. 연막이 퍼져나가는 지역에는 해인사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쫓아내는 정도로 임무를 종료했고, 명령을 어긴 김영환 대령에 문책이 시작되었다. 김영환 대령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인사에는 700년을 내려온 우리 민족정신이 어린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프랑스가 파리를 살리기 위해 프랑스 전체를 나치에 넘겼고, 미국이 문화유산을 살리려고 교토를 폭파하지 않은 이유를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경판전 내부 모습
목판들이 꽂혀있는 모습

  오늘날 우리가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덕분이다. 두 문화유산은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각각 세계유산,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창문 사이 틈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나 역시 보고 또 봤다. 과거를 보여주는 요술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수백 년 전 고려 시대의 불교 경전이 지금까지 전해 온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바다 밑처럼 고요함에 잠긴 산사는, 늘 억겁의 세월도 지난 날의 기억처럼 느껴지게 만들고는 한다.

그림이 그려진 해인사의 한 벽면
하늘에서 본 해인사의 모습
에필로그

살면서 두 번, 한 계절이 넘는 시간을 산속에 들어가 살았다. 한 번은 호주 시골 산속 캠핑장 컨테이너에서. 다른 한 번은 지리산 정상 높이 조지아 산골 마을에 집 한 채를 빌려서.
말 나눌 사람도 없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도 없었다. 그래서 주로 하는 일은 온종일 책을 읽거나 산길 여기저기를 다니며 산책하는 일이었다. 밤에는 주야장천 별 보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지극히 단순하고 무료하며, 외롭고 심심한 시간이었다. 하루가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 것인지. 시간이 늘어지다 못해 더는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떠나온 원래의 세상은 계속해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겠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다른 시간 속에 살았다.

나는 늘 산에 오면 그때를 떠올린다. 머릿속에 복잡한 일이 많아질 때나, 내가 너무 현실적으로만 살아가게 될 때면 가끔 그리워하기도 한다. 신기한 일이다. 삶에서 가장 지루했던 시간이 오히려 짙게 남은 기억이 됐다. 때때로 삶이 파격적으로 단순해지는 데서 오는 만족감은 무엇보다 강력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산사를 걸으며 기분이 좋아졌다. 산속에서는 생존 경쟁에 불태우던 일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면서 조금은 더 궁극적인 목표를 생각하게 한다. 건강하게 살자, 던지 행복하게 살자, 같은 것들.
그 외에는 크게 없다. 단순한 풍경에서는 생각마저 단순해지는 것일까. 그러나 한껏 여유로워진 나는 어느새 그 단순함을 즐기고 있다. 나는 이것이 산사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선선히 부는 바람과, 뗑그렁 울리는 풍경 소리를 좋아하게 된다.


산사의 길의 맛 산채 비빔밥
산채비빔밥 골고루 섞인 산채비빔밥

  늘 등산로 입구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도시에서는 쉬이 팔지 않는 음식들을 판다. 엄나무 닭백숙, 능이버섯 오리 전골, 흑염소 떡갈비, 도토리묵, 더덕구이 등등. 대부분 산지에서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음식들이다. 그 중에서 단연 대표 메뉴는 산나물을 잔뜩 올려 내오는 산채 비빔밥이다. 대한민국 이름난 산중에, 산채 비빔밥 없는 산은 없을 것이다.
다만 만약 전통 사찰 음식을 하는 곳이라면, 대승불교에서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고기는 나오지 않을 수 있다. 더군다나 파, 마늘, 부추, 달래 등 냄새가 강한 오신채도 산채 비빔밥에 올라가지 않는다. 강한 자극이 번뇌를 일으켜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만 제외하면 고슬고슬 지은 밥에 취나물, 고사리, 참나물, 도라지, 더덕, 표고버섯, 시금치, 콩나물 등 어떤 나물이 올라가도 좋다. 고추장에 들어가는 고추는 오신채만큼 강한 향과 냄새가 없어 허용하는 곳이 많으니, 수행보다 맛이 우선인 우리에게는 다행이다. 매콤한 고추장과 풍미 가득한 참기름은, 개성 강한 모두를 강강술래 하게 만드는 산채 비빔밥의 반장 부반장이다.

  제대로 산채 비빔밥을 즐기려면 몇 가지 단계를 거쳐 먹는 것이 좋다. 먼저 온갖 산나물 가득 담긴 질그릇이 나오면,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나물의 맛을 음미한다. 일종의 자기소개 시간이다. 산채 비빔밥의 가장 큰 매력은, 근방에서 자란 식재료가 선물하는 신선함이다.

  그 다음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젓가락으로 밥과 나물들을 섞어 먹는다. 나물에 간이 되어있으니 슴슴하긴 해도 너무 싱겁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각 나물들의 본래 향을 살리면서 그 조화를 즐기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모든 나물들의 파악이 끝났을 때, 드디어 고추장이나 간장을 두르고 썩썩 비벼 먹는다. 사찰 음식을 먹으며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맛의 극락이다. 한껏 차분하고 편안해지는 맛이다.
박성호 작가 프로필 사진
by 박성호
국가유산 열개의 길 여행기
선사지질의 길 - 철원 고석정 - 포천 화적연 - 포천 비둘기낭 폭포 - 포천아트밸리

프롤로그 / 거대한 자연이 주는 위로

  나는 종종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꼭 세렝게티 초원이나 사하라 사막에 가야만 거대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까운 산에 올라 내가 살던 곳의 모습을 내려다보거나, 바닷가에서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자연을 느낄 수가 있다.

  내가 이렇게 거대한 자연을 찾아다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거대한 자연을 마주했을 때, 필연적으로 느껴지는 ‘작아지는 기분’을 좋아해서 그렇다. 그래서 한참이나 편안한 도로를 벗어나 힘겨운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한다. 거대한 자연이 주는 ‘작아지는 기분’이 사람을 치유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이런 기분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차츰차츰 무한한 자연이 나를 압도해 오는 기분. 이러한 자연이 나를 치유해 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연이 작게 만드는 것이 비단 나 자신 하나뿐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자연은 내 삶의 영역 전체를 작아지게 만든다. 평소 이 영역은 수많은 문제로 가득 채워져 있다. 관계의 문제, 성과의 문제, 금전적 문제. 이럴 때 거대한 자연이 주는 ‘작아지는 기분’이 도움이 된다. 내 삶의 영역 전체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삶을 채우고 있는 문제들도 함께 작아지는 까닭이다. 그러면서 내가 겪고 있던 문제가 실제로 큰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작은 영역 안에서 커다랗게 보였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내 삶 전체를 덮어 버려 매일 잠 못 들게 하던 커다란 문제가, 무한한 자연에 비해 한없이 초라하고 덧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작아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과 나의 차이를 줄어들게 만든다. 일상의 작은 공간에서 사람의 차이는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커지곤 하지만, 모든 인간을 한낱 먼지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개개인의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러니 나는 현실에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거대한 자연으로 떠나 보기를 권한다. 많은 경우 ‘작아지는 기분’이 우리의 정신을 치유해 줄 때가 있다.

  더군다나 자연의 고귀한 아름다움은 정화의 힘을 갖고 있기도 하다. 황홀한 풍경은 그것 자체로도 마음의 더럽혀진 부분을 깨끗이 씻어내기도 하므로. 이러한 자연의 위로는 어떠한 응원의 말보다 달콤할 때가 있다.

선사지질의 길 철원 고석정 - 고석정에 사람들이 서있는 전경
고석정 꽃밭과 도로를 위에서 본 뷰

  대한민국 최전방 강원도 철원군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북한 평강군이 있다. 평강군에는 해발 454m의 야트막한 산, 오리산이 있다. 둘레가 5리 정도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여러 차례 용암을 분출했던 화산이다.

