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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은 원래 갑신정변 이전까지 조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이름을 따 ‘죽첨장’이라 불렸다. 일제시대 때 금광을 개발해 ‘조선의 황금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한 최창학의 소유였다. 이 건물은 1936년 약 5,236㎡(1,584평)의 대지에 연건평 약 873㎡(264평) 규모로 지은 양옥으로, 1936년 착공, 1938년에 준공되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해방은 죽첨장에 새로운 운명을 부여하였다. 친일부역으로 이름이 높았던 최창학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 건물을 오랜 방랑 끝에 귀국한 임시정부 측에 내놓으면서 백범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환하기 전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국내에서는 ‘임시정부 환국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요인들의 숙소를 물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무렵 최창학은 해방이 되자 자신의 친일행위를 뉘우친다고 하면서 이곳을 김구 선생의 거처로 환국 준비위원회에 내놓은 것이다.
경교장에 여장을 푼 백범 김구는 먼저 건물 이름을 왜색이 짙은 죽첨장에서 경교장으로 바꾸었다. 경교장 2층은 동서로 긴 복도가 한가운데 있고 그 복도 양 옆에 방이 있는 구조였다. 남향인 방의 첫 방이 백범의 거실이었고, 왼쪽 맨 끝 방이 응접실이었다. 그 사이에 있는 일본식 다다미 방들은 수행원들이 사용하였다. 아래층에는 식당이 있었다. 요인들과 내방객들은 모두 이곳에서 식사를 하였다. 아래층의 응접실은 1945년 12월 3일 김구와 김규식 등 임시정부 국무위원 15명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무회의를 개최한 이래로, 임시정부의 주요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처음에 숙소로 제공된 경교장에서 임시정부 사무를 주로 보게 된 것은 미군정이 독자적인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법통성 차원에서 원래 ‘덕수궁’을 사무소로 사용하려고 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허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경교장은 이후 임시정부요인들의 사무소로 적극 활용되었다

경교장이 한국사회에서 큰 이목을 끌게 된 것은 해방 직후 펼쳤던 ‘반탁 건국운동’과 ‘통일운동’ 때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알려지자 1945년 12월 29일 오후 2시 경교장에서 김구 이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비롯 각 정당과 단체 대표가 모여 신탁 절대 반대운동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신탁반대운동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각계각층을 망라한 임원과 조직을 결성함으로써 경교장은 반탁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어 경교장이 다시 한 번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백범이 남북협상 차 평양을 다녀오기로 결심한 때였다. 남북이 분단될 가능성이 커지자 백범은 “통일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에 통일을 위해서는 그것이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이라고 해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며 평양행을 결심하였다. 1948년 4월 15일 저녁 경교장 뜰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한국독립당 당원이 백범의 통일이념을 지지하며 남북협상 시도를 뒷받침한 것에 반해, 다음날부터는 백범의 남북협상을 위한 평양행을 저지하려는 청년학생들로 경교장 뜰이 가득 메워졌다. 결국 백범은 성패 여부를 떠나 뜨거운 충정으로 평양행 결심을 굽히지 않았고, 평양을 다녀오게 되었다. 경교장이 통일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다.
현대사 격동의 역사 현장
1949년 6월 26일 정오 무렵, 평소 백범이 독서와 붓글씨 쓰기로 보내던 2층 거실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안두희가 발사한 총탄에 한평생 조국광복과 통일조국을 갈망하던 백범 김구가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백범의 죽음 이후 경교장은 한국사회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경교장은 단순한 건물 덩어리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사 그 자체이다. 이곳은 백범이 머무르던 사저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회의가 열렸던 장소이며, 백범이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협상을 준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경교장은 우리 현대사의 뿌리에 해당한다. 남북관계의 화해와 국민통합에 대한 역사의 요구가 강해질수록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기에 그 의미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글 김권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