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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 고종 홍릉은 조선 장인의 혼이 깃든 대한제국의 황제릉이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03-03 조회수 : 4934
고종 홍릉은 조선 장인의 혼이 깃든 대한제국의 황제릉이다

3.1절이 되면 고종황제가 생각난다. 1919년 그날, 고종황제를 영원한 안식처인 홍릉(洪陵)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에 온 백성이 만세를 불렀기 때문이다. 경기도 금곡 홍릉은 어릴적 봄·가을 소풍지여서 친숙하다. 2009년 11월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중 26대 고종 홍릉과 27대 순종 유릉은 조선왕릉과 형식이 전혀 달라 일제 식민지양식으로 알려져 왔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아니다. 홍릉은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인데, 그동안 우리가 애써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홍릉은 언제 어디에 만들었는지, 명성황후의 죽음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자.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은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시신조차 불에 타 온전치 못한 민왕비의 죽음은 사후 2개월간 비밀에 부쳐졌고, 이듬해 국장(國葬)을 치르고자 동구릉에 숙릉(淑陵)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왕비를 잃은 슬픔에 밥조차 먹지 못하던 고종은 그해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하며 왕릉 공사는 모두 중지되었다. 『명성황후홍릉산릉도감의궤』에 의하면 1897년 1월 3일 고종은 청량리를 새 능지(陵地)로 정하고, 2월 25일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이 때부터 청량리 홍릉을 다시 조영했고, 화원 김신학(金信學)을 비롯하여 석수 125명, 야장 16명, 니장 55명, 개와장 20명, 석각수 3명, 마석장 16명 등 총 236명이 동원되어 4월 22일 왕릉 공사를 모두 마쳤다. 그러나 국장은 미뤄졌다.

1897년 10월 11일,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로 즉위하고, 민왕후를 명성황후로 추봉하였다. 10월 28일 사후 2년이 지나서야 명성황후는 비로소 청량리 홍릉에 안치될 수 있었다. 물론 이때 이미 고종황제는 홍릉을 황제릉을 만들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다음으로 미뤘다. 그러나 황제릉을 만들 기회는 곧 왔다. 1898년 1월부터 청량리 홍릉의 비석과 혼유석 등에 문제가 생겨 중수하였고, 『홍릉석의중수도감의궤』에서 고종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1900년 당시 문제가 없던 문무석인이나 양호마석 등을 화원 김성구(金聖九)와 김영준(金榮浚)을 포함하여 18종 총478명의 장인이 동원되어 새로 만든 것이다. 석수의 우두머리인 석수변수 홍봉석(洪奉石) 등 5명과 서울·개성의 석수 이육복·신명석·김성준·임상길·신명석·김사득·양봉득·김보협·김광석 등 200여 명을 차출하였다. 석조물의 세부 묘사는 조각장(彫刻匠) 백천석(白千石) 등 5명이 담당했고, 마석장(磨石匠) 윤창식 등 20명은 조각상의 표면을 매끈하게 갈았다.

1 - 금곡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 1901년 10월 2일 완공. 침전의 형식은 일(一)자형이고, 내부는 궁궐의 정전처럼 당가(唐家)를 조성하였다. 현 금곡 홍릉의 당가는 1897년 청량리 홍릉의 것을1919년 2월 9일에 뜯어 옮겨 배치한 것이다.  2 - 고종태황제산릉주감의궤 중 침전 도설