  오늘 ‘선사 지질의 길’에서 만날 장소들은 이 오리산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한반도의 배꼽’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작은 산은 한반도 중부 일대 지질과 지형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오리산의 화산 폭발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중심 분출 형태로 일어나지 않았다. 한라산이나 백두산처럼 화산 중앙에서 격렬한 폭발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니 당연히 거대한 분화구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오리산은 열하분출 형태로 폭발했다. 쉽게 말하면 벌어진 지각 틈에서 스멀스멀 마그마가 흘러나온 것이다. 이렇게 흘러나온 마그마는 주로 점성이 약한 현무암질 성분으로 되어있는데, 잔잔하게 이루어지는 분출이다 보니 이후 식으면서 거대한 평야를 이루게 된다. 강원도에서 제일 넓은 평야인 철원평야는 이렇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빙하기가 찾아왔을 때는 이 거대한 평야가 전부 빙하로 뒤덮였었다. 다시 날씨가 다시 따듯해지고 빙하가 녹아내리자 엄청난 양의 물이 지표면의 틈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이전에 마그마가 굳어 현무암이 되는 과정에서 수축하며 만들어졌던 틈이다.

  결국, 이 틈은 조금씩 폭을 넓혀가며 온갖 기암괴석과 절벽을 만들어냈고 그 사이로 강이 흐르게 되었다. 이 강이 오늘 계속해서 만나게 될 한탄강이다.

드론에서 찍은 고석정 뷰
고석정 입구 문

  한탄강 유역은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강을 중심으로 한 지질 공원이다. 여기엔 용암 활동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지질 명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오늘 첫 번째로 만나 볼 장소는 철원 9경의 하나로 지정된 국민관광지 고석정이다.

고석정으로 내려가는 계단
고석정 정자

  고석정의 이름은 신라 진평왕 때 이곳에 만들었던 2층 누각에서 왔다. 지금의 정자는 한국 전쟁때 불타 없어진 것을 새로 지은 것이긴 하지만, 이곳은 오랜 옛날부터 한탄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이었다. 고려 때엔 충숙왕이 찾아와 머물렀고, 조선 영조 때는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가 요양을 하기도 했다.

 고석정 정면 화강암 바위 모습
고성적 위에서 바라본 물길
  이토록 고석정이 명성을 얻은 것은 신묘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화강암 바위 덕분이다. 높이 약 15m에 달하는 이 바위는, 오랜 시간 용암 대지에 묻혀 있다가 한탄강의 침식작용에 의해 땅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니 이 일대에서 지구의 가장 오랜 기억을 담고 있는 바위 중 하나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 화강암 바위가 형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억 1천만 년 전인 백악기 중기로 추측하고 있다. 공룡이 멸종하기도 전의 이야기다.

고석정에 배가 지나가는 모습

고석정 물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고석정 일대는 임꺽정의 은거지로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임꺽정은 조선 시대 실학자인 성호 이익 선생이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으로 꼽은 인물이다.

  양주 출신의 백정이었던 그는 도적 무리를 이끌고 여러 지역에 신출귀몰 출몰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명종은 직접 어명을 내려 임꺽정을 토벌하는 데 주력했는데, 임꺽정은 그럴 때마다 고석정 석굴에 숨어들어 은거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꽃밭 가는길 입구

하늘에서 바라본 고석정 꽃밭

  만약 고석정을 방문하게 된다면 고석정 꽃밭이 개장하는지도 꼭 확인해 보도록 하자. 철원 고석정 꽃밭은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눈부시게 피어난다. 내가 이곳에 방문했던 것은 11월 초의 가을날이었는데, 다행히 꽃밭이 마지막으로 개장하는 날이어서 입장할 수 있었다.

분홍색 꽃밭

붉고 노란색인 꽃 군락

꽃받 사이 길로 지나 가는 깡통열차

  원래 이곳 꽃밭은 탱크가 기동 훈련을 하던 군부대 장소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포성 소리를 내며 훈련하던 탱크는 사라지고, 꽃밭을 손쉽게 돌아볼 수 있는 깡통 열차가 느릿느릿 돌아다니고 있다.

  고석정 꽃밭은 시기에 따라 볼 수 있는 꽃의 종류와 규모가 다르다. 봄에는 노란색 유채꽃밭이 드넓게 피어나고, 가을에는 더욱더 다채로운 꽃밭이 펼쳐진다. 내가 방문했던 당시에 가장 선명한 색을 뽐내던 것은 거대한 촛불 맨드라미 군락이었다. 붉고 노란 두 가지 색의 대비가 들판에 뚜렷한 줄무늬 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선명한 색을 뽐내는 맨드라미 군락
노란색 맨드라미 한송이
한탄강 물줄기가 보이는 하늘에서 본 꽃밭

  이제 꽃밭에서 나와 한탄강 물줄기를 따라 함께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강원도 철원군의 남쪽 면은 경기도에서 가장 면적이 큰 도시와 맞닿아 있다.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해 이름 또한 ‘물을 품은 곳’으로 지어진 도시, 경기도 포천시이다.

선사지질의 길 포턴 화적연

화적연을 위에서 바라본 드론샷

  경흥로라는 도로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도로망을 인체의 혈관에 비유했을 때, 동맥에 해당하는 주요 줄기를 간선도로라 한다. 조선 시대에도 이러한 간선도로가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한양의 도성에서 한반도 동북부 함경도로 이어지는 간선도로가 경흥로였다. 당시 조선에는 죄지은 관리들을 북쪽 변방으로 유배 보내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경흥로는 고통의 귀양길이었을 것이다.

한탄강에 물이 비친 전경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

  그러나 또 누군가에게 경흥로는 즐거운 유람 길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금강산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경흥로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한탄강 유역의 경치 좋은 장소들도 일찍이 선비들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중 금강산을 가는 여정 중 포천 지역의 이름난 8곳의 명승지는 특별히 ‘영평팔경’이라 불렀다. 영평은 당시 포천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다.

화적연을 왼쪽 위에서 본 모습
화적연을 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모습
  그리고 그 영평팔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 오늘의 두 번째 방문지인 화적연이다. 한탄강 물줄기가 굽어 나가는 곳에 13미터 높이로 우뚝 솟아있는 화강암을 말한다. 화적연이라는 이름은 바위가 마치 볏단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화적연이 나와있는 관광안내판 - 영평팔경

햇빛이 비추는 화적연 화적연을 하늘에서 본 모습

  화적연은 철원의 고석정만큼 규모가 크지도 않고 관광객도 많지 않다. 그러나 진기한 모습의 바위가 만들어내는 영험한 분위기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왜 선비들이 이곳을 영평팔경의 으뜸으로 꼽았는지 알만하다.
 
  조선 시대 화적연을 주제로 수많은 그림이 그려지고, 수많은 시가 쓰였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은 금강산 가는 길에 명승을 그린 ‘해악전신첩’에 화적연을 남겼고, 조선 후기 영의정을 지낸 허목은 금강산 유람기에 ‘화적연기’를 남겼다. 이 외에 많은 문인들은 화적연의 바위를 엎드린 용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 화적연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어느 날 한 늙은 농부가 극심한 가뭄에 지쳐 연못가에 앉아 한탄했다. “물이 이렇게나 많은데 곡식을 말려 죽여야 한다는 말이냐? 하늘도 무심해서 용도 낮잠만 자는가 보다” 그러자 물이 왈칵 뒤집히며 용이 강물에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날 밤부터 비가 내려 풍년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전설 덕분인지 화적연은 조선시대 국가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은행나무와 나무들
은행나무잎을 확대한 모습
  화적연은 솟아있는 화강암 바위 외에도 한적히 경치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바로 옆에 캠핑장이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강가로 소음이 닿지 않는다. 주요 차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수영도 금지되어 있으니, 고요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만족스러울 곳이다.

