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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열 개의 길 가야문명의 길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가야문명의 길 여행경로 소개 - 국립 김해박물관 - 김해 수로왕릉 - 김해 대성동 고분군 - 창년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합천 옥전 고분군

프롤로그 / 깍두기도 아닌데

  이따금 느끼는 것인데, 한국에 안내판이 참 많다. 문화유산이나 명승지야 물론이고 동네 뒷산이나 공원만 걸어도 잔뜩 보인다. 어릴 적엔, ‘이런 건 산책 나온 아빠들이나 읽는 거 아닌가?’ 했는데, 언제부턴가 나도 걸음을 멈추고 읽게 된다. 길가의 야생화 이름이 궁금해지면 나이가 든 것이라는데 나도 그렇게 된 걸까?
하여간 무료함을 달래기에도 좋고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음, 조팝나무는 조로 지은 밥처럼 보여서 붙은 이름이구나, 하면서 제법 열심히 읽는다. 돌아서면 곧 잊어버릴 내용이지만, 외우려고 하지 않아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거다.

  요새는 문화유산을 두루 다니면서 역사 안내판을 많이 읽는다. 단순히 인쇄된 것도 있고 비석에 새겨져 있는 것도 있다. 너무 길지만 않으면 되도록 읽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하나 눈에 띄는 점도 있었다. 고려 시대 이전의 역사를 설명할 때면 자주 나오는 문구가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두 역사책이 한국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양대 사료다 보니, 두 책에 나오는 문장들이 빈번히 적혀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 관한 내용을 설명할 때는 당시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런 지도를 보게 될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오는 지도에는 항상 가야도 있는데 왜 삼국시대, 삼국사기, 삼국유사일까……’

  이건 오래된 의문이다. 학창 시절에도 삼국시대 지도가 나오면 늘 궁금했다. 그러나 늘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넘어가다가 이번에야 그 이유를 찾아보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더라.
우선 [삼국사기]를 통해 처음 ‘삼국시대’를 규정한 김부식이, 가야를 멸망시켜 흡수한 신라 출신이라는 점.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생각해 봤을 때 끄덕거려지는 이유다.
또, 당시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중앙 집권화된 국가가 아닌 여러 작은 나라들의 연맹 형태였다는 점. 그러니 개수만 보고 사국시대라 하기에는 확실히 오류가 있다.

  결론은 인제야 비로소 ‘삼국’ 시대라고 부르게 된 것에 이해를 해버렸다. 하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찜찜한 기분은 여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삼국’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다 보면, 철의 왕국이라 불렸던 가야가 이룩한 높은 문물이 퇴색되는 느낌이 있지 않나 싶어서. 이건 뭐, 깍두기도 아니고.
  어쨌건 마침 이런 타이밍에 ‘가야 문명의 길’을 걷게 됐다. 내게 가야는 늘 애착이 가는 곳이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모임에서 소외된 사람이 있으면 떡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것이다 보니, 자연스레 가야에 관심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멀쩡한 자에게 깍두기 취급은 서럽다. 제법 키가 크기 전까지 늘 깍두기였던 나의 경험담이다. 삼국시대 지도 한 귀퉁이에서 ‘가야’라는 두 글자를 볼 때마다, 늘 그런 아픈 손가락 보는 마음이 들었다.

국립 김해 박물관

  가야 문명의 길을 시작할 장소로는 경상남도의 김해시가 제격이다. 김해시는 흔히 ‘금관가야’라고 부르는 가야계 고대국가가 생겨난 곳인데, 금관가야는 초창기 여러 가야 국가 중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맹주국이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바라본 김해시내 전경
김해 시민 헌장 조형물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김해 공항으로 날아갔다. 김해시는 공항에서 경전철로 연결되어 있어 찾아가기 무척이나 편하다. 나는 김해 박물관역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나오자마자 김해 시민헌장을 새겨놓은 상징물이 보였다. 첫 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찬란한 가야 왕도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받아 시민 화합과 조화를 바탕으로 후세에 길이 빛날 시민 행복도시를 만들어 간다.’
단언컨대 이보다 가야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안내판은 본 적 없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국립김해박물관 외관
박물관 내부  스크린에 김해 시민의 종과 지도가 비친 모습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국립김해박물관이다. 여행하다 보면 문화유산 인접한 자리에 박물관이 붙어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되는데, 이럴 땐 박물관을 먼저 둘러보는 것이 좋다. 요컨대 미리 보기 같은 걸까. 전에는 밖을 먼저 둘러보고 박물관에 들어가곤 했지만, 역시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보는 것과 나중에야 '아 이런 거였구나'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박물관 내부 모습과 모형물
전시되어 있는 그릇모양 유물들

  지금의 김해시가 위치한 낙동강 하류 일대는 오래 전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한 삶의 터전이었다. 다만 예전에는 지금처럼 드넓은 평야는 아니었고, 바다와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다도해 지역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는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기도 했고, 이때부터 일찍이 이 지역이 교역의 요충지로서 발전해나가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큰 규모의 마을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 청동기시대 막바지에 이르자 철기 문화가 사회변동을 재촉하기 시작하는데,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가야가 등장하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말갖춤과 여러 철제품
철기 유물들

  가야의 경제적 성장 기반은 단연코 ‘철’이었다. 철광석이 산출되는 산과 바다에 인접한 지역적 특성 탓에 가야는 질 좋은 철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의 지역 이름인 ‘김해’조차도 이 시절 쇠가 바다처럼 많이 난다고 하여 붙은 것이라고 한다.
가야 문화유산에서 빈번히 출토되는 말의 갑옷과 투구는 당시 철기를 만드는 가야 기술이 최고였음을 증명하는 것은 물론 주변 나라들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음을 보여준다.

동물 모양의 작은 토기 유물들
전시되어있는 가야 유물들

  그리고 철과 함께 가야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 해주는 수식어는 ‘해상왕국’이다. 가야는 철을 중심으로 한반도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지금의 중국,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김해시에 있었던 ‘금관가야’가 이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도 이러한 ‘철’과 ‘해상교역’에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철을 매개로 밖으로는 여러 나라와 교역하고 안으로는 가야의 여러 정치체제를 통합하여 맹주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금관가야’의 건국 신화는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구지가’로 유명한 이 건국 신화는 ‘가야 문명의 길’ 다음 장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야문명의 길 - 김해 수로왕릉

  국립 김해박물관 뒤편에는 거북이를 닮은 자그마한 동산이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 천 년 전,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이 ‘구지봉’에 인근 아홉 마을 족장이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구지가’로 전해지는 이 노래는 간단하면서도 섬뜩하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춤추며 건네는 협박에 겁먹었는지, 6개의 황금알을 담은 상자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이내 하나둘 알이 깨지기 시작하더니 6명의 건장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얼마나 건장했는지, 전부 키가 구척장신이었다고 한다.
하여간 이들은 육가야로 불리는 여섯 가야 왕국의 군주가 된다. 다만 쌍둥이도 태어난 순서에 따라 형 동생이 정해지듯, 알에도 그런 게 있나 보다. 첫 번째로 알에서 깨어난 장남이 그들이 탄생한 김해 지역을 맡아 첫 번째 왕이 된다.
그가 바로 금관가야의 초대 국왕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 ‘수로왕’이다.

수로왕릉 드론샷
수로왕릉 들어가는 입구

  김해시에서도 이곳이 500년 가야의 수도임을 강조하고 있다 보니, 수로왕릉은 굉장히 규모로 세심히 관리되고 있다. 주위 1만 8천 평이 왕릉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에도 좋다.
하지만 금관가야의 건국 신화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수로왕의 무덤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워낙 오래된 역사이다 보니 불분명한 내용이 많다. 예컨대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출생하여 199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렇게 되면 향년 157세까지 살았던 게 된다. 아마 후세에 과장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래도 수로왕이 그만큼 장수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수로왕릉

  아쉽게도 가야는 중국식 한문 역사 기록 체계가 자리 잡기 전에 멸망한 탓에 기록이 많지 않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나마 유물이 풍부한 편이라, 고고학적으로 연구된 내용으로 과거를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금관가야는 건국 이후 급속도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당시에는 항구도시였던 김해 지역의 지리적 이점도 있었겠지만, 건국자인 수로왕이 장수하며 오래 재위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수로왕릉 드론샷

  ‘수로왕릉’을 둘러본 이후에는 북쪽으로 15분 정도 걸어서 ‘수로왕비릉’도 다녀왔다.
‘허황옥’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수로왕의 왕비에게는 특이한 기록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녀가 인도 아유타야의 공주로 16살에 배를 타고 건너왔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사실 위주로 기록한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각 지역의 설화로 가득한 [삼국유사]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수로왕릉으로 올라가는 계단
수로왕릉 안의 석탑

  수로왕비릉에는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배에 실어 왔다는 파사석탑이 있다. 이 역시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러나 허황옥이 실제로 어디에서 왔는지는 여전히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고려대 산학협력단에 이 탑의 산지와 분석을 의뢰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 “파사석탑에 사용된 암석의 산출지는 한반도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정말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2000년 전, 멀리 인도의 16세 공주가 한반도에 와서 수로왕과 혼인했던 것일까.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 적어놓은 파사석탑에 대한 소감이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일연 스님은 700년 전에 이미, 파사석탑이 외국에서 왔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가야문명의 길 - 김해 대성동 고분군

  역사란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남겨진 유물과 기록을 서로 비교하고 분석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어찌 보면 역사란 객관적 논리와 창의적 사고의 산물이다. 글로 남겨져 있는 기록이 적은 고대사일수록 이러한 소양이 더욱 필요할 수밖에 없다.

  가야에 관한 역사는 땅속에서 나온 유물의 형태나 분포로 정황을 추적하는 고고학 의존도가 동시대 삼국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그래서 여전히 가야역사에는 알아내지 못한 채 공백으로 남아있는 부분이 많다. 그 중에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었던 4세기 전후의 역사가 있었다. 이 빈 공간이 채워지게 된 것은 1990년, 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발굴하면서부터이다.

대성동 고분군 드론샛
대성동 고분군에 있는 돌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수로왕릉에서 10분 정도면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하늘에서 알이 내려왔다는 구지봉에서는 600m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고분군이 있는 언덕은 ‘작은 구지봉’이라는 뜻에서 ‘애구지’라고 불렸다고 한다. 가야역사에서 구지봉이 가장 중요한 성지인 것처럼, 애구지 언덕도 신성시되는 곳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대성동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있는 무덤들은 금관가야 최고 지배계층의 묘역들이다. 덕분에 이곳에서 왕급 무덤을 포함한 다수의 왕후 묘가 발굴되면서, 한국 고대사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많은 부분이 채워지게 됐다. 더군다나 한·중·일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어, 당시 금관가야의 높은 위상과 사회적 영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그러나 서기 391년, 한국사에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칭호로 가장 자주 불리는 군주가 고구려 왕위에 오르며 금관가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백제사에서도 그랬지만, 또다시 광개토대왕이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영토를 넓혀나가기 시작한 광개토대왕은 한반도 정세를 뒤흔들었다. 심지어는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군이 낙동강 하류까지 내려와 가야를 급습하면서, 가야는 침체기를 겪게 된다.
  5세기 초 이후 대성동 고분군이 급격히 축소되는 것이 그러한 사태를 반영한다. 이제 가야 연맹의 중심은, 낙동강 하류 금관가야에서 경상도 내륙 산간 지방으로 점차 이동하게 된다.

가야문명의 길 - 합천 온전 고분군
합천의 논밭과 마을을 위에서 본 모습

  김해에서 차를 빌려 경상남도 서북부의 합천으로 갔다. 김해에서 합천은 차로 100km 가까이 떨어져 있는 먼 거리이지만,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이어져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활발하게 교류해 오던 곳이다.

다라국의 뜰

  합천 박물관에 도착해 차를 대고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니 옥전 고분군이 있는 언덕이 보였다. 올라가는 산책로 입구에 ‘다라국의 뜰’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다라국’은 중국과 일본 측 기록에 나타나는 이름인데, 합천군 일대에 있었던 가야 계열 소국의 이름이다.

나무사이로 보이는 옥전고분군
옥전고분군

  언덕을 오르니 제각각 크기가 다양한 여러 개의 무덤이 을씨년스럽게 산을 뒤덮고 있었다. 무덤 속 누워있는 사람은 말이 없지만, 무덤은 늘 많은 것을 알려주는 역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곳 옥전 고분군도 김해에서 만난 대성동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지배 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최고 수장급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무기와 갑옷, 장신구가 잔뜩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M2호로 불리는 무덤에서는 2,000여 개가 넘는 구슬이 발견되었고, M3 무덤에서는 최고 지배자의 상징인 용봉무늬와 봉황무늬, 용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칼이 4자루나 출토되기도 했다.

옥전고분군 드론샷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 남부 낙동강 일대에 이와 비슷한 지배층 고분군이 다량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가야 문명이 연맹이라는 독특한 정치체계를 유지하면서 병존하였다는 실증적인 증거가 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중앙 집권화된 국가였다면 지배층 무덤이 한데 모여있었을 것이다.
또한 고령을 중심으로 합천, 산청, 함양, 남원, 장수 일대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에서 5세기 후반 이후로 점점 유사성이 발견됐다. 이는 이 시기에 경상도 내륙 산간 지방을 아우르는 강력한 연맹체가 나타났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더불어 같은 시기 김해의 ‘금관가야’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함께 생각하면, 후반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가 해안에서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가야 문명의 길 -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송현동 고분군 드론샷

  합천에서 다시 동쪽으로 차를 몰아 창녕으로 갔다. 창녕 역시 가야 연맹의 소국인 비지국이 있던 곳이고, 합천 옥전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일대가 부흥했던 5~6세기가 중심 연대가 되는 고분군이다.
이렇게만 보면 이전 고분군과 별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내가 창녕을 ‘가야 문명의 길’ 최종 여행지로 정한 것은 이곳이 가야의 마지막과 관련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멀리서 본 무덤 모형도
가까이서 본 무덤 모형도

  창녕의 고분군은 시내 북동쪽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송현동 고분군을 먼저 둘러본 뒤 그보다 규모가 큰 교동 고분군으로 갔다. 그곳엔 무덤의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는 모형도 있었다. 원래 이곳에는 훨씬 더 많은 수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도굴되거나 논으로 개간되면서 그 수가 줄었다고 한다.

  무덤 형태는 가야 시대의 형식이므로 예전에 이곳이 가야 연맹의 영역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어느 정도  독자성을 띠고 있기도 하지만, 어느 시기 이후로는 신라양식의 경주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창녕이 지리적으로 전통적인 신라 영토와 가야 연맹 지역 사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옆에서 본 고분군
송현동 고분군 드론샷

  때문에 창녕의 가야 소국이었던 비지국은 가야 문명이 자취를 완전히 감추기 전부터 일찍이 신라화 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신라가 가야를 정복하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로 창녕을 활용했다는 추측도 있는데, 실제로 신라 진흥왕이 가야 각국을 정복하고 창녕에 척경비를 세웠으니 그럴듯한 이야기다.

가야 문명의 길 에필로그

  이렇게 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경상도 내륙 산간 지방 소국들이 차츰 점령당하거나 흡수되면서 가야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700년 가까이 독립적인 연맹 체제를 유지하며 신라와 대등하게 발전했던 철의 왕국이, 너무도 간단히 소멸하여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렇게 싱겁게 마무리됐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신라와 백제의 황산벌 전투처럼, 가야에도 처자식을 죽이고 최후까지 대항한 계백 같은 장수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남겨진 문화유산을 보고 추측할 뿐 사실을 알 수 없다.

  이번 '가야 문명의 길'은 어느 때보다 상상하며 걷는 여행이었다. 가야 연맹의 역사는 계속해서 말하듯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대부분 추측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한 편으론 이 점이, ‘가야 문명의 길’을 여행하는 가장 큰 재미가 됐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근차근 돌아보면서, 하나의 추리 소설을 읽듯 머릿속에 그려 나가 보는 것이다.

  문화유산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력에 활활 불을 지피는 존재이다. 역사는 문화유산이라는 수많은 힌트가 숨겨져 있는 방 탈출 게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단서에 적힌 것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도 관심을 둬야 한다.
  역사는 입증된 기록으로만 생각해야 한다고? 물론 사람은 현실에 산다. 그러나 머릿속으론 언제든 마음대로 떠났다가 올 수 있다. 그런 자유로운 상상이 열 곱절 백 곱절 재밌는 세상에 살게 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고 살면 재미가 없다. 역사도 그렇다.

가야문명의 딜의 맛 - 돼지국밥 & 수구레국밥

돼지국밥

  경상도에서 국밥이라고 하면 열 중 아홉은 돼지국밥을 떠올릴 것이다. 물론 돼지국밥의 원조를 따지고 어느 곳의 향토 음식인가를 따지자면, 밀양과 부산의 입지가 압도적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경상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이 되었으니, 가야 문명의 길을 여행한다면 식단표 한 칸 정도는 돼지국밥을 위해 비워 놓도록 하자.

  돼지국밥은 문자 그대로 돼지 뼈를 고아 우려낸 육수에 돼지고기와 밥을 넣어 먹는 음식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 명료한 음식이지만,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 돼지국밥은 거의 없었다. 6·25 때 부산으로 피란 온 북한 사람들이 정착하며 퍼져 나갔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만약 설렁탕 정도를 생각하고 처음 돼지국밥집에 방문한 사람이라면 적잖이 당황하게 될 수도 있다. 돼지는 소와는 다르게 특유의 강렬한 향취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엔 묽은 국물에 살코기만 얹는 식으로 만드는 깔끔한 돼지국밥집도 생겨나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건 그 반대 전통식이다.

  오랫동안 우려낸 걸쭉한 국물에 넘칠 정도로 가득한 고기, 새우젓과 마늘을 듬뿍 넣고 여기에 고춧가루가 듬성듬성 묻은 정구지(부추)는 다다익선. 마무리로 넣어주는 돌돌 말린 소면까지. 어쩐지 너무 말끔하면, 그건 돼지국밥답지 않다.

수구레국밥

  후가야 연맹의 중심지였던 고령, 창녕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코 수구레국밥이다.
수구레국밥은 소가죽을 벗겨낸 뒤 거기에 붙어있는 수구레를 긁어모아 푹 삶고 끓여 만든다. 소로 만든 국밥이지만 고기는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선지를 같이 넣어서 먹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수구레국밥은 오랜 시간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준 값싼 음식이었다. 그러나 먹거리가 풍부한 요즘엔 오히려 소고기국밥보다 찾기 힘든 음식이 되었으니, 가야 연맹의 길을 여행하다 수구레 국밥집을 만나게 된다면 꼭 한번 방문해 보자. 처음에는 뚝배기 가득 비계가 쌓여있는 모습에 지레 겁이 날 수도 있지만, 익숙해지면 이만한 별미가 없다.

  수구레는 쫄깃하고 야들야들하며 질기지 않고 고소하다. 파와 마늘, 고추가 잔뜩 들어간 얼큰한 국물 덕분에 느끼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세상에 맛있는 국밥이야 셀 수도 없이 많지만, 수구레국밥에는 대체재가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나는 그 맛을 알아버렸으니, 참 곤란하게 됐다.

 
박성호 작가 프로필
by 박성호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1 - '국가유산 열 개의 길' 여행기 관동 풍류의 길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 - 여행경로 소개 - 출발 - 평창 월정사 - 강릉 경포대 - 강릉 오죽헌 - 강릉 선교장 - 양양 낙산사
프롤로그 / 하늘을 지붕 삼아 떠도는 나그네처럼


  여행의 좋은 점이야 셀 수 없이 많겠지만, 나는 그중 최고는 역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시나마 ‘생존 경쟁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물론 현실적으로 계획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살아가는 데에 무척이나 필요한 자세이다. 그러나 나는 종종 머릿속이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는 것에 체증을 느낄 때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입에서 현실적인 말들만 나오는 게 무섭다. 이런저런 복잡한 숫자들을 너무 자주 보고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그래서 그럴 때는 멀리 깊은 자연 속으로 떠난다. 최대한 속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는 그렇게 아득히 비현실적인 자연의 풍경 앞에서 하염없이 뭉그러지는 순간이 좋다. 어느새 거듭 다짐하게 된다. ‘어딘가 붙들려 매여 있다 생각하고 살지 말아야지.’ ‘나 스스로 작은 것에 구속하며 살지도 말아야지.’
아마도 자연의 고귀한 아름다움은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황홀한 풍경은 그것 자체로도 사람 정신의 얼룩진 부분을 깨끗이 씻어내므로.

  이번에 내가 여행할 길은 강원도 ‘관동 풍류의 길’이다.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 관동 지방은 예로부터 당대의 문인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찾던 곳이다. 그래서 나도 이번 여정은 풍류의 정신을 생각하며 여행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자연을 가까이하는 것, 멋을 아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람과 물이 흐르듯 유유자적 즐기는 것. 그런 다짐으로 동쪽으로 향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 - 관동 풍류의 길 평창 월정사
  관동은 대관령의 동쪽을 가리킨다. 그러니 대관령은 관동 풍류의 길을 여는 길목이라 할 수 있다.
그 옛날 신사임당은 강릉에 계신 모친을 그리며 어린 율곡과 대관령옛길을 건넜고, 관동팔경을 화폭에 담은 김홍도 역시 붓을 들고 대관령 고개를 넘었다.
그러나 대관령을 따라 백두대간을 넘기 전 방문하면 좋을 곳이 있는데, 바로 산 전체가 불교 성지로 되어있는 오대산의 사찰 월정사이다.

일주문 사진
금강교 사진

  사찰의 첫 번째 산문인 일주문을 지나 울창한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2km 가까이 되는 꽤 긴 거리지만, 수령 80년 이상 1,800여 그루의 전나무 숲길이 근사하게 조성되어 있어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마침내 맑고 투명한 냇물 위로 금강교를 건너면, 산속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가 모습을 보인다.

월정사 사진
팔각 구층석탑 사진
  월정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중심의 팔각 구층 석탑이다. 그리고 석탑 앞에는,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자세로 공양하는 자세를 취한 보살상이 놓여 마주 보고 있다.
그리고 구층 석탑을 제외하고는 사찰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끼기가 어려운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7세기에 창건된 월정사는 긴 역사가 있지만 세 번이나 전소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은 고려 충렬왕 때, 두 번째는 조선 순조 때.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비교적 최근인 6.25 전쟁 당시이다.
여기엔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데, 마지막 화재는 우리 손으로 의도적으로 불태운 것이다. 1·4후퇴 당시 북한군이 이 절에 머물 것을 염려해서 대한민국 국군이 월정사를 불태우고 내려갔던 것이다.

월정사 부감 사진
  만약 나처럼 ‘관동 풍류의 길’을 따라 여정을 시작하려는 사람이라면, 처음 시작은 월정사에서 하길 추천한다. 월정사는 국가유산으로서의 가치만으로도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지만, 오대산의 수려한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장소이다 보니 이제 막 도시를 떠나온 여행자가 마음 비우기 좋은 장소이다.
나는 그렇게 잠시 월정사를 둘러보다, 이제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향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8 - 관동 풍류의 길 강릉 경포대
  동해가 빚어내는 황홀한 비경, 관동팔경 탐방의 시작을 경포대에서 가졌다.
간혹 경포대라고 하면 부산의 해운대처럼 지역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경포대는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자리한 누각의 이름이다. 한때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경포대 그림
경포대 정자 옆 그림
  언덕을 오르자, 경포대 정자 옆에 익숙한 그림들이 보였다. 경포대는 예부터 동해를 찾은 수많은 시인 묵객이 다녀간 명승지로서, 명사들의 수많은 시와 글, 그림이 남아있다.
분명 전에도 봤던 그림들이지만 실제로 묘사한 지역이 눈앞에 있으니 집중해서 다시 보게 됐다. 수백 년 전의 자연이나 지금의 자연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앞에는 경포호수가 있고, 그 뒤로 가늘고 긴 땅이 바다와의 경계를 구분짓고 있다. 
경포대 정자와 해변경포대 정자 사진경포대 정자 내부 사진
  고등학생 시절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할 때,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쓴 [관동별곡]은 그렇게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아무리 빼어난 문장으로 관동팔경의 경치를 칭송한다 해도, 옛 한글로 쓰인 고전문학이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까.

  그러나 경포대에서, 문득 그때 나를 괴롭혔던 [관동별곡]이 생각나더라. 새삼 정철이란 사람이 그리 오랜 역사 속 인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나와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느낀 것을 적었다고 생각하니까. 김홍도도 그렇고, 정선도 그랬다.
경포대에서 내려다보는 호수와 바다의 조화는 기품 있고 우아했다. 교과서에서 봤던 그 작품들이 왜 탄생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살면서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언젠가 내가 익혔던 지식이 실제의 경험과 합쳐질 때 오는 즐거움이란 몹시나 특별한 것이다.

경포대 누각 천장 시인의 글
  누각 천장에는 경포대에 관련된 시인 묵객들의 글이 게시되어 있다. 숙종이 직접 지은 ‘어제시’도 있고 강릉 부사를 역임했던 문관 조하망의 ‘상량문’도 있다.
그리고 사진에 보이는 글은 유년을 강릉에서 보냈던 조선 학자의 ‘경포대부’라는 글이다. 경포대의 특징적인 풍경을 계절별로 구분하여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통해 성정을 다듬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데에 힘쓸 것이란 포부도 담겨있는 명문이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글이 무려 열 살 나이에 지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의 글인지 예측할 것 같은데, 답은 이 다음 여정에 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15 - 관동 풍류의 길 강릉 오죽헌
  오죽헌은 경포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보니,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열 살 아이가 경포대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나 보다.

율곡이이 동상
  오죽헌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율곡 이이의 동상이다.
동상 앞에는 율곡이 금과옥조처럼 품고 실천한 ‘견득사의’가 적혀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로,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율곡이 형제 가족들까지 거둬 식솔이 100명이 넘는 대가족이었던 때가 있다. 하지만 벼슬을 관뒀을 때는 식솔들과 함께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인 황해도 재령 군수 최립이 쌀을 보낸 적이 있는데, 율곡은 ‘관아의 곡식을 보낸 것 같아 도저히 받을 수 없다’며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그만큼 이득과 손실 보다는 옳고 그름을 우선시하는 율곡이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17-문성사 사진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18-배롱나무 꽃 사진
  오죽헌 가장 안쪽에는 율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가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백 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수령이 무려 600년이 넘어, 율곡이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낼 때도 같은 자리에서 꽃을 피웠던 나무라고 한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19-몽룡실 외부 사진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0-몽룡실 내부 사진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1-검은대나무 사진
  문성사 옆에 있는 건물에는 신사임당이 율곡을 출산했던 방 몽룡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을 오죽헌이라는 이름답게 검은 대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율곡은 조선 역사상 제일 가는 천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보니, 율곡의 비범함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가령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도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라든지.

