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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 기획특집 민속명절 정월 대보름 vs 서양의 데이문화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02-06 조회수 : 4351
기획특집 민속명절 정월 대보름 vs 서양의 데이문화


올해 2월 14일은 좀 특별한 날이다. 음력으로는 1월 15일, 새해의 첫 보름달이 떠오르는 정월 대보름이다. 이 날은 또 ‘밸런타인데이’이기도 하다. 여성이 좋아하는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전하는 서구 풍습이다. 한국 전통명절인 정월 대보름, 서양 풍습인 밸런타인데이, 두 날이 묘하게도 겹쳐진 것이다. 정월 대보름은 한식, 설, 단오, 한가위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주요 민속명절이다. 정월 대보름에 벌어지는 세시풍속은 전체 세시풍속 가운데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다양하고 풍성하다. 그만큼 의미가 깊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엔 정월 대보름은 잘 모르고, 밸런타인데이를 즐긴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 2월 14일은 한국 사회에서 민족 대대로 이어져온 전통 민속명절과 어느 틈에 새 풍속으로 자리 잡은 서구 명절의 위상과 현주소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날이다. 급속한 산업화, 서구화에 따른 우리 전통문화의 속살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잊혀지는 세시풍속, 확산되는 ‘데이 문화’.
전통 세시풍속은 급속히 쇠락하고 있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당초 농경문화, 음력에 바탕을 둔 한국인들은 1년 내내 24절기에 따라 풍성한 세시풍속을 누리고, 한껏 즐겼다. 전국 곳곳의 지역마다 그 특성에 따라 놀이, 음식문화도 다채로웠다. 작고한 민속학자 임동권 선생이 세시풍속을 집대성한 책 《한국세시풍속》을 보면 1년 중 세시풍속 행사는 무려 192개에 이른다. 먼저 음력으로 새해 첫날인 1월 1일 설에는 설빔을 차려 입고, 정성스레 차린 차례상 앞에서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함께 모여 차례를 올렸다. 가족 간, 이웃 간 덕담을 주고받고, 갖가지 놀이도 했다. 정월 대보름 아침에는 부럼을 깨물며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한 해 동안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랐고,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먹으며 건강도 챙겼다. 이름도 재미난 귀밝이술에는 일 년 내내 좋은 소식만을 듣고, 귀도 밝아진다는 소박하고 정겨운 믿음이 담겨 있다. 또 달집 태우기를 하고, 더위를 팔아치우는 익살스러운 일도 벌였다. 고싸움, 지신밟기, 볏가리대 세우기 등으로 마을 주민 모두가 하나가 돼 마을의 안녕과 풍요로움을 기원하며 서로가 공동체임을 확인했다. 설이 개인적 성격이 강하다면, 정월 대보름은 공동체적 성격이 짙은 셈이다.

입춘을 지난 삼짇날(3월 3일)에는 화전놀이를 했고, 한식(4월 초)에 이어 5월 5일은 단오다. 단오에 더위를 쫓으라고 부채를 선물로 주고받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름답고도 운치있는 미풍양속이다. 세시풍속은 유두와 백중, 한가위 등을 지나 한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까지 계속된다. 대대로 이어진 세시풍속에는 우리 문화의 여러 뿌리가 살아 있고, 선조들의 삶의 지혜가 녹아있으며, 많은 이야깃거리가 들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임동권 선생이 확인한 192개의 세시풍속 중 지금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명절과 달리 밸런타인데이처럼 갖가지 이름을 단 ‘데이 문화’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정체성이 모호하지만 이런 ‘-데이’는 마치 전통 세시풍속처럼 달마다 1~2개씩 있다. 대표적인 것만 보더라도 3월에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화이트데이, 4월에는 남녀가 검은 옷을 입고 자장면을 먹는 블랙데이, 11월엔 특정 과자를 주고받는 ‘ㅇㅇㅇ데이’ 등이 있다. 세태 변화에 따라 ‘데이 문화’도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만큼 새 풍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받아들일 부분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술에 휘둘려 상업적인 것들, 엉뚱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밸런타인데이만해도 일본의 초콜릿 제조·유통 기업이 서구의 밸런타인데이를 차용, 초콜릿 판매를 늘리기 위해 마케팅 차원에서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날이 누군가에는 상처가 되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문화사대주의적양상이 심한 경우도 있다. 성직자들이 귀신 모습으로 악귀를 쫓아내는 켈트족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 미국을 통해 이 땅에 들어와 자리잡은 핼러윈데이도 그 중 하나다. 그래서 관련 세미나 등을 열어 데이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뜻있는 시민단체, 지식인들의 행동은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전통 세시풍속이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모두가 짐작할 만하다. 농경문화, 마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사회가 근대화란 이름아래 극도로 산업화·서구화되면서다. 양력을 쓰고, 밥보다는 빵, 한복보다는 양복, 한옥보다는 아파트처럼 일상 속의 의·식·주가 통째로 변하면서 생활양식이 바뀐 것이다. 더욱이 한국의 산업화·서구화는 지구상 어떤 나라보다 빠르고, 압축적으로 진행됐다. 아예 정부가 나서 전통적인 여러 풍습을 야만적이고, 미신이라고 비판하며배척정책을 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일이다. 경제적 측면에선 ‘한강의 기적’이란 평가도 얻었지만, 문화적으로 보면 잃은 것이 더 많은 기적이다.