선사 지질의 길 - 포천 비둘기낭 폭포
한탕강 물줄기와 Y 자 모양 다리 위에서 바라본 드론샷

  한탄강의 한은 거대하다는 뜻이고 탄은 여울을 뜻한다. 그러니 한탄강은 ‘큰 여울’이라는 말에서 왔다. 여울은 강이나 바다에서 유독 물살이 빠르며 졸졸 소리 내는 곳을 뜻하니, 그만큼 한탄강은 거칠고 박력 있는 강이다. 과거에는 인명 사고도 잦았다고 하는데 요새는 되려 이런 특성을 활용하여 래프팅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한탄강 명칭에 관한 다른 유래에는 이런 것도 있다. 후고구려를 다스리던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나며 이 강 주변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던 탓에 한탄강이 됐다는 이야기. 혹은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한탄강을 건너지 못해 한탄했다는 이야기.

한탄강 근처의 땅

돌틈 사이로 흐르는 물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한탄강이 ‘대탄강’, 큰 여울이 있는 강으로 적혀있는 것으로 보면 이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탄강의 ‘탄’은 ‘탄식할 탄(歎)’보다는 ‘여울 탄(灘)’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임꺽정과 궁예, 6.25 피난, 계속해서 한탄강에 얽힌 이야기에 은거나 탄식하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지형적 특성 때문이다. 평평한 땅 사이 틈으로 용암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한탄강은, 가까이 가지 않으면 대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밑으로 푹 꺼져 있는 협곡 사이로 물길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숨을 곳도 많고, 자칫 잘못하면 절벽 사이에 고립되어 버릴 수 있는 곳도 많다.

  한 마디로 용암 지대의 강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지표면을 흐르던 용암은 아래로 흘러내리며, 땅 밑에 수많은 보물 같은 풍경들을 만들어 냈다. 이번에 방문할 장소가 바로 이러한 장소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한탄강 지질공원 안에 지구가 있는 조형물
단풍나무 사이로 보이는 협곡

  포천시 영북면에 자리 잡은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에 도착했다. 천연기념물이자 한탄강 8경 중 하나인 비둘기낭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협곡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비둘기낭 폭포를 만나보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은 지질 용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주상절리이고, 다른 하나는 하식 동굴이다.

  우선 주상절리는 용암 유출로 형성된 화산암 지형에서 흔히 발견되는 지질구조이다. 모습은 육각기둥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분출된 용암이 급격한 온도 변화로 수축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주상절리는 필연적으로 지형에 많은 불연속적 틈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 때문에 하천에서는 틈을 따라 물에 의한 풍화·침식이 쉽게 일어나게 된다. 특히나 폭포가 있다면 떨어지는 물의 와류에 의해 절벽 아래쪽에 거대한 동굴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게 바로 하식동굴이다.

비둘기낭
비둘기낭에 지형을 확대한 모습
  이제 비둘기낭 폭포의 지형이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는지? 아쉽게도 최근 비가 내리지 않아 떨어지는 물줄기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비둘기낭 폭포는 화산 활동으로 인한 침식 지형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였다. 깊은 협곡과 현무암 주상 절리, 용암 대지, 폭포, 하식 동굴 등 한탄강의 다채로운 풍경들은 모두 뜨거운 용암의 분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물과 바람이 억겁의 세월 동안 천천히 조각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물이 흐르는 비둘기낭

  비둘기낭 폭포의 물은 동굴 왼쪽으로 떨어진다. 수량이 많은 날에는 물안개를 만들어 낼 정도라 하는데, 나는 아쉬운 대로 사진에 물줄기를 그려 넣어 봤다. 확실히 폭포가 떨어지고 있으니 한껏 분위기가 살아났다.
이곳은 예로부터 겨울이면 수백 마리의 산비둘기가 서식해 비둘기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주변의 수풀이 우거져 위에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6·25전쟁 당시에는 마을 주민의 대피시설이나 군인들의 휴양지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찾으려 하는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숲속에 숨은 천혜의 비경이다.

선사지질의 길 포천 아트밸리
단풍이 든 아트밸리 하늘에서 본 모습

  이제 한탄강 물줄기를 벗어나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40분쯤 내려오다 포천 시내에 진입하기 직전 왼쪽으로 꺾으면 거대한 주차장이 있는 산기슭에 닿는다. 이번 선사 지질의 길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할 곳은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 같은 산, 천주산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

모노레일이 지나가는 모습
모노레일 안에서 본 올라가는길

  나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편도로 모노레일 기차표를 끊었다. 입구에서 이어지는 길이 길지는 않지만, 경사가 상당한 탓에 모노레일을 타면 편하게 올라갈 수 있다.

  포천 아트밸리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장소들과 가장 다른 점은 사람의 손길이 짙게 닿은 곳이라는 점이다. 고석정과 화적연, 비둘기낭이 자연이 만들어낸 예술품이라면, 포천 아트밸리는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원래 화강암을 채석하던 채석장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본 아트밸리
하늘에서 옆으로 본 아트밸리 드론샷

  경제 발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이곳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강암 채석장이 있었다. 재질이 단단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포천석 화강암을 채석하는 곳이었다. 포천석은 품질이 우수해 우리나라 국가 주요 기관을 짓는 데에도 빈번히 사용되었다. 예컨대 청와대, 국회의사당, 대법원, 경찰청, 인천국제공항, 세종문화회관 등이 포천석으로 지어졌으니,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엔 성장통도 생기기 마련이다. 30년이 흐른 1990년대 이후엔 더 이상 양질의 화강암을 얻기가 어려워졌고, 그때부터 이곳은 버려진 공간으로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다. 하지만 2004년, 포천시는 5년의 노력 끝에 이곳을 복합 예술 문화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훼손된 자연을 우리 곁으로 되돌리기 위한 반성의 의미였다.

아트밸리 풍경
물에 비치는 아트밸리
  모노레일을 타고 천주호에 도착했다. 화강암을 파 내려갔던 웅덩이에 빗물과 샘물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비교적 어린 호수다.
호숫가에서 바라보는 아트밸리 협곡의 모습은 가위 장관이다. 지구가 만들어낸 자연적인 바위의 모습과 인위적으로 깎아낸 매끈한 절벽이 뒤섞여 몽환적이고 오묘한 풍경을 선사한다. 한국에서 본 적 없는 경치에 어딘가 외국에 온 것만 같은 이국적인 기분도 든다.

아트밸리의 화강암
쑥색의 검푸른 알갱이들이 있는 모습

  화강암은 마그마가 천천히 식으면서 만들어지는 돌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화강암’보다는 순우리말인 ‘쑥돌’이 쓰였다고 하니, 이곳에, 채석장에 있던 시절에는 ‘쑥돌’로 불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검푸른 알갱이들이 잔뜩 박혀있는 모습이 네모반듯한 쑥떡과 닮아있다.

아트밸리에서 내려가는 계단
아트 밸리 절벽을 하늘에서 본 드론샷
  만약 천주호와 절벽의 경치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싶으면 나무 계단을 따라 하늘정원으로 올라가 보자. 하늘정원에서는 천주산과 호수공연장, 조각공원의 풍경까지 모두 만나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아무도 찾지 않던 폐채석장이, 노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나는 오늘 여행을 함께 한 엄마와 함께 이 하늘정원에 올랐는데, 둘이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으면 좋겠다.’ 우리만 보고 감탄하기엔 너무도 아쉬운 풍경이었다.