  그러나 오죽헌에서 내가 떠올렸던 일화는 율곡이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한 일화다. 율곡은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상복을 벗었음에도 모친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19세에 속세를 떠날 결심까지 하고 불교에 심취해 절에 들어간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오죽헌에서 율곡의 유년 시절은 무척이나 행복한 기억들로 가득했을 것만 같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2 - 관동 풍류의 길 강릉 선교장
  오죽헌을 둘러본 후에는 근처의 선교장으로 이동했다.
선교장은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 형태를 잘 보여주는 전통가옥이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3-선교장 외부 사진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4-선교장 내부 사진
  선교장은 개인소유의 국가민속문화유산이고 지금도 300년째 대대로 후손이 사는 주택이다. 그 때문에 오죽헌처럼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며 점차 증축되고 중건되었다. 그래서 전체적인 통일감이나 짜임새는 조금 결여되어 있으나, 지속해서 사람이 생활해 온 탓인지 거대한 규모에 비해 소박하고 인간적인 풍취가 느껴졌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5-자연환경과 선교장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6-연못과 선교장 정자
  주변 자연환경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처마 뒤로 우뚝 솟은 소나무도 근사하고, 입구에 지어진 인공 연못과 정자는 그야말로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라는 것을 단번에 느끼게 한다.
  정자의 이름은 활래정. 여러 사람 둘러앉으면 끝날 작은 방이지만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자에서 연못을 향해 난 창문에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여유롭게 음풍농월을 즐겼을 옛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곳이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7-활래정 안에서 본 연못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8 - 관동 풍류의 길 양양 낙산사
  강릉을 벗어나 계속해서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오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낙산사로 향했다. 자비로 중생을 보살핀다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관음성지 홍련암, 그리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의상대가 있는 역사 깊은 천년고찰이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29-낙산사와 동상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0-해수관음상 동상 사진
  해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솔숲을 지나 오봉산 정상으로 걸어갔다. 오봉산은 낙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낙산은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타락가산’의 의미다. 그만큼 낙산사는 관세음보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낙산사는 신라 시대 고승인 의상대사가 직접 관세음보살을 마주하고 창건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오봉산 정상에는 높이 1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해수관음상’이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해수관음입상은 비교적 최근인 1970년대에 세워졌는데, 그 당시 동양 최대의 불상이었다고 한다.
나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 경치가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동해의 넓은 해안선이 보였고, 해수관음상 뒤편으로는 저 멀리 설악산의 대청봉과 울산바위가 보였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1-의상대로 가는 길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2-의상대 정자 사진
  그러나 정철의 관동팔경에 기록된 4경은 정상 아래쪽 해변 가까이에 있다.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할 때 참선했던 의상대이다. 원래는 이곳에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워 두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3-의상대 정자에서 본 홍련암
  의상대 정자에 올라 왼쪽을 바라보면, 낙산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암자 홍련암이 보인다. 홍련이라는 것은 붉은 연꽃을 의미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데에는 전해지는 창건 설화가 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4-홍련암 사진
  신라 문무왕 12년 때, 의상대사가 우연히 이곳에서 신비한 파랑새를 목격하고 새를 쫓아갔다. 그러나 새는 바다 위의 석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의상은 석굴 앞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나체로 정좌하여 지성으로 7일 7야를 기도 드렸다. 그러자 바닷속에서 붉은빛의 홍련이 솟아 올랐고, 그 안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5-홍련암에서 본 바다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6-홍련암의 풍경 사진
  현재 홍련암의 법당 내부에는 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한때 2005년에 오봉산에 거대한 산불이 일어나 낙산사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된 적이 있는데, 다행히도 홍련암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불길을 피했고 소실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7-낙산사 부감 사진
관동풍류의길 에필로그

오봉산의 낙산사를 마지막으로 관동 풍류의 길도 마무리짓는다.
이번 여행은 한국 고유 산천의 아름다움을 물씬 느낄 수 있었던 길이었다. 예로부터 강원도에 왜 많은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지, 백두대간과 동해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이해하게 됐다.

  혹시 ‘알랭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을 읽어보셨는지? 그 책에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말이 있다. “현실을 힘들게하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다면,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 그것을 이겨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이런 문장이다.
  나는 늘 생각한다.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늘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다 보면, 우리 인생의 조금의 스트레스나 문제만 있어도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를 뒤덮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이 현재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보는 것도 때때로 큰 도움이 된다. 강원도 관동 풍류의 길은 그런 면에서 참 매력적인 여행이다.

  이제 해가 지는 방향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처음에 말했던 ‘생존 경쟁의 제약’이 있는 삶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아아, 풍류는 이제 끝났다. 몸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현실적 모드’ 스위치를 켤 시간이다.
  그러나 다시 속세에 돌아가는 게 마냥 싫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나는 잠시 이렇게 풍류를 즐기러 떠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늘 경계에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현실과 이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물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는 삶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서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8 - 관동 풍류의 길의 맛 초당순두부 & 오징어 순대
관동 풍류의 길에 어울리는 맛이라 하면, 응당 머릿속에 바다가 떠오는 맛이어야 할 것이다. 음식을 입속에 넣는 순간 멀리서부터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기왕이면 술이랑도 잘 어울리는 음식이면 좋겠다. 한국의 풍류를 이야기할 때 음주가무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추천할 관동 풍류의 맛은 ‘초당순두부’와 ‘오징어순대’이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39 - 초당 순두부
초당순두부만큼 동해바다를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음식이 있을까. 바닷물을 간수로 하여 만드는 초당두부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로 유명한 초당 허엽 선생에게서 기원했다고 한다.
잘 만든 초당순두부는 파도가 치고 나타나는 하얀 포말처럼 몽글몽글 부서진다. 한입 가득 입 속에 넣으면 썰물처럼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젊은이들 입맛을 겨냥한 짬뽕 순두부도 별미이지만, 바다 향 깃든 순두부의 정수를 느끼고 싶다면 하얀 순두부를 추천한다.

관동 풍류의 길 여행기 사진40 - 오징어 순대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 오징어순대는 말 그대로 오징어 몸통에 소를 채워 넣어 쪄낸 요리이다. 어떻게 이런 요리를 생각해 냈는지 기발하기도 하지만, 사실 세계 각지에는 오징어에 속을 채워 만든 유사한 음식들이 꽤 있다. 그만큼 보장된 요리법인 것이다.
요즘엔 그냥 쪄내는 것이 아니라 계란물을 부어 전처럼 부쳐내기도 하는데, 이러나저러나 중요하지 않다. 결국엔 맛만 좋으면 되는 법.
오징어순대를 맛있게 먹는 방법의 하나는 포장해서 숙소에서 먹는 것이다. 손 시릴 정도로 차가운 술과 함께라면 더욱 좋다. 침대가 옆에 있으니 걱정도 없다. 오징어순대 한 점과 술 한 모금이면 세상은 어느새 행복으로 허물어져 간다.
현대에는 아마 이런 것조차도 관동 풍류의 일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박성호 작가 사진
by 여행작가 박성호
국가유산 열개의 길 여행기 - 백제고도의 길 - 글 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하늘에서 본 백제역사지구 모습)
백제고도의 길 - 여행경로 소개 - 출발 - 공주 공산성 - 익산 미륵사지 - 익산 왕궁리 유적 - 부여 부소산성

프롤로그 / 어디에나 있었을까

  나는 서울 성수동 작업실에서 개포동 집으로 퇴근한다. 늘 공유 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간다. 가깝지 않은 거리이지만, 영동대교를 건너 한강과 양재천을 따라 생각 없이 밟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 있다.
이 길을 수도 없이 다니며 느낀 것인데, 도시에는 옥외 광고판이 참 많다. 그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음식점 메뉴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일종의 도시 메뉴판인 셈이다. 대신 광고 하나 걸기가 대단히 비싸리라 생각도 드는데, 보이는 국내 기업 로고들이 다 한 번쯤 들어본 곳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온통 시그니쳐 메뉴만 모아 둔 ‘특별 메뉴판’이다.

  평소엔 그것들을 주의 깊게 보지는 않는다. 너무 익숙해져 있다고 해야 할까. 이곳이야말로 내 구역이니, 저 광고판 속 로고들은 이웃집 아저씨, 동생 같은 느낌이다. 아니면 잘 나가는 옆 동네 형 같은 느낌.
그러나 외국에서는 다르다. 이따금 외국에서 퇴근길에 보던 친숙한 간판들을 보게 될 때가 있다. 아니, 이따금도 아니다. 요새는 외국에서 한국 기업 광고를 마주하게 되는 일이 무척이나 많아졌다.
최근에 다녀온 곳만 해도 그렇다. 멕시코에서도 태국에서도 스리랑카에서도, 한국 제품들이나 회사 광고를 자주 보게 된다. 이럴 때면 뭐랄까, 매일 동네에서 보던 친구를 번화가에서 마주친 기분이다. 그것도 잔뜩 차려입은 모습으로. 순간 ‘어째서 여기에?’하는 당황스러움도 들지만 이내 반갑다. 가끔은 친분을 과시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이쯤이면 ‘왜 백제 여행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하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유인즉, 내 머릿속의 백제는 늘 이런 타이틀을 갖고 다니기 때문이다. “고대 문화 강국”, “한류의 원조”.
신라가 삼국 통일의 승자로, 고구려가 씩씩한 기상과 광활한 영토로 기억되는 것처럼, 백제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수려한 문화를 이곳저곳에 퍼뜨린 개성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더욱이 백제는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 아닌가. 그러니 지금이 삼국시대였다면 내가 매일 퇴근하면서 보는 광고들을 대부분 백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일본 여행을 가면 또 여기저기에서 백제 광고들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칠지도도 보고, 금동대향로도 보고.
결국엔 고구려와 신라에 밀려 일찍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터무니없는 생각이려나? 하긴 뭐, 원래 퇴근길에 하는 생각들은 대부분 쓸데가 없다.

백제고도의 길 - 공주 공산성 가까이서 바라본 모습

  백제에 관한 얘기를 시작하려면 한강을 바라보며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떠나온 주몽의 아들 온조가 한강 위례성을 도읍 삼아 건국한 나라로 알려져 있으니까.
그러나 아쉬운 것은, 한성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의 문화유산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500년 가까이 이어졌다고 해도 워낙 오래전 일이다. 한성백제의 주요 무대로 추정되는 서울 송파구 일대가 강남 개발 본격화 이후 건물로 뒤덮여버린 탓도 크다.
‘백제 고도의 길’의 시작을 정확히 한강 어디에서 하기에는 석연찮은 느낌이 있다. 위례성이 지금의 풍납토성 위치에 있었을 것이란 주장도 비교적 최근의 학설이다. 심지어 이러한 논쟁은 조선 시대, 고려 시대에도 있었다고 한다.

공산성의 서문인 금서루를 하늘에서 본 모습
도로 가운데 보이는 무령왕 동상 전경

  따라서 이번 ‘백제 고도의 길’ 여행은 충청남도 공주의 공산성에서 시작한다. 공산성은 위례성에서 천도한 백제의 두 번째 수도, 웅진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정문은 서문인 금서루인데, 바로 앞 도로 중심에 거대한 무령왕 동상이 세워져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공주 공산성에 올라가 깃발이 나란히 이어진 길공주 공산성을 위에서 본 모습

  공산성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부지가 작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건물터도 있고 저장시설도 있지만, 백제만 한 규모를 가진 나라의 궁성이 있었다고 하기엔 좁아 보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러므로 천혜의 요새로서는 적합한 장소였다. 삼면을 둘러싼 성벽은 공산의 산세를 그대로 살려 쌓아 두어 오르기 어려워 보였고, 앞으로는 금강이 자연 해자(垓字) 역할을 하고 있다.

공산성 안에서 본 하늘과 전경
위에서 본 공주 공산성의 모습

  왜 백제가 이러한 방어 요새로 수도를 옮겼는지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 초창기 백제는 소위 잘나가는 국가였다. 비옥한 한강 유역을 바탕으로 농경문화와 철기문화를 급속도로 발전시켰고, 바닷길을 통해 수준급의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유리했다.
이 때문에 백제의 최고 전성기는 당시의 근초고왕에 의해 이루어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체격과 외모가 남달리 뛰어나며 넓은 식견까지 있었다고 한다. 백제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지금의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연맹 형태로 남아있던 마한을 전부 정복했다.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까지 침략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은 백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정복왕, 광개토대왕이 출현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근초고왕이 전사시킨 고국원왕의 손자였다.

연못이 있는 공주공산성 연지

백마강과 공주 공산성이 같이 보이는 전경

  광개토대왕은 한성을 포위하며 복수혈전을 펼쳤다. 기고만장했던 백제를 사지로 밀어 넣었다. 아들인 장수왕은 또 어떤가.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며 남진정책을 펼친 그는, 이름답게 98세까지 장수하며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위기에 처한 백제 개로왕은 중국의 강자 북위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되려 장수왕의 심기를 자극해 버렸다. 결국, 수도 위례성은 함락되었고, 개로왕은 참수당했다.

  그러니 공산성은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이 부랴부랴 도망치며 옮긴 곳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넓은 개활지보다는 방어에 적합한 산지가 수도로 적합했을 것이다.
이토록 눈물 나는 시작이었지만, 백제는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 나간다. 뒤이어 즉위한 동성왕은 신라 왕녀와 결혼하여 나제 동맹을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무령왕과 그의 아들 성왕은 ‘백제 중흥의 아이콘’이라 불릴 정도로 백제 안정화에 힘썼다. 근초고왕 이후 백제왕국의 명군이자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진묘수를 재현한 큰 동상과 진묘수 모양의 조명이 여러개 설치된 모습

  이때의 찬란한 문화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무령왕릉에서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면서였다. 다행인 것은, 무덤이 통째로 지하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도굴과 약탈을 전혀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기도 하다.

  내가 공산성에 방문했을 때는 돼지처럼 생긴 귀여운 동물이 잔디밭에 잔뜩 있었다. 무엇인고 하니, 이 석상은 무령왕릉을 지키던 진묘수다. 1971년, 발굴단이 왕릉 입구 진입 직후 통로에 서 있던 것을 발견했다. 무려 천오백 년 가까운 긴 세월을 홀로 무덤을 지키면 있었던 것이다.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의 모습
강위에 설치된 배모형들이 떠있는 모습

  마침, 내가 방문한 시기엔 백제 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1955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백제 문화제는 백제 문화의 부흥을 목표로 공주시와 부여시가 합심해 여는 축제이다. 평생 백제 중흥을 위해 힘썼던 무령왕과 성왕이 이 모습을 봤다면 감격할 일이다.
그만큼 도시 전체를 정성껏 꾸며 놓았으니, 인생에 한 번쯤은 꼭 가볼 만한 경험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이 정도 규모의 행사를 매년 개최하는 도시는 흔치 않다.

익산 미륵사지터의 모형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로 이동하기 전에 남쪽의 익산으로 향했다. 백제는 7세기 의자왕의 항복으로 멸망하게 되지만, 그때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박물관에 있는 무왕의 초상화

  백제의 30대 국왕, 무왕은 7세기에 백제 최대의 호국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한 인물이다.
미륵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륵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 사찰이다. 미륵 신앙은 사바세계에서 내려온 미륵불에 의해 모순된 세상이 바로잡힌다는 믿음을 갖고 하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후기 백제에서 유행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로 연달아 수차례 왕이 암살당했다. 더군다나 두 번의 천도를 거치며 백성도 혼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왕 역시 무령왕, 성왕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중흥을 위해 힘썼다. 내부로는 토목 공사에 힘썼고, 대외적으로는 아막성 전투를 시작으로 신라와 무려 40년간 16번의 대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하늘에서 본 익산 미륵사지 터
멀리서 바라본 익산 미륵사지 석탑
정면에서 바라본 익산 미륵사지 석탑

  이 시기에 건설된 미륵사는 비록 반쯤 남은 석탑과 터만 남아있을지라도 그 규모가 엄청났다. 신라에 황룡사가 있었고 고구려에 금강사가 있었다면 백제에는 미륵사가 있었다.
백제의 건축 기술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당대 최고였다.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찰로 불리는 소가씨 가문의 아스카데라 사찰은 백제 장인들의 지도하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신라 선덕여왕이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울 때도 신하들과 이런 논의를 나눈 기록이 있다.
“공장을 백제에 청한 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게 복잡하고 거대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백제 장인들이 도움이 필요했다.

미륵사지 근처 나무하늘에서 찍은 미륵사지터의 정면 모습

  이렇게 미륵사지를 둘러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이토록 거대한 사찰이 세워진 익산은 백제의 가장 번창한 도시였겠구나.’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알 수 없다.’이다.
사실 익산은 백제사의 최대 미스터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도시이다. 백제의 어떤 왕이 정확히 어떠한 이유로 익산에 왕궁을 세우게 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더군다나 여기에는 ‘서동 설화’에 대한 수수께끼도 포함되어 있다.
이 내용은 백제 무왕의 왕궁으로 알려진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이어 나가보도록 하자.

백제 고도의 길 - 익산 왕궁리
광활한 호남평야가 보이는 전경

  익산은 광활한 호남평야 입구에 있는 관문 도시다. 옛 이름은 ‘금마저’. 무왕은 이곳 왕궁에 거주하며 계속해서 쇠락해가던 백제의 국력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당시 수도였던 부여 사비 궁에서 장차 천도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내게 무왕은 오히려 서동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하다. 마를 캐면서 생계를 유지해 맛동으로 불리기도 했던 가난한 백제 청년 서동. 서동이 신라에 가서 낯뜨거운 스캔들을 일으켰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액자틀 모양 조형물 사이로 보이는 왕궁리 유적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벌써 보통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어린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며 이런 문란한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선화공주님은 밤에 몰래 서동 방에 정을 나누러 간다.”

  결국 이 동요가 널리 퍼지게 되자 선화공주는 궁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유배지로 이동하는 도중 서동을 만나 혼인하게 된다. 지금이야 경찰서에 잡혀갈 내용의 이야기이지만, 설화적 요소가 가미된 것일 수도 있고 또 시대가 다르니까.

옆에서 본 왕궁리 유적의 모습바닥에 흔적이 있는 왕궁리 유적

  그러면 어떻게 가난한 서동이 백제 왕위에 오르게 되는가. 그건 알 수 없다. 서동이 마를 캐며 우연히 금을 쌓아놓았던 덕에 부자 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대부분 ‘온갖 역경 끝에’ 왕이 되었다고 얘기가 끝난다.

  그러나 <삼국유사> 서동 설화에 분명히 기록된 내용도 있다. 하나는 서동이 곧 백제 무왕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화공주의 간절한 청으로 미륵사가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깃발이 보이는 왕궁리 유적 근처 모습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끝난다면 백제사의 최대 미스터리라 할 수 없을 것이다.
2009년 1월 14일, 국내 역사학계에 파문을 일으킨 큰 사건이 있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 중 그 안의 작은 공간에서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중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금판에 음각하여 미륵사 창건에 관한 기록을 새긴 ‘사리봉영기’였다.

  문제는 적혀있던 무왕의 왕후 이름이다. 그곳엔 신라 진흥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 가문 ‘사택씨’의 딸이라 적혀있었다.
그렇다면 서동은 익산의 ‘무왕’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일까?
현재까지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무왕’이 여러 왕후를 두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그대로 서동은 ‘무왕’이 맞다는 주장. 아니면 기록상 신라 여성과 결혼했다고 적혀있는 ‘동성왕’이 서동이라는 주장. 또 <삼국유사> 고본 기록에 따르면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정확히는 ‘무강왕’이라 적혀있는데, 한자어의 의미를 생각해 봤을 때 ‘무강왕’은 ‘무령왕’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엇이 맞을까? 역사가 재미있는 건, 억겁의 세월을 뚫고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백제 고도의 길 - 부여 부소산성

  베일에 싸여있는 익산에서 발길을 돌려 마지막 행선지 부여에 도착했다.
익산이 백제의 수수께끼로 가득한 신비로운 곳이라면, 부여는 700년 백제의 멸망을 담은 애달픈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다.

도시의 건물들이 빼곡한 부여를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
백마강과 산이 보이는 전경

  너른 평야 위로 아름다운 백마강이 흐르고 있는 부여는 한눈에 보아도 ‘살기 좋은 곳’이다. 이런 생각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백제는 역사상 두 번의 천도를 했으나, 그 두 번의 천도가 목적이나 상황 전혀 다르다.
백제가 한성 위례성을 떠나 공주의 공산성으로 옮긴 것은 앞서 말한 대로 타의에 따른 천도였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도망치듯 떠났으니, 최우선 요건은 당연히 방어에 유리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공주의 공산성은 ‘숨기 좋은 곳’이다. 이후 조선 시대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도 공산성으로 피신을 간 역사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천도는 백제 성왕의 철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자의적 천도이다. 부여는 국가 부활의 강력한 의지로 만들어진 신도시 수도였다고 할까. 심지어 성왕은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기도 했었다. 백제 시조 온조가 부여 사람 주몽의 아들이니, 백제 왕실이 북방의 강자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산 봉우리 안의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백마강 남쪽의 부소산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감싸고 있다. 성벽 안으로는 당시의 건물터와 군창터가 남겨져 있다.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부소산은 산세가 험해 이곳만이 옛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마침, 부소산성 남쪽 아래에는 왕궁 시설 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이 있으므로, 이곳 일대를 전부 사비성으로 보는 게 통설적이다.

구드래 선착장 부여 유람선창문사이로 보이는 황포돛배

  이번에는 부소산성에 바로 오르지 않고 유람선 선착장으로 향했다. 백제의 큰 강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백마강’이야말로 사비성의 운치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더욱이 유람선도 백제 시대 고증을 거쳐 건조한 황포돛배이기 때문에,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즐길 수 있다.

강위에서 바라본 백마강
낙화암 절벽의 모습

  여유롭게 강물 위를 흘러가다 보면, 부소산성의 명소인 낙화암 절벽에 닿는다. 백제가 신라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 의자왕의 궁녀들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들어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원래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꽃이 떨어져 내린 바위라 하여 낙화암으로 부르게 되었다.

나무사이로 보이는 고란사
소나무와 어우러진 백화정 정자

  배는 낙화암 아래의 사찰 고란사에 있는 선착장에 멈춰 섰다. 이곳에서 하선해 산을 오르면 힘들게 부소산성을 넘지 않고도 낙화암에 올라갈 수 있다.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것이다.

낙화암에 올라서 바라본 강의 모습

  실제로 낙화암에 오르면 생각보다 좁은 장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서 배운 낙화암은 의자왕의 삼천 궁녀가 뛰어내린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시대엔 ‘삼천 궁녀’가 실제로 삼 천명의 궁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궁녀를 거느렸다는 문학적인 수사로 통용된다고 한다. 혹자는 이러한 이야기 자체가 백제 최후의 왕인 의자왕의 명성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패자는 더더욱 침묵할 수밖에 없으니 궁금한 일이다.
그렇게 낙화암까지 보고 내려와 배를 타고 처음 선착장으로 되돌아왔다. 하늘은 맑고 바람도 없어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스르륵 백마강을 떠내려왔다.

물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황포 돛배
백마강 전경

에필로그

  중학교에 다닐 즈음, 명절날 텔레비전을 틀면 늘 나오던 단골 영화가 있었다. 사비성으로 진격하려는 신라군과 이를 막으려는 백제군의 결사 항전을 다룬 영화, 황산벌.

  오랜만에 다시 그 영화를 찾아보았다. 어릴 때는 그저 재밌는 코미디 영화라 생각했는데, 20년이 지나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내가 다녀온 ‘백제 고도의 길’의 실제 역사라는 점을 떠올릴수록, 되려 진짜 모습은 어땠을지 상상해보게 되었다고 할까?

  요새는 옛날 영화 속 명장면이 인터넷에 잔뜩 올라와 있어 사람들 반응도 쉽게 볼 수 있다. 황산벌도 당연히 올라와 있다. 댓글을 죽 훑어보니 나처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다. ‘사극은 진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명작.’, ‘코믹스럽게 웃긴 영화이지만, 우습지 않은 진지한 메시지.’

  문득 영화가 나왔을 당시의 반응도 궁금해졌다. 20년 전 기사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거참 좋은 세상이다.
그러나 이번엔 혹평도 많다. ‘사무치도록 장엄한 한국사를 희화화한 자기학대.’, ‘민족사에 성찰이 부족한 신세대를 오도하기 적합한 하류 코미디.’ 심지어는 ‘천박하다’는 단어와 ‘수준 미달’이라는 표현까지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수도 없이 접했던 영화 황산벌과 서동 설화. 실제인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이 이야기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처럼 백제 역사에 관심을 둘 수 있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흥미로운 내용을 전면에 내세워 이목을 끄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에는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려야 무엇이든 잊히지 않고 발전해나갈 수 있으니까. 한데 앞으로도 내 머릿속 계백은 박중훈, 김유신은 정진영, 의자왕은 오지명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문제가 아예 없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것 참 뭐가 맞다 하긴 어렵고 머리 아픈 문제다. 그래도 용기 내어 말하자면, 백제 고도의 길을 걷기 전에 황산벌 한번 보고 가시길. 이미 저물어버린 왕국이지만 왠지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그런 몰입이 있어야, 국가유산 탐방도 재미있는 거다.

