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불완전의 미학
학술적 호칭으로는 백자대호(白磁大壺)라 하지만 통상적으로 불리는 명칭은 둥그런 달을 닮았다고 해서 달항아리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달항아리는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비슷한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도자기다. 하얗고 동그랗고 살짝 이지러진 그 독특한 조형 안에 순박하고도 넉넉한 우리의 선조들의 품성이 잘 녹아 있다. 처음에는 젓갈이며 장을 담아둔 그릇이었다가 점차 사대부의 감상 대상이 되었듯 달항아리는 서민부터 양반까지, 일상부터 예술까지 아우르며 우리 문화를 그 큰 가슴에 품어내고 있다. 양반집 사랑방의 문갑 위에, 여염집 부엌의 찬장 위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 달항아리. 아무런 장식 없는 새하얀 살결과 동글동글한 생김새 하며 주둥이가 크고 굽이 작아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는 것까지 달항아리는 보름달을 참 많이도 닮았다. 그래서 누군가는 달항아리를 바라보며 푸근함과 넉넉함을 느꼈고, 또 누군가는 선비의 이상을 읽어냈다.
한국 현대미술가인 수화 김환기는 달항아리를 가리켜 ‘불가사의한 미’라 했는데, 그 오묘한 아름다움의 중심에 한국 특유의 ‘불완전의 미학’이 있기 때문이다. 새하얀 둥근 달처럼 원형을 지향하였지만 완전한 원형이 될 수 없었던 달항아리. 살짝 찌그러져 있는 그 모습은 어딘지 불완전해 보이지만, 또 이런 모자람 덕분에 자연스럽고 여유로워 보일 수 있었다. 달항아리가 이런 모양을 갖게 된 것은 백자를 빚는 흙, 즉 고령토(高嶺土)라는 흙의 물성 때문이다. 큰 데다가 달처럼 둥그런 달항아리를 기존 항아리 빚는 방식대로 한 번에 빚어 올리게 되면 점력이 약한 고령토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린다. 영리한 조선의 도공들은 대접 모양으로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건조시킨 뒤 이 둘을 붙여 크고 둥그런 항아리를 완성해냈다. 때문에 어느 달항아리를 보아도 중앙에 위아래를 이어 붙인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인지라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두께가 조금씩 차이 나게 마련이고 이 차이 때문에 불에 굽는 과정에서 한쪽이 살짝 주저앉는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 민족의 너그러운 심성과 해학의 진가가 드러난다. 옛사람들은 살짝 찌그러진 달항아리를 불량품 취급하며 깨뜨려버리는 대신 ‘저 정도면 됐지’ 하는 관용의 심성으로 그 모습 그대로를 즐겼다. 아니, 어쩌면 그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 더 흡족하고 멋지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불과 흙, 그 자연의 힘에 의한 찌그러짐을 용납하는 것, 완벽하게 동그란 것보다는 이게 더 보기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심성이었다. 나는 이것을 불완전의 미학이라 부른다. 이 불완전의 미학은 90%의 아름다움에 10%의 감상자의 관용이 더해져 비로소 완벽한 미학을 탄생시킨다. 자연의 물성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가능했기에 계산과 계획을 통해 얻는 미적 쾌감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었을 것이다.
조형미의 극치 달항아리
조선시대 정치 이념으로 꽃을 피웠던 유교 문화도 달항아리를 널리 사용하게 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달은 비움의 가치를 보여주는 존재로서 선비들에게 신성시되었는데, 찼다 하면 금세 이지러지기 시작하고 줄어들었다가 어느새 차오르는 달의 모습이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이다. 비움을 통해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비움, 무욕(無慾), 넉넉함, 포용력, 어진 마음과 같은 아름다운 가치들을 상기하며 선비들은 달항아리를 바라보고 만지고 품었다. 달항아리에 매료된 것은 옛 선비들만은 아니었다. 한국 현대추상의 대표 작가이신 수화 김환기 선생은 동경 유학 시절부터 40여 년 동안 달항아리를 모았으며 사랑하셨다. 남기신 글 중에 한 대목을 보자면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고요하기만 한 우리 항아리엔 움직임이 있고 속력이 있다. 싸늘한 사기지만 그 살결에는 따사로운 온도가 있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과장이 아니라 나의 미(美)에 대한 개안(開眼)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됐다”라고 했다. <항아리를 든 여인>, <매화와 달과 백자> 등 달항아리 연작들을 그려냈던 그는 ‘평생 달항아리에 빠져 사는 게 아닌가’ 스스로도 생각할 정도로 달항아리를 탐닉했다. 한편으로는 수십 점에 달하는 달항아리를 모은 컬렉터이기도 했는데, 어찌나 푹 빠져 있었던지 교수 월급을 몽땅 털어 인사동에서 달항아리를 사는가 하면 한밤중에 달빛 아래 백자를 놓고 감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부산 피난살이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보니 그렇게 아꼈던 달항아리들이 온통 깨져 있었다. 이 모습을 본 김환기는 차라리 통쾌한 심정이었다. 김환기는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며 다시는 항아리를 사 모으지 않았다. 어려운 살림에 항아리를 모았고 내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난으로 모두 잃었지만, 그걸 후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현대 작가 사이에도 달항아리 사랑은 여전하다. 광화문 이전 공사 때 공사장 가림막에 달항아리 작품을 걸었던 강익중, 사진 속에 달항아리를 담고 있는 구본창 등 달항아리를 주제로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줄을 잇는다. 무엇이 그들을 달항아리로 이끌었을까? 지금은 대영박물관 한국관에 자리 잡고 있는 18세기 달항아리의 원소유자였던 도예가 버나드 리치의 이야기 속에 해답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는 1935년 한국에 들어와 달항아리를 구입해 가면서 그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 지름 40센티미터 정도로 품에 쏙 들어오는 달항아리를 안으면, 왠지 편안하고 행복해지는 느낌이 밀려온다. 버나드 리치가 느꼈던 기분이 이런 것일까? 꼭 안아보지 않더라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감정이 전해진다. 김환기가 “싸늘한 도기지만 그 살결에 따사로운 온도가 있다”고 말했던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응석, 원망, 바람…. 무엇이든 받아주고 품어줄 것 같은 달을 빼닮은 달항아리. 그 인간적인 매력에, 어수룩하면서도 순박한 매무새에, 순정 어린 흰 빛깔에, 세속의 욕심을 비워낸 듯한 무심함에, 때로는 우물가의 아낙네들이 때로는 사랑방의 선비가 떠오르는 그 오묘한 매력에 누군들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
글˚최웅철 (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