나무와 돌이 보이는 풍경
에필로그

  올해 초에 과테말라 아카테낭고 화산에 다녀왔다. 4년 전에도 방문했던 곳이다. 굳이 내가 이 먼 곳을 다시 찾은 것엔 이유가 있다. 아카테낭고 화산 해발 4,000m 부근엔 건너편 화산 봉우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근사한 베이스캠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연기만 뿜어져 나오는 풍경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지구에서 몇 군데 되지 않는, 밤새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여러 의미로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몸은 악마 같은 고산병과 살을 에는 추위로 한껏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의식이 희미해지며 고통이 옅어질 때마다 무지막지한 폭발음이 천둥처럼 울렸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굉음이었다.

  어쩌면 화산 내부는 로또 추첨 통처럼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는 직경 수 미터는 되는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한꺼번에 굴러다니는 듯한 그 소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동안 돌 끓는 그 소리가 계속되다 폭발하는 순간에는 지진과 천둥소리가 뒤섞인 굉음을 낸다. 각종 화산 쇄설물들이 로켓처럼 튀어 오르고, 곧 검은 구름이 재앙처럼 뿜어져 나온다. 그러고는 끈적거리고 새빨간 마그마가 과음한 것처럼 울컥울컥 게워 내온다.

  이번 ‘선사 지질의 길’을 걸으면서, 눈앞에서 보았던 화산의 폭발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 그려졌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들도 결국에는 그런 장면에서 시작이 되었겠구나, 하면서. 가늠할 수 없이 깊은 시간과 규모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래서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는 여행이 좋다. 평생을 도시에 살아가는 나는, 나도 모르게 인간 중심적으로 세상에 대해 바라보게 될 때가 많다. 작디작은 사람의 시선으로 지구를 바라보고 세상을 생각한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을 여행하다 보면 이따금 거대한 지구를 중심으로 사람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한하고 거대한 시선에서 그 안에 놓여 있는 사람의 작은 삶에 대해 바라보게 된다.

선사 지질의 맛 메밀 막국수와 메밀전 포크 이미지

메밀 막국수와 메밀전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볼 수 있는 음식이라면 단연 메밀 요리이다. 지금은 강원도를 감자의 고장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한반도에 감자가 전해진 것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고 삼국시대 이전부터 강원도는 메밀의 고장이었다.

  산간 지역에서 메밀은 무척이나 고마운 구황작물이다. 구황작물은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준 작물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기후의 영향을 적게 받고, 비교적 척박한 땅에서도 기를 수 있어야 할 것. 또 수확하기까지의 재배 기간이 짧아야 할 것. 메밀은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 더군다나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니,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산간 지방에 안성맞춤이었다.


  오늘날 한탄강 일대에서도 메밀 요리를 하는 식당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로 메밀막국수와 메밀전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막국수에 닭고기 육수를 부어 먹는 집이 많았다고 하나, 요즘에는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내놓는 집이 대부분이다. 먹는 방법이야 어렵지 않다. 젓가락 가는 대로 차가운 국수를 후루룩 떠먹고, 따듯한 메밀전을 대충 찢어 먹어 균형을 맞춘다.

  애초에 막국수는 각 잡고 세련되게 먹는 음식이 아니다. 막국수의 어원은 메밀을 거칠게 ‘막’ 갈아 뽑은 국수라는 설도 있고,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만들어 냈다는 뜻에서 ‘막’ 만든 국수라는 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막국수는 같은 어원을 쓰는 ‘막 거른 술’, ‘막걸리’가 제짝이라 할 수 있다. 막국수 한 젓가락엔 메밀전 한 젓가락, 그리고 막걸리 한 사발. 마침, 물맛 좋은 포천에는 막걸리가 유명하니, 이래저래 다 계획된 일이다. 맛의 한통속이다.

 
박성호 작가님 사진
by 박성호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 - '국가유산 열 개의 길' 여행기 설화와 자연의 길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 - 설화와 자연의 길 여행 경로 소개 출발-성산일출봉 - 산방산 - 용머리해안 - 주상절리 - 쇠소깍 - 거문오름

프롤로그 / 떠날 길이 하영 남았다

  나는 직업 여행가로 살고 있다. 좋건 나쁘건, 늘 떠나 있거나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삶이다. 내게 일상은 언제나 이 둘 중 하나다. 다행히 아직은 젊고 팔팔하니 썩 나쁘지 않은 일이다. 세월이 흘러 그 후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걸 걱정하고 살았다면 시작도 하지 못했겠지.

  여하간 올해도 세계 방방곡곡 떠돌다 한국에 돌아왔다. 이제 한 달 조금 넘었을까? 오랜만에 내방 방바닥에 누워 ‘당분간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겠군’ 하고 있었는데, 돌연 ‘국가유산 열 개의 길 여행기’를 연재하게 됐다.
뭐, 고작 열 개면 쉬엄쉬엄 다니면 되겠구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길 하나에 다녀와야 할 장소가 대여섯 개씩 있다. 그것도 전국 금수강산 곳곳에 퍼져서. 천천히 정리해야지, 하고 구석에 박아뒀던 배낭이 그대로 있길 다행이다.