백제고도의 길의 맛 - 황등비빔밥과 연잎밥
황등비빔밥
황등비빔밥을 한 젓가락 올린 모습

  비빔밥 좋아하시는지? 나는 좋아한다. 전주비빔밥처럼 시계 방향으로 차곡차곡 얹은 정갈한 비빔밥도 좋지만, 그냥 집에 남는 재료들을 마구잡이로 넣고 고추장 한술과 참기름 둘러 비벼 먹는 스타일도 좋다.
그러나 이번에 익산에 들러 먹었던 황등비빔밥은 전에 만나보지 못한 독특한 형태였다. 육회 비빔밥과 비슷하겠거니 했는데,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익산 황등비빔밥의 가장 큰 특징은 사골국에 토렴한 밥이 콩나물과 함께 미리 고추장에 비벼져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양념 된 육회가 주먹만 한 덩어리로 잔뜩 올려 나온다. 코팅된 밥알 하나하나에 감칠맛이 배어 있고, 곁들어 먹는 맑은 선짓국도 시원하고 진하다. 의문이 드는 맛이다. 왜 황등비빔밥을 모르고 살았을까 하는 의문.
비빔밥을 먹을 때마다 고기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면 황등비빔밥을 추천한다. 뜨는 족족 반은 밥이고 반이 고기다. 황금 어장이 없다.

연잎밥
한상 차려진 연잎밥과 요리들

  백제 문화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은 ‘삼국사기’에서 나온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김부식이 백제 궁궐의 자태에 대해 남긴 말이다.
그리고 이런 백제에서 가장 사랑받은 꽃은 단연코 연꽃이다. 백제 금속공예의 최고 걸작품이라 여겨지는 금동대향로도 활짝 핀 연꽃의 형상을 하고 있고, 연꽃무늬는 백제의 사찰 뿐 아니라 도성에서도 널리 사용됐다.

  오늘날 부여 부소산성 주변에서는 연잎밥을 하는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예로부터 부여 사람들은 궁의 정원인 궁남지의 연잎을 따서 연잎밥을 해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떡갈비나 버섯전골 같은 음식과 함께 한정식의 형태로 나오고 있다.
쫄깃한 찹쌀을 커다란 연잎으로 싸서 쪄낸 연잎밥의 맛은 은은하다. 각종 곡물과 연근을 넣어 함께 쪄내기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솔직히 조금은 어른 입맛이다. 자극적인 음식을 바랐다면 실망할 수도 있으나, 이번 여행길은 백제의 문화를 떠올리는 길이므로 이것 하나 되새기도록 하자.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그런 단정하고 우아한 맛이다. 삐죽 입 나온 아이들은 따로 떡갈비를 시켜주면 된다.
by 박성호
국가유산 열개의 길 여행기 - 산사의 길 -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산사의 길 여행경로 소개 - 공주 마곡사 - 순천 송광사 - 순천 선암사 - 합천 해인사


프롤로그 / 왜 절은 산에 있을까?

  오늘날 한국의 절은 대부분 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절을 떠올리면 늘 함께 계곡이나 숲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동시에 도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산 속에 은둔하며 불경을 외는 승려의 모습. 떠들썩한 속세와는 다른, 평온하고 신비로운 모습.
이 때문에 다른 불교 문화권 나라들을 여행하다 보면 이따금 신기할 때가 있다. 중국이나 일본, 태국이나 스리랑카에서 그랬다. 외국에서는 도심 번화가에서도 쉽게 사찰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도시 여기저기에 성당과 교회가 있는 것처럼, 편의점과 식당 사이 골목에도 사찰이 숨어있고는 하다.

  그런데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우리도 절이 도심 길거리에 흔히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불교는 약 1천년간 국교의 위치에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불교의 교리는 지배계층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당시 왕들은 수도에 더 크고 영향력 있는 절을 짓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예컨대 신라 진흥왕은 경주에 궁궐보다 높은 황룡사를 지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평양에만 9개의 절을 지었다. 심지어 불교의 권력이 가장 강했을 고려 말에는 전국에 절이 1만 3천 곳 남짓 있었다고 한다. 그때 승려 수만 해도 15만여 명으로 추정하니, 당시 인구가 400만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지금처럼 절이 대체로 산에 있게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억불’ 정책 탓이다. 이는 조선의 핵심 건국 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와 태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원래 시대가 변하면 이전에 가장 강력한 세력부터 청산하는 것이 필수적인 절차이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성리학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한 책, ‘불씨잡변’을 써내기도 했다.
결국, 도심의 사찰들은 차례차례 산지로 강제 이전 당하거나 폐쇄되었다. 유교 교육을 위한 향교나 서원으로 용도가 변경되기도 했다. 또한 천민으로 전락한 승려들은 도성 출입마저 금지되었다. 심지어 절에 걸린 범종은 떼어내어 무기로 만들기도 했다. 이때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도 철거될 위기에 처했었으나, 이는 임금인 세종이 따로 지시해 막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러니 만약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한국엔 시내 곳곳에 사찰이 무수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는 것이니, 절이 주로 산에 위치하게 된 지금의 모습은 한국 불교의 독특한 형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우리에게 산에 있는 사찰, ‘산사’라는 말이 익숙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과거 때문이다. 지금은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산사의 길 - 공주 마곡사
하늘 에서 본 구릉 지역

  서울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천안 아산 사이 39번 국도를 지나면 그때부터 공주, 청양, 보령에 걸쳐 광활한 구릉 지역이 나타난다. 구릉은 완만한 기복의 낮은 산이나 언덕이 이어져 있는 지형을 말한다. 계속해서 좁고 꼬불꼬불한 길이지만, 그만큼 천천히 주변 경치를 둘러보기에 좋다. 이번 ‘산사의 길’은 사찰 여행인 동시에 대한민국 산 여행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하늘에서 찍은 공주 마곡사 드론샷
 
  오늘의 첫 번째 장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태화산 자락에 자리 잡은 마곡사이다. 신라 10대 불교 성인 중 하나인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마곡사는 1400년 가까운 긴 역사가 있는 천년 사찰이다.

물에 비치는 마곡사의 다리
나무사이로 보이는 마곡사 석탑과 사찰

  예로부터 공주 일대에 전해지는 말로,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란 말이 있다. 봄은 태화산 마곡사가 가장 아름답고, 가을은 계룡산 갑사가 가장 아름답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내가 마곡사에 방문했을 당시는 초가을이었다. 당연히 ‘춘마곡’이 자랑하는 봄의 싱그러운 정취는 없었다. 그러나 추운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은 한결 차분하고 낭만적인 계절인 터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마침, 평일이라 사람도 없어 느긋하게 걸어 들어갔다.

석탑이 보이는 마곡사의 모습
마곡사 대광보전 정면 모습

  마곡사는 그리 크지 않은 절이다. 창건 당시에는 30여 칸이 넘는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대웅보전, 대광보전, 영산전, 사천왕문, 해탈문 정도만 남았다. 중심 건물인 대광보전 앞마당에는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 석탑이 있고, 가장 높은 곳에는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보전이 있다.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는 마곡사를 정면으로 하늘에서 본 모습

  마곡사가 위치한 지역은 휘어 흐르는 마곡천의 흐름과 산세가 태극 모양 같다 하여 ‘십승지지’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십승지지(十勝之地)’는 풍수지리상 전쟁의 참화를 면하고 몸을 보전하기 좋은 명당 열 군데를 말한다. 그만큼 밖에서 접근하기 힘들고 은둔하기 좋은 곳이란 건데, 이 때문인지 마곡사에는 관련된 이야기도 몇 가지 전해오고 있다.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마곡사

  1453년, 조선에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에 3일을 통곡한 인물이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명민하기 유명했던 김시습이다. 그는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로서 평생 방랑 길에 오른다.

  그러나 수양대군 세조는 어떻게든 김시습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5세에 이미 ‘중용’과 ‘대학’을 익히고 세종에게 찬사를 받기도 한 그는, 한성부 도성 내의 소문난 천재였다. 그런데 마침 세조가 명산대찰을 찾아 전국을 다니던 시기, 김시습이 마곡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무주 덕유산 백련암에 십여 년간 있다가 마곡사로 왔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는 직접 마곡사로 향했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왕의 행차를 들은 김시습이 미리 마곡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마곡사에는 현재까지도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타고 다니던 가마 ‘세조대왕연’이 보관되어 있다.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마곡사에 들렀던 세조가 이곳에 남기고 간 것이다. 또한 마곡사에 남겨진 ‘영산전’ 현판도 세조가 사액한 것이다.

마곡사 영산전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있다. 구한말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도 젊은 시절 한동안 마곡사에 머물렀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1896년, 20세의 젊은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라는 지역에서 일본인 상인을 군인으로 의심해 살해했다. 이는 ‘백범일지’에도 자세히 기록된 내용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벌어진 일이다. 결국 김구 선생은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도중 탈옥을 감행한다. 그리고 은신하게 된 곳이 이곳 마곡사였다. 원종이라는 법명까지 받아 출가하고 승려 생활을 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후 김구 선생은 다시 속세로 돌아와 농촌 계몽운동을 거쳐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1946년 광복 이후, 임시정부 주석이 된 김구 선생은 사찰 경내를 둘러보며 백범일지에 이런 회고를 적었다.
"사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상으로 나를 환영하여 주나, 48년 전의 승려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마곡사에는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이 심었던 향나무가 여전히 남아있다.  

물이 흐르는 마곡천  
 
 마곡사의 서쪽 길로 빠져나와 마곡천에 닿으면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걸을 수 있다. 크게 숨차지 않는 평탄한 길이라 무리하지 않고 산보하기 좋은 길이다. 김구 선생도 이곳 바위에서 삭발을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하니, 삼국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역사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길이다.

산사의 길 - 순천 송광사
천이 보이는 순천 도시를 위에서 본 모습

  이번에는 충청도를 벗어나 전라남도의 최대 도시, 순천으로 왔다. 조선 시대 간행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순천의 산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운 탓에 소강남이라고 일컫는다.”
순천의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풍요롭기로 유명한 중국의 강남과 비슷해, ‘작은 강남’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만큼 순천은 오래 전부터 빼어난 경치로 소문난 곳이다.

조계산 도립공원 안내도
산의 풀숲사이로 흐르는 계곡물
높고 곧게 뻗은 나무와 돌멩이들을 쌓아 올린 작은 돌탑들

  순천에서 찾아갈 산은 호남의 명산이라 불리는 조계산이다. 소백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조계산은 해발 889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맑은 계곡과 울창한 숲, 폭포와 약수를 품은 다채로운 산이다. 
또한 산 전체가 잎이 넓은 낙엽활엽수로 덮여 있어 철 따라 계절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봄철의 벚꽃이 대단하고 가을철의 단풍이 훌륭하다. 산세도 험하지 않으니 사시사철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조계산에는 자연경관보다도 더욱 유명한 것이 있다. 동·서 양면에 걸쳐 자리 잡은 대한민국의 양대 거찰, 송광사와 선암사이다. 조계산은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담은 기록장이자 그 문화유산의 전시장이다.

산에 둘러쌓여있는 송광사를 위에서 본 모습
송광사로 들어가는 입구                 
  나는 먼저 조계산 북서쪽 기슭에 자리한 송광사를 찾았다. 한국에는 ‘삼보(三寶)사찰’이라고 불리는 세 개의 절이 있다. 삼보는 문자 그대로 불교의 세 가지 보물을 뜻한다. 첫째는 부처님을 뜻하는 불(佛),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경전을 뜻하는 법(法), 셋째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정진한 스님, 승(僧). 그러니 ‘삼보사찰’은 이 세 가지 보물을 상징하는 불보·법보·승보의 사찰을 말한다.
불보사찰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양산 통도사. 법보사찰은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 그리고 승보사찰이 지금 만나 볼 순천의 송광사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송광사에서 나라의 최고 승려인 국사가 16명이나 배출됐기 때문이다.

삼청교 다리와 본찰
송광사  
 
송광사의 대표적인 경치로 손꼽히는 우화각과 삼청교를 건너 본찰로 들어갔다. 평일 이른 낮의 송광사에는 방문객이 거의 없어 고요하고 한적했다. 이렇게나 유명한 사찰을 유유히 둘러볼 수 있다는 것에 기분 좋았다.
송광사는 신라의 승려 혜린선사에 의해 길상사라는 명칭으로 창건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후 계속해서 수리와 중창을 거치다, 고려 시대의 승려 지눌이 이곳에서 가르침을 베풀며 발전했다. 고려의 승려 지눌은 한국 불교의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을 창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계산이라는 이름도 원래의 송광산에서 이때 개칭되었다.

꽃이 핀 배롱나무
큰 초록잎 사이로 보이는 송광사


  절의 면적이 지금까지 가본 절 중에 손꼽을 정도로 컸다. 하나의 절에서 국사가 16명이나 배출된 것은 아마 이런 규모의 덕도 크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이 많아야 뛰어난 인물도 나오기 쉬워지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고려시대 승려의 영향력은 대단히 강력했으니, 16 국사가 배출된 사찰의 명성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전국에서 수많은 청년이 송광사에 승려가 되기 위해 몰려들었을 것 같다. 절 마당에 ‘비사리 구시’라 해서 송광사 스님들의 공양을 돕던 밥통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크기가 욕조만 하다. 얼핏 보면 왜 나룻배가 산사 마당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또 이전에는 ‘십육조사진영’이라 해서 16 고승들의 초상화가 국사전 건물에 전시되어 있었다 한다. 하지만 70여 년 전, 안타깝게도 도둑이 들어 세 점을 제외한 나머지 영정들이 전부 도난당했다.


송광사 처마 아래에서 본 단청과 그림

  그렇게 송광사를 전부 돌아보는 데 한참이 걸렸다. 사람이 없으니 오히려 더 유심히 둘러보게 된다.
그러면서 중국인 서래와 한국인 형사 해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을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 서로에게 핸드크림과 립밤을 발라주는 모습. 법당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린 서래에게 손수건을 건네준 해준의 모습.
사실 내게 송광사는,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헤어질 결심’ 속 장면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박찬욱 감독님은 송광사의 어떤 면에 반해 이곳에서 영화의 가장 낭만적인 장면을 찍게 되었을까. 탕웨이님은 이후 송광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며 스님들과 아침 공양도 했다던데, 새소리만 남은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들다.
하기야 ‘헤어질 결심’뿐이 아니지. 천 년도 넘은 아득한 과거에는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승려가 목욕재계하고 불공을 드렸을지. 드높은 명성만큼이나 시간 속에 파묻힌 수많은 이야기가 궁금한 곳이다.

산사의 길 순천 선암사

  조계산 서편의 송광사에서 반대쪽 선암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차를 타고 가는 방법. 같은 산에 자리한 사찰이라 금방 갈 것 같지만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산을 빙 돌아가야 하는데 거리만 30킬로미터에 달하니 적어도 40분은 생각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걸어가는 방법이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조계산 도립공원 등산로를 통해 서로 이어져 있다. 다행히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산 중턱을 둘러 가는 길이라 경사도 적당하고 경치를 감상하기도 좋다.

 선암사로 향하는 개울
누각 강선루

  선암사로 향하는 개울을 따라 걷다 보면 무지개 돌다리 승선교와 누각 강선루를 볼 수 있다. 두 문화유산 모두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주변 환경과 운치 있게 어우러져 있어 많은 방문객이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곳이다.
그런데 선암사, 승선교, 강선루, 이름에 전부 신선 선(仙) 자가 쓰였다. ‘선암사’는 절 서쪽의 평평한 바위에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놀았다는 유래에서 만들어졌고, ‘강선루’도 신선들이 내려와서 노는 누각이다. 또 ‘승선교’는 신선들이 놀다 아침 해 떠오르듯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온통 신선들의 놀이터다.
그만큼 이 일대가 생로병사로 가득 찬 인간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의 부처님 세계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불교에서 무지개다리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산에 둘러싸인 하늘에서 본 선암사
사찰안에 있는 두개의 석탑
송광사의 돌담

  이번에도 경내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송광사에 비해 한결 더 차분하고 아담해 보였다. 과거 선암사는 건물만 100여 동 있었던 큰 절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부분 화재로 소실되고 20여 동만 남았다.
고요한 사찰인 선암사는 수행 총림이다. 승려들이 모여 함께 배우고 수행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사찰이란 뜻이다. 주변을 둘러싼 우거진 숲과 맑은 기운이 더없는 평온함을 선사하니,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수행이 될 듯하다. 사람보다 다람쥐 만나기가 더 쉬운 곳이다.

템플스테이 문
창문에 달린 동종

  사람이 사는 세계는 온갖 고통과 생사윤회가 끝없이 반복되는, 생로병사의 세계다. 그러나 불교에서 절은 부처님이 살고 있는 극락의 나라, 불국토(佛國土)이다. 이곳엔 근심, 걱정, 시기 질투, 증오와 원망이 없다. 오직 마음의 집착을 끊은 자만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절에 갈 때는 잠시나마 원래의 사바세계를 떠난다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 좋다. 일주문을 지나며 세속의 나를 떼어놓고, 해탈문을 지나며 모든 번뇌와 깨달음이 사실 하나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인생이란 본디 몸부림치면 칠수록 수렁은 깊어지고,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첩첩산중이라 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집착 번뇌를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기 위해 깊은 산사를 찾는다. 아예 사찰에 머물며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고 예불을 행하기도 한다. 정신건강적인 측면에서 과학적으로도 효과가 있다고 입증되는 ‘템플스테이’다. 선암사에서도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에 참가했던 사람 중에는 나의 아버지도 있었다.

물이 흐르는 개울가
물이 세차게 떨어지는 개울

  사실 내게 선암사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나는 몇 년 전, 가족 모두와 함께 선암사를 찾은 적이 있다. 나와 어머니, 아버지, 누나 이렇게 넷이 서울에서 차를 끌고.
주차장에서 절까지 가는 길이 꽤 길어서 넷이 한참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셋이었다. 당시 근심이 많았던 아빠에게 엄마가 템플스테이를 하는 게 어떻겠냐 권했고, 결국 아빠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암사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론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지 않는다. 기억에 짙게 남게 된 이유는, 그로부터 며칠 뒤 예고 없이 아빠가 집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빠는 불과 며칠 만에 절에서 탈출했다. 편의점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는 산 속에서,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버린 것이다.

  차 없이 나오기 워낙 힘든 곳인데, 아빠가 어떻게 서울까지 돌아왔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아빠 말로는 무작정 산에서 내려오니 순천 시내로 가는 차가 있어 얻어 탔다고 한다. 그 다음 여차저차 터미널을 찾아 고속버스를 타고 왔단다.
하여튼 도시로 돌아온 아빠는 전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한 편으론 아직도 그럴 에너지가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산사의 길 - 합천 해인사
산에 안개가 낀 해인사를 멀리서 본 모습

  서울에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경상남도 합천으로 갔다. 도착하고 바로 차를 빌려 북쪽의 가야산으로 운전해 갔다. 산골짜기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올라갔다. 합천 해인사는 가기 쉽다, 하고 말하기에는 양심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지금이야 그나마 도로가 잘 닦여 있지만, 예전, 이 지역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방문할 가치가 있나?’ 묻는다면 이건 대답이 쉽다. 예로부터 "조선 팔경"의 하나로 알려진 가야산은 수려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다 보니 수목이 울창하며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고, 신라에 편입된 후에는 국가의 제사를 지낸 명산이라 하니 경치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가볼 만한 곳이다.

계곡에 물이 흐르는 모습
숲이 우거진 등산로

  그리고 그러한 가야산 깊은 곳에 자리한 해인사는 내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해인사는 대한민국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해인사가 이전에 소개했던 순천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 중 하나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해인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여 보관하는 ‘법보사찰’이다.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전 기념석
해인사로 가는 길

  사실 해인사는 원래부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절은 아니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지만, 해인사는 이보다 400년 이른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이다. 더군다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은 조선 시대에 와서야 지어졌다. 본래 강화도에 보관하던 대장경을 조선 태조 때에 옮겨오면서 지은 것이다.
지금도 해인사 입구에선 창건 당시에 심었다는 나무를 볼 수 있다. 서기 802년, 승려 순응과 이정의 기도로 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감사하여 식수한 느티나무다. 두 스님은 이때 왕의 도움을 받아 해인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나무의 온전한 모습까지 볼 수는 없다. 그저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무려 1,200여 년 같은 자리에 서서 해인사 방문객들을 맞다가, 1945년 수령을 다해 고사했다.

산안개가 있는 해인사
옆에서 바라본 해인사
 
  느티나무의 마중을 받으며 해인사에 들어섰다. 가야산 두메산골에 파묻혀 있는 그윽한 산사다.
해인사는 귀중한 의미와 역사만큼 수많은 문화유산을 소유한 사찰이다. 국보는 6점, 보물은 21점을 소장하고 있다.
거쳐 간 이름난 인물들도 많다. 희랑 스님은 후백제 견훤의 제안을 뿌리치고 고려의 태조 왕건을 도왔는데, 이후 태조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해인사를 고려의 국찰로 삼고 중건을 지원했다.
또 조선 중기의 유정 스님도 해인사에서 입적했다. 임진왜란이 닥치자 몸소 뛰쳐나와 의승을 이끌고 왜군을 무찌른 그는, 우리에게 ‘사명대사’라는 존경심 담은 이름으로 익숙하다.
신라 말 ‘삼최’ 중 한 사람이자 뛰어난 문장가 최치원도 해인사에서 말년을 보내다 숨을 거두었다.
또 1817년 순조 17년에는 해인사의 수많은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적 있는데, 그때 당시 경상감사 김노경의 아들이 재건을 축원하는 의미로 ‘가야산 해인사 중건상량문’을 지었다. 뛰어난 서예와 그림 실력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 실학자, 추사 김정희다.

매달린 등에 둘러 싸여있는 석탑
해인사 내부 불상

  나는 늘 새로운 절에 방문하면 마지막으로 중수한 것이 언제인지 확인하고는 한다. 나무로 된 사찰 건물들이 화재에 취약하기도 하고, 임진왜란이나 6.25를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새롭게 지어진 경우도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긴 시간 화마를 피해 온전히 보전 중인 문화유산을 만나게 되면 반가우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해인사 역시 화재로 인해 7차례나 중수한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중수한 것은 조선 후기라 한다.

해인사의 계단
해인사 문사이로 보이는 스님의 모습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신기하게도 팔만대장경을 봉안하는 장경판전 건물만큼은 늘 화마를 피해 갔다는 것이다. 심지어 6.25 전쟁 당시에는 해인사 전역이 우리 군의 폭격 대상으로 지정된 적도 있었다. 좌익 성향 무장 테러 조직인 조선인민유격대가 기지로 삼기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의 긴박한 상황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지리산, 가야산 일대의 ‘빨치산 잔당 토벌’ 명령이 내려졌다. 명령을 받은 공군 김영환 대령은 전투기를 몰고 편대원들과 출격했다. 먼저 나섰던 미군기가 연막탄을 떨어뜨려 폭격 지점을 지정했고, 대한민국 공군의 임무는 그곳에 폭격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영환 대령은 편대원들에게 폭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전시 상황에서의 명령 불복종은 즉결 처분에 처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항명했다. 연막이 퍼져나가는 지역에는 해인사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쫓아내는 정도로 임무를 종료했고, 명령을 어긴 김영환 대령에 문책이 시작되었다. 김영환 대령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인사에는 700년을 내려온 우리 민족정신이 어린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프랑스가 파리를 살리기 위해 프랑스 전체를 나치에 넘겼고, 미국이 문화유산을 살리려고 교토를 폭파하지 않은 이유를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경판전 내부 모습
목판들이 꽂혀있는 모습

  오늘날 우리가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덕분이다. 두 문화유산은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각각 세계유산,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창문 사이 틈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나 역시 보고 또 봤다. 과거를 보여주는 요술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수백 년 전 고려 시대의 불교 경전이 지금까지 전해 온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바다 밑처럼 고요함에 잠긴 산사는, 늘 억겁의 세월도 지난 날의 기억처럼 느껴지게 만들고는 한다.

그림이 그려진 해인사의 한 벽면
하늘에서 본 해인사의 모습
에필로그

살면서 두 번, 한 계절이 넘는 시간을 산속에 들어가 살았다. 한 번은 호주 시골 산속 캠핑장 컨테이너에서. 다른 한 번은 지리산 정상 높이 조지아 산골 마을에 집 한 채를 빌려서.
말 나눌 사람도 없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도 없었다. 그래서 주로 하는 일은 온종일 책을 읽거나 산길 여기저기를 다니며 산책하는 일이었다. 밤에는 주야장천 별 보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지극히 단순하고 무료하며, 외롭고 심심한 시간이었다. 하루가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 것인지. 시간이 늘어지다 못해 더는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떠나온 원래의 세상은 계속해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겠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다른 시간 속에 살았다.

나는 늘 산에 오면 그때를 떠올린다. 머릿속에 복잡한 일이 많아질 때나, 내가 너무 현실적으로만 살아가게 될 때면 가끔 그리워하기도 한다. 신기한 일이다. 삶에서 가장 지루했던 시간이 오히려 짙게 남은 기억이 됐다. 때때로 삶이 파격적으로 단순해지는 데서 오는 만족감은 무엇보다 강력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산사를 걸으며 기분이 좋아졌다. 산속에서는 생존 경쟁에 불태우던 일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면서 조금은 더 궁극적인 목표를 생각하게 한다. 건강하게 살자, 던지 행복하게 살자, 같은 것들.
그 외에는 크게 없다. 단순한 풍경에서는 생각마저 단순해지는 것일까. 그러나 한껏 여유로워진 나는 어느새 그 단순함을 즐기고 있다. 나는 이것이 산사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선선히 부는 바람과, 뗑그렁 울리는 풍경 소리를 좋아하게 된다.


산사의 길의 맛 산채 비빔밥
산채비빔밥 골고루 섞인 산채비빔밥

  늘 등산로 입구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도시에서는 쉬이 팔지 않는 음식들을 판다. 엄나무 닭백숙, 능이버섯 오리 전골, 흑염소 떡갈비, 도토리묵, 더덕구이 등등. 대부분 산지에서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음식들이다. 그 중에서 단연 대표 메뉴는 산나물을 잔뜩 올려 내오는 산채 비빔밥이다. 대한민국 이름난 산중에, 산채 비빔밥 없는 산은 없을 것이다.
다만 만약 전통 사찰 음식을 하는 곳이라면, 대승불교에서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고기는 나오지 않을 수 있다. 더군다나 파, 마늘, 부추, 달래 등 냄새가 강한 오신채도 산채 비빔밥에 올라가지 않는다. 강한 자극이 번뇌를 일으켜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만 제외하면 고슬고슬 지은 밥에 취나물, 고사리, 참나물, 도라지, 더덕, 표고버섯, 시금치, 콩나물 등 어떤 나물이 올라가도 좋다. 고추장에 들어가는 고추는 오신채만큼 강한 향과 냄새가 없어 허용하는 곳이 많으니, 수행보다 맛이 우선인 우리에게는 다행이다. 매콤한 고추장과 풍미 가득한 참기름은, 개성 강한 모두를 강강술래 하게 만드는 산채 비빔밥의 반장 부반장이다.

