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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한국의 사자탈춤
우리나라에 사자탈춤이 전래한 시기는 불확실하지만,우륵이 작곡한 가야금 음악 12곡에 사자기師子伎가 들어 있으므로 552년진흥왕 13 이전으로 소급된다. 신라에서 사자탈춤은 이보다 300여 년 경과한 후 최치원857~?이 지은 <향악잡영鄕樂雜詠>5수에 나타난다. 오기五伎는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 등인데 그중 산예가 사자탈춤이다. ‘멀고먼 고비사막 만 리 길 건너와遠涉流砂萬里來 / 떨어진 털가죽에 먼지만 뒤덮여毛衣破盡着塵埃 / 고개와 꼬리 흔들어 어진 덕 보이니搖頭掉尾馴仁德 / 백수의 재주일망정 이 기상을 따르리雄氣寧同百獸才’와 같다. 고개와 꼬리를 흔드는 춤사위가 묘사되어 있고, 원래는 백수의 왕 맹수이지만 불교에 조복調伏되어 부처의 자비심을 실천하는 호법신임을 알려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화성낙성연도華城落城宴圖에 사호무獅虎舞가 나타난다. 사자가 커다란 혀를 내밀어 먹이를 먹으려 하고, 호랑이는 앉아서 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몰이꾼 두 명은 채찍을 들고 서 있고, 다른 몰이꾼 한 사람은 놀이판으로 들어오려는 구경꾼을 만류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1894년에 윤용구尹用求가 편찬한 <국연정재창사國讌呈才唱詞>에 의하면 <각정재무도홀기各呈才舞圖笏記>(1893년)에 기록되어 있는 사자무는 1887년 성천成川 지방의 잡극을 궁중 정재에 수용한 것이다. 반주음악인 영산회상곡을 ‘만방녕지곡萬方寧之曲’, 곧 ‘만방을 태평하게 하는 음악’이라 한 걸보면, 사자탈춤을 왕권 강화의 춤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무용 사자춤은 612년 백제의 미마지가 일본에 전해준 기악을 1233년에 기록한 <교훈초敎訓抄>를 통해서 확인된다. 화성낙성연에서 연행되었던 사호무에서 사자 몰이꾼은 체괄이이고 호랑이 몰이꾼은 오랑캐인 것으로 보아, 사자는 왕권의 수호자이
고 호랑이는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상징한 궁중무용이었다.
민속무용 사자탈춤은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과 하회별신굿탈놀이, 수영야류, 통영오광대, 그리고 북청사자놀이에서 전승되었다. 북청사자놀이는 사자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악귀를 잡아먹어 벽사진경辟邪進慶을 꾀하였다. 봉산탈춤은 목중이 노장을 파계하게 만든 죄를 응징하려는 사자와 화해하고 춤판을 벌인다. 은율탈춤에서는 사자춤이 탈판을 정화하는 기능을 한다. 강령탈춤에는 사자 두 마리가 등장하는데 원숭이춤이 결합되어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도 주지춤을 추고 주지 싸움을 하여 탈판을 정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수영야류에서는 산신인 사자가 범을 잡아먹는다. 통영오광대는 수영야류의 사자춤마당에 포수가 첨가된 형태이다. 그러나 통영의 사자는 민간신앙과 무관하고, 오로지 포식자로서의 맹수일 뿐이다. 민속무용의 사자는 벽사동물로 의식되거나 산신신앙과 결합되기도 하였지만, 원래의 동물로 환원되기에 이르렀다. 사자탈춤의 공연 방식은 행렬놀이 형태와 판놀음 형태로 나누어진다. 북청사자놀이는 대표적인 길놀이 형태의 사자탈춤이고, 다른 지역 사자탈춤은 판놀음 형태로 탈판의 악귀를 물리치고 정화하는 구실을 한다.

중국의 사자탈춤
서역의 쿠차庫車에서 대승불교를 배경으로 불법佛法과 왕권 수호를 상징하는 오방사자무가 성립되었는데, 이것을 전진前秦의 여광呂光이 385년에 구자국龜玆國을 복속시키고 양주凉州로 가져온 것을 계기로 중국에 전래되었다. 쿠차의 사자는 남북조와 수나라 시대에 조성된 키질석굴의 사자 그림과 투루판吐魯番의 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된 7~8세기의 사자탈춤 토용土俑을 통해서 복원되었다.
단안절段安節의 <악부잡록樂府雜錄>(890년경)에 의하면 오방색 가죽을 걸치고 태평악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 오방사자마다 12명의 사자랑獅子郞이 따라붙어 조종하였다. 두우杜佑, 735~812의 <통전通典>에 의하면 두 사람이 고삐줄을 잡고, 다섯 사자는 제각기 방위에 따라 옷을 입었으며, 140명이 태평악을 부르며 그에 맞춰 춤을 추었다. 또한 오방사자무의 황색 사자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므로 청색·백색·적색·흑색 사자들이 사방에 서서 춤을 출 동안 태평악을 불러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통전>에 따르면 여광이 쿠차악을 ‘진한기秦漢伎’로 변화시킨 것을 북위의 태무제423~452가 하서河西를 평정하고 얻어서 ‘서량악西凉樂 ’이라 불렀으며, 이것이 수대까지 중시되다가 당대에 와서 ‘서량기西凉伎’가 되었다. 당대의 서량기는 위대와 수대에 비하면 크게 변화된 모습이었는데,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서량기에는 당대에 개편된 연극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최초로 사자무를 연행한 연희자들이 쿠차인들이었다.