  어디를 먼저 가야 할까? 열 개의 길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여행지를 고를 때, 어떤 기준으로 고르시나요?” 그러고 보니 종종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반복된 질문은 일종의 모범 답안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라,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내가 평소에 보고 사는 풍경과 얼마나 다른지를 첫 번째로 생각해요.”
여행이 많아지다 보니 떠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그 때문에 내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떠나서 실제로 ‘떠났다’라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단순히 몸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떠나는 것이다. 좋은 의미의 ‘일탈’이야 말로 내가 원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그러니 이런 내게, 제주도야말로 긴 여행의 포문을 열기에 제격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제주도에 가는 것이 언제나 즐겁고 설렌다. 수십 번을 다녔는데도 그렇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야자수의 이국적인 풍경이 여전히 ‘떠나왔다’고 느끼게 한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랬다. 배낭을 메고 공항을 나서자마자 제주의 세찬 바람이 나를 반겼다. 하늘은 프러시안블루로 맑게 개었다. 자연스레 방구석에서 재충전을 꿈꾸던 마음이 쓰윽 열렸다.
이런 산뜻한 시작이라면 얼마든지 떠나도 좋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제주 말로 하영(많이) 남았지만, 무엇이 나를 막으리.
세상엔 설레는 출발만큼 기분 좋은 것이 없다. 나는 곧장 동쪽으로 향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 - 설화와 자연의 길 제주 성산 일출봉 천연보호 구역
  제주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찾는다는 으뜸 명소, 성산 일출봉을 찾았다.
로마에 간 사람이 콜로세움을 찾고 파리에 간 사람은 에펠탑을 찾듯이 제주도 하면 ‘성산 일출봉’, 하고 어려서부터 익히 보고 들었다. 심지어는 ‘성산 일출봉에 오르지 않고 제주도에 다녀왔다 말하지 말라’ 하는 사람도 봤다.
나는 이 정도 유명한 곳엔 반기를 들고 싶을 때가 있다. ‘흥, 나는 그런 여행자의 의무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무관심한 척하고 싶어진달까. 확실히 어른스러운 짓은 아니지만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4-성산일출봉 안내석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5-성산일출봉 산책로 사진
  하지만 이런 나도 성산 일출봉은 여러 번 올랐다. 처음은 언젠가 수학여행 왔을 때 못 이기는 척하며 터덜터덜 올랐고, 그 후론 운동하는 셈 치고 자발적으로 올랐다. 그러면서 늘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괜히 으뜸 명소가 아니야. 멋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그러나 여전히 완전히 지고 싶지는 않아서, ‘제주도에 다녀왔다 하려면 최소한 백록담은 올라 봐야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아마 백록담은 오르기 쉽지 않은 터라 성산 일출봉이 ‘제주도의 상징적인 명소’ 타이틀을 대신 차지한 게 아닌가 싶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6-등경돌 사진
  성산일출봉을 오르면서 눈에 띄는 건 계단 옆에 우뚝 솟아있는 ‘등경돌’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돌은 어느 할머니가 바느질하는데 등잔을 올려놓았던 받침대라고 한다. ‘아니 무슨 이렇게 거대한 돌 위에 등잔을 올려놓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바느질하던 할머니의 키가 워낙 컸다.
전설 속 이 할머니의 이름은 ‘설문대할망’. 키가 어느 정도로 컸냐 하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워 다리를 뻗으면 발끝이 제주도 앞바다 관탈섬에 걸쳤다고 한다. 지도에서 이 거리를 재어보면 대략 40킬로미터쯤 된다. ‘설문대할망’이 매일 등경돌에 불을 켜고 바느질을 한 것은 옷이 한 벌 뿐이라 그렇다는데, 한 벌이라도 맞는 옷이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7-정상에서 내려다본 성산일출봉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8-성산일출봉에서 내려다본 풍경 사진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인 게 무척이나 상쾌했다. 한눈에 담기는 광활한 풍경에 나 역시 거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제주도를 여행할 때 이 ‘설문대할망’ 설화를 따라가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애초에 푸른 바다 한가운데 제주도를 만든 장본인이 ‘설문대할망’이기 때문이다. ‘설문대할망’은 육지에서부터 치마에 흙을 퍼 담아와 섬을 쌓았다. 아무리 깊은 바다도 무릎 위를 넘기지 않았다고 하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섬 가운데 남은 흙을 모두 털어 넣어 한라산을 만들었다. 다만 이게 너무 높고 뾰족하다 보니 앉기 불편해서 봉우리를 꺾어 멀리 던져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푹 파여 있는 백록담이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설문대할망’이 멀리 던져버린 봉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 봉우리를 찾기 위해 정상에서 내려와 남서쪽 해변으로 차를 몰았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9 - 설화와 자연의 길 산방산 & 용머리 해안
  제주에는 3대 명산으로 불리는 산이 세 개 있다. 하나는 중심의 한라산, 하나는 동쪽 끝의 성산일출봉.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한라산 봉우리를 뚝 떼어다가 던져버려 만들어졌다는 서남단의 명산, 산방산이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0-산방산 부감 사진
  서귀포 시내를 지나 서쪽으로 향할수록 산방산이 멀리서부터 웅장함을 뽐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네비게이션이 필요 없다. 평탄한 지형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으니, 그것만 보고 따라가면 된다.
산방산이 한라산의 꼭대기라는 전설이 생겨난 이유는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백록담의 지름과 산방산 밑 둘레가 얼추 비슷하게 맞아떨어지고, 한라산 정상의 돌 재질이 산방산과 마찬가지로 조면암으로 되어있다. 더욱이 산방산 생김새가 분화구 없는 종 모양으로 생겼다 보니 한라산의 비어있는 머리를 채워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1-산방굴사 불상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2-산방굴사 사진
  산방산 매표소로 입장해 산책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산방이라는 이름은 산 중턱에 방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산책로의 끝에 있는 해식동굴 산방굴을 말한다. 이 안쪽에는 불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산방굴사라고 하였다.
산책로로 갈 수 있는 건 이 산방굴사까지다. 산방산 암벽에는 학술 가치가 높은 희귀한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그 때문에 산방산의 문화유산적 가치 보존과 천연기념물인 암벽 식물지대 보호를 위해 이외의 지역은 입산이 금지되어 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3-산방산에서 바라본 용머리 해안 풍경 사진
  계단을 올라가다 뒤돌아보면 용머리 해안의 근사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물결치듯 유려하게 굽어있는 모습이 왜 용머리해안인지 굳이 의문을 품지 않게 한다. 산방산 자락에서 바다로 뻗어나가는 역동적인 기세의 용이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4-산방굴사 굴 내부 불상 사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해발 150m 부근의 산방굴사에 도착했다.
가장 윗단엔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어 정면으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굴은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 굴 내부 천장의 암벽 사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똑똑 소리를 내며 고요한 동굴 안을 깨운다. 그 소리가 어째 영험하게 느껴진다 싶더니 역시나 산방덕의 눈물이란 전설을 품고 있다.
  산방덕은 하늘나라 선녀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고성목이라는 나무꾼과 결혼했다.
그러나 대부분전설엔 해피엔딩보다는 구슬프거나 애틋한 이야기가 많다.
고을의 사또가 그녀의 미모에 빠져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사또는 남편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강제로 둘을 이별하게 만든다. 이에 분노한 선녀는 산방굴사로 들어와 며칠을 목 놓아 울다가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은 산방덕의 눈물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5-내려다본 마을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6-내려다본 해안가 사진
  이토록 슬픈 전설을 담고 있는 산방굴사이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마침, 이른 아침 시간이라 아무도 없이 조용히 감상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엔 절벽으로 둘러싸인 송악산도 보였다. 그 뒤엔 평평한 가오리를 닮은 가파도가 있었고, 그 뒤엔 대한민국 최남단 섬인 마라도가 보였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7 - 마라도 여객선 선착장 marado excursion ship wharf 화살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8-파도치는 모습
  그리고 사실 마라도는 내 다음 여정이기도 했다. 멀리서도 또렷이 보이는 모습에 미리부터 반가웠는데, 산방산을 내려와 해안으로 가보니 파도가 몹시도 성나 있었다. 배에서 꽤 고생하겠구나, 했는데 조금이라도 고생할 일은 없었다. 그날의 모든 출항이 결항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로 실망한다거나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조금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당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긴 시간 여행하며 얻은 것 중 하나는, 예상 못한 상황에 대한 맷집이다. 나한테 여행은 늘 우연함을 찾는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제주도에는 바람이 많이 불수록, 파도가 거셀수록 좋은 곳도 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9 - 설화와 자연의 길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주상절리는 자주 찾게 되는 곳은 아니다. 푸른 제주 바다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앞의 육각형 기암괴석은, ‘으음, 신기하게 생겼네.’ 하고 처음 몇 번만 관심을 가질 뿐이니까.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면, 어쩐지 심상찮은 파도가 몰려온다면 꼭 한 번 주상절리대를 찾아보길. 그런 날의 주상절리는 숨겨놓은 발톱을 꺼내 드는 사나운 맹수 같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0-파도치는 주상절리 사진
  철썩, 집채만한 파도가 칠 때마다 절벽을 타고 올라와 하얀 포말로 부서진다. 바람에 날려 와 차갑게 얼굴을 때린다. 나는 도마 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횟감의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파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엄청났다. 세상의 어수선함을 한 방에 정리해 버리는 압도적인 힘이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도시에 살며 늘 느꼈던 ‘인간은 참 대단해’하는 생각이 순수한 소꿉장난처럼 느껴진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1-주상절리 하단부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2-주상절리 지질 확대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3 - 설화와 자연의 길 제주 서귀포 쇠소깍
  바닷바람이 제법 소슬하게 느껴질 즈음, 이번엔 주상절리와는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쇠소깍을 찾았다. 쇠소깍은 담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깊은 웅덩이 지형인데, 제주 낱말로 쇠소는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의 연못을 의미하고 깍은 끝을 의미한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4-쇠소깍 부감 사진
  바람은 여전히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모래 해변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쇠소깍의 수면은 놀라울 만큼 잔잔했다.
쇠소깍의 매력은 바로 이 대비에 있다. 한순간 다른 세계로 뛰어든 것처럼 만드는 극적인 대비. 더욱이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져 만들어진 기암괴석과 울창한 삼림은 마치 이곳을 신비한 비밀의 장소처럼 보이게 만든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5-레저를 즐기는 여행객들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6-쇠소깍에서 카약타는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 신비한 명소에 전설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유난히 푸르고 투명한 쇠소깍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므로, 과거에는 이곳은 ‘용소’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름에 가뭄이 들면 용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과거에는 신성시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물놀이하거나 돌을 던지는 것도 못 하게 했다는데, 지금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노 젓는 카약이나 전통 뗏목 ‘테우’를 타며 경치를 즐기고 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7- 테우 타는 사람들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8- 쇠소깍의 풍경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9 - 설화와 자연의 길 제주 거문오름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그동안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며 바다는 충분히 보았기 때문에, 여정을 마무리할 장소로 거문오름을 찾았다. 숲이 우거져 검게 보이기 때문에 ‘검은 오름’이란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0-거문오름 부감 사진
  참고로 오름이란 단 한 차례의 분출만을 일으키고 명을 다한 화산을 말한다. 다시 말해 아주 오래전 지구에서 장렬히 전사한 화산들의 무덤이랄까.
물론 이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고, 전설에 따르면 오름 역시 ‘선문대할망’의 작품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할망이다. 다만 일부러 의도해서 만든 것은 아니고, 치맛자락으로 흙을 옮기다 실수로 흘린 것들이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1-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 간판 사진
  제주도 전역에는 360여 개의 수많은 오름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거문오름이 유일하다. 그만큼 자연유산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개별적인 출입이 어렵고, 대신 자연환경 해설사를 따라 함께 탐방로를 걸을 수 있다.
나는 미리 전날에 오전 첫 번째 트래킹을 예약해두었다. 약속한 시각이 되자 서른 명의 여행객이 입구에 모여 함께 숲으로 출발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2-빽빽한 나무들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3-나무들 사이 산책로 사진
  입구에서부터 삼나무와 편백, 소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빼곡히 자라나 있었다. 나무들의 촘촘한 잎 사이로 가느다란 빛발이 새어 들어오긴 했지만, 숲속을 환히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과연 ‘거문오름’이라 부를 만 했다.
처음 약 30분가량은 계속해서 오르막길이 이어져 있지만, 무성히 자란 나무가 해를 완전히 가리고 있어서 제법 서늘했다. 걷기에 딱 좋은 길이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4- 잘린 나무에 이끼가 자란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5- 노루 사진
  혹여나 제주의 여느 다른 오름처럼 탁 트인 전망을 기대하고 찾았다면 거문오름은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문오름 탐방로에는 숲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구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오름의 정상조차도, ‘이곳이 정상입니다.’하는 표지판만 있을 뿐 좌우가 긴 동굴처럼 막혀있다.
하지만 신비로운 숲의 생태를 관찰하기 좋아한다면, 축축한 습기를 통해 전해오는 싱그러운 풀 내음을 좋아한다면 거문오름은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가 된다. 지층 변화로 생긴 풍혈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천연 에어컨 역할까지 해주니 말이다. 더욱이 세상을 덮은 신록의 풍경은, 초록이 얼마나 싱그럽고 생기 있는 색인가 느끼게 한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6- 거문오름 주변 오름 설명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7-산책로를 오르는 관광객들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에필로그