  제대로 산채 비빔밥을 즐기려면 몇 가지 단계를 거쳐 먹는 것이 좋다. 먼저 온갖 산나물 가득 담긴 질그릇이 나오면,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나물의 맛을 음미한다. 일종의 자기소개 시간이다. 산채 비빔밥의 가장 큰 매력은, 근방에서 자란 식재료가 선물하는 신선함이다.

  그 다음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젓가락으로 밥과 나물들을 섞어 먹는다. 나물에 간이 되어있으니 슴슴하긴 해도 너무 싱겁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각 나물들의 본래 향을 살리면서 그 조화를 즐기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모든 나물들의 파악이 끝났을 때, 드디어 고추장이나 간장을 두르고 썩썩 비벼 먹는다. 사찰 음식을 먹으며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맛의 극락이다. 한껏 차분하고 편안해지는 맛이다.
박성호 작가 프로필 사진
by 박성호
국가유산 열개의 길 여행기 - 서원의 길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서원의 길 여행 경로 소개 - 논산 돈암서원 - 장성 필암서원 - 경주 옥산서원 - 달성 도동서원

프롤로그 / 조선 시대 교육 이야기

  나는 울산의 사립 기숙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교 기숙사에서 동기들과 생활하며 공부했고, 적장의 목을 베어 오겠다는 각오로 수능을 준비했다. 자립형 사립 학교였기 때문에 교과 과정엔 자율성이 있었다. 공부를 잘하면 재단에서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또 설립자 기일엔 대대적인 학교 행사가 열렸다. 신입생 때는 설립자 인생과 정신에 관해 공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수백 년 전 조선 시대의 서원도, 내가 다녔던 현대의 사립 학교와 닮은 점이 많다. 서원 역시 지방에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던 것처럼, 유명한 서원들도 경쟁률이 높고 들어가기가 까다로웠다. 지금의 선생님처럼 원장님, 강장님, 훈장님이 계셨고, 학생인 원생이 있었다. 원생들은 서원에서 공부하며 인성 교육도 받았고, 유학을 공부하며 과거 시험을 준비했다. 또 서원의 설립자나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는 제사를 드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교육이나 지금의 교육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재미있다. 이번 ‘서원의 길’은 그 당시 공부하던 원생들이 시끌벅적 모여있던 모습을 떠올리며 걸어야 더욱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잠깐. 당시의 교육 문화를 이해하면 더욱 실감 나게 걸을 수 있으니, 먼저 용어 정리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 무슨 용어 정리까지 해야 하나?’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하나씩 공부해 보자.

  조선 시대 교육기관엔 서당, 서원, 향교, 사부학당(이하 사학), 성균관이 있다. 이를 현재의 개념으로 공립과 사립으로 나누어 보면 서당, 서원은 사립이고 향교, 사학, 성균관은 공립이다.
초등교육을 맡았던 건 서당이다. 하늘 천, 따 지, 하는 ‘천자문’으로 시작해 글을 쓰고 이해하는 간단한 기초 교육 위주였다. 주인인 훈장이 직접 선생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자영업 학원 원장님인 셈이다.
그 다음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사학, 향교, 성균관이다. 사학은 수도 한양에 지어진 국립학교이고, 향교는 지방에 세워진 국립학교로 이해하면 쉽다. 다만 이 둘은 나라에서 설립한 학교이므로, 유교 이념을 전파하고 교육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 당연히 유교의 성현께 제사를 올리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유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공자와, ‘사성’이라 불리는 안회, 증자, 자사, 맹자를 중심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렇게 사학이나 향교에서 최우수 학생으로 추천받거나, 과거시험을 통과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조선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은 지금의 국립 대학인 셈이다. 성균관이 배출한 인재에는 조광조, 이황, 이이, 정약용, 신채호가 있다.

  자, 이제 마지막 오늘의 주인공, 서원에 대해 알아보자.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은, 정치적 혼란으로 중앙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정확히는 조선 초기 권력을 독점한 훈구파 세력에 밀린, 사림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지방으로 퍼져 제자들을 양성하고, 자신들 세력의 학문적 역량을 축적하기 위해 서원을 운영했다. 서원은 특정한 사상과 이념을 후학들에게 넘겨줄 수 있다 보니, 앞서 설명한 공립 학교와는 대척점에 있었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서원이 증설되고 발전한 것도 국립 교육 기관들이 쇠퇴했을 때부터였다. 향교는 전쟁과 같은 국가적 혼란을 거치며 약해진 반면, 서원은 향촌 사회의 자치 규약인 향약을 세우며 지방에서 영향력을 넓혀갔다.
결국, 지방의 유수한 양반 자제들이 대부분 서원에 입학하기에 이르렀고, 어느 시점 이후로는 서원 출신 인사들이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이들은 사림파 조직이 되어 기존의 훈구파와 대립하게 된다. 오늘날 정당 정치로 볼 수 있는 조선 붕당 정치의 시작이다.

  여기까지가 ‘서원의 길’을 시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조선 시대 교육 이야기다. 앞서 말했듯 서원에서 길러진 인재들은, 후에 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기와 파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럼 과연 그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생활했을지, ‘서원의 길’을 통해 만나 보자.

서원의 길 - 논산 돈암서원
논산의 마을을 위에서 본 모습

  조선엔 동국 18현이라 부르는 인물들이 있다.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며 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올랐던 18명의 유학자를 말한다. 독창적인 자신의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 학자와 선비로서 양심과 도덕을 실천한 그들은 유교 국가 조선에서 만인의 칭송을 받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 올랐다. 조광조, 이황, 이이, 최치원, 정몽주 등, 수백 년이 지난 현대에도 빛이 바래지 않은 이름들이다.

드론으로 멀리서 찍은 논산돈암서원
논산돈암서원 입구

  앞서 말했다시피 사설 교육 기관인 서원은 훌륭했던 유학자를 기리는 장소였다. 그러니 이번 여행은 당대의 뛰어난 대유학자들을 만나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첫 번째로 방문한 논산 돈암서원은, 앞서 말한 동국 18현 중 무려 네 명의 유학자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조선 예학을 집대성한 예학의 대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제자인 송시열과 송준길이다.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소나무와 논산 옆에서 본 논산 돈암서원
정면에서 본 논산 돈암서원

  광산 김씨는 충청도 연산현(지금의 논산시)의 명문 사대부 가문이다. 김장생의 아버지는 조선의 중앙 관청인 사헌부 수장까지 올랐던 김계휘인데, 돈암서원은 원래 이 아버지와 아들이 학문 연구를 하고 후진양성에 힘쓰던 곳이었다.
그러다 김장생이 사망한지 3년 후 같은 자리에 서원이 건립되었고, 30년 후에 현종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넗은 마루를 가진 응도당
나무와 함께 보이는 서원안의 건물

  서원 안에 있는 건물들은 각각의 역할이 있다. 수업하던 강의실이 있고, 강의 자료를 만드는 출판소가 있으며 기숙사 건물도 있다.
돈암서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넓은 마루를 지닌 강당 ‘응도당’이었다. 이곳은 유생들이 ‘장수 강학’하던 건물이다. 장수는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것을 뜻하고, 강학은 스승과 문답을 주고받으며 공부하는 당시의 수업 방식을 말한다. 서원에서는 일방적인 교육보다는 유생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식의 교육이 주로 행해졌다.

서원 뒷편의 사당
서원의 꽃담

  앞으로 만나 볼 다른 서원도 마찬가지이지만, 대개 서원의 뒤편이나 높은 곳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앞에서 공부하고 뒤에서 제사 지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돈암서원에서 모시는 인물은 앞서 말한 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과, 김장생의 제자이자 송시열의 친척 송준길이다. 네 명이 전부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명문 사립 학교인 셈이다.
사당 숭례사를 둘러싼 꽃담에는 유교 경전에 나오는 여러 구절이 쓰여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지부해함 [地負海涵]. 땅이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가 모든 물줄기를 수용하듯, 배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박문약례 [博文約禮]. 배움을 통해 지식을 확장하면서도 자만하지 말라. 예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라.
서일화풍 [瑞日和風].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처럼, 상대방을 배려하고 응대하며 배운 것을 실천하라.
유학 중에서도 특히 예법이나 예제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는 학문을 예학이라 한다. 김장생은 조선 시대 예학을 하나의 학파로 정립시킨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러니 꽃담에 이렇게 바른 자세와 태도와 관련된 말이 적혀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서원의 모습
서원의 길 - 장성 필암서원
논밭이 보이는 장성

  다음 여정은 남쪽의 호남 지방으로 간다. 자동차로 수도권이나 충청권에서 내려가다 보면, 광주의 관문 역할을 하는 전라남도 장성을 만난다. 이번에 찾아갈 곳은 이곳에 위치한 필암서원이다. 왕의 스승, 하서 김인후 선생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멀리서 하늘에서 바라본 서원과 마을 모습
소나무와 서원의 연못

  성리학자들은 대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서원을 건립했다. 골짜기가 있어 물이 흐르고 산이 있어 풍월을 가까이할 수 있어야, 성리학의 목표에 적합한 교육을 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 찾은 곳도 주변이 무척이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필암서원 정문인 붉은 빛의 확연루
필암서원 현판

  필암서원은 넓은 공원을 지나 가장 안쪽 산기슭에 붙어있다. 나이 많은 은행나무 옆 붉은빛의 확연루가 필암서원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확연루의 현판은 앞서 돈암서원에서 만났던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김인후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던 송시열은, 김인후 신도비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우리나라 인물 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하여 탁월한 이를 그다지 찾아볼 수 없으며 대게 이 세 가지 중 한두 가지에 뛰어난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김인후 선생을 종생하니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게 되었다.’

필암서원
필암서원 모습

  필암서원은 전라도의 선비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만큼 김인후는 당대에 존경 받던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였다. 호남 사람으로 유일하게 동방 18현에 올라 문묘에 종사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높은 수준의 학문과 도덕으로 칭송받았다.
  그 탁월함에 탄복한 사람 중에는 퇴계 이황도 있었고, 왕인 중종도 있었다. 중종은 김인후가 세자의 도덕적 교육을 담당하는 책임을 맡게 했다. 다시 말해, 인종의 세자 시절 선생님이 된 것이다. 인자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인종 역시 결이 같은 김인후를 공경했고, 둘은 서로 뜻이 맞아 신임이 두터웠다.
또한 김인후는 성리학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약, 복서(점괘), 율려(음악) 등에도 능했다고 한다. 본래 예술에 능했던 인종은 그런 김인후에게 손수 그린 대나무 그림을 하사하기도 했다.

담장이 보이는 필암서원
벽에 붙어있는 한자로 된 글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인종은 비운의 왕이다.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하고,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해 조선 왕조 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으로 남게 되었다.
왕의 스승이었던 김인후는 이로 인해 심장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결국엔 벼슬의 뜻도 접고 사직하여 장성으로 돌아와, 오직 산림에 은둔한 채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그런 성품답게 김인후의 학문은 의리, 충의의 실천을 중요시한다. 정성을 다하여 공경함을 중시하며, 스스로 절대로 도를 안다고 자처하지 않으며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정신은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와, 필암서원은 호남 지역 유학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훗날 흥선 대원군은 ‘호남 팔불여’란 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문 불여 장성(文 不如 長城)’. 학문으로는 장성에 견줄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 중심에 필암서원이 있었고, 하서 김인후 선생이 있었다.

서원의 길 - 경주 옥산서원
산 과 논이 보이는 풍경

  전라도를 떠나 경상도로 넘어가기 전에, 이쯤에서 용어 정리를 한 번 더 하면 좋겠다. 계속해서 유학, 성리학 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 둘이 차이에 대해서. 대충 뭐 비슷한 말 아니겠나?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 보자.

  우선 유학부터. 유학은 공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는 학문이다. 공자는 중국의 수많은 제후국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기 시작했던 ‘춘추시대’ 사람이다.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다. 그래서 당시에 공자를 비롯한 학자들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세상이 혼란할까? 어떻게 해야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이때 공자의 해결법은 이런 접근이었다.
“지금의 문제는 개개인의 윤리의식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부터 윤리의식을 높이고, 모두가 하나둘 참여하면 이 사회가 편안해질 것이다.”
유학은 이러한 공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의 심리, 도덕, 정의에 대해 논하는 학문이다. 다만 공자가 직접 글을 써서 경전을 남기거나 하지는 않았고, 훗날 여러 제자가 어록을 엮어가다 맹자가 집대성하여 학문으로 정립된다.

  그렇다면 성리학은 무엇인가. 이번에는 12세기 송나라의 학자였던 주희라는 인물을 알아야 한다.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주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아버지는 그런 주희에게 유학을 배우라는 유언을 남겼고, 주희는 유언대로 여러 유학자를 스승으로 삼아 공부했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불가와 도가의 사상도 배우게 되고, 그 안의 문제점도 느끼게 됐다.
그렇게 주희는 일평생에 거쳐 공부하며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결국, 이전 유학자들의 사상과 불교, 도교의 사유를 섞어 새로운 학문을 집대성하기에 이르는데, 그게 바로 성리학이다.
곧 성리학은 유교의 한 학파로서, 불교와 도가가 비현실이라는 점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주희는 훗날 존경의 의미로 주자라 불리게 된다.

서원을 하늘위에서 바라본 모습
그림자가 비추는 서원

  자, 이제 다시 조선. 알다시피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강력하게 받아들인 나라이다. 그리고 이번 경주 옥산서원에서 만나 볼 유학자가 조선의 성리학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전라도 호남 지역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된 인물이 필암서원 김인후라면, 경상도 영남 지역에는 옥산서원의 이언적이 있다. 문묘와 종묘 모두 이름을 올린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조선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고, 사후에는 이황에게 계승된다.

물가 근처에 쌓여있는 작은 돌들
옥산서원 들어가는 문

  옥산서원 역시 경주 시내에서 거리가 꽤 먼 산골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 앞으로는 가까이 자계천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평평한 너럭바위가 일대를 뒤덮여 있어 경치가 빼어나다. 이언적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곳 산과 계곡에 직접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중 한 곳은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라는 뜻에서 ‘세심대’라 붙였는데, 그 이름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 퇴계 이황이 직접 쓴 글씨로 새긴 것이다.

나무로된 계단이 있는 누마루 무변루
옥산서원 현판이 보이는 정면

  내부에 들어가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유학생들이 휴식을 취하던 누마루인 무변루이다. 누마루는 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를 뜻하는데, 필암서원은 서원 최초로 누마루를 도입한 곳이라고 한다. 높은 마루가 외부의 경관과 내부의 경관을 연결하고 있으니, 누마루는 서원의 건축물이 자연과 어우러지는 효과를 극대화한다.

옆에서 본 서원의 모습
서원 문고

  또한 필암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문고 가운데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국 시대 연구의 대표 양대 사료 중 하나인 김부식의 [삼국유사]도 보관되어 있다. 또한 한석봉, 김정희 등 당대 명인의 친필 현판도 다수 남아있다.

벽에 걸려있는 한자로 된 글들
단청이 보이는 서원의 처마

  이언적은 여러 차례 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임금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함을 강조한 인물이다. 임금이 우선으로 자기 수양을 게을리하지 말고 덕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솔선수범하여 사치와 탐욕을 경계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언적은 관료와 선비 또한 먼저 모범을 보이고 실천하기를 역설했다. 후에 그는 을사사화 여파로 멀리 귀양을 가게 되지만,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좌절하지 않고 평생을 저술과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문사이로 보이는 옥산서원 정면

  그리고 그의 이런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갖게 했다. 사실상 정치적 적이라 할 수 있는 훈구파 세력도 그의 학문과 덕행을 인정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직접 찾아와 문상하였다. 사후 명종은 그의 작위를 복직시켰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황은 그를 추모하는 글에서, 그를 가까이에서 봤는데도 더 많이 묻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서원의 길 - 달성 도동서원
서원 근처 푸른 강이 흐르는 모습을 찍은 드론샷

  마지막으로 만나 볼 인물 역시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인 김굉필이다. 그러나 그 전에 ‘소학’이라는 책에 대해 먼저 공부하고 넘어가자.
소학은 유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공부하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쓰인 책이다. 일상생활의 예절이나 정신 수양을 위한 격언 등을 모아 놓았다. 지금으로 치자면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을 위한 교과서, 예컨대 바른 생활이나 슬기로운 생활 같은 책이다.
이렇게 갑자기 소학 얘기를 꺼낸 것은, 이번 도동서원에서 기리는 김굉필 선생이 스스로를 ‘소학 동자’라 칭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수령이 400년 넘은 거대한 은행나무
도동서원 입구

  도동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자리잡고 있다. 현풍읍에서 낙동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찾을 수 있다. 길이 워낙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무심코 지나가기엔 어려운 곳인데, 그 이유는 서원 앞마당에 심어진 수령 400년 넘은 거대한 은행나무가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김굉필 선생의 외증손이며 이황, 조식의 제자로 알려진 정구가 심은 것이다.

서원을 위에서 본 모습
도동서원 중앙에서 바라본 모습

  지금껏 여러 서원들을 다녀봤지만 아름답기로 치자면 도동서원을 따라 올 곳이 없다. 주변 낙동강 일대 정취와 어우러짐도 그렇고, 높낮이가 서로 다른 지붕 선들이 만들어내는 풍성함도 그렇다. 더군다나 둘러싼 담장도 독특하고 아름다워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도동서원은 조선 시대 서원 건축이 가져야 할 건축적 규범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본을 중시하고 실천한 것이 되려 특색이 된 것이다.

서원 내부 천장과 현판
담장과 이어져 중앙에 있는 문

  이런 서원의 모습은 이곳에서 모시는 한훤당 김굉필과 닮아있다.
김굉필은 30세가 될 때까지도 소학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수양했다. 늦게 공부를 시작해 생전 성리학에 통달한 그였지만, 기초적인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 동자'라 칭하며 ‘소학’의 도덕적 가르침대로 생활했다. 또한 후진 양성에도 전력을 다해, 조광조를 포함한 수많은 인재가 그의 밑에서 배출됐다.
하지만 그도 사화의 참혹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사건에 연루되어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된다. 이후 2년 뒤에는 유배지가 순천으로 옮겨졌는데, 또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나 유배 중이던 사람들이 대거 희생된다. 그리고 김굉필 역시 효수되어 순천 철물시장에 걸리게 된다.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

서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모습
한복을 입은 선생님이 학생들과 마주앉아 있는 모습
 
  때마침 어린 학생들이 도동서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정도로 보였다. 배우는 것은 소학의 내용을 네 글자씩 묶은 사자소학이다. 아버지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 내 몸을 기르셨다, 로 시작하는 사자소학은 마지막 두 구절이 참 재밌고 인간적이다.

嗟嗟小子(차차소자)아, 敬受此書(경수차서)하라。
아! 소자(제자)들아 공경히 이 책을 받아라.
非我言耄(비아언모)라내, 惟聖之謨(유성지막)시니라。
 나의 말은 늙은이의 망녕이 아니라, 오직 성인의 가르치심이니라.

  조용히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장난치거나 떠들지는 않지만 죄다 시선이 제각각이다. 아이들을 공부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 옛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에필로그

  서원은 검소함을 덕목으로 여겼던 조선 시대 건축물답게, 그리 화려하지 않다.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왕궁이나 불교의 절처럼 웅장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간결한 모습이 고고하고 반듯하다. 마치 고결한 선비와 같은 아름다움이다. 공자께서도 말씀하셨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

  이번 ‘서원의 길’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을 만나보는 시간이었다. 서원을 여행하는 재미는 바로 이런 점에 있지 않나 싶다. 조선시대 건축 미학을 보여주는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당대 유학자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존경하고 탄복하게 된다. 정치가와 학자로서 정점에 선 인물들이 곧고 모범이 되는 생활을 했다는 것은, 후대 사람들에게도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더군다나 이런 현인들의 사상과 정신이 서원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니, 각각 서원의 다른 학풍을 느끼며 걸어보는 것도 좋다.
논산 돈암서원은, 예학의 대가 김장생 선생의 가르침대로 내 자신의 예의와 예절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곳. 말과 행동을, 거칠지 않게 남을 배려하며 해야겠다 다짐하게 만드는 곳.
장성 필암서원은, 왕의 스승 김인후 선생의 가르침대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의리를 지키고 공경을 다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곳.
경주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을 정립한 이언적 선생의 가르침대로 사치와 탐욕을 경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 되겠다 다짐하게 하는 곳.
달성 도동서원은, 소학동자 김굉필 선생의 가르침대로 기본에 충실하며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 게을러지지 않기를 바라게 하는 곳.

  대한민국에는 내가 이번에 가보지 못한 서원들도 무척이나 많이 남아있다. 그러니 서원의 길을 여행하게 된다면 이곳에서는 어떤 인물을 모시고 있고, 그의 삶에서 배울 점은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 공부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는 사람을 교육하는 수많은 책과 문화유산이 있지만, 훌륭한 개인의 삶만큼 깊게 감명을 주는 것도 흔치 않다.

서원의 길의 맛 두부전골
두부전골
  이번 서원의 길에서 소개할 음식은 두부전골이다. 두부전골이 서원과 상관없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엔 조선시대의 흥미로운 일화가 숨어있으니 한 번 들어보시길.
경제적으로 여유 있었던 조선시대 양반들 중에는 식도락가들이 많았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어울리는 음식을 찾고 즐겼다. 그러면서 보통 하루에 다섯 끼를 먹었다고 한다. 기본 세끼를 포함해 일어나자마자 죽 같은 것을 먹고, 자기 전엔 간식 같은 가벼운 음식까지.
그런 조선시대 양반들이 즐겼던 최고의 별미는 역시 두부였다. 두부를 소재로 시를 쓰고 읊조리기도 했고, 심지어는 벗들과 함께 공기 좋은 곳에 모여 두부를 먹는 모임이 크게 유행했다. 두부는 일종의 조선시대 워크숍 단골 음식인 셈이다.
그때 먹었던 두부 요리의 형태가 지금의 맑은 두부전골이나 두부탕과 비슷하다. 육수를 내는 데는 주로 닭고기를 사용했는데, 다산 정약용은 직접 이 음식의 요리 과정을 글로 적어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름에 대한 설명도 했는데, 재밌는 건 이 음식의 이름이 ‘연포탕’이라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연한 두부 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연포탕을 먹는 모임의 이름도 ‘연포지회’였다.

  아니 잠깐, 연포탕은 낙지를 넣어 만드는 보양 음식 아닌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원조가 아니다. 재미있게도 현대에 오면서 차츰차츰 낙지가 두부를 밀어내게 되었고, 연포탕 이름을 빼앗고 말았다. 해안에서 연포탕 국물을 고기 대신 낙지로 내던 것이 발단이라 한다. 더욱이 점점 두부는 저렴해졌고 낙지는 비싼 재료가 되었으니, 어느 순간부터 낙지가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슬그머니 스포트라이트가 옮겨간 건데, 두부는 조금 슬플 것 같다.

 

 
박성호 작가
by 박성호
국가유산 열개의 길 여행기
선사지질의 길 - 철원 고석정 - 포천 화적연 - 포천 비둘기낭 폭포 - 포천아트밸리

프롤로그 / 거대한 자연이 주는 위로

  나는 종종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꼭 세렝게티 초원이나 사하라 사막에 가야만 거대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까운 산에 올라 내가 살던 곳의 모습을 내려다보거나, 바닷가에서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자연을 느낄 수가 있다.

  내가 이렇게 거대한 자연을 찾아다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거대한 자연을 마주했을 때, 필연적으로 느껴지는 ‘작아지는 기분’을 좋아해서 그렇다. 그래서 한참이나 편안한 도로를 벗어나 힘겨운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한다. 거대한 자연이 주는 ‘작아지는 기분’이 사람을 치유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이런 기분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차츰차츰 무한한 자연이 나를 압도해 오는 기분. 이러한 자연이 나를 치유해 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연이 작게 만드는 것이 비단 나 자신 하나뿐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자연은 내 삶의 영역 전체를 작아지게 만든다. 평소 이 영역은 수많은 문제로 가득 채워져 있다. 관계의 문제, 성과의 문제, 금전적 문제. 이럴 때 거대한 자연이 주는 ‘작아지는 기분’이 도움이 된다. 내 삶의 영역 전체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삶을 채우고 있는 문제들도 함께 작아지는 까닭이다. 그러면서 내가 겪고 있던 문제가 실제로 큰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작은 영역 안에서 커다랗게 보였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내 삶 전체를 덮어 버려 매일 잠 못 들게 하던 커다란 문제가, 무한한 자연에 비해 한없이 초라하고 덧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작아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과 나의 차이를 줄어들게 만든다. 일상의 작은 공간에서 사람의 차이는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커지곤 하지만, 모든 인간을 한낱 먼지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개개인의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러니 나는 현실에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거대한 자연으로 떠나 보기를 권한다. 많은 경우 ‘작아지는 기분’이 우리의 정신을 치유해 줄 때가 있다.

  더군다나 자연의 고귀한 아름다움은 정화의 힘을 갖고 있기도 하다. 황홀한 풍경은 그것 자체로도 마음의 더럽혀진 부분을 깨끗이 씻어내기도 하므로. 이러한 자연의 위로는 어떠한 응원의 말보다 달콤할 때가 있다.

선사지질의 길 철원 고석정 - 고석정에 사람들이 서있는 전경
고석정 꽃밭과 도로를 위에서 본 뷰

  대한민국 최전방 강원도 철원군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북한 평강군이 있다. 평강군에는 해발 454m의 야트막한 산, 오리산이 있다. 둘레가 5리 정도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여러 차례 용암을 분출했던 화산이다.