이제, 금곡 홍릉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살펴보자. 고종은 1897년 중국 공사로 베이징에 있던 박제순에게 영선사의 주사 1명을 특사를 파견하여 중국 명 황제릉을 조사하고 모사해 오게 했다. 이 모사본을 본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릉을 명 황제릉처럼 조성하려면 한두 해에 역사를 끝내기 어려울 것이라며 우리나라의 규례대로 규모를 축소하기로 하였다. 청량리 대신 금곡을 능지로 선정하고, 북경에 있는 명13릉의 조산(朝山)을 천수산(天壽山)으로 부르듯, 금곡 뒤 묘적산(妙績山)을 천수산(天秀山)으로 개칭하고 황제릉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금곡 홍릉은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이 생전에 자신의 수릉(壽陵)으로 만들고 명성황후의 청량리 홍릉을 옮기려 했다. 비록 황제릉이지만 그 제작체계는 여전히 조선왕릉과 마찬가지여서, 국장도감·빈전혼전도감·산릉도감을 설치하고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하였다. 세 도감의 총책임자는 궁내부 특진관 심순택이 총호사로서 총괄했으며, 산릉도감의 제조는 민영준 등 3인이었다. 산릉도감은 다른 도감보다 규모가 커서 10곳의 하부 제작처를 두어 물품을 전담했다. 삼물소는 능침, 조성소는 건축물, 대부석소는 석조물, 소부석소는 각종 석재, 수석소는 석재 운반, 노야소는 철물, 보토소는 봉분, 별공작은 가구, 번와소는 기와, 분장흥고는 돗자리 등을 제작했다.

대한제국 황제릉으로 조영된 금곡 홍릉은 여러면에서 조선왕릉과 다르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조각상의 종류와 배치이다. 조선왕릉에는 문무석인상과 양호마석상을 능침 위에 삼층단으로 배치했다. 반면 금곡 홍릉에는 문무석인상의 종류는 그대로이나, 동물상은 기존의 양호마 3종에서 기린·코끼리·해태·사자·낙타 등 5종 1쌍씩 총10기를 추가하고, 능침 아래쪽 침전에서 홍살문 사이에 배치하였다. 이것은 중국 명 황제릉의 종류와 배치를 따르되 규모는 줄인 것이다.

곧 명 황제릉에는 사자·해태·낙타·코끼리·기린·말 등 6종 2쌍씩 총24기가 능침 아래 영은전(寧恩殿)에 분포하며, 각 2쌍 중 1쌍은 입상이고 다른 1쌍은 와상이다. 금곡 홍릉보다 명 황제릉의 석수 개수가 2배 이상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금곡 홍릉의 석조물은 1900년 8월에 모두 완성되었다. 다음 조선왕릉의 제향용 침전(寢殿)은 정(丁)자형인데 비해, 금곡 홍릉은 일(一)자형을 세웠다. 건축용 석재는 강화도에서 채취하거나 경운궁의 것을 옮겨 1901년 10월 2일 완공되었다. 이렇게 1901년 말 명성황후를 청량리에서 금곡으로 천릉하기 위한 능묘조성은 완비되었으나,1903년까지 10여 차례 길일을 택일하다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게다가 1903년 11월 24대 헌종계비 효정왕후, 1904년 9월 27대 순명황태자비 가 서거하여 연거푸 국장을 치르면서 또다시 미뤄졌다. 결국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하고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채 덕수궁에 거주하던 고종이 생을 마감한 1919년에야 비로소 금곡 홍릉은 완결 되었다.

금곡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사후 안식처이고, 대한제국의 유일한 황제릉이다. 한말 격동기에 열강에 맞서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드러내려 애썼던 고종황제의 고민이 느껴진다. 또 조선왕릉의 전통 위에 명 황제릉의 형식을 절충하려 고심한 조선 장인의 피와 땀 그리고 장인정신이 배어있다. 같은 금곡 능역 내에 있는 순종 유릉이 1926년 그의 사후 1년간 일본인 조각가에 의해 식민지양식으로 조각상이 제작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3월이 가기 전에 금곡 홍릉에 가서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려보길 권한다.

금곡 홍릉 석수상, 1990년 8월 3일 경 완성. 석인상(1899), 석수상(1900)은 제작 완료되었으나 명성황후의 천릉이 미뤄져 前別營의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1919년 3월 19일 고종의 안장 후 비로소 홍릉 침전 앞에 세웠다.

1.금곡 홍릉 침전, 1901년 10월 2일 완공, 2. 금곡 홍릉 석인 석수 조각상, 1899-1900년 8월 경 완공, 3. 베이징 명13릉 영락제 장릉 앞 석수상

- 글˚장경희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문화재청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