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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창업 편에서는 태조와 그 4대조의 행적을 소개했다. 태조가 조선을 건설한 것은 조상 대대로 덕(德)과 인(仁)을 쌓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태조의 고조부인 목조(穆祖)는 전주에서 살다가 수령과 틈이 벌어져 삼척으로 이동하였다. 목조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동할 때 그를 따라간 백성은 170여 집이나 되었다. 얼마 후 목조가 덕원의 용주리로 옮길 때에도 이들은 모두 따라갔다. 목조가 경흥의 알동에서 원의 관리가 되자 동북 사람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조선의 왕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가 알동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나가자 다른 관리들이 그를 없앨 것을 모의하였다. 익조는 노파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적병을 피해 적도로 들어갈 때에는 바닷길이 저절로 열려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알동 사람들이 익조를 따라 적도로 들어갔다.
태조의 조부인 도조가 경흥에 있을 때의 일이다. 꿈에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두 번이나 나타나 자신은 남지의 용인데 흑룡이 자기 집을 빼앗으려 하니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잠에서 깬 도조가 남지로 나가 보니 흑룡과 백룡이 싸우고 있었고, 도조가 화살로 흑룡을 맞추자 강으로 달아났다. 다음날 도조의 꿈에 백룡이 다시 나타나 감사 인사를 하면서 후세에 큰 경사가 있을 것이라 했다.
태조의 부친인 환조는 고려 관리가 되었고, 공민왕 때 원이 점거한 쌍성을 격파한 공으로 개성에 있는 집을 하사받았다. 얼마 후 환조는 삭방 도병마사가 되어 북방 경계를 방어하자 그곳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명령을 따랐다. 이를 보면 태조의 선조들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새 국가를 건설하는 기반이 되었다.
태조는 키가 크고 풍채도 늠름했다. 혜징이란 승려가 그의 관상을 보고 장차 왕씨를 대신하여 나라를 일으킬 것이라 예언했다. 태조의 꿈에 하늘에서 신인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면서 그대는 문무를 겸비했으니 금척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라고 말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할 조짐이었다.
고려 말기에 태조는 외적의 침략을 여러 번 물리쳤다. 공민왕 때 홍건적 20만 명이 개경을 함락시키자 왕은 복주(안동)로 달아났다. 태조는 동북면 만호의 자격으로 2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물리쳐 개경을 수복하였다. 원의 승상 나하추가 홍원 지역을 침략하자 태조는 동북면 병마사로 출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우왕 때에는 왜적들이 전라, 경상, 충청 지역을 유린했고, 태조는 삼도 도순찰사로 출전하여 이지란과 함께 적장 아지발도를 쏘아 죽였다. 태조가 개성으로 개선할 때 최영이 그를 맞이하며 ‘삼한(三韓)을 다시 세웠다’고 칭찬했고, 이색은 태조의 승리를 축하하는 시를 지었다.
태조는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실권을 잡고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우왕 때 최영은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고, 태조는 명나라에 죄를 짓고 백성에게 화가 미치는 일이라며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렸다. 이 무렵 민간에서는 태조가 서경(평양)과 안주를 왕래할 때 백성들을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동요가 돌았고, 군대에서는 목자(木子)인 이(李)씨가 나라를 얻을 것이라는 노래가 불려졌다.

태조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정도전은 궁전 건물과 대문의 이름을 정했다. 한양은 고려 숙종 때 김위제의 말을 따라 남경을 건설하고 가끔 행차했던 곳으로 이때에 수도로 확정되었다. 경복궁이란 이름은 『시경』의 ‘군자는 만년토록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君子萬年 介爾景福)’는 구절에서 따왔고, 강녕전은 홍범구주의 오복(五福)에 해당하는 강녕(康寧)에서 따왔다. 또한 사정전은 천하의 이치를 생각하라[思]는 뜻이고, 근정전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해야[勤]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뜻이었다.

『갱장록』의 창업 편을 읽어 보면 목조에서 태조까지 고난이 많았지만 꾸준히 덕을 쌓은 끝에 민심을 얻고 천명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태조는 고려 왕실을 위해 지성을 다했고, 신흥 강대국인 명과의 외교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살림살이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은 외부로부터의 환란을 방어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견감시키며, 과거제와 예제를 정비하여 상하 관계를 안정시켰기 때문이었다. 정조가 창업 편에서 강조한 것은 민심을 잃으면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는 메시지였다.
- 글 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