  오늘 ‘선사 지질의 길’에서 만날 장소들은 이 오리산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한반도의 배꼽’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작은 산은 한반도 중부 일대 지질과 지형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오리산의 화산 폭발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중심 분출 형태로 일어나지 않았다. 한라산이나 백두산처럼 화산 중앙에서 격렬한 폭발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니 당연히 거대한 분화구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오리산은 열하분출 형태로 폭발했다. 쉽게 말하면 벌어진 지각 틈에서 스멀스멀 마그마가 흘러나온 것이다. 이렇게 흘러나온 마그마는 주로 점성이 약한 현무암질 성분으로 되어있는데, 잔잔하게 이루어지는 분출이다 보니 이후 식으면서 거대한 평야를 이루게 된다. 강원도에서 제일 넓은 평야인 철원평야는 이렇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빙하기가 찾아왔을 때는 이 거대한 평야가 전부 빙하로 뒤덮였었다. 다시 날씨가 다시 따듯해지고 빙하가 녹아내리자 엄청난 양의 물이 지표면의 틈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이전에 마그마가 굳어 현무암이 되는 과정에서 수축하며 만들어졌던 틈이다.

  결국, 이 틈은 조금씩 폭을 넓혀가며 온갖 기암괴석과 절벽을 만들어냈고 그 사이로 강이 흐르게 되었다. 이 강이 오늘 계속해서 만나게 될 한탄강이다.

드론에서 찍은 고석정 뷰
고석정 입구 문

  한탄강 유역은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강을 중심으로 한 지질 공원이다. 여기엔 용암 활동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지질 명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오늘 첫 번째로 만나 볼 장소는 철원 9경의 하나로 지정된 국민관광지 고석정이다.

고석정으로 내려가는 계단
고석정 정자

  고석정의 이름은 신라 진평왕 때 이곳에 만들었던 2층 누각에서 왔다. 지금의 정자는 한국 전쟁때 불타 없어진 것을 새로 지은 것이긴 하지만, 이곳은 오랜 옛날부터 한탄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이었다. 고려 때엔 충숙왕이 찾아와 머물렀고, 조선 영조 때는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가 요양을 하기도 했다.

 고석정 정면 화강암 바위 모습
고성적 위에서 바라본 물길
  이토록 고석정이 명성을 얻은 것은 신묘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화강암 바위 덕분이다. 높이 약 15m에 달하는 이 바위는, 오랜 시간 용암 대지에 묻혀 있다가 한탄강의 침식작용에 의해 땅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니 이 일대에서 지구의 가장 오랜 기억을 담고 있는 바위 중 하나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 화강암 바위가 형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억 1천만 년 전인 백악기 중기로 추측하고 있다. 공룡이 멸종하기도 전의 이야기다.

고석정에 배가 지나가는 모습

고석정 물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고석정 일대는 임꺽정의 은거지로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임꺽정은 조선 시대 실학자인 성호 이익 선생이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으로 꼽은 인물이다.

  양주 출신의 백정이었던 그는 도적 무리를 이끌고 여러 지역에 신출귀몰 출몰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명종은 직접 어명을 내려 임꺽정을 토벌하는 데 주력했는데, 임꺽정은 그럴 때마다 고석정 석굴에 숨어들어 은거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꽃밭 가는길 입구

하늘에서 바라본 고석정 꽃밭

  만약 고석정을 방문하게 된다면 고석정 꽃밭이 개장하는지도 꼭 확인해 보도록 하자. 철원 고석정 꽃밭은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눈부시게 피어난다. 내가 이곳에 방문했던 것은 11월 초의 가을날이었는데, 다행히 꽃밭이 마지막으로 개장하는 날이어서 입장할 수 있었다.

분홍색 꽃밭

붉고 노란색인 꽃 군락

꽃받 사이 길로 지나 가는 깡통열차

  원래 이곳 꽃밭은 탱크가 기동 훈련을 하던 군부대 장소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포성 소리를 내며 훈련하던 탱크는 사라지고, 꽃밭을 손쉽게 돌아볼 수 있는 깡통 열차가 느릿느릿 돌아다니고 있다.

  고석정 꽃밭은 시기에 따라 볼 수 있는 꽃의 종류와 규모가 다르다. 봄에는 노란색 유채꽃밭이 드넓게 피어나고, 가을에는 더욱더 다채로운 꽃밭이 펼쳐진다. 내가 방문했던 당시에 가장 선명한 색을 뽐내던 것은 거대한 촛불 맨드라미 군락이었다. 붉고 노란 두 가지 색의 대비가 들판에 뚜렷한 줄무늬 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선명한 색을 뽐내는 맨드라미 군락
노란색 맨드라미 한송이
한탄강 물줄기가 보이는 하늘에서 본 꽃밭

  이제 꽃밭에서 나와 한탄강 물줄기를 따라 함께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강원도 철원군의 남쪽 면은 경기도에서 가장 면적이 큰 도시와 맞닿아 있다.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해 이름 또한 ‘물을 품은 곳’으로 지어진 도시, 경기도 포천시이다.

선사지질의 길 포턴 화적연

화적연을 위에서 바라본 드론샷

  경흥로라는 도로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도로망을 인체의 혈관에 비유했을 때, 동맥에 해당하는 주요 줄기를 간선도로라 한다. 조선 시대에도 이러한 간선도로가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한양의 도성에서 한반도 동북부 함경도로 이어지는 간선도로가 경흥로였다. 당시 조선에는 죄지은 관리들을 북쪽 변방으로 유배 보내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경흥로는 고통의 귀양길이었을 것이다.

한탄강에 물이 비친 전경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

  그러나 또 누군가에게 경흥로는 즐거운 유람 길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금강산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경흥로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한탄강 유역의 경치 좋은 장소들도 일찍이 선비들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중 금강산을 가는 여정 중 포천 지역의 이름난 8곳의 명승지는 특별히 ‘영평팔경’이라 불렀다. 영평은 당시 포천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다.

화적연을 왼쪽 위에서 본 모습
화적연을 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모습
  그리고 그 영평팔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 오늘의 두 번째 방문지인 화적연이다. 한탄강 물줄기가 굽어 나가는 곳에 13미터 높이로 우뚝 솟아있는 화강암을 말한다. 화적연이라는 이름은 바위가 마치 볏단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화적연이 나와있는 관광안내판 - 영평팔경

햇빛이 비추는 화적연 화적연을 하늘에서 본 모습

  화적연은 철원의 고석정만큼 규모가 크지도 않고 관광객도 많지 않다. 그러나 진기한 모습의 바위가 만들어내는 영험한 분위기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왜 선비들이 이곳을 영평팔경의 으뜸으로 꼽았는지 알만하다.
 
  조선 시대 화적연을 주제로 수많은 그림이 그려지고, 수많은 시가 쓰였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은 금강산 가는 길에 명승을 그린 ‘해악전신첩’에 화적연을 남겼고, 조선 후기 영의정을 지낸 허목은 금강산 유람기에 ‘화적연기’를 남겼다. 이 외에 많은 문인들은 화적연의 바위를 엎드린 용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 화적연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어느 날 한 늙은 농부가 극심한 가뭄에 지쳐 연못가에 앉아 한탄했다. “물이 이렇게나 많은데 곡식을 말려 죽여야 한다는 말이냐? 하늘도 무심해서 용도 낮잠만 자는가 보다” 그러자 물이 왈칵 뒤집히며 용이 강물에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날 밤부터 비가 내려 풍년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전설 덕분인지 화적연은 조선시대 국가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은행나무와 나무들
은행나무잎을 확대한 모습
  화적연은 솟아있는 화강암 바위 외에도 한적히 경치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바로 옆에 캠핑장이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강가로 소음이 닿지 않는다. 주요 차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수영도 금지되어 있으니, 고요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만족스러울 곳이다.

선사 지질의 길 - 포천 비둘기낭 폭포
한탕강 물줄기와 Y 자 모양 다리 위에서 바라본 드론샷

  한탄강의 한은 거대하다는 뜻이고 탄은 여울을 뜻한다. 그러니 한탄강은 ‘큰 여울’이라는 말에서 왔다. 여울은 강이나 바다에서 유독 물살이 빠르며 졸졸 소리 내는 곳을 뜻하니, 그만큼 한탄강은 거칠고 박력 있는 강이다. 과거에는 인명 사고도 잦았다고 하는데 요새는 되려 이런 특성을 활용하여 래프팅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한탄강 명칭에 관한 다른 유래에는 이런 것도 있다. 후고구려를 다스리던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나며 이 강 주변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던 탓에 한탄강이 됐다는 이야기. 혹은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한탄강을 건너지 못해 한탄했다는 이야기.

한탄강 근처의 땅

돌틈 사이로 흐르는 물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한탄강이 ‘대탄강’, 큰 여울이 있는 강으로 적혀있는 것으로 보면 이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탄강의 ‘탄’은 ‘탄식할 탄(歎)’보다는 ‘여울 탄(灘)’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임꺽정과 궁예, 6.25 피난, 계속해서 한탄강에 얽힌 이야기에 은거나 탄식하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지형적 특성 때문이다. 평평한 땅 사이 틈으로 용암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한탄강은, 가까이 가지 않으면 대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밑으로 푹 꺼져 있는 협곡 사이로 물길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숨을 곳도 많고, 자칫 잘못하면 절벽 사이에 고립되어 버릴 수 있는 곳도 많다.

  한 마디로 용암 지대의 강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지표면을 흐르던 용암은 아래로 흘러내리며, 땅 밑에 수많은 보물 같은 풍경들을 만들어 냈다. 이번에 방문할 장소가 바로 이러한 장소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한탄강 지질공원 안에 지구가 있는 조형물
단풍나무 사이로 보이는 협곡

  포천시 영북면에 자리 잡은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에 도착했다. 천연기념물이자 한탄강 8경 중 하나인 비둘기낭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협곡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비둘기낭 폭포를 만나보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은 지질 용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주상절리이고, 다른 하나는 하식 동굴이다.

  우선 주상절리는 용암 유출로 형성된 화산암 지형에서 흔히 발견되는 지질구조이다. 모습은 육각기둥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분출된 용암이 급격한 온도 변화로 수축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주상절리는 필연적으로 지형에 많은 불연속적 틈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 때문에 하천에서는 틈을 따라 물에 의한 풍화·침식이 쉽게 일어나게 된다. 특히나 폭포가 있다면 떨어지는 물의 와류에 의해 절벽 아래쪽에 거대한 동굴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게 바로 하식동굴이다.

비둘기낭
비둘기낭에 지형을 확대한 모습
  이제 비둘기낭 폭포의 지형이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는지? 아쉽게도 최근 비가 내리지 않아 떨어지는 물줄기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비둘기낭 폭포는 화산 활동으로 인한 침식 지형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였다. 깊은 협곡과 현무암 주상 절리, 용암 대지, 폭포, 하식 동굴 등 한탄강의 다채로운 풍경들은 모두 뜨거운 용암의 분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물과 바람이 억겁의 세월 동안 천천히 조각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물이 흐르는 비둘기낭

  비둘기낭 폭포의 물은 동굴 왼쪽으로 떨어진다. 수량이 많은 날에는 물안개를 만들어 낼 정도라 하는데, 나는 아쉬운 대로 사진에 물줄기를 그려 넣어 봤다. 확실히 폭포가 떨어지고 있으니 한껏 분위기가 살아났다.
이곳은 예로부터 겨울이면 수백 마리의 산비둘기가 서식해 비둘기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주변의 수풀이 우거져 위에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6·25전쟁 당시에는 마을 주민의 대피시설이나 군인들의 휴양지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찾으려 하는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숲속에 숨은 천혜의 비경이다.

선사지질의 길 포천 아트밸리
단풍이 든 아트밸리 하늘에서 본 모습

  이제 한탄강 물줄기를 벗어나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40분쯤 내려오다 포천 시내에 진입하기 직전 왼쪽으로 꺾으면 거대한 주차장이 있는 산기슭에 닿는다. 이번 선사 지질의 길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할 곳은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 같은 산, 천주산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

모노레일이 지나가는 모습
모노레일 안에서 본 올라가는길

  나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편도로 모노레일 기차표를 끊었다. 입구에서 이어지는 길이 길지는 않지만, 경사가 상당한 탓에 모노레일을 타면 편하게 올라갈 수 있다.

  포천 아트밸리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장소들과 가장 다른 점은 사람의 손길이 짙게 닿은 곳이라는 점이다. 고석정과 화적연, 비둘기낭이 자연이 만들어낸 예술품이라면, 포천 아트밸리는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원래 화강암을 채석하던 채석장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본 아트밸리
하늘에서 옆으로 본 아트밸리 드론샷

  경제 발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이곳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강암 채석장이 있었다. 재질이 단단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포천석 화강암을 채석하는 곳이었다. 포천석은 품질이 우수해 우리나라 국가 주요 기관을 짓는 데에도 빈번히 사용되었다. 예컨대 청와대, 국회의사당, 대법원, 경찰청, 인천국제공항, 세종문화회관 등이 포천석으로 지어졌으니,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엔 성장통도 생기기 마련이다. 30년이 흐른 1990년대 이후엔 더 이상 양질의 화강암을 얻기가 어려워졌고, 그때부터 이곳은 버려진 공간으로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다. 하지만 2004년, 포천시는 5년의 노력 끝에 이곳을 복합 예술 문화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훼손된 자연을 우리 곁으로 되돌리기 위한 반성의 의미였다.

아트밸리 풍경
물에 비치는 아트밸리
  모노레일을 타고 천주호에 도착했다. 화강암을 파 내려갔던 웅덩이에 빗물과 샘물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비교적 어린 호수다.
호숫가에서 바라보는 아트밸리 협곡의 모습은 가위 장관이다. 지구가 만들어낸 자연적인 바위의 모습과 인위적으로 깎아낸 매끈한 절벽이 뒤섞여 몽환적이고 오묘한 풍경을 선사한다. 한국에서 본 적 없는 경치에 어딘가 외국에 온 것만 같은 이국적인 기분도 든다.

아트밸리의 화강암
쑥색의 검푸른 알갱이들이 있는 모습

  화강암은 마그마가 천천히 식으면서 만들어지는 돌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화강암’보다는 순우리말인 ‘쑥돌’이 쓰였다고 하니, 이곳에, 채석장에 있던 시절에는 ‘쑥돌’로 불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검푸른 알갱이들이 잔뜩 박혀있는 모습이 네모반듯한 쑥떡과 닮아있다.

아트밸리에서 내려가는 계단
아트 밸리 절벽을 하늘에서 본 드론샷
  만약 천주호와 절벽의 경치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싶으면 나무 계단을 따라 하늘정원으로 올라가 보자. 하늘정원에서는 천주산과 호수공연장, 조각공원의 풍경까지 모두 만나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아무도 찾지 않던 폐채석장이, 노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나는 오늘 여행을 함께 한 엄마와 함께 이 하늘정원에 올랐는데, 둘이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으면 좋겠다.’ 우리만 보고 감탄하기엔 너무도 아쉬운 풍경이었다.

나무와 돌이 보이는 풍경
에필로그

  올해 초에 과테말라 아카테낭고 화산에 다녀왔다. 4년 전에도 방문했던 곳이다. 굳이 내가 이 먼 곳을 다시 찾은 것엔 이유가 있다. 아카테낭고 화산 해발 4,000m 부근엔 건너편 화산 봉우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근사한 베이스캠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연기만 뿜어져 나오는 풍경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지구에서 몇 군데 되지 않는, 밤새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여러 의미로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몸은 악마 같은 고산병과 살을 에는 추위로 한껏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의식이 희미해지며 고통이 옅어질 때마다 무지막지한 폭발음이 천둥처럼 울렸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굉음이었다.

  어쩌면 화산 내부는 로또 추첨 통처럼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는 직경 수 미터는 되는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한꺼번에 굴러다니는 듯한 그 소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동안 돌 끓는 그 소리가 계속되다 폭발하는 순간에는 지진과 천둥소리가 뒤섞인 굉음을 낸다. 각종 화산 쇄설물들이 로켓처럼 튀어 오르고, 곧 검은 구름이 재앙처럼 뿜어져 나온다. 그러고는 끈적거리고 새빨간 마그마가 과음한 것처럼 울컥울컥 게워 내온다.

  이번 ‘선사 지질의 길’을 걸으면서, 눈앞에서 보았던 화산의 폭발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 그려졌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들도 결국에는 그런 장면에서 시작이 되었겠구나, 하면서. 가늠할 수 없이 깊은 시간과 규모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래서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는 여행이 좋다. 평생을 도시에 살아가는 나는, 나도 모르게 인간 중심적으로 세상에 대해 바라보게 될 때가 많다. 작디작은 사람의 시선으로 지구를 바라보고 세상을 생각한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을 여행하다 보면 이따금 거대한 지구를 중심으로 사람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한하고 거대한 시선에서 그 안에 놓여 있는 사람의 작은 삶에 대해 바라보게 된다.

선사 지질의 맛 메밀 막국수와 메밀전 포크 이미지

메밀 막국수와 메밀전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볼 수 있는 음식이라면 단연 메밀 요리이다. 지금은 강원도를 감자의 고장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한반도에 감자가 전해진 것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고 삼국시대 이전부터 강원도는 메밀의 고장이었다.

  산간 지역에서 메밀은 무척이나 고마운 구황작물이다. 구황작물은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준 작물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기후의 영향을 적게 받고, 비교적 척박한 땅에서도 기를 수 있어야 할 것. 또 수확하기까지의 재배 기간이 짧아야 할 것. 메밀은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 더군다나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니,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산간 지방에 안성맞춤이었다.


  오늘날 한탄강 일대에서도 메밀 요리를 하는 식당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로 메밀막국수와 메밀전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막국수에 닭고기 육수를 부어 먹는 집이 많았다고 하나, 요즘에는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내놓는 집이 대부분이다. 먹는 방법이야 어렵지 않다. 젓가락 가는 대로 차가운 국수를 후루룩 떠먹고, 따듯한 메밀전을 대충 찢어 먹어 균형을 맞춘다.

  애초에 막국수는 각 잡고 세련되게 먹는 음식이 아니다. 막국수의 어원은 메밀을 거칠게 ‘막’ 갈아 뽑은 국수라는 설도 있고,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만들어 냈다는 뜻에서 ‘막’ 만든 국수라는 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막국수는 같은 어원을 쓰는 ‘막 거른 술’, ‘막걸리’가 제짝이라 할 수 있다. 막국수 한 젓가락엔 메밀전 한 젓가락, 그리고 막걸리 한 사발. 마침, 물맛 좋은 포천에는 막걸리가 유명하니, 이래저래 다 계획된 일이다. 맛의 한통속이다.

 
박성호 작가님 사진
by 박성호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 - '국가유산 열 개의 길' 여행기 설화와 자연의 길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 - 설화와 자연의 길 여행 경로 소개 출발-성산일출봉 - 산방산 - 용머리해안 - 주상절리 - 쇠소깍 - 거문오름

프롤로그 / 떠날 길이 하영 남았다

  나는 직업 여행가로 살고 있다. 좋건 나쁘건, 늘 떠나 있거나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삶이다. 내게 일상은 언제나 이 둘 중 하나다. 다행히 아직은 젊고 팔팔하니 썩 나쁘지 않은 일이다. 세월이 흘러 그 후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걸 걱정하고 살았다면 시작도 하지 못했겠지.

  여하간 올해도 세계 방방곡곡 떠돌다 한국에 돌아왔다. 이제 한 달 조금 넘었을까? 오랜만에 내방 방바닥에 누워 ‘당분간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겠군’ 하고 있었는데, 돌연 ‘국가유산 열 개의 길 여행기’를 연재하게 됐다.
뭐, 고작 열 개면 쉬엄쉬엄 다니면 되겠구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길 하나에 다녀와야 할 장소가 대여섯 개씩 있다. 그것도 전국 금수강산 곳곳에 퍼져서. 천천히 정리해야지, 하고 구석에 박아뒀던 배낭이 그대로 있길 다행이다.

  어디를 먼저 가야 할까? 열 개의 길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여행지를 고를 때, 어떤 기준으로 고르시나요?” 그러고 보니 종종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반복된 질문은 일종의 모범 답안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라,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내가 평소에 보고 사는 풍경과 얼마나 다른지를 첫 번째로 생각해요.”
여행이 많아지다 보니 떠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그 때문에 내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떠나서 실제로 ‘떠났다’라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단순히 몸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떠나는 것이다. 좋은 의미의 ‘일탈’이야 말로 내가 원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그러니 이런 내게, 제주도야말로 긴 여행의 포문을 열기에 제격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제주도에 가는 것이 언제나 즐겁고 설렌다. 수십 번을 다녔는데도 그렇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야자수의 이국적인 풍경이 여전히 ‘떠나왔다’고 느끼게 한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랬다. 배낭을 메고 공항을 나서자마자 제주의 세찬 바람이 나를 반겼다. 하늘은 프러시안블루로 맑게 개었다. 자연스레 방구석에서 재충전을 꿈꾸던 마음이 쓰윽 열렸다.
이런 산뜻한 시작이라면 얼마든지 떠나도 좋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제주 말로 하영(많이) 남았지만, 무엇이 나를 막으리.
세상엔 설레는 출발만큼 기분 좋은 것이 없다. 나는 곧장 동쪽으로 향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 - 설화와 자연의 길 제주 성산 일출봉 천연보호 구역
  제주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찾는다는 으뜸 명소, 성산 일출봉을 찾았다.
로마에 간 사람이 콜로세움을 찾고 파리에 간 사람은 에펠탑을 찾듯이 제주도 하면 ‘성산 일출봉’, 하고 어려서부터 익히 보고 들었다. 심지어는 ‘성산 일출봉에 오르지 않고 제주도에 다녀왔다 말하지 말라’ 하는 사람도 봤다.
나는 이 정도 유명한 곳엔 반기를 들고 싶을 때가 있다. ‘흥, 나는 그런 여행자의 의무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무관심한 척하고 싶어진달까. 확실히 어른스러운 짓은 아니지만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4-성산일출봉 안내석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5-성산일출봉 산책로 사진
  하지만 이런 나도 성산 일출봉은 여러 번 올랐다. 처음은 언젠가 수학여행 왔을 때 못 이기는 척하며 터덜터덜 올랐고, 그 후론 운동하는 셈 치고 자발적으로 올랐다. 그러면서 늘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괜히 으뜸 명소가 아니야. 멋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그러나 여전히 완전히 지고 싶지는 않아서, ‘제주도에 다녀왔다 하려면 최소한 백록담은 올라 봐야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아마 백록담은 오르기 쉽지 않은 터라 성산 일출봉이 ‘제주도의 상징적인 명소’ 타이틀을 대신 차지한 게 아닌가 싶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6-등경돌 사진
  성산일출봉을 오르면서 눈에 띄는 건 계단 옆에 우뚝 솟아있는 ‘등경돌’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돌은 어느 할머니가 바느질하는데 등잔을 올려놓았던 받침대라고 한다. ‘아니 무슨 이렇게 거대한 돌 위에 등잔을 올려놓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바느질하던 할머니의 키가 워낙 컸다.
전설 속 이 할머니의 이름은 ‘설문대할망’. 키가 어느 정도로 컸냐 하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워 다리를 뻗으면 발끝이 제주도 앞바다 관탈섬에 걸쳤다고 한다. 지도에서 이 거리를 재어보면 대략 40킬로미터쯤 된다. ‘설문대할망’이 매일 등경돌에 불을 켜고 바느질을 한 것은 옷이 한 벌 뿐이라 그렇다는데, 한 벌이라도 맞는 옷이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7-정상에서 내려다본 성산일출봉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8-성산일출봉에서 내려다본 풍경 사진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인 게 무척이나 상쾌했다. 한눈에 담기는 광활한 풍경에 나 역시 거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제주도를 여행할 때 이 ‘설문대할망’ 설화를 따라가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애초에 푸른 바다 한가운데 제주도를 만든 장본인이 ‘설문대할망’이기 때문이다. ‘설문대할망’은 육지에서부터 치마에 흙을 퍼 담아와 섬을 쌓았다. 아무리 깊은 바다도 무릎 위를 넘기지 않았다고 하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섬 가운데 남은 흙을 모두 털어 넣어 한라산을 만들었다. 다만 이게 너무 높고 뾰족하다 보니 앉기 불편해서 봉우리를 꺾어 멀리 던져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푹 파여 있는 백록담이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설문대할망’이 멀리 던져버린 봉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 봉우리를 찾기 위해 정상에서 내려와 남서쪽 해변으로 차를 몰았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9 - 설화와 자연의 길 산방산 & 용머리 해안
  제주에는 3대 명산으로 불리는 산이 세 개 있다. 하나는 중심의 한라산, 하나는 동쪽 끝의 성산일출봉.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한라산 봉우리를 뚝 떼어다가 던져버려 만들어졌다는 서남단의 명산, 산방산이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0-산방산 부감 사진
  서귀포 시내를 지나 서쪽으로 향할수록 산방산이 멀리서부터 웅장함을 뽐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네비게이션이 필요 없다. 평탄한 지형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으니, 그것만 보고 따라가면 된다.
산방산이 한라산의 꼭대기라는 전설이 생겨난 이유는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백록담의 지름과 산방산 밑 둘레가 얼추 비슷하게 맞아떨어지고, 한라산 정상의 돌 재질이 산방산과 마찬가지로 조면암으로 되어있다. 더욱이 산방산 생김새가 분화구 없는 종 모양으로 생겼다 보니 한라산의 비어있는 머리를 채워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1-산방굴사 불상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2-산방굴사 사진
  산방산 매표소로 입장해 산책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산방이라는 이름은 산 중턱에 방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산책로의 끝에 있는 해식동굴 산방굴을 말한다. 이 안쪽에는 불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산방굴사라고 하였다.
산책로로 갈 수 있는 건 이 산방굴사까지다. 산방산 암벽에는 학술 가치가 높은 희귀한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그 때문에 산방산의 문화유산적 가치 보존과 천연기념물인 암벽 식물지대 보호를 위해 이외의 지역은 입산이 금지되어 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3-산방산에서 바라본 용머리 해안 풍경 사진
  계단을 올라가다 뒤돌아보면 용머리 해안의 근사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물결치듯 유려하게 굽어있는 모습이 왜 용머리해안인지 굳이 의문을 품지 않게 한다. 산방산 자락에서 바다로 뻗어나가는 역동적인 기세의 용이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4-산방굴사 굴 내부 불상 사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해발 150m 부근의 산방굴사에 도착했다.
가장 윗단엔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어 정면으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굴은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 굴 내부 천장의 암벽 사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똑똑 소리를 내며 고요한 동굴 안을 깨운다. 그 소리가 어째 영험하게 느껴진다 싶더니 역시나 산방덕의 눈물이란 전설을 품고 있다.
  산방덕은 하늘나라 선녀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고성목이라는 나무꾼과 결혼했다.
그러나 대부분전설엔 해피엔딩보다는 구슬프거나 애틋한 이야기가 많다.
고을의 사또가 그녀의 미모에 빠져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사또는 남편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강제로 둘을 이별하게 만든다. 이에 분노한 선녀는 산방굴사로 들어와 며칠을 목 놓아 울다가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은 산방덕의 눈물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5-내려다본 마을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6-내려다본 해안가 사진
  이토록 슬픈 전설을 담고 있는 산방굴사이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마침, 이른 아침 시간이라 아무도 없이 조용히 감상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엔 절벽으로 둘러싸인 송악산도 보였다. 그 뒤엔 평평한 가오리를 닮은 가파도가 있었고, 그 뒤엔 대한민국 최남단 섬인 마라도가 보였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7 - 마라도 여객선 선착장 marado excursion ship wharf 화살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8-파도치는 모습
  그리고 사실 마라도는 내 다음 여정이기도 했다. 멀리서도 또렷이 보이는 모습에 미리부터 반가웠는데, 산방산을 내려와 해안으로 가보니 파도가 몹시도 성나 있었다. 배에서 꽤 고생하겠구나, 했는데 조금이라도 고생할 일은 없었다. 그날의 모든 출항이 결항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로 실망한다거나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조금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당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긴 시간 여행하며 얻은 것 중 하나는, 예상 못한 상황에 대한 맷집이다. 나한테 여행은 늘 우연함을 찾는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제주도에는 바람이 많이 불수록, 파도가 거셀수록 좋은 곳도 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19 - 설화와 자연의 길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주상절리는 자주 찾게 되는 곳은 아니다. 푸른 제주 바다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앞의 육각형 기암괴석은, ‘으음, 신기하게 생겼네.’ 하고 처음 몇 번만 관심을 가질 뿐이니까.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면, 어쩐지 심상찮은 파도가 몰려온다면 꼭 한 번 주상절리대를 찾아보길. 그런 날의 주상절리는 숨겨놓은 발톱을 꺼내 드는 사나운 맹수 같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0-파도치는 주상절리 사진
  철썩, 집채만한 파도가 칠 때마다 절벽을 타고 올라와 하얀 포말로 부서진다. 바람에 날려 와 차갑게 얼굴을 때린다. 나는 도마 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횟감의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파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엄청났다. 세상의 어수선함을 한 방에 정리해 버리는 압도적인 힘이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도시에 살며 늘 느꼈던 ‘인간은 참 대단해’하는 생각이 순수한 소꿉장난처럼 느껴진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1-주상절리 하단부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2-주상절리 지질 확대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3 - 설화와 자연의 길 제주 서귀포 쇠소깍
  바닷바람이 제법 소슬하게 느껴질 즈음, 이번엔 주상절리와는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쇠소깍을 찾았다. 쇠소깍은 담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깊은 웅덩이 지형인데, 제주 낱말로 쇠소는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의 연못을 의미하고 깍은 끝을 의미한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4-쇠소깍 부감 사진
  바람은 여전히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모래 해변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쇠소깍의 수면은 놀라울 만큼 잔잔했다.
쇠소깍의 매력은 바로 이 대비에 있다. 한순간 다른 세계로 뛰어든 것처럼 만드는 극적인 대비. 더욱이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져 만들어진 기암괴석과 울창한 삼림은 마치 이곳을 신비한 비밀의 장소처럼 보이게 만든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5-레저를 즐기는 여행객들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6-쇠소깍에서 카약타는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 신비한 명소에 전설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유난히 푸르고 투명한 쇠소깍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므로, 과거에는 이곳은 ‘용소’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름에 가뭄이 들면 용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과거에는 신성시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물놀이하거나 돌을 던지는 것도 못 하게 했다는데, 지금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노 젓는 카약이나 전통 뗏목 ‘테우’를 타며 경치를 즐기고 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7- 테우 타는 사람들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8- 쇠소깍의 풍경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29 - 설화와 자연의 길 제주 거문오름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그동안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며 바다는 충분히 보았기 때문에, 여정을 마무리할 장소로 거문오름을 찾았다. 숲이 우거져 검게 보이기 때문에 ‘검은 오름’이란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0-거문오름 부감 사진
  참고로 오름이란 단 한 차례의 분출만을 일으키고 명을 다한 화산을 말한다. 다시 말해 아주 오래전 지구에서 장렬히 전사한 화산들의 무덤이랄까.
물론 이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고, 전설에 따르면 오름 역시 ‘선문대할망’의 작품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할망이다. 다만 일부러 의도해서 만든 것은 아니고, 치맛자락으로 흙을 옮기다 실수로 흘린 것들이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1-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 간판 사진
  제주도 전역에는 360여 개의 수많은 오름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거문오름이 유일하다. 그만큼 자연유산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개별적인 출입이 어렵고, 대신 자연환경 해설사를 따라 함께 탐방로를 걸을 수 있다.
나는 미리 전날에 오전 첫 번째 트래킹을 예약해두었다. 약속한 시각이 되자 서른 명의 여행객이 입구에 모여 함께 숲으로 출발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2-빽빽한 나무들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3-나무들 사이 산책로 사진
  입구에서부터 삼나무와 편백, 소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빼곡히 자라나 있었다. 나무들의 촘촘한 잎 사이로 가느다란 빛발이 새어 들어오긴 했지만, 숲속을 환히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과연 ‘거문오름’이라 부를 만 했다.
처음 약 30분가량은 계속해서 오르막길이 이어져 있지만, 무성히 자란 나무가 해를 완전히 가리고 있어서 제법 서늘했다. 걷기에 딱 좋은 길이었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4- 잘린 나무에 이끼가 자란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5- 노루 사진
  혹여나 제주의 여느 다른 오름처럼 탁 트인 전망을 기대하고 찾았다면 거문오름은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문오름 탐방로에는 숲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구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오름의 정상조차도, ‘이곳이 정상입니다.’하는 표지판만 있을 뿐 좌우가 긴 동굴처럼 막혀있다.
하지만 신비로운 숲의 생태를 관찰하기 좋아한다면, 축축한 습기를 통해 전해오는 싱그러운 풀 내음을 좋아한다면 거문오름은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가 된다. 지층 변화로 생긴 풍혈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천연 에어컨 역할까지 해주니 말이다. 더욱이 세상을 덮은 신록의 풍경은, 초록이 얼마나 싱그럽고 생기 있는 색인가 느끼게 한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6- 거문오름 주변 오름 설명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7-산책로를 오르는 관광객들 사진
설화와 자연의 길 에필로그