부럼나누기. 달집 태우기


현대적 계승, 재창조가 시급한 때.
전통 문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많은 사람들, 지식인들은 오래 전부터 세시명절과 그 풍속의 쇠락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한편으론 세시풍속의 쇠퇴가 마치 데이 문화 때문인 양 데이 문화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물론 데이 문화의 개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전통 세시명절과 그 풍속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다. 전통이니까, 민족문화니까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맹목적 복원이 아니다. 다양한 놀이문화, 음식문화, 의미 깊은 사회적 기능 등이 녹아있는 세시풍속에서 지금 이 시대에 유효한 여러 지혜를 찾아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세시풍속이 그저 옛날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응용되고, 계승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실제 세시풍속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서구화·산업화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정월 대보름은 주로 마을 단위, 요즘으로 보면 지역 단위의 명절이다. 고싸움 등은 놀이이기도 하지만 지역민들 모두가 서로 기대고 의지하는 공동체성을 확인하는 문화다. 공동체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런 풍속은 개인화된 현대사회가 낳는 각종 문제를 극복하고 지역 공동체를 살리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아파트 부녀회나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조기축구회같은 많은 모임 차원에서 지역적으로 응용, 활용하면 이웃 간 나누고 배려하는 공동체 문화의 장점을 충분히 챙길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세시풍속은 영화나 소설, 뮤지컬, 애니메이션 등 문화콘텐츠의 주요 자산도 될 수 있다. 또 여름·겨울방학 때에 맞춰지는 세시풍속은 도시 가족들의 농촌체험 프로그램과 연계해 참가자들에게 더 풍성하고 즐거운 경험을 안길 수 있다. 정월 대보름을 맞아 달맞이 명소를 홍보하는 전국의 지자체들은 달맞이 참여자들을 달집 태우기같은 체험 프로그램과 결부시켜 상승효과를 내는 방안의 모색도 가능하다.

실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의 상당수도 그 나라, 지역의 세시풍속을 바탕으로 한 것이 많다. 브라질의 리우카니발이 그렇고, 새해를 맞아 서로에게 물을 뿌려 행운을 부르고 액을 쫓는 데서 유래한 태국 송크란 축제도 마찬가지다. 몽골의 나담 축제,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노르웨이 바이킹 축제, 하와이의 알로하 축제 등도 전통문화를 뿌리로 현대적 계승과 재창조가 이뤄진 것들이다. 전통적 세시풍속이 의미 있는 문화행사로 활성화되고, 확고하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정부와 지자체들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여기에 전통문화·축제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콘텐츠 발굴, 현대적 재창조 노력이 합쳐져야 한다. 이젠 세태를 탓하며 전통 세시풍속의 쇠락을 안타까워 할 때가 아니라, 현대적 계승과 발전을 위해 행동에 나설 때다. 이번 정월 대보름이 우리 사회 각 주체 모두가 이를 깨닫고, 움직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사진제공 : 문화재청, 국립민속박물관]


고싸움놀이


-글 도재기(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