  푸른색 이 길을 끝으로 첫 번째 ‘설화와 자연의 길’ 여행을 마무리했다. 문자 그대로 제주도의 이야기와 자연을 따라 걷고 오르다 보니 어느새 끝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설문대할망’ 전설 중에 말하지 않은 내용이 하나 더 있다. 언젠가 제주도가 다 만들어져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다.
설문대할망은 자신이 입을 속옷을 만들기 위해 명주 100동을 모아 달라고 제주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명주 1동은 50필인데 한 필의 길이는 대략 20m나 된다. 그러니 명주 100동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 때문에 설문대할망은 보답으로 제주에서 목포를 잇는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는 생기지 않았고, 제주도는 지금까지 그대로 섬으로 남아있다. 딱 99동을 모으고 하필이면 한 필이 모자랐던 탓이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아마 한 필이 부족했던 건 설문대할망이 숨겼거나 거짓말을 한 까닭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 한 필이 모자를 리 있나. 아무리 전설이어도 말이다.

  하여간 제주도는 발길 닿는 곳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니 참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제주도의 풍경이 단조롭고 밋밋함 투성이였다면 이런 전설이 먹혀들 리 없었을 것이다. 단언컨대, 제주도에 전설이 넘쳐 나는 건 순전히 자연 덕이다. 이런 신비로운 자연에서는, 때로는 영화 같은, 때로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잔뜩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제주도는 태생이 그런 섬이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8 - 설화와 자연의 길의 맛 갈치국 & 흑돼지
  끝으로 ‘설화와 자연의 길’ 여행에 어울리는 맛을 추천해 본다.
나는 사람의 기억은 오감을 통해 짙게 남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피부로 다양하게 느낄수록 그 흔적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다.
그러니 여행에서의 음식은 이른바 ‘추억의 방부제’ 같은 거다. 말이 요상하긴 하지만, 그만큼 음식은 여행의 기억을 한층 선명하게 만든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9 - 갈치국
  추천하는 첫 번째 음식은 갈치국이다. 갈치조림은 먹어봤어도 갈치국은 처음 듣는다고? 그럴 수 있다. 지방이 많은 갈치는 자칫 잘못하면 비린내가 심하게 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갈치로 국을 끓여 먹는 것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갈치국은 ‘가장 제주다운’ 향토 요리라 할 수 있다. 제주 앞바다에서 공수한 싱싱한 제주 은갈치에, 큼직하게 썬 호박과 얼갈이배추. 여기한 칼칼한 매운 고추가 전부인 갈치국은 그야말로 제주도 갈치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40 - 흑돼지
  제주도의 맛을 꼽는데 흑돼지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제주도에 가면 흑돼지를 먹는다.’ 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의례처럼 자리 잡아서, 제주도 여행을 했는데 흑돼지를 먹지 않는다면 무언가 이야기의 완결을 내지 못한 기분이다. 불판 위에 잔뜩 졸인 멜젓에 흠뻑 담가 먹는 흑돼지. 그 맛은 말해서 무엇하리.
그래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저녁도 의례적으로 흑돼지를 먹었다. 점심을 많이 먹은 상태였지만, 평소 같으면 양을 조절했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오늘은 여행기를 쓰기 위함이니까.’ 하는 책임감으로 양껏 먹었다. 나는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인가 보다. 오겹살도 먹고 항정살까지 먹었다.
언젠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왔을 때, 흑돼지 두루치기 하나를 건장한 학생 여럿이 나눠 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어 여행을 떠난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박성호 작가 사진
by 여행작가 박성호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 - '국가유산 열 개의 길' 여행기 왕가의 길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 - 왕가의 길 여행경로 소개: 출발 - 강화 고인물 유적 - 강화 전등사 - 김포 장릉 - 경복궁 - 창덕궁국가유산 열개의 길 여행기 - 왕가의 길왕가의 길 여행경로소개 - 강화 고인돌 유적 - 강화 전등사 - 김포장릉 - 경복궁 - 창덕궁