  푸른색 이 길을 끝으로 첫 번째 ‘설화와 자연의 길’ 여행을 마무리했다. 문자 그대로 제주도의 이야기와 자연을 따라 걷고 오르다 보니 어느새 끝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설문대할망’ 전설 중에 말하지 않은 내용이 하나 더 있다. 언젠가 제주도가 다 만들어져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다.
설문대할망은 자신이 입을 속옷을 만들기 위해 명주 100동을 모아 달라고 제주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명주 1동은 50필인데 한 필의 길이는 대략 20m나 된다. 그러니 명주 100동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 때문에 설문대할망은 보답으로 제주에서 목포를 잇는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는 생기지 않았고, 제주도는 지금까지 그대로 섬으로 남아있다. 딱 99동을 모으고 하필이면 한 필이 모자랐던 탓이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아마 한 필이 부족했던 건 설문대할망이 숨겼거나 거짓말을 한 까닭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 한 필이 모자를 리 있나. 아무리 전설이어도 말이다.

  하여간 제주도는 발길 닿는 곳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니 참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제주도의 풍경이 단조롭고 밋밋함 투성이였다면 이런 전설이 먹혀들 리 없었을 것이다. 단언컨대, 제주도에 전설이 넘쳐 나는 건 순전히 자연 덕이다. 이런 신비로운 자연에서는, 때로는 영화 같은, 때로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잔뜩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제주도는 태생이 그런 섬이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8 - 설화와 자연의 길의 맛 갈치국 & 흑돼지
  끝으로 ‘설화와 자연의 길’ 여행에 어울리는 맛을 추천해 본다.
나는 사람의 기억은 오감을 통해 짙게 남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피부로 다양하게 느낄수록 그 흔적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다.
그러니 여행에서의 음식은 이른바 ‘추억의 방부제’ 같은 거다. 말이 요상하긴 하지만, 그만큼 음식은 여행의 기억을 한층 선명하게 만든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39 - 갈치국
  추천하는 첫 번째 음식은 갈치국이다. 갈치조림은 먹어봤어도 갈치국은 처음 듣는다고? 그럴 수 있다. 지방이 많은 갈치는 자칫 잘못하면 비린내가 심하게 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갈치로 국을 끓여 먹는 것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갈치국은 ‘가장 제주다운’ 향토 요리라 할 수 있다. 제주 앞바다에서 공수한 싱싱한 제주 은갈치에, 큼직하게 썬 호박과 얼갈이배추. 여기한 칼칼한 매운 고추가 전부인 갈치국은 그야말로 제주도 갈치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설화와 자연의 길 사진40 - 흑돼지
  제주도의 맛을 꼽는데 흑돼지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제주도에 가면 흑돼지를 먹는다.’ 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의례처럼 자리 잡아서, 제주도 여행을 했는데 흑돼지를 먹지 않는다면 무언가 이야기의 완결을 내지 못한 기분이다. 불판 위에 잔뜩 졸인 멜젓에 흠뻑 담가 먹는 흑돼지. 그 맛은 말해서 무엇하리.
그래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저녁도 의례적으로 흑돼지를 먹었다. 점심을 많이 먹은 상태였지만, 평소 같으면 양을 조절했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오늘은 여행기를 쓰기 위함이니까.’ 하는 책임감으로 양껏 먹었다. 나는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인가 보다. 오겹살도 먹고 항정살까지 먹었다.
언젠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왔을 때, 흑돼지 두루치기 하나를 건장한 학생 여럿이 나눠 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어 여행을 떠난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박성호 작가 사진
by 여행작가 박성호
국가유산 열개의 길 여행기 - 소릿길 - 글, 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소릿길 여행경로 소개 - 국립무형유산원 - 필봉농악 전수관 - 고창 판소리 박물괸 - 남원 광한루원

프롤로그 / 귀를 쫑긋하게 된다

  어느 평범한 날에, 어느 평범한 아르헨티나 식당에서 홀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스테이크면 꽤 근사한 식당 아니야?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김치 썰듯 스테이크를 써는 나라이기 때문에 소고기라고 별 게 아니다. 가격도 8,000원쯤 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전쯤의 일이긴 했어도 저렴한 가격대였다.

  마을은 호수를 끼고 있는 작고 소박한 휴양지였다. 곳곳에 솜사탕이나 아이스크림, 팝콘을 파는 리어카도 잔뜩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 현지 사람들이었다. 특히 젊은 커플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이곳 사람들은 남미의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정열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애정 행각도 몹시 창의적이고 과감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문득 식당에서 흘러나온 노랫소리였다. 가게 안이 떠들썩했던 터라 아무도 노래에 집중하지 않았지만 나만 유일하게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스페인어 사이로, 작은 한국어 실개천이 흘렀다.
그건 분명 한국 음악이었다. 소녀시대였는지 빅뱅이었는지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는 그렇게나 이국적인 장소에서 한국말 가사가 나오는 자체가 신기했을 때였다. 먹던 스테이크고 뭐고 번쩍 손을 들고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지금 나오는 이거, 한국 노래에요!’ 하면서 당당히.

  그 후로 그런 경험은 시대가 갈수록 흔해졌다. 언젠가 과테말라 시골 마을에서는 타코를 먹는 내내 블랙핑크 노래가 흘러나왔다. 필리핀 대형 쇼핑몰에 갔을 때는 외국인 백여 명이 모여 아이돌 춤을 추는 장면도 봤다.
이제 외국에서 한국 음악이 흘러나와도, 굳이 손을 들고 이게 한국어 가사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다. 케이팝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계 어디에나 있다. 그냥 귀를 쫑긋하고 노래를 듣고 있으면, 종종 호기심 많은 누군가가 와서 말을 걸 때도 있다.
그럴 땐 뿌듯함을 숨기고, ‘네, 한국에서 왔어요.’하고 수줍게 말한다. 그 단순한 대답 하나로 호의적으로 변하는 외국인들을 무수히 많이 만났다. 이집트에서, 탄자니아에서, 요르단에서, 콜롬비아와 쿠바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함께 사진을 찍고 악수 세례를 받았다.
참 신기한 일이다. 세상 사람이 한국어로 된 음악에 이렇게나 관심을 갖다니.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왔다 하면 북한인지 남한인지 설명해야 할 때가 많았는데 말이다.

소릿길 - 국립무형유산원

  이번 소릿길 여행을 위해 전라도로 떠났다. 예로부터 문화예술의 본고장으로 불린 전라도는 빼어난 기량을 가진 예술인을 많이 길러낸 곳이다. 특히나 전라도 지방의 민요는 남도민요라 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소리로 자리매김했으니, 소릿길의 무대로 전라도만 한 곳이 없다.

위에서 바라본 국립무형유산원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전라북도 제1도시 전주의 국립무형유산원이다. 나는 늘 전주에 여행 올 때마다 한옥 마을을 주로 방문했었는데, 전주천 바로 건너에 이렇게나 거대한 시설이 세워져 있는지 몰랐다.
사실 처음에는 의구심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형체가 없는 무형유산을 어떻게 전시할 수 있는지.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하긴 한 것인지. 원래 ‘국립’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조금 더 깐깐한 눈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국립무형유산원

  그러나 이내 소개 글을 보고 쉽게 납득해버렸다. ‘그래, 그런 목적이면 이 정도 과감한 투자는 해야지.’하고 끄덕이면서. 내가 납득하고 말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어쨌든 대신 소개하자면, 국립무형유산원은 단순히 전시만을 위해 기획된 곳이 아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얘기하기 전에 먼저 무형유산의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형유산은 관리만 잘하면 그대로 계속 남아있을 수 있지만, 무형유산은 ‘전승’을 통해 전수되지 않으면 맥이 끊겨버린다. 해당 기술이나 예술을 보유한 사람이 천년만년 살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무형유산은 보존을 위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더욱이 습득 난도도 높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므로 전수받을 전수자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 수익 활동이 가능한 무형유산은 그나마 낫지만, 대다수는 소위 ‘옛 노래, 옛 기술’인지라 자연적으로 내버려두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

국립 무형유산원 악기

국립무형유산원 내부 전시되어있는 악기와 옷

  이제 국가무형유산원의 중요성을 아시겠는지? 한 마디로 이곳은 우리나라의 무형유산을 보호하고, 후손들에게 온전히 전승하기 위해 설립된 ‘무형유산 복합행정기관’이다.
더군다나 이처럼 무형유산만을 위한 체계적인 행정기관은 세계 최초라고 한다. 이렇게 목적과 의도를 이해하고 나니 의구심이 들었던 마음이 금세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태세를 바꾸었다. 역시 처음부터 너무 깐깐한 눈으로 볼 필요는 없다.

무형유산원 내부

처용무 한장면

  국립무형유산원의 전시실은 상설전시실 1과 상설전시실 2로 구분되어있다. 상설전시실 1은 주로 전통 공연과 예술, 의례나 의식에 관한 내용이었고, 상설전시실 2는 전통 공예 기술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번 여행은 소릿길을 주제로 한 여행이었으므로 나는 첫 번째 전시실을 더욱 세심히 돌아보았다.

판소리 부채와 북

미디어월스크린에 설치된 처용무 체험

  전시는 수도 없이 그 기획력에 감탄할 정도로 잘 구성해 두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무형유산’에 대한 전시인 만큼 악기나 도구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시청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각각의 무형유산이 주는 분위기와 느낌을 나타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느껴졌다.
전라북도 전주에 간다면 국립무형유산원은 꼭 한번 방문해 보길 바란다. 그만큼 만족스러운 전시였다. 우리나라에 얼마나 다채로운 무형유산이 있는지, 옛 조상이 음악과 춤의 풍류를 통해 어떻게 삶의 희로애락을 예술로 승화했는지, 즐겁게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소릿길 - 필봉농악전수관
임실 필봉 마을 전경

  전주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섬진강을 건너면 치즈로 유명한 임실군이 나온다. 전반적으로 산이 많은 지역인데, 이번 소릿길에서 찾아갈 지역은 강진면의 필봉리라는 소박한 산골 마을이다.
필봉 마을의 역사는 약 300년 정도로 추정되는데, 필봉이라는 이름은 마을 뒷산이 붓의 끝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었고 주민은 주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필봉농악 전수관을 위에서 본 모습

필봉굿 흑백 사진

  여느 다른 시골 마을과 마찬가지로, 필봉마을에도 예로부터 마당밟기나 당산굿 같은 농악이 전해져 왔다. 농악은 풍물놀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의 흥을 돋우고 단합과 화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 연주하는 공연 예술이다.

  그러나 평범한 마을굿이었던 필봉농악이 지금처럼 높은 수준을 보이게 된 것은 1920년경의 일이다. 당시에는 유명한 상쇠를 모셔 굿을 전수받는 문화가 있었는데, 필봉마을도 박학삼이라는 걸출한 상쇠를 초빙해 풍물굿을 전수받은 것이다. 박학삼 상쇠는 이후 필봉마을로 이주해 오면서까지 마을 풍물굿을 수준을 걸립패 수준으로 한껏 끌어올렸다.

필봉굿 벽화 그림

필봉굿 사진

  그렇게 필봉마을은 흠뻑 풍물굿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특히 필봉리 출신인 3대 양순용 상쇠는 필봉굿의 정리와 체계를 마련하면서 자체적으로 문화의 꽃을 피우게 했다.

  대외적으로 여러 대회에 나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도 해 전국의 대학생들이 필봉 마을로 풍물굿을 배우러 몰려오기도 했다. 평생을 풍물굿 전승과 보급에 힘써, 후에 임실 필봉농악이 국가무형유산에 지정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한 셈이다. 필봉마을에는 지금도 꾸준히 풍물굿 공연이 이어져 오고 있다.


필봉문화관 입구


전시되어있는 필봉 굿 관련 자료들

  그러나 요즘의 젊은 사람이라면 앞의 설명을 도통 알아듣기 힘들 수도 있다. 상쇠는 뭐고 걸립패는 무엇인지. 그리고 굿은 무당이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건 잘못이 아니다. 시대에 흐름에 따라 전통이 더는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니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같은 농악전수관이 필요한 것이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새롭게 알아갈 때는 먼저 용어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잠깐 마련한 우리 농악 용어 배우기 시간. 우선 상쇠는 농악대의 맨 앞에 서서 꽹과리를 치며 굿판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을 말한다. 다시 말해 농악대의 우두머리이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군대의 지휘관 같은 막중한 역할이다.
그리고 걸립패는 조금 더 전문적이고 직업적으로 발전한 형태이다. 마을 단위를 벗어나 인근 다른 지역까지 가서 공연도 하고 약속된 대가도 받고 하면서. 농악의 예술성을 질적으로 고양하고, 전업 농악인을 배출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먹으로 그린 굿하는 사람

필봉 굿 악기들

  필봉농악전수관에는 양순용 상쇠가 실제로 사용했던 악기들이나 의복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벽면에는 그가 생에 남겼던 말이 여럿 적혀있는데, 이를 통해 평생을 상쇠로 살아간 사람이 가졌던 풍물굿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굿은 푸지게 쳐야 제! 삶의 전부인 것처럼!”
“오는 이 흡족하게 놀려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좋은 굿이고 잘된 판이제.”
신명진 굿판을 벌이는 경험이야말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위대한 힘이자 굿의 지향점으로 본 것이다.

  적어도 굿판에서만큼은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량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음악으로 한마음이 되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것이었다.

소릿길 - 고창판소리 박물관 - 판소리 하는 모습의 인형들
고창 전경

  전북 임실에서 섬진강을 따라 그대로 내려가다가, 순창에서 차를 서쪽으로 돌렸다. 그대로 담양을 거쳐 내장산까지 뚫고 나가면 서해 바다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평야가 나타난다. 고창은 그 입구에 자리잡아 탁 트인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고창읍성을 위에서 본 모습
위에서 본 판소리 박물관

  고창을 대표하는 고창읍성이 남쪽의 방장산을 둘러싸고 있다. 조선 전기에 유사시 피난처로 계획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우리가 눈여겨 볼 곳은 그 바로 앞 신재효의 고택이다. 조선말의 문신이자 판소리 연구가였던 그는, 계통 없이 불려 오던 광대소리를 판소리 여섯 마당으로 정립한 인물이다.
이번 소릿길 세 번째 여정은 이 신재효 고택 옆에 들어선 고창 판소리 박물관이다.

판소리 박물관
판소리 박물관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는데 한옥에서 귀를 쫑긋하게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호기심이 들어 문 앞에 다가가 보니 ‘판소리득음실’이라고 적혀있다. 밖에도 한복을 입고 서 있는 분들이 계셔 물어보니, 명창을 길러 내기 위해 판소리 전승 교육을 하는 장소라고 한다.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 보여 인사만 드리고 뒤편의 건물로 돌아갔다.

판소리 박물관 내부 전시관
판소리를하고 있는 소리꾼과 고수를 재현한 모형물

  판소리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 ‘판’과 ‘소리’가 결합한 말이다. ‘판’은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하여 이루어지는 자리를 뜻하므로, ‘판소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중과 공연자 사이의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판소리를 구성하는 3요소를 꼽을 때 소리꾼, 고수와 함께 늘 청중이 들어간다. 청중은 ‘얼쑤!’, ‘지화자 좋다!’ 같은 추임새를 통해 호응하고 공연에 참여한다.

춘향전을 재현한 인령들

  또한, 판소리는 조선 시대 최상위 신분층인 왕족과 임금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예술 문화로 널리 알려졌다. 당대 유명한 명창이나 소리꾼들은 궁궐에 불려 가 공연을 하고 벼슬을 얻기도 했다. 또한, 왕실 뿐 아니라 양반들의 판소리 사랑도 대단했는데, 조선 후기 그림들을 보면 축제나 부잣집 잔치에 판소리 공연이 초대된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드는 생각. 판소리는 ‘궁중예술’, ‘양반예술’인가?
그렇다. 당대 명창으로 유명했던 모흥갑은 평안감사 부임식에 초청을 받아 공연하기도 했고, 판소리 애호가로 유명한 흥선대원군은 박만순, 정춘풍 명창의 지위를 올려주고 벼슬을 내려 주기까지 했다. 그러니 판소리가 ‘궁중예술’, ‘양반예술’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판소리 북과 가야금
판소리하는 여성이 그려진 부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판소리는 동시에 ‘민중예술’이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시작이 그렇다.
본래 판소리는 하층민과 평민의 전유물이었다. 판소리의 창자는 ‘소리광대’라 불렸는데, 광대는 조선 중기에 연예 일을 담당하는 천민 계급이었다.
판소리는 농어촌, 장터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다. 줄타기 등의 곡예와 함께 공연하기도 하면서 점차 부잣집에도 초청을 받고 입지를 넓혀 나간다. 물론 양반의 향유물로 성격이 바뀌어 가면서 변화도 있었다. 이전의 음담패설이나 천박한 표현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초가집이 있는 모형물
소리꾼이 폭포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재현한 모형물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판소리의 목적은 결국 다수의 사람에게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었으므로, 소리꾼에게 있어 폭포도 뚫고 나가는 우량한 성량을 갖는 것은 최대 수련 과제였다. 더욱이 보통 공연을 시작하면 최장 8시간 넘게 이어지기도 했으니, 중간에 쉬는 시간도 없이 홀로 극을 이끌어나가는 건 보통 노력과 재능으로는 불가능했다.

  때문에 당대의 명창들은 상류층 하층민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환호받는 존재였다. 판소리가 전라도를 넘어 전국으로 퍼지고 인기가 많아질수록, 유명한 명창들은 너도나도 섭외하고 싶어하는 잔치의 꽃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슈퍼스타 연예인인 셈이다.

전시되어있는 판소리 책

  여기서도 판소리의 대부, 신재효 선생의 선경지명은 빛이 난다. 그의 업적은 판소리 6마당을 정립한 것뿐이 아니다. 일찍이 판소리의 흥행 가능성을 내다본 그는, 판소리 교육공간을 만들고 싹이 보이는 아동을 가르쳐 소리를 하게 했다. 수많은 명창들이 그의 교육공간인 동리정사에서 나왔다. 요즘의 개념으로 보자면 연예 기획사에서 연습생들을 훈련하고 아이돌로 데뷔시킨 것이다.
심지어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여성 가창자를 키우기도 했다. 실제로 고창의 기생이었던 진채선은 신재효에게 소리를 배워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이 된다. 흥선 대원군 눈에 들어 운현궁의 음악을 담당하는 대령기생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렇듯 판소리는 19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양반예술의 모습도 지니고 있으면서 민중예술의 측면도 보이는, 독특한 예술로 발전했다. 누구나 좋아하는 우리의 정서를 담은 이야기였으며, 누구나 듣고 싶어하는 한이 서린 소리였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맞으며 양반층이 해체되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판소리는 우리 모두의 문화였기에 지금껏 수많은 사람의 노력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소릿길 - 남원 광한루원
드론에서 찍은 남원과 옆에 흐르는강

  현재까지 전해지는 판소리는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 마당에서 <변강쇠가>를 제외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부가>, <적벽가> 다섯 마당이다.
이번 소릿길 마지막 여정은 위 다섯 마당 중 가장 규모도 크고 음악적으로도 뛰어나다 여겨지는 <춘향가>의 배경, 남원 광한루원이다.

위에서 정면으로 본 광한루원
광한루원 입구

  남원 광한루원은 춘향전의 수혜를 잔뜩 받은 문화유산이다. 물론 대표격 건물인 광한루 자체가 한국 4대 누각으로 인정받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이 광한루도 춘향전이 등장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던 건물이기 때문이다.
1414년 조선 태조 때,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를 오게 되며 광통루라는 누각을 세운다. 그리고 20년 후,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던 것으로 유명한 정인지가 이 누각을 고쳐 세우면서 이름을 바꾼다. 전설 속의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산다는 ‘광한청허부’에서 이름을 따 ‘광한루’라 지었다. 춘향전이 나오기 300년도 전의 일이다.

