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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2014.02 그때를 어찌잊으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02-06 조회수 : 2696
그때를 어찌잊으랴


우리 국민 모두가 결코 잊지말아야할 통한의 침탈역사.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영국, 미국,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보장받은 일제가 그 여세를 몰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한 때가 1905년(고종 42) 11월이다. 을사조약을 강제체결 할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강압적으로 압박하여 조약에 찬성할 것을 강요하였으며,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한국의 대신들을 종용하였으나 대신들이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자,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을 동원하여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 하였다. 강압에 의한 국권 침탈로 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야만 했던 때가 지금 1세기가 넘는 세월이지났다. 일본은 국토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이기에 항상 안전한 지대를 기반으로 하는 대륙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살며, 지리학적으로 불안한 태평양판의 영향권에 밀접해 세계에서 가장 빈도가 높은 지진다발지역에 위치했기에 항상 천재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불안심리가 대륙을 동경하게 되고 급기야는 대륙으로 진출하게 되는 주요 접목지대인 우리나라에게 중국을 칠 길을 내어달라는 터무니없는 핑계로 조선을 침략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일찍이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 강산을 넘보았고, 1876년에는 군함 운양호(일본군함)를 앞세워 강압적으로 병자수호조약을 수호한 후 일제의 마수는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개항이 되자 일본상선의 자유로운 드나듦으로 여러 가지 폐해가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1894년 동학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조선땅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친일 김홍집내각을 세워 일본 세력 하에 갑오경장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조선에 회의적이었으나 이면에는 적대시했다.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자하는 명성황후 주변을 감시하고 회유하였지만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1895년(을미)에 미우라 공사는 일본암흑세력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고종은 위협을 느껴 김홍집내각을 배척하고 수구세력으로 개각을 단행하였으며, 이 와중에 핍박을 거듭하는 일제의 검은손을 피해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1894년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 1905년 러일전쟁까지 승리하며 사할린을 차지하게 되었고, 당시 아시아 최대의 군사강국이 되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를 선두로 내세워 조선 백성의 뜻인 양 왜곡하여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외교권을 비롯한 주권의 대부분을 강탈했다. 이에 고종황제는 일본의 야비한 침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1907년 6월에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무력침략의 과정과 행위를 낱낱이 적어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 폭로하고자 특사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파견했다. 후일 이토 히로부미는 이것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기어이 하야시켰다. 7월 24일에는 ‘한일신협정’, 일명 ‘정미7조약’을 강요하였고 이어서 31일에 우리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8월 2일 광무연호를 융희로 고친 후, 8월 7일에 순종의 아우 영친왕(영왕, 은)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무자비한 만행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만주 하얼빈역에서 민족의 적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으나, 그 다음해 일본은 강제로 한일합방을 추진해 우리의 주권은 완전히 말살되었다.


일제의 침략과 우리민족 말살정치

말살의 첫째 대상은 왕권말살이었다. 먼저 명성황후를 시해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왕조 역대 황후들 중 정치적 감각과 능력이 탁월했던 황후는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존재였기에 명성황후 시해를 실천에 옮겼다. 이때 명성황후의 춘추 45세였다. 참으로 절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하겠다. 일제는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키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영친왕



다음 대상은 고종과 명성황후에서 태어난 황태자(후일 순종) 전하이다. 황태자에게는 알게 모르게 아편을 복용하게 하여 생식능력을 떨어뜨리는 만행조차 서슴지 않았다하니 불운한 조선의 마지막 황제이시다. 또 다음은 영친왕의 납치사건이다. 영친왕은 고종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세자였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폐위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세자를 일본의 인질로 내주었으니, 고종황제의 당시 심정이 어찌했을지는 상상이 갈 정도이다. 어린 영친왕은 일본에 건너가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성년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일본과 조선은 동족이라는 허울 아래 일본여성과 정략결혼을 시켰으니 그가 바로 일본 황족 나시모토(利木宮)의 장녀 이방자(마사코)여사이다. 원래 이방자여사는 요시히토(천황)와 성혼설이 있었으나 음밀한 내사 끝에 그가 생산에 문제가 있다하여 내쳐졌었다. 그 후 간악한 무리들의 압제에 의해 영친왕과 혼인하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조선의 황맥을 끊어놓으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사이에는 무리 없이 자녀가 태어났고 이방자여사를 잘못 진단한 일본 의사는 모두 처결되었다는 설이 있다.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1921년 8월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국을 8개월 된 어린 세손을 품에 안고 귀국했으나, 세손은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해 버렸다. 이 세손의 이름은 진(晉)이며 그의 묘는 조모 귀임 엄씨가 잠든 동대문구 청량리 홍릉에 있으며 ‘숭인원’이라 한다. 이방자여사는 세자를 잃고 한없는 슬픔 속에 일본에 돌아간 후 둘째 황손 이구(玖)를 낳았다. 그 후 1963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방자여사는 야비한 일본황실의 실태를 만방에 알리기도 하고,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고아와 불우이웃을 돌보는 일에 진력을 다해 완벽한 조선의 마지막 왕비로 그 책무를 다 하다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돌아가셨다. 그의 묘소는 시아버지 고종황제의 홍릉 옆에 영친왕과 함께 영면하고 있다. 이에 우리 민족은 더욱더 강건한 체제로 성장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글 이은식(한국인물사연구원 원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