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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지난 9월 3일 저녁 6시 30분, 성북동에 위치한 한국가구박물관에서는 작지만 의미 있는 전시가 시작되고 있었다. 전시가 열리는 한국가구박물관은 전통 목가구를 수집하고 전시하는 특수전문박물관이다. 박물관이기는 하지만 이곳은, 가장 한국적인 정취를 담고 있는 공간이기도 해서 국가적인 행사나 참가자를 제한하는 행사에 종종 활용되고 있다.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와 2015년 중국 시진핑 주석 방문 시에 오찬 장소로 사용되었고, GUCCI와 같은 세계적인 명품사가 자사의 특별 전시를 개최하는 장소로 사용했으며, CNN은 이 박물관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가구박물관은 웬만해서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도도한 장소다.
그 비밀스러운 정원에서 시작되려는 전시는 260년 역사의 시계 제조사가 새로운 라인업을 국내에 소개하는 자리였다.
세계 최고의 명품 시계 제조사답게 백화점이 아닌 가구박물관을 전시장소로 선택한 문화적 안목은 탁월했지만, 그날 밤 설렘과 낯선 입자들이 밤공기에 녹아 장소가 주는 특별함을 능가하는 묘한 긴장감을 주고 있었다.

그 어색함을 만들어 내는 곳은 행사장에 자리한 VIP석이었다. 한 명의 서양 남성과 세 명의 동양 남성, 그들의 수수한 옷차림으로 미루어 고가의 시계를 구입할 주요 고객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전시를 취재하기 위해 초청된 기자로 보기에는 연령대가 높아 보였다.
VIP석에 자리한 서양 남성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건너온 세계 최고의 명품 시계 제조사 바쉐론 콘스탄틴의 아티스틱 디렉터 크리스찬 셀모니였고, 세 명의 동양 남성은 속칭 인간문화재라 부르는 공예분야의 기능보유자로 소목장 박명배, 두석장 박문열, 옻칠장 손대현 명인이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조선시대 보록(寶錄)하나가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보록(寶錄)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존호(尊號)를 새긴 금보나 옥보를 보관하는 궤를 말한다. 어보(御寶)는 조선시대에 국왕이나 왕실을 상징하는 도장으로, 좁은 의미로는 외교문서나 행정실무에 쓰였던 국새(國璽)와 의례용으로 쓰였던 어보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 사용할 경우, 국왕이나 왕비 또는 세자나 세자빈 등 국왕과 관련된 이들의 의례에 쓰인 도장을 말한다. 그러니까 보록은, 왕실 의례인 가례(嘉禮), 책봉(冊封), 국장(國葬) 시에 존호(尊號), 휘호(徽號), 시호(諡號) 등을 새긴 어보를 만들고 이 어보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보관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 자리는, 175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나 260년의 세월을 견디며,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바쉐론 콘스탄틴의 새로운 작품들과, 조선왕조 500년 왕실문화의 정수이자 왕실 자체를 상징하는 어보(御寶)를 보관하는 보록(寶錄)이, 동서양의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만나는 문화적 충돌의 무대인 것이다.
지난해 5월 바쉐론 콘스탄틴 한국 지사인 바쉐론 콘스탄틴 코리아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에서 모든 일은 시작되었다. 2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 무언가 특별한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을 추진하고 싶어 했으며, 그동안 각국의 전통공예와 협업 경험이 풍부한 바쉐론 콘스탄틴으로서는 한국문화재재단을 최상의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었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원하는 작품은 일회성 이벤트의 결과물이나 단순한 시계 케이스가 아니었다. 바쉐론 콘스탄틴 브랜드 역사에 영원히 남을 작품을 원했고, 그 작품을 한국의 전통공예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와의 협업을 통해서 완성하고 싶어 했다.
