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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허준과 <동의보감>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08-02 조회수 : 6341





허준의 혈연, 학연 네트워크
허준의 출생과 가계에 대한 파악은 그가 의학을 선택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이다. 16~17세기 초반의 조선 사회는 혈연 중심의 강한 가족 공동체적 성격을 띠었으므로 누구 집에서 어떤 자식으로 태어났는지는 한 아이의 일생을 결정짓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허준의 출생을 보면, 최고 권세가는 아니지만 꽤 좋은 양반가에서 서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일생의 큰 궤적을 결정짓는 전제처럼 보인다.

허준은 1539년 부모 모두 양반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종성부사종3품를 역임한 허론許이고, 그의 조부허곤許琨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상우수사정3품를 지낸바 있으니, 뼈대 있는 무관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 영광 김씨는 비록 서출이었지만 부정副正, 종3품 김유성金有誠의 자식으로 괜찮은 양반 가문이었다.
서자는 문관이나 무관으로 나아갔을 때 신분상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이를 꺼려 의원・통역・천문 등의 전문직인 잡관雜官을 선택하게 되며, 또 집안에서도 차별을 받아 학습을 제대로 못 받았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허준의 집안은 그렇지않았던 것 같다. 서자인 동생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허준도 다른 양반 가문 자제들처럼 집안에서 과거 준비를 위한 수업과 교양을 충분히 쌓았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허준의 가계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김안국金安國,1478~1543과 김정국金正國, 1485~1541 형제의 존재다. 이 둘은 조부 허곤의 누이 아들이니 허준에게는 5촌 아저씨뻘로 매우 가까운 인척이다. 김안국은 <간이벽온방>과 <창진방瘡疹方>의 발행자로, 김정국은 <촌가구급방>의 저자로 의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김안국의 제자로 당대의 쟁쟁한 유학자이며 선조의 사부이기도 한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허준의 내의원 출사出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허준은 김안국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굉필金宏弼로부터 유희춘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계보 안에 위치했다.





의원 허준의 행적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허준의 선택지가 의학 하나만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본국명의>에서 지적하듯 그는 학문을 좋아하고 경전과 역사에도 박식했다고 한다. 의학을 따로 말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학문이란 16세기 일반 지식인이 추구했던 학문임에 틀림없다. 좁게는 과거에 입격하기 위한 공부일 것이며, 넓게는 사대부들이 익히는 문・사・철 일반에 대한 학문이었을 것이다.
허준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포착되는 것은 그의 나이 30세 때인 1568년선조 원년부터다. 그의 아저씨 김안국의 제자인 유희춘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유희춘은 선조가 즉위하자 오랜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한양에서 다시 관직에 오르면서 <미암일기眉巖日記>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허준의 행적을 10여차례 언급하고 있다. 그의 학식을 알려주는 <노자老子> <문칙文則> <조화론造化論> 등 세 책의 이름이 등장하며, 허준의 진료 성공에 관한 기록도 보인다.

<미암일기>의 허준 기록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569년 윤6월 3일 유희춘이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했다는 사실이다. 마침 전해에 선조 임금이 즉위 직후 청백리의 자손 중에서 숨어 있는 인재를 발굴해 등용하는 것을 신정의 중요한 정책으로 표방한 바 있다. 정3품 이상 고위 문관에게는 추천권이 부여되었는데, 유희춘은 그것을 행사한 것이다. 허준을 추천한 배경에는 자신이 경험한 그의 의술 솜씨와 걸출한 학문 능력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가 자리했을 것이다. 유희춘의 천거는 수용된 것 같다. 이듬해 기록에는 이때 허준이 궐내 내의원에 근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다음 해에는 허준의 관직이 종4품 내의內醫 첨정僉正이라고 적혀 있다. 의과 장원급제인 경우 종8품임을 감안할 때 허준의 종4품 벼슬이 파격적인 대우였음에 틀림없다.

