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찬란했던 문화와 침략의 수난이 끊이지 않았던 얼룩진 519년 조선의 국운도 석양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장충단은 1895년(고종 32) 경복궁에서 일어난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인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일본인을 물리치다가 장렬하게 순사한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궁내부(宮內府) 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한 여러 장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00년(광무 4) 9월 고종황제가 남소영(南小營)자리에 세운 사당이다. 그러나 야수와 같은 왜인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그때 1910년(순종 4) 일제강점 이후 폐사되었다. 1920년(일본연호 대정 9)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이라 이름 지어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했으며, 상해사변(上海事變) 때 일본군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 삼용사의 동상과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의해 살해된 이토 히로부미의 혼을 달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세웠다. 광복 후 육탄 삼용사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장충단의 사당과 부속 건물이 파괴되면서 장충단비만 외로이 남게 되었다.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로 1900년 11월에 세워졌다. 앞면에 새긴 장충단(獎忠壇)이란 전서는 순종의 예필(睿筆)이며 뒷면의 비문은 육군부장 민영환(閔泳煥)이 짓고 썼다. 1910년 이후 일제가 뽑아버렸던 비신을 광복 후 찾아 영빈관(현 신라호텔) 안에 세웠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 서쪽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유형문화재 제18호다.
비문 내용은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이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갑오(甲午)을미(乙未)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 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키는 진실이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성대하다”라고 적혀 있다.
을미사변은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변이다.
사변의 책임자는 일본군이었으나 협조와 방조자는 조선군 우범선(禹範善)이다. 우범선은 농학자 우장춘(禹長春)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881년(고종 18) 별기군의 참영관이 되면서 개화정책에 동조 가담하였다. 1894년 8월 장위영령관(壯衛營領官)으로서 군국기무처 의원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 때는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일본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 명성황후 시해를 방조하였다. 이로 인하여 체포령이 내려져 일시 피신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아관파천으로 정국이 일변하여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으로 망명했다. 동경에 거주하며 일본 여성 사카이(酒井)와 결혼. 재기를 꿈꾸던 중 1903년 12월 한국에서 보낸 자객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하였다.
나는 조선인이다. 아버지의 죄과를 알고만 있을 수 없었다.
우장춘의 일생은 일제강점기의 육종학자. 아버지는 한말의 혁명정객인 범선이며 어머니는 일본인으로 1898년 일본에서 출생했다. 극심한 빈곤과 주위의 학대 속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히로시마에서 마치고, 동경제국대학 실과에 들어가 졸업한 후, 일본 농
민성에 취직하여 활동하던 중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한국인이라는 것과 정규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다가 한국행 결심을 하게 되니 일본정부에서 최고의 예우를 하겠다며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 제시를 뿌리치고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으로 역임하면서 수많은 육종학에 전념하였다. 1959년 8월 11일 생을 마감한 우장춘 박사의 애국정신과 농업기술혁명에 기여한 공로는 한 장의 문화포장으로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
황후께서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에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민씨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하여 국정이 농단된 순조, 헌종, 철종을 포함한 60여 년간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없는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를 읽을 만큼 총명했으며 수완이 능란한 왕비는 수 년 후 황실정치에 관여하여 흥선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일생을 두고 구부 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살을 깎는 집안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한 결과로 각자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명성황후의 추모비 앞에서
아아, 세계만방 역사 속에 어찌 이 같은 통분한 일이 있으랴. 우리 겨레는 천만년이 지나도 이 면면한 한을 잊을 수 없다. 이곳 녹산(鹿山) (창덕궁 내)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의 배위되시는 명성황후께서 불공대천의 원수 왜적의 손에 처참하게도 순국하신 곳이다. 1894년 갑오경장과 1895년 을미 10월 8일 새벽에 왜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궁성을 포위하고 곤녕합(坤寧閤)으로 침입하여 황후를 시해한 후 이불에 옥체를 싼 다음 석유로 불을 질러 시신마저 없이하여 흔적조차 없게 했다. 아 하늘도 무심하다. 인류 역사상 어찌 이런 만행이 있으랴. 항상 동양평화를 가장하는 왜들은 전쟁도 아닌 터에 타국의 궁중으로 쳐들어와서 국모를 시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날을 생각하면서 이곳 녹산에 오르니 주먹으로 가슴을 쳐 울분하면서 어서 우리의 힘으로 세계 제일 부국강병의 나라를 이룩해야겠다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황후께서는 지나치도록 총명, 영리하신 여걸이셨다. 황후가 되신 후 춘추좌전을 공부하여 정치와 역사를 연구하셨다.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쇄국정치에서 문호개방이 되니 동북아시아의 요새지대인 우리 국토는 마치 이리 떼가 침을 흘리는 고깃덩이와 같았다. 이 중에도 중국, 러시아, 일본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는 각축전을 벌였다. 영특한 황후께서는 탁월한 외교수단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을 써서 용이하게 일본에 이권을 주지 않았다. 일본은 앙앙불락해서 마침내 우리 국모를 시살한 후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해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다섯 해 후에는 경술합방을 선포하여 마침내 망국의 비운을 당하게 되었다. 황후께서 야수들에게 시해되시지 않았던들 나라행색은 크게 달라졌으리라. 국모께서 흉변을 당하신 지 1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 민족의 심장은 더욱 뜨거워져왔고 또한 그 사실을 잊어서도, 잊어서는 아니 될 수치의 역사이며 꼭 갚아주어야 할 것이라 다짐해본다.
장충단공원을 찾던 그날
국민의 사랑을 받던 가수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 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공원.
이 가사의 대상은 연인과 친구가 아니라 민족의 얼을 모신 장충단 비문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최치수 선생의 노랫말은 그 무게를 더하고 있다.
글˚이은식 (한국인물사연구원 원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