춘향전 조형물
광한루원 안의 연못

  여수 밤바다가 원래도 아름답지만 한 대중가요에 의해 더욱 유명해진 것처럼, 광한루원도 그렇다. 더욱이 춘향전은 단군 이래 한반도에서 가장 큰 히트를 친 연애소설이다.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비견될 만하다.

버드나무 사이로 보이는 광한루원
광한루원

춘향 그림

  나는 먼저 광한루를 보러 갔다. 광한루는 은하수를 상징하는 커다란 연못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 버드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바람이 불면 늘어진 가지가 산들산들 흔들렸다.
이몽룡과 성춘향의 첫 만남을 기억하시는지? 둘의 만남도 이 버드나무와 함께였다.

  어느 화창한 5월의 단옷날. 월매의 딸 성춘향이 몸종 향단이와 함께 놀러 나와 그네를 뛰고 있었다. 춘향가에서는 춘향이가 그네 뛰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세류 같은 고운 몸이 단정히 노니는데…”
여기서 세류는 가지가 가느다란 버드나무를 뜻한다. 이몽룡이 이 모습을 보고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다리가 보이는 광한루원을 위에서 본 모습

광한루원의 다리

  견우와 직녀가 밟았던 광한루 앞 오작교를 건너며 계속해서 춘향전의 내용을 떠올렸다.

  결국 몽룡은 하인 방자의 도움으로 춘향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성춘향은 기생의 딸, 이몽룡은 남원 부사였던 양반가 아버지의 아들. 이내 몽룡은 아버지가 왕의 비서 격인 동부승지로 임명되면서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이름이 ‘춘향몽룡전’이 아닌 ‘춘향전’인 이유는 이제부터 나온다. 조선 시대 변 씨 중 가장 유명 인사라 할 수 있는 변학도, 변 사또가 억지로 춘향에게 수청을 들게 한 것이다. 참고로 변학도는 이몽룡의 아버지를 이어 남원 부사로 발령받은 인물이다. 조선 시대 음서제로 관직을 부여받은, 지금으로 치면 낙하산 인사다.
결과는 이미 알고 있듯 춘향은 옥에 갇히면서까지 강력하게 거부한다. 고을 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강이에 곤장을 맞으며 고문을 당하다 실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가슴 아픈 반전. 대뜸 한 거지가 옥에 갇힌 춘향을 찾아온다. 우리는 그 거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 거지가 춘향이 그토록 애타게 부르짖던 이몽룡이다. 춘향은 여전히 정절을 포기하지 않겠다 했지만, 어머니 월매의 마음은 달랐다. 이때 월매가 양반 몽룡에게 소리친 말은 “걸인 중의 상걸인이 돼서 돌아왔구나!”였다.
부모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양반이고 뭐고 내 자식 일에는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다.

광한루원의 작은 다리

  이제 끝이 다가온다. 춘향전이 긴 시간 사랑받는 것은 마지막 또 한 번의 통쾌한 반전 때문일 것이다.
변학도의 생일 날, 주변 운봉, 곡성, 정읍의 사또까지 모두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연다. 여전히 거지꼴을 하고 있던 이몽룡은 연고도 없는 주제에 밥을 얻어먹으러 온다. 아무리 거지꼴을 하고 있어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양반인 이몽룡을 쫓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엔 취미가 없는 이몽룡은 여기서 반찬 투정까지 한다. 분위가 차가워지자 옆 마을 운봉 사또가 수습하고자 한시 놀이를 제안한다. 어쩔 수 없이 변학도는 ‘고’로 운을 띄우고 이몽룡은 한시를 짓는다.

金樽美酒 千人血 금준미주 천인혈
(금잔에 담긴 좋은 술은 천 백성의 피요)
玉盤佳肴 萬姓膏 옥반가효 만성고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 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 怨聲高 가성고처 원성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 소리 높더라)

  곧 이어 장면은 춘향가의 가사를 빌리자면,
“삼면에서 우루루루, 삼문을 후닥딱.”
관아에 울려 퍼지는 벼락같은 소리.
“암행어사 출두야!”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고 책도 흔하지 않던 시절. 구름처럼 몰려든 청중들 속에서 명창이 목청 높여 내지르는 이 소리가 얼마나 통쾌하고 신이 났을지, 어렴풋이 상상이 간다.
절로 ‘얼쑤’ 소리가 나게 하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에필로그

  이번 소릿길 여행에서 느낀 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소리를 통해 모두가 하나가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사회엔 필연적으로 많은 경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부자와 빈자의 경계, 세대의 경계, 신분의 경계, 성별과 종교의 경계, 혹은 국적의 경계 등등.

  때때로 소리는 그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짓기 위해 발전하기도 했다. 접근성을 높이거나 일부러 한쪽의 전유물로 만들어 나가면서.
그러나 서양의 오케스트라나 한국의 농악, 판소리, 종묘제례악 어떤 것을 보아도 굳게 드는 생각이 있다. 결국, 아름답고 훌륭한 소리는 어느 한 쪽만 감동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소리의 힘은 많은 사람을 하나로 모으는 방향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그 힘이 점차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녹아서 허물어지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듣는 것이 좋다. 음식이나 그림은 이해하는 데에 어느 정도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음악은 그것이 오십 년 전의 것이던 오백 년 전의 것이던,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순식간에 세월이나 장소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일상처럼 평범한 순간도 영화처럼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어준다.

  소릿길을 여행하게 된다면 이어폰을 꼭 가져가길 바란다. 한적한 광한루원을 거닐며 음악을 듣고 바람을 쐬고 있다 보면, 더욱더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꼭 춘향가나 오래된 전통 노래가 아니어도 좋다.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어딘가 현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왔다 느낄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무엇이든 경계가 허물어짐을 느끼면서.

소릿길의 맛 - 전주 콩나물국밥 남원 추어탕

전주 콩나물 국밥

  전주의 가장 대표적인 향토음식은 무엇인가요?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가장 많은 대답은 ‘전주비빔밥’일 것이다. 그러다 전주 시민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 대답이 더 많이 나올 수도 있다. ‘전주 콩나물국밥’.

  간을 보호해주는 아스파라긴산과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되는 아르기닌이 잔뜩 들어있어 해장 음식으로 유명한 콩나물국밥. 세상에 콩나물국밥보다 맛있는 음식이야 수도 없이 많겠지만 이만큼 부담 없고 속 편한 음식이 있을까. 으레 에피타이저로 딸려나오는 수란과 함께라면 아무리 닳고 닳은 위장이라도 말끔히 수리해낸다.

  단,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국밥 집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 수란에 섞어 먹을 김이 테이블에 따로 올려져 있을 것. 나는 김을 좋아해서 눈치 보지 않고 먹는 게 좋다. 두 번째, 오징어젓이 반찬으로 있을 것. 아무래도 콩나물만 먹기에는 심심한 느낌이 있어 오징어젓으로 싸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세 번째. 콩나물이 반드시 푹 익지 않았을 것. 어느 음식이나 채소의 익힘 정도는 중요한 요인이지만, 콩나물국밥을 시켰는데 콩나물이 매가리 없이 축 처져 있으면 눈물이 난다.
명심하자. 콩나물국밥의 콩나물은 적당히 ‘아삭’해야 한다. 그래야 영혼의 단짝 모주도 술술 들어간다.

남원추어탕

추어탕

  남원은 우리나라 천혜의 자연환경인 지리산과 섬진강을 보유한 도시이다. 그러니 예로부터 질 좋은 음식재료를 풍부히 구할 수 있는 맛의 고장으로 유명했고, 그 중에서 추어탕은 남원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잠깐. 토란대, 미꾸라지, 시래기. 이것들의 공통점이 두 개 있는데 무엇인지 아시는지? 하나는 추어탕의 주요 재료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 싫어하는 재료라는 점이다.

  그렇다. 추어탕은 어른의 음식이다. 우리 집 근처에는 추어탕 잘하는 집이 없는데 나이가 들수록 맛있는 추어탕이 먹고 싶으니 큰일이다. 특히나 쌀쌀한 가을이 찾아올수록 그렇다. 집 나간 며느리를 돌아오게 하는 것은 가을 전어 뿐만이 아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영양분을 축적하는 시기에는 미꾸라지도 맛이 오른다. 

  나는 광한루원을 천천히 둘러보고 몸이 으슬으슬한 저녁에 가을 추어탕을 먹고 왔다. 잊을 수 없다. 그 맛. 미꾸라지를 뼈째 갈아 넣은 걸쭉한 국물에 들깻가루도 듬뿍 들어있었다. 여기에 혀가 얼얼해지는 초피 가루도 잔뜩 뿌렸다. 다진 마늘? 청양고추? 사정없이 넣는다.
너무 과하다고? 괜찮다. 추어탕은 ‘어른의 음식’이니까. 식당에서 나올 땐 이미 몸이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추어탕은 이 맛에 먹는다.

 
박성호 작가
by 박성호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 - '국가유산 열 개의 길' 여행기 왕가의 길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 - 왕가의 길 여행경로 소개: 출발 - 강화 고인물 유적 - 강화 전등사 - 김포 장릉 - 경복궁 - 창덕궁국가유산 열개의 길 여행기 - 왕가의 길왕가의 길 여행경로소개 - 강화 고인돌 유적 - 강화 전등사 - 김포장릉 - 경복궁 - 창덕궁

프롤로그 : 여행자와 이방인

  여행하며 지구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세상엔 참 살기 좋은 곳이 많다고 느끼게 된다.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여유도 있고. 나는 서울에 태어나 나고 자란 사람이지만, 많은 면에서 서울보다 나아보이는 동네도 잔뜩 있다.
사람이 행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에 ‘외국에 다녀온 사람의 입 다물기’가 있다 보니, 가끔은 이런 장소에 관해 이야기하고 다닌다.
“노르웨이에 뵘로란 동네가 지내기 좋더라고요.”, “니카라과에 오메테페란 섬이 있는데 거긴 몇 달을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누군가 내게, “혹시나 나중에 살고 싶은 장소가 있으신가요?”하고 물으면 내 대답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확고해진다. “한국이요. 한국 살고 싶어요.”
유년 시절 기억의 배경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한평생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문화 속에서 무슨 음식을 먹고 살아왔는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 인생에 처음 입력된 기억들은 쉽게 거역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외국에선 늘 이방인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언젠가 중미 정글 속 고대 마야 유적들을 탐험하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것 참 신기하긴 한데, 실제로 이 곳에 나같은 사람이 잔뜩 모여 사는 모습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가 않는군. 내가 마야인의 후손도 아니고.’

  이번에 내가 여행할 길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걸을 ‘왕가의 길’이다. 긴 세월 동안 천천히 쌓아져 온 왕가의 길은 한반도 왕실의 위엄과 화려한 문화, 번영과 위기의 순간들이 서려 있는 길이다.
그러니 이번 길은 우리나라의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길이자, 걷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느끼게 하는 길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왕가의 길 - 강화 고인돌

  왕가의 길을 시작하기 위해 인류 역사의 시작되기 이전, 선사시대로 되돌아가 보자.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무려 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거나 채집하며 생활하던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 십만 년 후, 농경이 시작된 기원전 8,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자 마침내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곳곳에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강한 족장이 주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해 국가로 발전하는 단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한반도 왕가의 길을 시작하게 된 지점도 바로 이 때라고 할 수 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4-고인돌 안내 캐릭터 동상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5

  우리나라는 ‘고인돌 집중 밀집 지역’이다. 세계 전체 고인돌의 절반에 가까운 4만 여 기가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다. 강화도에서는 보존 상태가 좋고 형태가 다양한 고인돌을 만나볼 수 있다. 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인돌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탁자식’ 고인돌을 찾으러 강화도 부근리에 있는 지석묘를 찾았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6-고인돌 사진

  강화도 고려산 북쪽 끝자락 넓은 언덕에 육중한 고인돌이 외롭게 서 있다.
고대 거석 기념물만큼 권력의 위엄과 상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덮개돌의 무게는 무려 50톤에 달한다. 대형 버스 약 세 대에 맞먹는 무게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돌을 바라봤다. 그 옛날 이 무거운 돌을 받침돌 위에 올려놓은 것도 신기하고, 수천 년 넘게 이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도 신기했다. 종종 유적이나 풍화, 침식된 자연을 볼 때면 억겁의 세월 앞에 모든 게 작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제 떠날까 하는데 유치원 꼬마들이 잔뜩 체험학습을 왔다. 선생님 따라 쫄래쫄래 언덕을 올라오더니, ‘우와아, 크다’ 하며 몇 바퀴 돌다가 다시 줄 맞춰서 내려갔다. 돌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 인생 삼십 몇 년도 이렇게나 긴데, 수천 년 전의 유적이라니.’ 아이들은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나 보다.
하긴 나도 그랬지. 여기서 오십 년쯤 더 살게 되면 멈춰있는 돌덩이를 보고 눈물까지 흘리게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왕가의 길 - 강화 전등사

  고인돌 유적지를 빠져나와 강화도를 벗어나기 전에, 방문해야 할 왕가의 길 명소가 하나 더 있다.
익히 알고 있듯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는 환웅과 웅녀의 아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다. 마침 강화도에는 단군과 관련된 명소가 두 곳 있는데, 하나는 단군이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이고, 하나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다.
이번에 방문 할 장소는 이 삼랑성 내부에 위치한 1600년 역사의 강화 전등사이다.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천년고찰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8-삼랑성 성벽 통로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9-소나무 사진

  밖에다 차를 대놓고 삼랑성 성벽을 지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등사로 향하는 길목에는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가득했다. 다만 소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심지어는 시멘트가 발라져 있기까지 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당시 무기의 대체 연료로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만든 상흔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0-숲에 둘러싸인 전등사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1-전등사 사진

  숲으로 둘러싸인 전등사의 풍경이 산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고구려 시기에 세워진 전등사는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던 사찰로서 중하게 여겨졌다. 원래의 이름은 ‘참된 종교를 추구하라’는 의미로 진종사였으나, 1281년 충렬왕의 왕비가 진종사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2-전등사 사찰 사진

  전등사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억압하던(숭유억불) 조선에서도 왕실 사찰로서 비호를 받던 사찰이다. 전등사가 있는 삼랑성 안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전등사가 실록을 보호하는 수호 사찰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3-스님 뒷모습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4- 사찰 천장의 용 조각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5-법당명 사진

  오랜 세월만큼 사찰 안에는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역사책처럼 남아있다. 하나하나 풍부한 이야기와 시대를 품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강화대교를 건너 서울로 돌아오는 길, 김포에 있는 장릉을 찾았다.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왕릉은 문화의 보고이자 풍수지리상 명당의 상징이다. 왕가의 길에서 놓칠 수 없는 여행지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7-김포장릉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8-김포장릉 소나무 사진

  김포 장릉은 산의 경사가 완만해 능이 자리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신비한 분위기의 숲길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는데, 소나무가 많이 심겨 있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르고 기상이 좋은 소나무는 풍수 사상에서 명당 자리에 심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수목이기 때문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19-김포장릉 전경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0-건물 안에서 본 묘 사진

  숲길을 지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하니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가 잠들어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임금의 무덤이라 하기엔 어쩐지 소박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 곳은 원래 왕릉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임금의 아버지 묘인 대원군 묘로 조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1-김포장릉의 건축물

  제14대 선조의 아들이자 제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은 추존 왕이다. 죽은 후에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들인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고 난 후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켰다. 원종은 왕자인 정원군이었던 당시 세자로 있던 적이 없었기에 추존이 부적절하다는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여하간 조선왕조의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면 원체 흥미진진 이야기가 많아 끝내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찾다 보면 그 이후 왕, 그 이전 왕가의 이야기까지 찾아보게 된다. 그러나 나머지는 다음 여정에서 이어가도록 하자.
다시 숲길을 걸어 나온 나는 이제 조선 역사의 중심, 한양으로 향했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옛 고조선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초대 국왕인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운 지 채 한 달도 한 돼 천도를 결심한다.
여러 후보지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했다. 도읍지 설계의 총책임은 개국공신 정도전에게 맡긴다. 그리하여 3년 후 새로운 궁궐이 완공되었고,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하라’는 의미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3- 경복궁 사진

  경복궁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자주 지나치게 되지만 볼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다. 휘황찬란한 수많은 현대식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언제나 중심에서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4-경복궁 앞 수문장 교대의식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5-수문장 교대의식 사진

  정문인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에 입장하니, 중문인 흥례문 사이에서 수문장 교대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8월의 더운 날씨였지만 한국 사람들을 비롯해 수많은 외국인이 걸음을 멈추고 경건히 의식을 관람했다.
수문장 제도는 15세기 조선 전기에 정비되었는데, 지금의 의식은 당시 궁궐을 지키던 군인들의 복식과 무기, 각종 의장물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6-근정문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7-근정전에서 본 근정문 사진

  이어서 흥례문과 근정문을 지나 경복궁의 핵심 건물인 근정전으로 입장했다.
근정전 앞은 임금의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식 같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의식과 행사들이 열리던 곳이다. 이 마당의 이름이 우리에게도 친숙한 ‘조정’이다. 그리고 ‘근정’이란 이름은 정도전이 붙였는데,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조정 바닥의 돌이 매끈하지 않고 상당히 울퉁불퉁하다는 점인데, 이는 임금이 위에서 조정을 내려다볼 때 너무 강한 햇빛이 비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8-근정전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29-근정전의 왕좌 사진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그리고 근정전의 왕좌는 마치 어둑한 허공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근정전 내 넓은 바닥이 한결같이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의도한 것이다. 근정전이 구름 위의 하늘 궁전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정전을 오르는 돌계단에도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돌계단 사방에는 각 방향의 하늘을 상징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별자리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0-경회루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1-경회루 산책하는 사람들 사진

  근정전 서편으로 이동해 경회루 연못을 따라 걸어본다. 연못에 비치는 인왕산의 산세가 수려하다.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지금의 경복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불에 타 대부분 소실된 탓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들으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럼, 그사이 긴 시간 동안 경복궁은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하고.

  사실 경복궁은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던 궁궐이다. 전란이 끝난 이후 조선 정부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소모되는 경복궁 복원을 포기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경복궁은 2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표범들의 서식지로 전락한 것이다.
대신 1610년, 광해군은 경복궁이 아닌 다른 궁을 먼저 중건해 조선의 제1 궁궐, 법궁으로 선포한다. 그곳이 이번 왕가의 길 마지막 여정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2 - 왕가의 길 창덕궁
왕가의길 - 창덕궁

  경복궁에서 안국역을 지나 창덕궁으로 걸어갔다. 불과 이 십여 분 만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 닿았다.
창덕궁은 태종의 주도로 1405년에 완공되었다.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십여 년 만에 이렇게 가까이 새로운 궁을 지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경복궁은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 데다(1차 왕자의 난), 자신의 정적인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궁이기 때문에 태종에게는 꺼림칙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태종은 왕위에 즉위한 직후 조선의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하는 와중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3-창덕궁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4-창덕궁 내부 사진

  창덕궁과 경복궁의 가장 큰 차이는 궁궐의 형태에 있다. 경복궁이 기하학적인 대칭을 중시하며 왕가의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낸 것과는 달리, 창덕궁은 주변 환경에 맞추어 얽매임 없이 지어졌다. 전형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자연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게 건설된 것이다.
  때문에 창덕궁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색다른 궁궐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게 될 수도 있다. 건물들은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되어 있으며, 심지어 궁궐의 중심이 되는 정전인 인정전은 정문과 완전히 틀어져 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5- 창덕궁 길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6-인정문 마당 사진

  재밌는 점은 창덕궁의 이러한 특징이 정작 건설을 명령했던 태종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는 것이다.
창덕궁의 공사 책임은 당시 판한성부사(지금의 서울시장 격)였던 박자청이 맡았다. 그런데 심지어 태종은 박자청을 하옥시키기도 했다. 인정문 밖 마당의 구역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 명령 했는데, 박자청이 산세를 살리고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사다리꼴로 만든 탓이었다.
  결국 가장 한국적인 미를 보여준다 찬사를 받는 지금의 창덕궁은 박자청이라는 인물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의도된 설계였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7-창덕궁 후원 관광하는 관람객 사진

  나는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해둔 덕에 후원 관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창덕궁 후원은 한국인의 자연관과 사상, 정서를 보여주는 대표적 정원이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이곳은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 조성되었고 세조, 성종 대에 확장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이 소실되면서 광해군 대에 다시 조성된 곳이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8-창덕궁 후원 건물 사진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39-창덕궁 후원의 정자 사진

  사실 창덕궁 후원은 오랜 시간 ‘왕가의 비밀스러운 정원’이란 의미로 ‘비원(秘苑)’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지금은 울창한 숲과 연못을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편히 걸을 수 있으니, 비원이라는 말은 더 이상 맞지 않는 것 같다. 한 편으론 이 모든 과거의 풍경들이 더 이상 비밀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으로 느껴지던 지.
  골짜기마다 자연의 지세에 따라 잘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정자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왕가에서는 이곳을 휴식과 산책을 비롯한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후원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 있어 학문을 탐구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자연 풍광을 느끼며 시를 짓고 꽃구경 하며 치유를 받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천천히 드넓은 후원을 누볐다.

왕가의 길 에필로그

  나도 이제 제법 머리가 굵어서 그런가? 한반도의 고조선과 삼국시대의 역사가, 조선 왕조의 역사가 흥미로운 소설만큼이나 재밌다. 왕실의 유적과 유물에 남아있는 풍부한 이야기 하나하나에 쉽게 몰입해서 빠져들게 된다.
왕가의 길의 매력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이자 조선 왕조 오백 년 역사의 수도였던 수도권 일대는, 무척이나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세세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가의 길에서 만나는 문화유산들은 저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더욱이 이야기 하나하나가 거미줄처럼 또 다른 이야기들과 연결되어 있으니, 한 번 빠져들면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해가며 시리즈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멈추기 어렵다.

  결국에는 나도 뼛속까지 한국 사람인가 보다. 점점 더 많은 나라를 여행할 수록, 다양한 문화를 경험해 볼 수록 되려 한국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세상에 어떤 강을 여행해도 한강만큼 내게 특별함을 느끼게 하는 강은 없었으니까. 어쩌면 내가 이렇게 떠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결국에는 돌아 올 정겨운 장소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 길을 걸으면서 다시금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장소가 공감할 수 있는 과거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일이다. 그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들 사이에 사는 지 잊지 않게 해준다.

왕가의길의 맛 - 설렁탕

국물-고기-면-밥-파 설렁탕

  왕가의 길에 추천할 음식은 서울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이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이다.
설렁탕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조선 시대 임금이 농사가 잘되길 기원하며 직접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 제단과 관련이 있다. 왕이 제사 의식을 진행하고 행사가 끝나면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소고기 국물을 나눠줘 거기에 밥을 말아 먹었던 것이 시초라는 이야기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유래설이 있다. 하지만 설렁탕이 한때 조선의 외식 문화를 제패했던 패왕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종로와 청계천 주변엔 역사 깊은 설렁탕집이 여럿 남아있다.

왕가의 길 여행기 사진42- 설렁탕 사진

  진하고 뽀얀 국물에 향긋함을 더하는 파와 얇게 썰린 소고기 한 점. 한국전쟁 이후 미국 원조가 시작되며 더해진 얇은 밀가루 국수. 여기에 갓 지은 따듯한 흰 쌀밥과 아삭시큼한 깍두기까지.
그 아름다운 맛의 조화는 한국 사람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앉자마자 곧바로 내오는 패스트푸드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으니, 간편히 한 그릇 때우기 위한 바쁜 현대인에게도 부담이 없다.

  나는 설렁탕을 먹을 때, 소금으로 간을 하고 밥을 말기 전 늘 국물부터 한 수저 맛본다. 슴슴하지만 감칠맛 가득한 맛이 중독성 있다. ‘아, 그래 설렁탕은 이 맛에 먹지’ 하며 생각하는 찰나, 머릿속 한편에선 비통한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김첨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설렁탕은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을 수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한 맛이다. 설렁탕을 먹을 땐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박성호 작가 사진
by 여행작가 박성호
국가유산 열개의 길 여행기 - 천년정신의 길 - 글/사진 여행작가 박성호
경주 계림 - 경주 대릉원 일원 - 경주 월성 - 경주 불국사 - 경주 석굴암

프롤로그 / 사람의 시간은 길다

  내가 즐겨 하는 이야기 중에, ‘지구의 역사가 일주일이라면’이라는 것이 있다. 지구라는 구체가 생겨난 시간을 월요일 0시로 보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일요일 오후 12시로 봤을 때 지구의 역사를 환산해 보는 것이다.
물론 계산은 내 취향이 아니므로, 아래 내용은 언젠가 여행 중에 읽었던 베르나르의 책에서 메모한 자료를 참고해 적은 것이다.

  월요일 0시에서 하루가 흐를 때마다, 대략 6억 6천만 년이 지나간다. 물론 6억 4천만 년이라고 대충 2천만 년쯤 떼먹어도 눈치채는 사람은 없겠지만, 일단은 그렇다.

  어쨌든 월요일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 아침이 올 때까지도 지구에는 아무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수요일 점심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마침내 박테리아라는 최초의 생명 형태가 나타난다. 이 박테리아는 일요일 오전까지 계속해서 증식되고, 조금씩 새로운 형태의 생명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벌써 일요일 오후 4시. 드디어 우리에게 친숙한 공룡이 나타난다. 공룡은 지구 위에서 5시간 동안 종을 유지한다. 하지만 오후 9시가 되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마리도 남지 않게 된다. 아, 그럼 드디어 위대한 인간의 시대가 오는가보다, 싶겠지만, 전혀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에 최초의 인류가 출현하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일요일 오후 11시 57분이다.

  모두가 잘 아는 세계 4대 문명, 그러니까 최초의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은 11시 59분 45초부터이다. 쉽게 말해 인류의 역사는 15초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가 달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은 불과 40분의 1초 전이다. 이는 눈 한번 깜빡이는 시간보다 다섯 배는 짧다.