어의 허준과 국왕 선조의 동반자적 관계
공교롭게도 허준의 내의원 입사는 선조1552~1608, 1567년 즉위 직후 진행된 천거에 의한 것이었다. 1569년 그의 나이는 31세로 18세였던 선조보다 13년 연장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선조가 붕어하던 1608년까지 거의 30년 동안 떼기 힘든 끈끈한 관계를 지속했다. 선조는 허준의 의학적 식견을 크게 인정해 의서 집필을 맡겼으며, 허준은 의술로 임금과 그 가족의 병을 고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선조는 병증이 회복될 때 선물 하사, 작위 승진 등 큰 상을 내렸고, 허준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임금을 피난지 의주까지 호종護從하여 건강을 지킴으로써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선조를 호종한 의원은 허준과 이연록李延祿 2인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왕의 진료는 허준이 담당했다. 이때부터 허준은 내의원 어의 중 으뜸의 자리를 차지했다. 1596년 광해군의 병을 치료한 공으로 선조는 허준을 동반東班에 올렸다. 1604년 6월에는 호성공신 3등에 책정되어 양평군陽平君이라는 읍호를 얻었으며, 종1품 숭록대부로 승진했다. 의관으로서 그가 이룩한 성취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허준이 종1품에 오른 것은 대단한 경사였지만, 서얼 출신의 의관이 1품에 오른 것에 대한 문관의질시와 견제는 더욱 심해졌다.

<동의보감> 편찬과 허준의 만년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있던 1596년 선조의 명으로 <동의보감>의 편찬이 시작되었다. 호학好學의 군주와 학문과 임상 양측면에서 능력을 보인 어의 허준 사이에는 사선을 같이 넘을 정도의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보다 거창한 사회적・의학적 요인이 있었겠지만, 주문자와 수행자 사이에 형성된 학문과 의술에 대한 공감대와 신뢰 또한 허준이 <동의보감> 편찬의 총 책임자가 된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해 허준은 다른 5인의의원을 이끌고 <동의보감> 편찬을 시작했지만, 이듬해 정유재란이 터지자 사업이 중단되었다. 1601년 무렵 선조는 그에게단독으로 편찬을 완수할 것을 지시했다. 수의 일로 바쁜 허준의 새 의서 집필은 더디게 진행됐으며,1608년 2월까지 채 절반을 마치지 못했다. 1608년 선조가 붕어하자 그에게 유배라는 정치적 시련이 닥쳤다. 그러나 유배는 지지부진했던 <동의보감> 편찬에 집중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였다. 1년 8개월 귀양살이 중 의서 편찬에 박차를 가한 결과, 마침내 1610년 8월 6일 광해군에게 총 25권의 <동의보감>을 바칠 수 있었다. <동의보감> 편찬 명령을 받은 지 14년 만에 자신을 신임했던 선조가 맡긴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그의 나이 72세 때였다.

<동의보감>은 3년 만에 인쇄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생명의 원리와 오장육부 등을 다룬 내경편內景編, 머리, 얼굴, 이목구비, 사지 등을 다룬 외형편, 병의 원인과 진단, 치료 원칙을 다룬 잡병편, 약물요법을 다룬 탕액편湯液編, 침과 뜸 치료법을 다룬 침구편으로 구성되었다. 5편의 내용은 다시 105개 챕터, 2807개에 달하는 세목을 두어 양생의 원칙, 병의 원인, 병증의 종류, 맥의 특성, 구체적인 치료법, 식이요법, 단방, 도인법導引法, 침구법, 기양법, 금기 등을 포괄했다. 독자는 편 아래1문門에 속한 소 표제를 훑는 것으로 그 내용을 대강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을 한데 모아놓은 책의 목차를 일람하면 이 책이 다루는 내용 전반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특징을 띤 <동의보감>은 조선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중국의 그 어떤 의서보다도 훌륭한 의학책이었다.

허준은 만년에 내의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소일했으며, 1613년에 조선을 휩쓴 온역瘟疫과 당홍역唐紅疫에 대응하여 최후의 두 저술인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을 저술했으며, 1615년 향년 77세로 세상을 떴다. 광해군은 그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 작위를 추증했다. 나라에서 그에게 의관의 역사상 최고의 지위를 안겨준 것이다.

허준 사후 19세기까지 <동의보감>은 국내에서 5~6차례공식적으로 인쇄, 발간되었다. 의학의 본고장인 중국, 심지어 일본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중국에서는 30차례 이상 찍었으며, 오늘날에도 계속 새 판이 나오고 있다. 2009년에는 의학책 중 세계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인 반열에 올랐다.

 
-  글. 신동원.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