프롤로그 : 여행자와 이방인

  여행하며 지구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세상엔 참 살기 좋은 곳이 많다고 느끼게 된다.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여유도 있고. 나는 서울에 태어나 나고 자란 사람이지만, 많은 면에서 서울보다 나아보이는 동네도 잔뜩 있다.
사람이 행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에 ‘외국에 다녀온 사람의 입 다물기’가 있다 보니, 가끔은 이런 장소에 관해 이야기하고 다닌다.
“노르웨이에 뵘로란 동네가 지내기 좋더라고요.”, “니카라과에 오메테페란 섬이 있는데 거긴 몇 달을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누군가 내게, “혹시나 나중에 살고 싶은 장소가 있으신가요?”하고 물으면 내 대답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확고해진다. “한국이요. 한국 살고 싶어요.”
유년 시절 기억의 배경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한평생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문화 속에서 무슨 음식을 먹고 살아왔는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 인생에 처음 입력된 기억들은 쉽게 거역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외국에선 늘 이방인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언젠가 중미 정글 속 고대 마야 유적들을 탐험하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것 참 신기하긴 한데, 실제로 이 곳에 나같은 사람이 잔뜩 모여 사는 모습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가 않는군. 내가 마야인의 후손도 아니고.’

  이번에 내가 여행할 길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걸을 ‘왕가의 길’이다. 긴 세월 동안 천천히 쌓아져 온 왕가의 길은 한반도 왕실의 위엄과 화려한 문화, 번영과 위기의 순간들이 서려 있는 길이다.
그러니 이번 길은 우리나라의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길이자, 걷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느끼게 하는 길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왕가의 길 - 강화 고인돌

  왕가의 길을 시작하기 위해 인류 역사의 시작되기 이전, 선사시대로 되돌아가 보자.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무려 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거나 채집하며 생활하던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 십만 년 후, 농경이 시작된 기원전 8,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자 마침내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곳곳에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강한 족장이 주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해 국가로 발전하는 단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한반도 왕가의 길을 시작하게 된 지점도 바로 이 때라고 할 수 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4-고인돌 안내 캐릭터 동상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5

  우리나라는 ‘고인돌 집중 밀집 지역’이다. 세계 전체 고인돌의 절반에 가까운 4만 여 기가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다. 강화도에서는 보존 상태가 좋고 형태가 다양한 고인돌을 만나볼 수 있다. 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인돌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탁자식’ 고인돌을 찾으러 강화도 부근리에 있는 지석묘를 찾았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6-고인돌 사진

  강화도 고려산 북쪽 끝자락 넓은 언덕에 육중한 고인돌이 외롭게 서 있다.
고대 거석 기념물만큼 권력의 위엄과 상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덮개돌의 무게는 무려 50톤에 달한다. 대형 버스 약 세 대에 맞먹는 무게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돌을 바라봤다. 그 옛날 이 무거운 돌을 받침돌 위에 올려놓은 것도 신기하고, 수천 년 넘게 이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도 신기했다. 종종 유적이나 풍화, 침식된 자연을 볼 때면 억겁의 세월 앞에 모든 게 작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제 떠날까 하는데 유치원 꼬마들이 잔뜩 체험학습을 왔다. 선생님 따라 쫄래쫄래 언덕을 올라오더니, ‘우와아, 크다’ 하며 몇 바퀴 돌다가 다시 줄 맞춰서 내려갔다. 돌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 인생 삼십 몇 년도 이렇게나 긴데, 수천 년 전의 유적이라니.’ 아이들은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나 보다.
하긴 나도 그랬지. 여기서 오십 년쯤 더 살게 되면 멈춰있는 돌덩이를 보고 눈물까지 흘리게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왕가의 길 - 강화 전등사

  고인돌 유적지를 빠져나와 강화도를 벗어나기 전에, 방문해야 할 왕가의 길 명소가 하나 더 있다.
익히 알고 있듯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는 환웅과 웅녀의 아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다. 마침 강화도에는 단군과 관련된 명소가 두 곳 있는데, 하나는 단군이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이고, 하나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다.
이번에 방문 할 장소는 이 삼랑성 내부에 위치한 1600년 역사의 강화 전등사이다.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천년고찰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8-삼랑성 성벽 통로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9-소나무 사진

  밖에다 차를 대놓고 삼랑성 성벽을 지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등사로 향하는 길목에는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가득했다. 다만 소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심지어는 시멘트가 발라져 있기까지 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당시 무기의 대체 연료로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만든 상흔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0-숲에 둘러싸인 전등사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1-전등사 사진

  숲으로 둘러싸인 전등사의 풍경이 산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고구려 시기에 세워진 전등사는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던 사찰로서 중하게 여겨졌다. 원래의 이름은 ‘참된 종교를 추구하라’는 의미로 진종사였으나, 1281년 충렬왕의 왕비가 진종사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2-전등사 사찰 사진

  전등사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억압하던(숭유억불) 조선에서도 왕실 사찰로서 비호를 받던 사찰이다. 전등사가 있는 삼랑성 안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전등사가 실록을 보호하는 수호 사찰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3-스님 뒷모습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4- 사찰 천장의 용 조각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5-법당명 사진

  오랜 세월만큼 사찰 안에는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역사책처럼 남아있다. 하나하나 풍부한 이야기와 시대를 품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강화대교를 건너 서울로 돌아오는 길, 김포에 있는 장릉을 찾았다.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왕릉은 문화의 보고이자 풍수지리상 명당의 상징이다. 왕가의 길에서 놓칠 수 없는 여행지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7-김포장릉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8-김포장릉 소나무 사진

  김포 장릉은 산의 경사가 완만해 능이 자리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신비한 분위기의 숲길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는데, 소나무가 많이 심겨 있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르고 기상이 좋은 소나무는 풍수 사상에서 명당 자리에 심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수목이기 때문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9-김포장릉 전경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0-건물 안에서 본 묘 사진

  숲길을 지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하니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가 잠들어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임금의 무덤이라 하기엔 어쩐지 소박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 곳은 원래 왕릉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임금의 아버지 묘인 대원군 묘로 조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1-김포장릉의 건축물

  제14대 선조의 아들이자 제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은 추존 왕이다. 죽은 후에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들인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고 난 후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켰다. 원종은 왕자인 정원군이었던 당시 세자로 있던 적이 없었기에 추존이 부적절하다는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여하간 조선왕조의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면 원체 흥미진진 이야기가 많아 끝내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찾다 보면 그 이후 왕, 그 이전 왕가의 이야기까지 찾아보게 된다. 그러나 나머지는 다음 여정에서 이어가도록 하자.
다시 숲길을 걸어 나온 나는 이제 조선 역사의 중심, 한양으로 향했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옛 고조선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초대 국왕인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운 지 채 한 달도 한 돼 천도를 결심한다.
여러 후보지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했다. 도읍지 설계의 총책임은 개국공신 정도전에게 맡긴다. 그리하여 3년 후 새로운 궁궐이 완공되었고,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하라’는 의미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3- 경복궁 사진

  경복궁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자주 지나치게 되지만 볼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다. 휘황찬란한 수많은 현대식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언제나 중심에서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4-경복궁 앞 수문장 교대의식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5-수문장 교대의식 사진

  정문인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에 입장하니, 중문인 흥례문 사이에서 수문장 교대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8월의 더운 날씨였지만 한국 사람들을 비롯해 수많은 외국인이 걸음을 멈추고 경건히 의식을 관람했다.
수문장 제도는 15세기 조선 전기에 정비되었는데, 지금의 의식은 당시 궁궐을 지키던 군인들의 복식과 무기, 각종 의장물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6-근정문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7-근정전에서 본 근정문 사진

