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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산호! 만세! 산호! 만세! 재산호! 만만세!
산호山呼는 국왕이나 황제에게 큰 소리로 경의를 표하라는 의례어이다. 이 만세 소리가 귓가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고 생생하다. 독립을 염원하며 우리 백성이 목 놓아 부르던 ‘대한독립만세’. 지금은 누구나 쉽게 외칠 수 있는 만세! 만세, 지금 그 의미를 알고 외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 재현행사의 목적이자 보람이다.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의 역사적 배경
1895년 일제에 의한 왕비 민씨 살해사건은 조선이 황제의 독자권을 구축하여 자주독립의 길로 가야만 하는 데에 절대적 계기가 된다. 1876년 개항 이후 열강의 각축장이 된 조선은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의 갑오경장으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조선에서 청을 몰아내고자 하는 속내를 감추고 조선 내정 간섭을 위한 일본의 계략이었다.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본에 대해 고종과 왕비 민씨가 반감을 가지고 돌아서자 일본은 궁궐에 무단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하였다. 왕비의 승하는 국상으로 연결되어 국가는 국장을 치러야 하고, 5개월 후 발인하여 능에 모시는 것이 조선의 국가의례이다. 그러나 시신이 온전치 않았을 왕비에 대한 염습과 빈전의례는 모두 이루어졌지만 발인은 하지 않았다. 발인은 계속 미루어졌고 2년이 흘렀다.
1897년, 그 사이 고종은 자주독립을 전제로 한 개혁이 필요함을 깨닫고 칭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대례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대례의궤>는 고종의 측근과 재야의 유생들이 올린 칭제상소문을 비롯하여 황제등극을 위한 제반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과 단자를 올리는 일,그리고 각 의식의 의주 등을 기록한 의궤이다.
고종의 등극의례는 10월 9일 경운궁 태극전에서 행해진 「친림서계의」로부터 시작하여 10월 14일 황태자비를 책봉하는 의식을 마지막으로 6일에 걸친 의례가 끝난다. 크게 나누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 ‘신하들의 축하를 받는 의식’ ‘조서를 반포하는 의식’ ‘책봉 의식’으로 구분되지만, 이들을 세분하면 총 23가지의 의례가 진행되었다.1)
2017년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120년, 두갑자가 흘러 다시 그날의 정유년이 된 해다.120년 전 왕후의 국장을 미루면서 황제국을 만들고자 한 고종과 당시 백성들은 어떠한 상황에 있었을까? 당시 황제국의 선포가 성공이냐 실패냐에 관한 판단은 또 다른 문제로 차치하고, 자주독립을 염원하여 황제국이 되었음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국정의 방향을 처음 선포하던 그날은 어떠하였을까? 고종은 호천상제황천상제와 황지기, 종향 14위의 신위를 모시고 환구단에 올라 고유제를 올렸다.2) 종묘와 사직이 대사였던 조선에서 환구단에 제사를 지내는 일은 중국 모르게 숨어서 올린 세조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3) 그리고 바로 이어 등극의를 행하였다. 황제의 12장복을 입고 12류 면류관을 쓰고 황제의 금색 의자에 앉아 옥보를 받았다. 하늘에 고하였으므로 바로 그 자리 환구단에서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이날 고종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었다. 이전까지 국왕의 즉위의식에서 아버지인 선왕의 빈전에서 어보와 유서를 받고 왕위에 오른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어 황제를 위한 의례가 펼쳐졌다. ‘국궁삼무도’와 ‘좌슬삼고두’가 이어지고, 바로 산호에 대한 답으로 만세를 외치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만세’이다. ‘천세’까지 축원할 수밖에 없던 조선이 이제 ‘만세’를 외칠 수 있었다. 황제국인 것이다.

환구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으로 만들기 위해 영상이 사용되었다.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리는 친사환구의 영상과 함께 고종의 심경을 내레이션으로 들려준다. “…하늘이시여! 이 나라를 굽어 살피소서!” 사라진 환구단 대신 중화전의 월대 위에서 고종에게 12장복이 입혀졌다.
신분사회에서는 복식의 차이가 계급의 차이를 말한다. 황제 12장복에는 제후국 국왕의 9개 무늬 장문용·화·화충·종이·오악·조·분미· 보·불에 3개의 장문이 더해진다. 해와 달과 성신이 황제의 어깨와 등에 내려앉는 것이다.