문제는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최고의 명품 시계를 담을 함의 철학적 개념을 정하는 일이었다. 재론의 여지 없이 전통적 사유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공간을 담을 수 있어야 하고, 문화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사회·정치적으로나 비교가 불가능한 상징을 내포한 무엇이어야만 했다. 또한 시각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도도한 질감과 한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배색 조화, 그리고 완벽한 입체감과 비율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도저한 토론과 고민 끝에 조선시대 어보(御寶)를 보관하는 보록(寶錄)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보록은 유일성, 권위, 자부심, 충성심, 고결함, 강인함 등의 형체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그 정도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뒤처지지 않을, 한 시대 정신문화의 총체적 결정체로서 자랑할 만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이후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보록(寶錄)을 조사하고 기본 디자인과 설계를 진행하였으며, 백골 제작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기능보유자 박명배 명인이, 장석 제작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기능보유자 박문열 명인이, 그리고 옻칠에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제1호 칠장 기능보유자 손대현 명인이 동참을 결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좋은 목가구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좋은 목재가 있어야 한다. 최소한 300년에서 500년은 족히 지나야 목재로서 가치가 있으며, 수령이 적합한 목재를 찾았다고 해도 나무를 켜보지 않으면 장담할 수 없다. 아름다운 목가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 본연의 아름다운 무늬가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나무를 구했다고 해도 원목 상태로 2년, 나무껍질을 켜서 실외에서 3년, 다시 실내에서 2년을 숙성시켜야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숙성시켜야만, 가구로 제작했을 때 뒤틀림이나 갈라지는 현상을 방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7년의 숙성은 고사하고 자재로 사용할 나무도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프로젝트의 기간은1년 남짓에 불과했다.
좋은 목수는 좋은 자재를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로 결정되곤 한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나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명배 명인은 최고의 목수였다.
본인이 힘겹게 수집해 놓은 자재 중에서 애지중지하는 최고의 자재를 내놓았다. 바로 500년된 고사목을 7년 이상 숙성시킨 느티나무였다. 흔히 시골에 가면 마을 어귀에 장승처럼 서서 수호목 구실을 하는 당산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 당산나무의 대부분이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는 무늬가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은데, 황갈색 목재 위에 물결처럼 어룽진 나이테의 곡선이 무척이나 우아하다. 이는 물을 운반하는 물관의 배열이 독특하기 때문인데 오래된 나무일수록 비늘, 구슬, 모란꽃등 다양한 무늬가 나타나고 광택도 아름답다. 거기에 견고함까지 갖추고 있는데, 마찰과 충격은 물론 습기와 충해에도 강해 좀처럼 썩거나 벌레 먹지 않는 나무이다. 박명배 명인은 이 느티나무의 천연의 무늬를 살리고, 전통 제작 기법인 짜임기법과 직접 만든 아교를 사용해서 백골(白骨)을 제작했다.
목가구 제작에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두석장의 역할이다. 가구의 결합 부분을 보강하거나 이음새를 연결하고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 등의 금속 장식을 장석(裝錫)이라고 하는데,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황동(놋쇠) 장석을 만드는 사람을 두석장이라고 한다. 두석은 단순히 기능적인 역할에 제한되지 않고 자체로 탁월한 예술작품으로써의 완결미를 보여주며 다양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박문열 명인은 함에 사용되는 장석에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전통문양을 정을 망치로 쳐서 문양을 새기는 조이질 기법으로 제작하였다. 이 기법은 장석 제작기법의 일반적인 표현기법으로 입체감까지 표현할 수 있어 사군자, 연꽃, 십장생, 박쥐, 구름 등을 새길 때 많이 사용되는 기법이기도 하다.
마지막 과정으로 손대현 명인은 옻나무의 수액을 직접 채취하여 정제과정을 거쳐 불순물을 제거하여 입자가 고운 칠을 만들었다. 백골의 표면을 다듬은 후 생칠을 바르고 갈고 바르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고, 다시 초칠에 중칠을 하여 건조한 다음 다시 상칠을 한 후 광내기와 생칠을 반복하여 마감한다. 이러한 과정을 30회 이상 실시하여 투명하고 얇게 옻칠을 완성했다.
2014년 5월에 시작한 협업이 2015년 8월에 긴 여정을 마쳤다. 1년 5개월의 시간 동안 그렸다가 지워버린 숱한 디자인 안과 설계도면, 보유자들과 함께 고민하며 때로 서로를 힘들게 했던 수백 시간의 기억들, 많은 시간을 자신의 공방에서 어보함과 고통스럽게 대면했을 예술가들의 침묵의 시간이 지났다. 바쉐론 콘스탄틴이라는 브랜드의 무거움과 그간의 세계적인 협업 기관과의 실적은 감내하기 어려운 압박이었다.
그리고 한국가구박물관에서 협업 작품이 공개되는 순간, 그 간의 시간은 박수와 환호로 치환되었다. 세계 최고의 시계 장인들과 세계 최고의 공예 장인들은, 문화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단 한 번의 교류도 없이 자신만의 영역을 천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결과물들은 함께 놓여 지는 순간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3인의 기능보유자가 제작한 조선시대 어보함 보록은 이제 스위스에서 조선 왕실의 기품을 오롯이 전달할 것이다. 1년 5개월의 시간 동안, 그들은 하나의 작품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형체를 만든 것이다.
이 문화적 행위는 수 세기를 건너뛰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상징으로 기능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