  이어서 흥례문과 근정문을 지나 경복궁의 핵심 건물인 근정전으로 입장했다.
근정전 앞은 임금의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식 같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의식과 행사들이 열리던 곳이다. 이 마당의 이름이 우리에게도 친숙한 ‘조정’이다. 그리고 ‘근정’이란 이름은 정도전이 붙였는데,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조정 바닥의 돌이 매끈하지 않고 상당히 울퉁불퉁하다는 점인데, 이는 임금이 위에서 조정을 내려다볼 때 너무 강한 햇빛이 비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8-근정전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9-근정전의 왕좌 사진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그리고 근정전의 왕좌는 마치 어둑한 허공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근정전 내 넓은 바닥이 한결같이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의도한 것이다. 근정전이 구름 위의 하늘 궁전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정전을 오르는 돌계단에도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돌계단 사방에는 각 방향의 하늘을 상징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별자리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0-경회루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1-경회루 산책하는 사람들 사진

  근정전 서편으로 이동해 경회루 연못을 따라 걸어본다. 연못에 비치는 인왕산의 산세가 수려하다.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지금의 경복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불에 타 대부분 소실된 탓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들으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럼, 그사이 긴 시간 동안 경복궁은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하고.

  사실 경복궁은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던 궁궐이다. 전란이 끝난 이후 조선 정부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소모되는 경복궁 복원을 포기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경복궁은 2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표범들의 서식지로 전락한 것이다.
대신 1610년, 광해군은 경복궁이 아닌 다른 궁을 먼저 중건해 조선의 제1 궁궐, 법궁으로 선포한다. 그곳이 이번 왕가의 길 마지막 여정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2 - 왕가의 길 창덕궁
왕가의길 - 창덕궁

  경복궁에서 안국역을 지나 창덕궁으로 걸어갔다. 불과 이 십여 분 만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 닿았다.
창덕궁은 태종의 주도로 1405년에 완공되었다.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십여 년 만에 이렇게 가까이 새로운 궁을 지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경복궁은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 데다(1차 왕자의 난), 자신의 정적인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궁이기 때문에 태종에게는 꺼림칙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태종은 왕위에 즉위한 직후 조선의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하는 와중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3-창덕궁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4-창덕궁 내부 사진
  창덕궁과 경복궁의 가장 큰 차이는 궁궐의 형태에 있다. 경복궁이 기하학적인 대칭을 중시하며 왕가의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낸 것과는 달리, 창덕궁은 주변 환경에 맞추어 얽매임 없이 지어졌다. 전형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자연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게 건설된 것이다.
  때문에 창덕궁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색다른 궁궐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게 될 수도 있다. 건물들은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되어 있으며, 심지어 궁궐의 중심이 되는 정전인 인정전은 정문과 완전히 틀어져 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5- 창덕궁 길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6-인정문 마당 사진

  재밌는 점은 창덕궁의 이러한 특징이 정작 건설을 명령했던 태종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는 것이다.
창덕궁의 공사 책임은 당시 판한성부사(지금의 서울시장 격)였던 박자청이 맡았다. 그런데 심지어 태종은 박자청을 하옥시키기도 했다. 인정문 밖 마당의 구역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 명령 했는데, 박자청이 산세를 살리고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사다리꼴로 만든 탓이었다.
  결국 가장 한국적인 미를 보여준다 찬사를 받는 지금의 창덕궁은 박자청이라는 인물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의도된 설계였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7-창덕궁 후원 관광하는 관람객 사진

  나는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해둔 덕에 후원 관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창덕궁 후원은 한국인의 자연관과 사상, 정서를 보여주는 대표적 정원이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이곳은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 조성되었고 세조, 성종 대에 확장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이 소실되면서 광해군 대에 다시 조성된 곳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8-창덕궁 후원 건물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9-창덕궁 후원의 정자 사진

  사실 창덕궁 후원은 오랜 시간 ‘왕가의 비밀스러운 정원’이란 의미로 ‘비원(秘苑)’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지금은 울창한 숲과 연못을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편히 걸을 수 있으니, 비원이라는 말은 더 이상 맞지 않는 것 같다. 한 편으론 이 모든 과거의 풍경들이 더 이상 비밀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으로 느껴지던 지.
  골짜기마다 자연의 지세에 따라 잘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정자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왕가에서는 이곳을 휴식과 산책을 비롯한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후원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 있어 학문을 탐구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자연 풍광을 느끼며 시를 짓고 꽃구경 하며 치유를 받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천천히 드넓은 후원을 누볐다.

왕가의 길 에필로그

  나도 이제 제법 머리가 굵어서 그런가? 한반도의 고조선과 삼국시대의 역사가, 조선 왕조의 역사가 흥미로운 소설만큼이나 재밌다. 왕실의 유적과 유물에 남아있는 풍부한 이야기 하나하나에 쉽게 몰입해서 빠져들게 된다.
왕가의 길의 매력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이자 조선 왕조 오백 년 역사의 수도였던 수도권 일대는, 무척이나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세세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가의 길에서 만나는 문화유산들은 저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더욱이 이야기 하나하나가 거미줄처럼 또 다른 이야기들과 연결되어 있으니, 한 번 빠져들면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해가며 시리즈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멈추기 어렵다.

  결국에는 나도 뼛속까지 한국 사람인가 보다. 점점 더 많은 나라를 여행할 수록, 다양한 문화를 경험해 볼 수록 되려 한국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세상에 어떤 강을 여행해도 한강만큼 내게 특별함을 느끼게 하는 강은 없었으니까. 어쩌면 내가 이렇게 떠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결국에는 돌아 올 정겨운 장소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 길을 걸으면서 다시금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장소가 공감할 수 있는 과거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일이다. 그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들 사이에 사는 지 잊지 않게 해준다.

왕가의길의 맛 - 설렁탕

국물-고기-면-밥-파 설렁탕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40 - 왕가의 길의 맛 설렁탕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41 - 국물 + 고기 + 면 + 밥 + 파 설렁탕
  왕가의 길에 추천할 음식은 서울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이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이다.
설렁탕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조선 시대 임금이 농사가 잘되길 기원하며 직접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 제단과 관련이 있다. 왕이 제사 의식을 진행하고 행사가 끝나면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소고기 국물을 나눠줘 거기에 밥을 말아 먹었던 것이 시초라는 이야기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유래설이 있다. 하지만 설렁탕이 한때 조선의 외식 문화를 제패했던 패왕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종로와 청계천 주변엔 역사 깊은 설렁탕집이 여럿 남아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42- 설렁탕 사진

  진하고 뽀얀 국물에 향긋함을 더하는 파와 얇게 썰린 소고기 한 점. 한국전쟁 이후 미국 원조가 시작되며 더해진 얇은 밀가루 국수. 여기에 갓 지은 따듯한 흰 쌀밥과 아삭시큼한 깍두기까지.
그 아름다운 맛의 조화는 한국 사람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앉자마자 곧바로 내오는 패스트푸드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으니, 간편히 한 그릇 때우기 위한 바쁜 현대인에게도 부담이 없다.

  나는 설렁탕을 먹을 때, 소금으로 간을 하고 밥을 말기 전 늘 국물부터 한 수저 맛본다. 슴슴하지만 감칠맛 가득한 맛이 중독성 있다. ‘아, 그래 설렁탕은 이 맛에 먹지’ 하며 생각하는 찰나, 머릿속 한편에선 비통한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김첨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설렁탕은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을 수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한 맛이다. 설렁탕을 먹을 땐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박성호 작가 사진
by 여행작가 박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