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2014.07 굿 이야기 강릉단오굿의 신명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07-04 조회수 : 3720

굿 이야기 강릉단오굿의 신명

강릉단오제 성주굿

굿이란 말은 언제부터 부정적인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특히 무당굿이라고 하면 상당수가 고개를 저으면서 지금 시대가 언제인데 그런 것을 하느냐, 나는 전혀 모르는 분야라면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듯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 무당은 적어도 30만 명이 넘는다. 느슨하게 잡아도 인구 2백 명에 하나꼴로 무당이라는 말이다. 이는 국민 대다수가 모르거나 무시할 수도 없는 엄청난 수치이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실제 사람들은 굿을 모른다. 굿은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 의례인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무지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교육에서 무속문화에 대한 교육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30만 명이라는 숫자가 말해주듯 상당히 무속적이다. 결국, 사람들은 무속에 대해 객관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부정적인 사회인식에 의존하여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무속문화 자체를 창피하게 여기는 기형적 사고를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굿은 무엇일까? 굿은 무당이라는 사제가 인간을 위해 각기 기능이 다른 여러 신을 차례로 모셔 춤과 노래, 신화구연, 연극과 기예 등으로 신을 기쁘게 하면서 소원을 빌고 축원하는 의례이다. 우리나라에는 집안으로 내려오는 세습무와 신들린 강신무가 있다. 그런데 굿을 누가 하든 무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굿판에 신을 강림시켜 인간과의 만남을 성취하는 일이다. 신들린 무당은 스스로 신격화하여 공수를 내리기도 하고 세습무는 대를 내려 신의 응답을 듣는 방법을 취한다. 즉, 무당은 인간의 소원을 신에게 고하고 신의 대답을 전하며 축원하는 중개자인 것이다. 이러한 무당굿의 역사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차돈의 순교 배후에는 무속신앙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지금과 같은 무당이나 굿의 존재는 12세기 이규보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유학자였던 이규보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에서 옆집에 살던 늙은 무녀의 굿을 묘사했는데, 천정에 머리가 닿도록 도무하면서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공수 주는 모습이 요즘 강신무 굿과 놀랄 만큼 일치한다.
무속은 이미 삼국시대 소수림왕이 중국으로부터 불교, 유교, 도교를 수입하여 통치이념으로 삼은 이래 지배계층에게 외면당했다. 그러나 무당이 천민으로 떨어진 조선조에도 무속은 민중의 신앙으로 살아남았다. 일제강점기, 남북 분단이 고착된 전쟁, 새마을운동을 겪으면서 줄곧 미신이라고 폄하하던 무당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와서의 일이다. 세습무들이 급격히 줄어들어 전승중단의 위기에 처했고, 강신무굿의 전승내용도 약화되고 있다는 인식과 굿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화현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덕분이다. 제주도 칠머리당굿을 비롯하여 전라도 씻김굿, 경기도당굿, 서울새남굿, 황해도 대동굿 및 배연신굿, 그리고 동해안별신굿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무당굿 가운데 가장 먼저 문화재가 된 굿은 바로 강릉단오굿이다. 1967년 강릉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는데 당시 지정분야에 제례, 탈놀이와 함께 무당굿이 들어있는 것이다.
고려 초에 시작되어 천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강릉단오제는 강릉을 비롯한 영동지역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서 해마다 벌이는 축제이 다. 2005년 11월 25일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 재되었다. 4월 보름 대관령 산정에 있는 국사성황사에서 신을 모셔와 단 오를 중심으로 일주일 이상 강릉 시내를 관통하는 남대천변에 굿마당을 마련하고 각종 의례와 놀이를 벌이는데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모여든다. 엄숙한 유교식 제례와 무당굿, 토속적인 탈놀이의 지정문화재 행사와 그 네, 씨름, 농악 등 세시민속놀이가 풍부하고 주변에 거대한 난장이 서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무당굿은 제례축문에도 전도무격(前導巫 覡)이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가장 핵심이 되는 의례이다.
 

소지올리기



강릉단오굿의 상징은 대관령에서 모셔온 신목이다. 오색 예단이 걸린 단풍나무 신목 아래 굿당을 베풀고 무녀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않고 굿을 한다. 굿판은 할머니들의 잔치이다. 집에서 두둑이 용돈을 받아 굿당에 온 할머니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신목 아래 꿇어앉아 소지를 올리는 것이다. 소지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하얀 종이이다. 응당 신이 다 알아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백지 한 장을 태우는 것이다. 살짝 촛불에 닿은 소지는 파르르 날아 신목까지 올라가 신에게 소원을 전해준다. 그리고는 편안히 앉아 굿구경을 한다. 무당굿은 고유의 기능을 가진 여러 신을 차례로 모시는 의례이다. 먼저 고을을 편안하게 해줄 서낭님을 모시고 모든 집안에 있는 조상을 위하여 조상굿을 한다. 자식들에게 복을 주는 세존굿, 집안의 안녕과 대주를 보호하는 성주굿, 역대 장수를 모시면서 군에 간 자손도 보호해주는 군웅장수굿, 어부들의 눈을 맑게 해주고 집집마다 효녀 낳으라고 심청굿도 한다. 아픈 사람이 없기를 바라면서 홍역이나 천연두를 예방하는 손님굿도 하고 사이사이 굿청 에 모인 분들을 위해 축원굿도 한다. 스무 명 가까운 무녀와 악사들이 굿을 해나가는데 나이든 무녀의 굿은 구수하고 정감이 있고, 젊은 무녀의 굿은 카랑카랑하면서 귀엽다. 무녀가 춤을 출 때는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무악이 신명을 불러일으킨다. 굿이 끝나면 여흥으로 민요도 부 르고 유행가도 부른다. 할머니들이 하나 둘 굿청에 나와 춤추는 시간도 이 무렵이 다. 이렇게 무당과 할머니들이 하나가 되 고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면서 단오굿은 절정에 이른다. 굿의 마지막은 신에게 속 한 것을 모두 태워 신의 세계로 다시 돌 려보내는 송신이다.
 

단풍나무 신목아래 꽃노래굿을 하는 무녀들


단오제가 끝나면 대개 비가 내린다. 신 은 돌아갔지만, 이 비를 맞으면서 논의 모는 쑥쑥 자라고 신의 약속으로 든든해 진 인간은 지상에 남아 다시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고단함을 신과 인간이 하나 되는 신명의 놀이로 풀어주는 굿의 힘이다.  

- 글˚황루시 (관동대학교 미디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