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알렌의 내한과 갑신정변
개항과 함께 서양 문물의 도입에 대한 필요성이 커져가고 있을 무렵인 1884년 9월 20일 알렌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자 선교의사로 한국에 왔다. 그러나 자유로운 선교가 가능하지 않아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일했다. 1884년 12월 알렌은 갑신정변으로 심한 부상을 당한 당시의 실력자 민영익을 살려냈고, 이것을 계기로 서양의학의 효과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 결과, 1885년 4월 10일 알렌의 건의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서울 재동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세워졌다. 알렌은 병원의 핵심인 의료 인력은 미국 자선단체즉 선교단체에서 파견해 무료로 봉사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재정 상황이 열악한 조선 정부로서는 흔쾌히 응할 수 있었다. 더구나 병원 건물로 내어준 것은 갑신정변 주모자 중 하나인 홍영식의 집이었다. 즉 몰수한 역적의 집을 병원 건물로 내어주었으니 조선 정부로서는 인력과 건물에 관한 별도의 비용을 지불할 일도 없어 손쉽게 병원 설립을 이룰 수 있었다.
제중원의 개원과 운영
제중원이 개원한 후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알렌은 이후 합류한 헤론과 함께 매일 60명에서 70명의 환자를 보았다. 제중원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치료했다. 사실 이전에 조선에도 혜민서와 같은 전통적 구료기관이 있었다. 그러나 제중원과 혜민서의 결정적 차이는 혜민서가 일반 민중들만 상대한 것에 비해 제중원은 모든 계층과 부류의 사람, 즉 거지나 나병 환자, 궁중의 높은 관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같은 병원에서 의술을 베풀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부르는 사람의 신분에 관계없이 먼 곳으로 왕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신분상의 차별과 남녀 간의 차별이 엄존하던 우리나라의 봉건적 관습을 깨뜨리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관을 실제로 보여주는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처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차별 없이 제중원에서 동일하게 치료를 받았으므로, 선교사들이 제중원에서 이루어진 환자 진료가 아주 민주적이었다고 자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중원에서 특기할 일은 여성 병동을 운영한 것이다. 물론 이전의 전통사회나 전통의료에서 여성에 대한 진료가 행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녀유별의 조선 사회 관습에서 여성에 대한 진료는 용이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의료인이 대다수 남성이었기에 여성들이 외간남자에게 진료를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궁중에서는 의녀를 선발하여 여성에 대한 진료를 담당하게 했으나 그 수나 전문성에서 부족한 면이 많았기에 많은 여성들이 혜택을 보지못했다.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 상황에서 제중원이 개원을 한 것이다.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외국인 선교사들이 여성을 진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의학에서 맥진을 위해 손목을 잡는 이상의 신체 접촉이나 환부 노출이 요구되는 서양의학의 특성상 자기 몸을 알렌과 같은 서양인 남자 의사에게 내어 보이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완강히 진찰을 거부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또 신분이 높은 부인은 마당에 있는 사람을 모두 내보내고 통행을 금지시켜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진찰을 받겠다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엘러즈와 같은 여성 의료인이 와서 이러한 문제는 상당히 해결되었다.

서양의학 교육의 시작
알렌은 병원설립안을 정부에 제출할 때부터 이미 의학 교육을 실시할 계획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다. 그는 제중원의 운영이
안정화되자 원래의 계획대로 의학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알렌은 1885년 12월 1일 당시 미국 공
사였던 폴크를 통해 의학당 설립을 조선 정부에 요청했고, 정부는 각 도에 공문을 보내 필요한 인재를 차출하여 선발시험을 치렀다. 그리하여 1886년 3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 교육이 정식으로 선발된 16명의 의학생들을 대상으로 제중원 의학당에서 시작되었다.
의학생 교육은 알렌, 헤론 및 언더우드가 맡았다. 알렌이 화학을, 헤론이 의학을, 언더우드가 영어를 담당하였다. 학생들은 먼저 영어를 습득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느 정도 영어가 숙달되자 기초과학인 수학, 물리 및 화학을 가르쳤다. 소정의 과정이 끝난 학생들에게는 영어로 해부학, 생리학 및 의학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후 의학 교육기관으로서 제중원의학당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1887년부터는 영어를 주로 교육하는 기관으로 변하였으며, 그것도 2년 정도만 지속되었다.
의학 교육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상대적으로 긴 수학 기간이었다. 오늘날에비해 조혼 풍속이 있었던 당시 가정을 가진 학생들이 특별한 수입 없이 장기간 낯선 공부에 전념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격적으로 의학공부를 하기 전에 영어를 습득했는데 외국어, 특히 서양어 구사 인력이 희귀하던 당시에 이들은 그간 습득한 영어 실력만 으로도 충분히 입신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므로 구태여 어렵고 긴 시간이 걸리는 공부를 계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의학 공부를 그만두었을 가능성도 크다. 초기 의학생 대부분이 관료로 입신한 사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최초의 시도가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후 에비슨에 의해 의학 교육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앞선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중원의 이전과 발전
점차 환자들이 많아져 재동의 병원이 협소하자 제중원은 1887년 구리개현재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부근로 이전, 병원 규모를 확대했다. 초기의 제중원은 조선 정부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조선 정부는 건물과 재정을 지원하고,
선교부는 의사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진료하면서 병원의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했다.
이후 1894년 제중원의 운영권이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넘어오면서 제중원은 정부와 관련을 끊고 완전한 선교 의료기관으로 재편되었다. 에비슨은 보다 나은 시설을 갖춘 병원 설립을 위해 노력한 결과, 1900년 미국에서 만난 세브란스 L. H.Severance 씨로부터 병원 설립 기금 1만 달러를 기부받아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맞은편 세브란스 빌딩 자리에 병원을 세웠다. 이때부터 병원 이름은 세브란스병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조선의 민중들은 여전히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이라고
불렀다.
한편 에비슨은 새로운 병원 설립을 추진하는 가운데 체계적인 의학 교육을 위한 노력도 계속했다. 특히 그는 학생들이보다 수월하게 의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국문 의학교과서 편찬 등 조직적인 의학 교육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물리, 화학등 기초과학과 해부학, 생리학 등 의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한국어 교과서를 준비할 수 있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정착하는 데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다. 이렇게 마련된 국문 의학 교재로 충실한 의학 교육을 할 수 있었고, 드디어 1908년 알렌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22년 만에, 에비슨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제중원은 우리나라에서 서양의술이 본격적으로 시술된 최초의 병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해 의료 인력이 자생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기틀을 만든 최초의 의과대학이다.그런 의미에서 제중원은 우리나라 근대의학의 발상지라 할 수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