왕 복식 어깨에 있던 용은 소매로 내려온다. 너무 자세한 설명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고, 혹시 너무 가르치려 든다고 불쾌할 수도 있으므로 조심스러웠다. 월대 위의 황제가 복식을 착용하는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 어색할 수 있지만 당시 상황을 함께 느끼고자 격식을 파하고 한 겹 두 겹 걸쳐질 때 가졌을 고종의 감동을 현대의 후손들과 나누고자 하였다. 옥보를
올린 후 행해지는 황제께 올리는 의례는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국궁삼무도鞠躬三舞蹈’와 ‘좌슬삼고두左膝三叩頭’의 행례 문제이다. 지금까지 국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배를 올리기 위한 기본 자세였다. 그런데 세 번 춤추듯 발을 굴러야 한다니…. 전후 문맥은 ‘국궁’전에 ‘흥평신’, 즉 몸을 바로 세우라고 하였으므로 무릎을 꿇은 상태는 아닌 것이고, 또 ‘진홀搢笏’하여 손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즉 허리를 굽히고 발을 세 번 구르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가는 아직 알 수 없다. 중국측 고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좌슬삼고두’ 역시 마찬가지다. 왼쪽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는 고두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두 가지 의례는 아직 고증하지 못하였지만 언젠가 새로운 사료가 나오면 더 완전한 황제 의례가 될 것이다. 이제 만세이다. 만세는 모든 관객이 함께 불러보자고 부탁하였다. 손을 위로 번쩍 올리고 함께 만세를 외쳤던 관객은 아마도 감격스러웠을 고종에게 작은 힘을 보태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등극의의 드라마적 전개가 끝났다. 의례를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의식에 들어가기 전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짧은 도입부였다.
황제국이 된 것을 세상에 알리다
‘수백관하표의’는 백관이 황제께 축하의 글인 표문을 올리고, 황제가 이것을 받는 간단한 의례이다. 환구단에서 고유제를 올린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의정 심순택의 표문이 읽혀지고 황제는 소차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다.
이어서 ‘책황후의’다. ‘황후’는 이제 처음 나타난 칭호이다. ‘명성황후 죽음에 대한 고종의 심경은 <어제행록御製行錄>과 <제문祭文>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제행록은 고종이 명성황후의 행록을 직접 지은 것으로 자신을 알뜰하게 챙기고 국정을 도와주던 동반자로서의 왕후를 회고하고 있다.4) 또한 왕후의 죽음 이후 염습의례와 빈전의례의 전奠을 올리며 직접 지은 제문에서도 부부의 인연을 다하지 못한 애통한심경을 표현하였다.5) 정사와 부사가 황후의 책문과 보를 싣고 갈 채연을 인도하여 입장하고,
그 뒤를 황후의 의장이 따른다.
이는 <국조오례의>에서 국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책비의’와 같다. 하지만 ‘황후’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책보를 싣고 가는 장소가 시신이 모셔진 빈전이다. 정사는 책보를 싣고 빈전으로 가서 책봉문을 읽어 올리게 된다. 이렇게 의례가 끝나게 되면 ‘책황후의’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정사는 중화전 전정에 나아가 책문을 읽는다. 거기에는 아내를 향한 고종의 마음이 담겨 있다. 월대 옆 LED에 영상이 켜진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왕후가 비로소 황후의 대례복을 입고 있다. 꽃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고 있는 황후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황제국을 상징하는 금절을 선두에 둔 채연이 빈전으로 향하자 황후는 일어나 멀리 사라져 갔다. 고종의 마음이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왔다. “궁궐의 높은 담을 넘어 종묘의 큰 자리에 앉아, 이 나라 대한을 지켜주시오….”
고종은 즉위식을 거행하고 두 달 후 황후의 예로 발인하여 국장을 치렀다. 고종은 자신을위해 대신 죽어간 왕비를 ‘황후’로 보내주고 싶었던 것이다. 순종이 나올 차례다. 실제로 ‘책황태자의’는 ‘책황후의’를 끝내고 바로 이어서 행해졌다. 우리는 순종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라는 것, 그리고 일제에 의해 무기력하게 황제에서 이왕으로 내려왔던 군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의도된 왜곡이다. 순종은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1910년 한일병탄조약의 칙유선포를 거부하였다. 더구나 순종은 그 조약서에 옥새를 찍은 적이 없다. 이 순간 고종에게는 순종이 당당하고 믿음직스러운 후계자였을 것이다. “너 왕태자는 … 총명한 임금의 상이라 칭송하는 소리가 드높도다! ….” 구장복을 입은 황태자는 책문과 금보를 받아 채연에 싣고 황후의 빈전으로 향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한大韓’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온 순간이 ‘반조의’다. “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이해를 광무원년으로 하노라!” 황제국이 된 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 황제의 첫 번째 조서를 반포하는 순간이 왔다. 조서에는 고종황제가 만들어 가고 싶은 나라가 서술되어 있다.
뇌물을 탐내고 백성을 착취하는 관리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벼슬하지 않은 선비들 중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알맞은 자리를 주라고 하였다. 외롭고 병든 백성을 해당 지방관이 돌보아 주라고, 모든 은택이 백성에게 골고루 미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중요한 내용을 황제의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대독관, 즉 선조관이 있었지만 고종황제는 직접 들려주고 싶었으리라. 그렇게 2시간에 걸친 긴 의례가 끝났다. 황제 즉위와 황제국의 선포 과정을 감히 고종의 마음 따라 더듬어 가 보고자 하였다. 고종의 마음을 이 시대의 사람들과 나누고, 전통을 재현하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지만 언제나 겸허하게 다가설 일이다. 120년 전 대한이 지금의 대한으로 이어졌고, 그 덕분에 나는 만세를 맘껏 부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지난날이 억울하였기 때문일까.
우리는 소망이 많은 민족이다. 온 국민이 한날한때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감격의 순간을 나는 날마다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