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인조는 맏아들인 소현세자를 훌륭한 국왕으로 키우려고 일찍부터 훌륭한 학자들을 스승으로 임명하여 그를 교육시켰다. 소현세자는 부친이 국왕이 된 직후에 원자(元子)의 자격으로 강학청 교육을 받았고, 14세에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시강원 교육을 받았다. 소현세자의 본격적인 왕세자 교육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소현세자의 시강원 교육은 세 가지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세자로 책봉되면서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로 왕세자 교육이 가장 정상적으로 이뤄진 시기이다. 소현세자는 유학 경전인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통감절요(通鑑節要)』나 『십구사략(十九史略)』 같은 중국의 역사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같은 성리학 서적을 배웠고, 보름마다 있는 회강(會講) 시험에서 그동안 학습한 내용들을 점검받았다. 두 번째는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고 소현세자가 인질이 되어 심양에 거주했던 시기이다. 이때 소현세자는 심양까지 동행한 시강원의 관리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전쟁 이전에 공부하던 『상서(尙書)』를 계속 배우고 『정관정요(貞觀政要)』와 『근사록(近思錄)』을 익히기도 했다. 그러나 명과 청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640년 이후로 세자의 강의 횟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세 번째는 청이 북경을 장악하고 세자가 고국으로 돌아온 이후의 시기이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얻은 병을 앓았고 인조와의 정치적 갈등까지 겹쳐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정상적으로 교육받던 1625년 5월 16일의 일이다. 세자의 학습을 점검하기 위한 회강이 열렸고, 시강원 소속의 스승들과 사헌부, 사간원의 관리가 참석했다. 세자가 먼저 『통감절요(通鑑節要)』의 본문을 배송(背誦), 즉 책을 보지 않고 외웠다. 전국시대 진나라 장수인 백기(白起, B.C. ?~B.C. 257)가 장평 땅에서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포로 40만 명을 땅에 파묻어 죽인 사건이 나오는 대목이었다. 세자의 암송이 끝나자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질문했다. 백기의 행적에 대한 평가를 묻자, 세자는 백기가 병사 40만 명을 땅에 묻어 죽인 것은 살생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 때문에 백기는 제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진나라 왕이 자신을 원망한 백기를 죽인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세자는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왕을 원망하다가 죽임을 당한 백기나 자신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백기를 죽였던 진나라 왕은 모두 잘못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14세였던 세자의 식견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현세자는 학습한 내용을 외울 때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 세자는 새로 배울 내용은 30번 정도를 읽고 이미 배운 것은 다시 20번을 읽어 총 50번을 읽었다. 그러나 세자의 스승들은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좌빈객(左賓客)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반드시 100번을 읽어야 문장의 뜻을 통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국왕은 정사를 다스리느라 바쁘지만 세자는 한창의 나이에 문안 이외에는 별로 할 일도 없으므로 오직 학문에 힘써야 한다고 권유했다. 김상용은 세자가 구두(句讀)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100번을 읽으면 구두에 능숙해지고 의리에도 저절로 통할 것이라고 했다. 우부빈객(右副賓客)이었던 장유(張維,1587∼1638)도 비슷한 견해를 가졌다. 그는 익숙하게 읽고, 자세히 음미하며, 반복하여 푹 젖는 데까지 이르러야 의리에 깊이 통할 것이라며 구두에 익숙하지 않으면서 분명하게 알고 이해할 사람은 없다고 했다.
장유는 인조가 세자에게 바라는 것이 학문의 진보이므로, 세자에게 책 읽는 횟수를 두 배로 늘려 100번을 읽으라고 요구했다. 세자는 그 자리에서 ‘예’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주로 이동했다. 분조란 ‘조정을 둘로 나누었다’는 뜻으로, 세자가 별도의 정부를 구성하여 전쟁을 수행하다가 전쟁이 끝나면 해체되는 임시기구였다. 전주에 도착한 세자는 현지에서 군량미를 거두고, 의병을 모집했으며, 무사를 선발하여 전장으로 올려 보냈다. 그러면서 세자는 자신을 수행한 시강원의 스승으로부터 『통감절요』를 배웠다. 전쟁을 치르는 중에도 학업은 계속되었지만 강의 분량은 평소의 절반인 200자 내외로 줄였다. 전주에서 세자를 가르친 스승에는 김육(金堉)이나 조경(趙絅)같은 유명한 학자가 있었다. 반정으로 국왕이 된 인조는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같은 시련을 겪었고, 소현세자는 인조를 측근에서 보좌하면서 시련을 함께 겪었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생활하는 동안 청 황제와 가까워졌으며, 인조는 이런 세자가 자신의 왕권까지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얼마 후 사망함으로써 오랫동안 준비해 온 학문적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글˚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