  신기하지 않으신지? 이 계산법으로 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인 신라의 역사도 몇 초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종종 나는 이러한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섬뜩한 생각이 든다. ‘이러다 인류가 바이러스 공격으로 한순간에 사라져도, 지구 역사로 보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인 건가?’ 하면서. 찰나에 지나지 않는 내 인생은 물론이고, 인류의 모든 역사가 너무도 허무하게 느껴진다. 생일 파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긴 세월을 떠올릴 때, 시간을 사람의 인생으로 나눠보곤 한다. 비록 같은 시간이라도, 사람의 시간은 지구의 시간보다 길다. 빙하가 녹는 시간으로 생각하면 천년이 너무도 짧은 시간이지만, 그 안의 여러 인생을 생각하면 한없이 긴 시간이 되곤 한다. 더군다나 우리의 정신은 빙하나 종유석보다는 조상들의 삶에서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그러니 오늘 ‘천년 정신의 길’은, 문화유산에 엮인 인물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생각이다. 그래야 천 년 역사에 담긴 아득한 깊이와 문화를 한껏 느낄 수 있을 것이므로. 역사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니 당연하기도 하다. 물론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만큼 읽기 어려운 것도 없지만, 신라의 인물들은 우리에게 워낙 익숙한 이름들이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천년 정신의 길 - 경주 계림
경주역사지구 드론샷

  신라는 한반도 고대 삼국 중 유일하게 수도를 천도하지 않은 나라이다. 신라는 지금의 경주 일대인 서라벌에서 시작해, 세계 곳곳에서도 드물게 수도를 천 년간 유지했다. 그러니 곧 신라의 역사는 한반도 동남부의 작은 땅이었던 서라벌의 확장 역사로 보아도 될 것이다. 나는 그 찬란한 영광의 처음과 끝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경주역에 도착했다.

신라대종

세계역사유적지구 기념석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경주는 도시 전체가 신라의 역사를 품은 도시이다. 특히나 문화유산이 밀집된 경주역사지구는 한국 학생들의 수학여행 단골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내가 방문했던 시기도 마침 시험 기간이 끝났을 때여서, 여기저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가득했다.

  서울에서 온 학생도 있었고 부산에서 온 학생도 있었다. 나도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분명히 경주에 왔던 적이 있다. 아마 고등학생 때도 왔을 것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경주 일대를 누빈 추억은 아마 대한민국에서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멀리 보이는 계림 안의 기와지붕
길사이로  흐르는 작은 물길

  신라가 처음부터 신라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신라는 서라벌 일대를 다스리던 작은 나라, 사로국에서 출발했다. 그전에는 고조선의 유민들로 구성된 여섯 개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중 한 마을의 촌장이, 우물 곁에서 울고 있는 말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래서 가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하나 있어 깨뜨려 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여섯 마을 사람들은 이 아이를 우러러 받들어 사로국 왕으로 모셨고, 당시 알의 모양이 표주박처럼 생겨서 이 사내의 성을 박으로 하였다. 그가 바로 신라의 초대 국왕이자 한국 박씨들의 시조, 박혁거세이다. 당시에는 왕을 칭하는 호칭이 ‘거서간’이었으므로, ‘혁거세 거서간’이라 불렀다.

  그러나 신라 왕가에는 이 외에도 탄생 설화가 두 개나 더 존재한다. 이는 한반도 다른 고대 국가와의 큰 차이 중 하나이다. 고구려, 백제가 하나의 시조를 중심으로 왕위를 세습해 간 것과 다르게, 신라는 박, 석, 김 씨가 나누어 왕위를 이어갔다.

경주 계림을 위에서 드론으로 본 모습
나무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계림숲

  내가 이번 여행지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경주역사지구의 계림이라는 숲이다. 이곳은 신라 김 씨 왕가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때는 신라 석 씨 왕가의 시조 석탈해가 신라 4대 국왕으로 있었던 시절, 어느 날 그는 서쪽 시림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보니 그 안에 자태가 뛰어난 사내 아기가 있었다.
석탈해는 기뻐하며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으니, 이름을 총명하고 지략이 많다는 뜻에 ‘알지’로, 성을 금궤에서 나왔다는 뜻에 ‘김’으로 하였다.
이후 계림은 원래 시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닭이 우는 숲이란 뜻에서 계림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경주계림비
경주 계림비각으로 가는 숲 길

  지금은 이제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숲은 아니다. 오히려 시끌벅적한 밖과 다르게 무척이나 고요했다. 계림은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지만, 경주역사지구를 방문한 사람들이 흔히 찾는 곳은 아니다.
김알지는 신라 세 왕가 중 하나의 시조이지만 박혁거세, 석탈해와는 다른 점이 많다. 둘이 국왕의 자리에 오른 것과 다르게, 김알지는 그의 후손들이 왕위에 올랐을 뿐 본인은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또한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사후에 숭배되거나 신격화된 것과 다르게, 김알지는 이렇다 할 흔적이 크게 남아있지 않다.

계림숲길
하늘에서 정면으로 본 계림숲
 
  그러나 계림에서 태어난 김알지로 시작된 김 씨 왕조는 신라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신라 초기에는 박 씨와 석 씨 계열이 주로 왕으로 등극했으나, 17대 내물왕 대부터는 김 씨 왕조의 약 600여 년에 이르는 긴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천년정신의 길 - 경주 대릉원 일원

  이제 숲에서 걸어 나와 건너편 대릉원 일원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신라 제13대 왕이었던 미추왕의 능을 비롯해 신라 왕족의 무덤이 다수 산재해 있는 곳이다. 발굴 과정에서 수많은 유물을 발견한 곳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신라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는 데에 크게 공헌한 곳이기도 하다.

경주대릉원을 드론으로 위에서 찍은 모습
대릉원과 연못

  이번엔 대릉원 일원을 걸으며 아까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
사실 초창기 박 씨와 석 씨 왕조 시절, 신라는 삼국 중에 가장 발전이 뒤처진 나라였다. 한반도 동남쪽에 고립된 탓에,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탓이다. 더군다나 박, 석, 김 씨로 바뀌어 가며 왕위가 이어져 갔다는 것은, 신라가 여러 부족의 연맹왕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구려, 백제가 왕위를 세습하며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을 때, 신라는 왜군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에 국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험난했던 신라 역사에 반전이 찾아온 것은 김 씨가 독점적으로 지도자 자리를 세습하는 내물왕 대에 들어서이다. 그리고 여기엔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왜군에게 멸망할 뻔한 신라를 도와 구출했는데, 이에 대한 대가로 내정 간섭을 했다. 그 일환으로 김 씨라는 새로운 성씨가 계속해서 왕위를 맡도록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경주 김씨 왕조가 시작되었고, 신라는 고대국가로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물론 여러 차례 위기도 있었다. 천재지변이 닥쳐 고달픈 시기를 보내기도 했고,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마침내 500년, 무려 63세의 나이로 지증왕이 등극하며 신라에도 전성기가 찾아온다. 이리저리 치이기만 했던 신라가 뒤늦게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릉원 앞에 현장학습을 나온 학생들
햇빛이 비춘 대릉원을 위에서 본 모습

  대릉원 일원에서 꼭 만나봐야 하는 문화유산은 단연 천마총이다. 천마총은 지증왕의 무덤이라는 통설이 있기는 하나, 정확히 누구의 무덤인지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왕의 무덤인 ‘능’이 아니라,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인 ‘총’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안에서 출토된 호화로운 유물들과 연구 성과로 추정해 보았을 때, 신라가 전성기를 맞기 시작한 6세기 전후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대릉원 내부에서 무덤을 보고있는 사람들
돌이 쌓여있는 돌무지 덧널무덤
무덤 안의 천마도, 금관 등의 유물들

  천마총 발굴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실 천마총은, ‘연습 삼아’ 발굴한 고분이다.
1970년대, 대한민국 정부는 ‘경주 관광 종합 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고분 1기의 내부를 공개해 관광 자원화하기로 했다. 또한 그 대상으로, 대릉원 일원의 가장 큰 고분인 ‘황남대총’이 지목되었다. 그러나 당시 고고학계의 발굴 경험이 부족했다 보니,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무덤을 시험 삼아 발굴해 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측하지 못한 대박이 터졌다. 불과 두 달 사이에 ‘천마총 금관’, ‘천마총 관모’, ‘천마총 금제 허리띠’, ‘천마총 장니 천마도’를 비롯한 유물이 1만 점 넘게 출토된 것이다. 위에 4점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환두대도와 유리잔을 비롯한 유물 6점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천마총 금관
천마도 그림

  만약, ‘아 천마총, 나도 학생 시절에 다녀왔었지.’하는 분이라면 그때의 기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천마총 내부는 2017년부터 1년간의 공사를 거쳐 현대적으로 새단장했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출입하지 못하던 목곽 뒤 공간도 확장 개방하여, 발굴 과정과 복원된 유물들을 설명하는 공간도 만들어 두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천마총 이름의 유래가 된 천마도 그림이다. 천마도는 말 안장 양쪽에 매다는 말다래에 그려져 있던 그림인데, 천마총에서는 이 말다래가 여러 점 발견되었다. 다만 발굴 당시까지 워낙 오랜 세월을 보낸 까닭에 대부분 크게 손상된 상태였고, 그나마 보존 상태가 좋은 ‘백화수피제 천마문 말다래’만 우선 공개되어 국보 207호로 지정되었다. ‘백화수피제’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경주 시내를 위에서 바라본 모습

  흔히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불린다.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금관을 비롯해 금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주 지역 인근에는 금광이 발견된 흔적이 없다. 신라인들은 강에서 사금을 채취해 금을 모았을 것이라 하는데, 많은 인력이 드는 일인 만큼 당시의 왕권을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5세기 이전까지 고구려, 백제에 밀려 한참 뒤처졌던 나라가 어느새 이들과 어깨를 견 줄 만큼 강력한 왕권 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이제 경주 김 씨 왕조 신라는 22대 지증왕, 23대 법흥왕, 24대 진흥왕을 거치며 한반도의 중심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새로운 법과 제도를 반포하는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며 국가의 체계를 잡아간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 숙제가 남아 있었으니,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가장 유리한 위치인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일이었다.

천년정신의 길 - 경주 월성
경주 월성을 드론에서 본 모습

  경주 월성은 신라의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101년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니, 신라가 멸망하는 935년까지 무려 800년 넘게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다. 월성은 이곳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이라 불리기도 한다. 성벽 밑으로는 방어 시설인 해자가 둘러싸고 있는데, 그 사이 만들어진 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경주 월성으로 가는 길
경주 월성 올라가서 바라본 모습

  이곳도 계림과 마찬가지로, 관광객이 흔히 찾는 장소는 아니다. 흙벽을 쌓아 만든 토성이다 보니 신라의 궁궐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평범한 언덕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곳 성벽 위야말로 경주역사지구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장소이다. 이곳에 오르면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경주는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곳이지만, 이 위에서 한반도 중심인 북서쪽을 바라봤던 신라 왕들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소나무들
소나무와 벤치에 앉아있는 두사람의 뒷모습
  6세기 진흥왕이 이끄는 신라는 이제 본격적인 정복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한강 유역은 백제에서 고구려에 넘어간 상황이었는데, 마침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을 상대하느라 시선이 빼앗겨 있었다. 진흥왕은 이를 이용해 백제 성왕과 손을 잡았고, 이내 고구려를 쳐서 승리를 거둔다. 한강 상류는 신라가, 하류는 백제가 갖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그러나 백제에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신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한강 하류까지 홀로 꿀꺽 독식해 버린다. 이때부터 신라와 백제는 철천지원수 사이가 된다. 화가 난 백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에 돌격해 관산성 전투를 벌이기도 하는데, 복수를 하기에 신라는 너무도 강력해져 있었다. 오히려 백제 성왕은 신라군에 의해 목이 잘리는 대굴욕을 겪는다. 신라는 이제 한반도 남부의 대가야마저 정복하며, 명실상부 한반도 최강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발굴현장을 덮어놓은 모습
멀리서 바라본 월성 유적 발굴지
  그리고 이때 진흥왕은 자신이 정복한 여러 지역을 돌아보며 진흥왕 순수비를 세운다. ‘순수’는 임금이 나라를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을 뜻하는데, 예컨대 한강 유역을 점령했을 때는 북한산 비봉 정상에 순수비를 세웠다.
이 순수비는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가 직접 정상에 올라 비문을 해독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 년 가량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떤 비석인지도 잊혀 있던 것을, 역사를 알고자 하는 노력으로 되살아나게 한 것이다.
또한 신라의 궁궐이 자리했던 월성도 여전히 조심스레 발굴 중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밝혀지지 않은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이야기들이, 언제든 현재의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올 수 있다.

첨성대를 멀리서 바라본 모습
멀리서 바라본 첨성대와 사람들
  진흥왕 이후에는 25대 진지왕, 26대 진평왕이 차례로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이제 시대는 7세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632년에는 진평왕의 딸이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여왕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첨성대를 세운 것으로 알려진 신라의 27대 국왕, 선덕여왕이다.

첨성대 사진을 찍는 사람들
첨성대

  첨성대는 한반도의 고대 건축물 중, 큰 복원이나 재건을 거치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문화유산이다. 무려 1,400여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던 것이다. 그런데 첨성대는 왜 왕의 궁궐인 월성과 이토록 가까운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인류가 천체를 관측한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늘의 현상에 경외심을 갖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 중 하나이므로, 인류는 늘 천체의 움직임을 통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견하려 했다.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술이 정치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던 현상이다.

  더군다나 천체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것은 농업이 중요했던 고대 국가의 필수 과제이기도 했다. 고대인들은 천문학과 수학의 정수인 역법을 바탕으로 하늘의 움직임을 계산했고, 농사 시기를 결정짓는 1년의 기후를 정밀하게 예측해냈다.
그러니 나라의 중요한 시설 중 하나인 첨성대는 왕권의 상징이 되었고, 이렇게 왕궁터와 가까운 자리에 서서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천년 정신의 길 - 경주 불국사
경주 시내를 드론에서 찍은 모습

  이제 선덕여왕이 즉위한 7세기, 한반도에선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이 터졌고 혼란한 상황이 지속됐다.
의자왕이 다스리던 백제는 원수인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고구려에선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신라는 고구려에 동맹을 청하기 위해 평양에서 회담을 연다. 그러나 한강 유역을 돌려달라는 고구려 요구에 동맹은 실패한다. 연개소문은 급기야 신라 사신이었던 선덕여왕의 조카를 감금하기에 이른다. 이때 감금되었던 인물이 후에 고구려에서 도망쳐 나와 신라 태종무열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김춘추이다.

  태종무열왕은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당과 손을 잡아 나당연합군을 결성했고, 마침내 660년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태종무열왕은 끝내 삼국통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생을 다하게 된다. 이후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당나라 군대를 격파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것은 그의 아들 문무왕이다.

  다만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신라 진평왕부터 문무왕까지 5명의 왕을 섬기며 절대적 충성을 다했던, 김춘추의 처남이자 매제 김유신 명장이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도 전선에서 대체 불가의 헌신을 보여준 그는 사망한 이후 신라 흥무대왕으로 추존된다. 신하가 왕으로 높여진 우리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산속에 있는 불국사를 위에서 바라본 모습

  이후 안정된 신라는 약 1세기 가량 번영한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었고, 국가 주도로 전국에서 인재를 양성했다.
또한 신라는 속세에 ‘불국정토’를 건설하겠다는 야심 찬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불국정토’는 부처와 보살이 사는,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을 말한다. 이때 신라의 재상이었던 김대성은 동쪽 토함산의 절을 대대적으로 중창했다. ‘불국정토’에서 이름을 가져온, ‘불국사’이다.

불국사 입구 현판
소나무가 우거진 불국사 입구

  불국사 관광 안내소 부근에 주차하면 사찰이 있는 곳까지 십여 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사찰 정원이 워낙 아름답게 조성된 덕에 걷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답게 전국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해 있었다. 그 중엔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도 많았다.

불국사 계단이 보이는 옆모습
불국사 정면

  불국사 예배 공간에 들어서기 전 먼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청운교와 백운교이다. 이 계단을 통해 속세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가 이어진다. 아래쪽 18단의 백운교는 흰 머리 노인을 뜻하고 위쪽 16단은 푸른 청년의 모습을 뜻해 전체적으로 사람의 인생을 상징한다. 그래서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했다고 한다.

다보탑과 석가탑
다보탑

  백운교, 청운교를 거쳐 자하문을 지나면 불국정토에 들어서게 된다. 중심엔 석가모니여래를 모신 대웅전이 있고, 그 앞엔 석가탑과 다보탑이 석등을 대칭으로 나란히 서 있다.
  비슷한 높이의 두 탑이 이렇게 맞은편에 동서로 서 있게 된 것에도 이유가 있다. 석가모니의 40년 설법을 집약한 경전 법화경에 나오는 내용인 ‘견보탑품’에 근거해 건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석가여래가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다보여래가 찬탄해 보탑의 형상으로 땅에서 솟아났고, 둘이 탑내에 나란히 앉았다는 내용이다.
사실 완벽히 이해하기엔 조금 어려운 내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다. 한국의 전통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는 다보탑의 모습과, 절제되어 있고 세련된 모습의 석가탑이 양쪽에서 대비되며 조화를 이룬다. 그 자태가 불국사를 한층 웅장하고 돋보이게 만든다.

위에서 바라본 불국사  
  원래 통일신라 시절의 불국사는 건물만 80종에 2,000여 칸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불국사의 8배 규모에 해당하는 초거대 사찰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방화로 크게 불타 사라졌었고, 불교를 천시하던 조선시대 말기엔 사실상 폐허로 남아있었다. 그렇다 보니 안타깝게도 석조물과 사리함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소실되었다.
그러니 지금의 불국사는 창건 당시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여러 차례 중건 시도는 있었으나, 현재 모습을 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광복 후 대규모 복원 이후이다. 그래도 다행히 석축과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이라 하니, 더는 파괴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천년정신의 길 경주 석굴암
토함산에 둘러쌓인 마을의 모습

  불국사가 위치한 토함산에는 같은 시기에 지어진 통일신라의 건축물이 하나 더 있다. 대한민국 국보이자 불교예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석굴암이다. 석굴암은 불국사에서 이어진 길로 걸어갈 수도 있지만, 차를 타고 산을 올라 입구까지 갈 수도 있다.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
석굴암 올라가는 길
  산세가 웅장하고 경치가 수령한 토함산은 예로부터 신라인들이 나라를 지켜준다고 믿으며 신성시했던 산이다. 석굴암으로 향하는 소나무림을 걸으며, 이제 신라의 마지막 이야기를 해보자.

  통일신라 시작의 발판을 두었던 태종무열왕부터 100년 후 혜공왕까지, 왕위는 계속해서 무열왕 계열의 자손들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혜공왕이 반란으로 시해당하며, 이제 왕위는 무열왕의 직계가 아니어도 오를 수 있게 된다.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며, 나라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이다.
 
  결국, 신라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란이 터졌다. 국왕이 피살당하는 대혼란의 시기가 주기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지금의 공주시 일대인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크게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중앙 정부가 지방 세력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왕실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지방에서 세금을 내지 않으니, 왕실의 국고가 텅텅 비어 버렸고, 백성에게 세금을 독촉하다 보니 농민 반란까지 일어나게 된다. 물론 통일신라를 지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나라에서 장원 급제까지 하고 돌아온 유학파 학자 최치원은 신라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려 사회 개혁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지방 호족들이 우후죽순 궐기하며, 신라는 조각조각 찢어져 버렸다. 여러 세력이 각기 한 지방씩 차지하고 위세를 부리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궁예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였다. 한반도는 다시 세 개의 큰 세력으로 대치하게 되니, 국경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뀌었던 후삼국시대이다.

  그러나 혼란의 시대였던 만큼, 최후의 승자는 알다시피 궁예도, 견훤도, 신라의 왕도 아니었다. 궁예가 호형호제할 정도로 아꼈던 장수 왕건이다. 공포 정치를 일삼는 궁예 대신 왕으로 추대된 그는 마침내 삼국을 통일시키며 한반도의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문을 활짝 열게 된다.

석굴암 입구 건물
석굴암 앞

  1천년간 56명의 군주를 거치며 한국사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 존속한 나라 신라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긴 역사인 만큼 그만큼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고 찬란한 문화를 자랑했던 나라이다. 과거 신라의 경제적 풍요로움과 문화적 번성함은 멀리 서역까지 알려져 아랍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이상향으로 인식되기도 했다고 한다. 서역의 한 학자는 신라를 이렇게 기록하기도 했다.

“중국의 동쪽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서역 사람이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

석굴암 구조도와 설명
석굴암 단청

  아마 이러한 신라 아름다움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 토함산의 석굴암이지 않을까 싶다. 신라 불교 예술이 정점에 달했을 때 만들어진 석굴암의 정교함은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그 엄숙함이 압도한다.

  중심에는 본존불이 앉아 있고, 주변은 십대제자와 초자연적 존재들이 둘러싸고 있다. 일 년에 딱 한 번, 부처님 오신 날에는 내부를 개방해 일반인도 본존불 주변을 돌며 참배할 수 있다고 한다. 완벽한 균형미와 공간미를 담아낸 공간이다 보니 욕심이 나기도 한다. 나는 그저 안쪽의 입구에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지만, 신비로운 위엄과 부드러운 생명력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다만 사진이 금지된 구역이라 대신 그림을 그려 대신한다. 신라 천 년 문화의 정수가 이 안에 담겨있다.

그림으로 그린 석굴함 석굴

에필로그

  이번 ‘천년 정신의 길’에서는 신라의 시작인 사로국에서부터 최후 멸망까지 차례로 둘러보았다. 방대한 역사만큼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 많아 평소보다 글이 길어지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못다 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 아쉽기도 하다.
  그림자 없는 탑이라 해서 무영탑이라 불리는 석가탑에 담긴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던 시기에 순교했던 이차돈의 이야기. 지금의 완도 일대의 해상 기지였던 청해진을,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 집단으로 만든 해상왕 장보고의 이야기.

  물론 세상에 이만큼 흥미로운 이야기가 없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이보다 사람을 긴장시키고 흥분시키는 소설과 영화가 수두룩하다. 이들은 영상과 소리로 표현되기도 하니, 훨씬 더 박진감 넘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유산에 담긴 이야기에는 인간의 상상만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몰입감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실제로 나와 같은 땅을 밟고 있던 조상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느낄 때, 그 옛날부터 믿어오던 전설이 아득한 시간을 거쳐 내게 닿았다고 느낄 때,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내가 살아가는 이 땅과 이어진 정신에 큰 자극을 준다고나 할까. 요컨대, 영화를 보는데 구석진 곳에 계속 이런 자막이 달린 거다. ‘이 이야기는 과거 실제의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약 1천 년간 존속했던 신라가 멸망하고, 다시 1천 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후 천 년은 알다시피 고려 왕조와 조선 왕조가 각각 500여 년씩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 지금 우리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주게 된 것은 유교의 한 학파인 성리학의 도입이었지 않을까 싶다.

  고려의 학자 안향이 중국에서 가져온 성리학은 이후 조선시대에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며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 때문에 이번 ‘천년 정신의 길’에서 경주 다음으로 선정된 곳이 조선 시대 성리학의 본고장 안동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내용도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이는 당시의 성리학 교육기관인 서원을 다룬, 다음 ‘서원의 길’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해산물에 물이나 육수를 부어 먹는 물회는 주로 해안 지방에서 먹는 음식이다. 물회에는 여러 형태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흔히 알려진 것은 강원 영동지방의 속초식 물회이다. 고추장 양념에 해산물과 각종 채소를 넣고, 얼음을 띄운 냉수나 육수에 후루룩 말아 먹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에선 이와는 다른 독특한 물회를 만나볼 수 있다. 고추장 양념에 갖은 채소를 올리는 것까진 속초식 물회와 같으나, 여기에 해산물 대신 잘게 썬 육회를 올린다. 이른바 ‘한우 물회’다.
사실 경주에서 이 ‘한우 물회’가 유명해진 것은 오래전의 일은 아니다. 경주에는 원래 한우 농가가 많기 때문에 고깃집이 많았는데, ‘한우 물회’는 이 고깃집들을 중심으로 2010년대 이후에 나타났다.
그런데 2020년대에 들어서는 SNS를 통해 우후죽순 퍼져나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경주 어디에서나 파는 음식이 됐다. 심지어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한우 물회’를 담아 파는 가게들도 생겼다. 대릉원 일원이나 첨성대를 걷다 보면, 종종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이 ‘한우 물회’를 들고 다니는 관광객들을 볼 수 있다.
맛은 생각하는 그대로이다. 질 좋은 한우로 만든 육회에 칼칼하고 감칠맛 넘치는 얼음 육수가 뒤섞인 맛. 맛있는 거 더하기 맛있는 거. 비록 새로운 맛은 아니어도, 한우를 구워 먹기에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겐 이만큼 반가운 음식이 없다. 경주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인 황리단길에는 ‘한우 물회’를 먹고 있는 20대 젊은 청년들이 가득하다.



  춘천 ‘감자빵’, 해남 ‘고구마빵’, 통영 ‘꿀빵’, 울진 ‘대게빵’, 완도 ‘전복빵’ 등등. 그야말로 지역 명물 빵 춘추전국시대다. 간단히 디저트로 먹기도 좋고, 예쁜 포장이 되어있어 선물로 사 가기도 좋으니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에 이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수제 전통 빵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빵이 있으니, 무려 8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경주의 황남빵이다.

  내가 황남빵을 처음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멀리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났을 때. 천마총과 첨성대, 불국사와 석굴암을 그때 처음 봤다.
당시 경주에서 식사로 무엇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선명히 기억한다. 여행이 끝나고 다시 먼 서울로 되돌아갈 시간. 나와 친구들은 모두 황남빵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눈앞에서 수제로 하나하나 만드는 빵을 기다리느라 꽤 오랜 시간 서 있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손놀림으로, 붉은 팥소와 반죽을 척척 잘라 만들어 내는 게 신기해 보였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사 가지는 않았다. 엄마가 준 용돈이 남은 만큼 제각각 부모님께 드릴 황남빵을 사 갔다. 낱개로 종이봉투에 담아 가는 친구도 있었고, 기세등등하게 30개들이 박스를 사 가는 친구도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싼 가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황남빵 맛이 달지 않고 담백하다 보니 그렇게 아이들이 좋아할 맛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냥 그런 게 멋있어 보였다.

  하여간 이번에 나이 스무 살 더 먹고 오랜만에 황남빵을 먹었다. 갓 구워낸 빵에서 김이 솔솔 올라오는데, 이렇게나 맛있는 빵이었나 싶었다. 빵 맛은 변함이 없는 것 같은데, 입맛이 변한 게다. 전통을 담고 있는 음식엔 늘 이렇게 세월의 맛이 있다. 무척이나 포근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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