호법신 사자가 오방에서 불법과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추는 오방사자무는 호국불교와 대승불교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불교무용이면서 동시에 궁중무용인데, 이러한 불교적·정치적 기능이 약화되고 민간신앙이나 벽사진경 사상과 결합하여 사자탈춤은 악귀나 역신을 퇴치하는 나희儺戱가 되거나 동물을 모방하는 민속무용으로 변하였다. 민속무용 사자탈춤은 다양하게 분화되었는데, 문무의 대립체계에 맞추어 문사文獅는 사자의 온순한 풍모와 활발한 동작을 보이고, 무사武獅는 사자의 용맹한 성격을 보인다. 지역적 차이도 있어 북파 사자탈춤은 용맹하고 활달하며, 남파 사자탈춤은 경쾌하고 기교적이다.
일본의 사자탈춤
일본의 사자탈춤은 대륙에서 형성된 불교무용 기악에서 그 연원을 찾는다. 기악의 전래에 대해서는 흠명천황欽明天皇, 540~572 때 오나라에서 귀화한 지총智聰이 전했다는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과 612년 백제에서 귀화한 미마지가 전했다는<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기악의 사자탈춤은 <법륭사가람연기급유기자재장法隆寺伽藍緣起及流記資財帳>(747)에 기록되어 있는 기악 도구 11점 속에 사자가면 2점과 오방색 사자의상 및 사자아獅子兒 가면 4점과 의상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존재가 확인된다. 그런데 <광륭사자재교체실록장廣隆寺資財交替實錄帳>(858)에는 사자 가면 1점과 사자아 가면 점이 기록되어 있다. 쌍사자와 독사자가 모두 확인되는 것이다.1233년에 기록된 <교훈초>에 의하면, 기악은 석가탄신일4.8이나
기악법회7.15에서 먼저 행렬놀이를 하고 판놀음을 하였는데, 행렬의 선두에 사자가 섰고, 판놀음도 사자탈춤이 첫째 마당이었다. 두 사람이 만든 오방색 사자가 사자아獅子兒라는 미소년에 이끌려 등장해 춤을 추는데, 입을 세 번 크게 벌려 불법을 위협하는 악마를 잡아먹는 시늉을 하고, 세 번 높이 뛰어 천신天神에게고하고, 세 번 낮게 뛰어 지신地神에게 고하였다.
일본의 고대 사자탈춤을 그린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를보면, 사자의 목에 방울이 매달려 있고, 고삐줄과 채찍을 든 몰이꾼이 앞에서 끌고 가고 사자아이 2명이 몰이꾼을 따라가는 모습이어서, 민속학자 송석하가 1930년대에 촬영한 북청사자놀이와 완전히 일치한다. 하여튼 기악이나 부가쿠에 등장한 사자는 한 사람은 앞에서 사자의 머리를 들고 놀리고 다른 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사자의 몸통과 뒷다리를 연기하는 2인 사자무였는데,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대부터 관동 지방에서 한 사람이 사자의 탈과 몸통을 머리에 걸쳐 쓰고 가슴에 갈고羯鼓를 매달고 연주하면서 춤을 추는, 이른바 풍류사자무風流獅子舞가 출현하였다.
뿔이 두 개 달린 수사자 두 마리가 뿔이 없는 암사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삼각관계의 갈등 구조를 보이는데, 막부의 무사들이 농촌의 청년조직을 장악하려는 수단으로 제사의례에서 놀았다. 이러한 변화는 연기력을 확장하기 위해 변형시켰다고 보기도 하고, 기악 계통 사자탈춤이 일본에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전승되고 있던 사슴탈춤이나 멧돼지탈춤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자탈춤이 발생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하회의 주지탈춤이 1인 사자탈춤이고, 중국에서도 한 사람이 혼자만드는 사자탈을 소사少獅라고 하기 때문에 일본의 내부 논리로만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중·일 사자탈춤의 비교
일본에서는 관동 지역의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인 1인 사자탈춤이 다른 지역의 장중하고 위엄 있는 2인 사자탈춤과 대립구도를 보인다. 우리나라는 2인 사자탈춤봉산, 강령, 북청과 3인 사자탈춤은율, 수영, 통영이 지역적으로 대립된다. 2인형이 타령장단에 맞추어 도약무를 추고 입사자立獅子의 위용을 과시하는 점에서 북방문화의 특징을 보인다면, 3인형은 동작이 느려서 유려한 굿거리장단과 조화를 이룰 뿐 입사자도 없어서 남방문화의 특징을 보인다. 중국도 북파와 남파의 사자탈춤이 대조적이다. 일본에서는 관동과 관서가 대립되고, 중국과 한국은 남방과 북방의 대립 양상을 보인다.
한중일의 사자탈과 사자조각에서 쌍사자는 암수의 관계지만 상징 체계는 각기 다르다. 중국에서 수사자는 권력을 상징하는 여의주를 가지고, 암사자는 자비심을 상징하는 새끼를 데리고 있다. 일본의 수사자는 공격력을 상징하는 뿔이 2개이고, 뿔이 1개이거나 없으면 암사자이다. 한국은 다문 입이 수사자이고 벌린 입이 암사자인데, 밀종불교에서 입을 벌린 ‘아’금강역사는 처음과 공격력을, 입을 다문 ‘훔’금강역사는 끝과 방어력을 상징하는 것과 관련된다. 한중일 모두 사자탈춤이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무용과 왕권을 수호하는 궁중무용으로 출발하여 민속무용으로 변용되는 과정을 거쳐왔다. 하지만 구체적인 작품양상과 상징 체계에서 서로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