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구성진 해학, 그 안에 담긴 전라도의 소리
글. 신은주(전북대학교 한국음악학과 교수)
1970년대 집에서 씻김굿을 하는 모습, 『보배섬 진도의 그때 그 시절』
제공: 진도문화원
‘전라도의 소리’라고 하면 누구나 ‘판소리’를 떠올릴 것이다. 구성진 성음과 강하게 꺾어 내는 목 그리고 아니리에서 묻어나는 전라도의 말투. 그 자체로 판소리는 전라도 소리임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판소리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판소리는 비단 전라도에만 국한된 소리는 아니다. 경기 이남과 충청 지역에서도 판소리가 널리 불렸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나라 서남부 지역에서 두루 성장해 온 음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판소리가 성장하면서 그 향유권은 전국으로 넓어졌다. 우리나라 서남부는 판소리뿐 아니라 산조1의 발상지이기도 한데, 이처럼 서남부(경기 남부, 충청남도, 전라도) 지역에서 판소리 및 산조와 같은 민속악의 대표 장르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지역의 굿 음악이 있다.
1 민속음악에 속하는 기악 독주곡 형태의 하나.(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예술성 높은 종합예술, 굿
굿 음악은 민중의 기층 사회에서 형성되고 애호된 음악 가운데에서도 가장 근간이 되는 음악으로, 많은 민속악 장르들이 굿 음악의 토대 위에서 발전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서남 지역의 굿은 집안 대 대로 세습하여 무당이 되는 세습무(世襲巫)들에 의해 연행되었던 굿으로, 세습무들이 주관하는 굿은 흔히 강신무(降神巫)들이 주관하는 굿과 비교하여 ‘접신(接神)’과 같은 영적인 행위는 없으나, 예술적으로 매우 발달되어 있다. 세습무들이 주관하는 굿에서 예능이 강조되는 이유는 신과 인간의 중개자(仲介者)로서 양자(兩者)를 만족시켜야 하는 세습무로서의 역할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대로 세습하여 굿을 연행하는 이들의 무계(巫系) 구조상, 굿판에서 나고 자라며 몸속 깊이 체득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뛰어난 예술적 감성이 이들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남 지역 굿의 예술적 우수성은 유려하고 애절한 무가에서 드러나며, 반주 악기로는 타악기뿐 아니라 피리, 대금, 아쟁, 해금과 같은 선율악기가 더해지는데, 이러한 점이 타 지역의 굿 음악과 구분되는 서남 지역 굿만의 특징이다. 서남 지역 굿에서 무녀의 노래를 보조하고, 반주 악기를 담당했던 무계 집안의 남자들 중 초창기 판소리 명인이나 산조 명인으로 나선 이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굿 음악과 판소리의 연관이 자연스레 설명된다. ‘전라도의 굿’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1980년에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진도씻김굿’이다. ‘씻김굿’은 죽은 이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행하는 굿으로, 여기서 ‘씻김’이란 이승에 살 때 맺힌 원한을 지우고 씻어 준다는 의미가 있다. 진도 지역의 씻김굿은 망자를 비롯한 그날의 굿을 위한 신들을 청하는 ‘초가망석’부터 시작해 ‘손굿쳐올리기’, ‘제석굿’, ‘넋올리기’, ‘희설’, ‘씻김’, ‘고풀이’, ‘길 닦음’, ‘액막음’의 절차로 진행되며, 전체 씻김굿 중 넋을 정화(淨化)하는 절차인 ‘씻김’ 부분이 굿의 절정에 해당한다. ‘씻김’ 절차에서 부르는 무가의 노랫말 중 일부를 살펴보자.
요세상에 나온 사람 누덕으로 나왔던가 석가여래 은덕으로 아버님전 뼈를 빌고
어머님전 살을 빌고 칠성님께 명을 빌고 지석님께 복을 빌어 이내일신 탄생하야
한두살에 철을 몰라 부모은덕 알을 손가 이삼십이 다되어도 부모은공 못 다갚고
어이없고 설운지고 세월이 여류하야 원수백발 돌아오니 없던 망령 절로나네···
할 수 없네 할 수 없어 홍안백발 늙어감은 인간에 이공도를 누가 능히 막을쏘냐···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지 못하노니 인간백년 산다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에
걱정 근심 다지하면 단사십을 못 산 인생 어제오늘 성턴 몸이 저녘 나절 병이 드니
실날같은 이내몸에 태산같은 병이 드니 부르나니 어머니요 찾느나니 냉수로세···
- 『국립남도국악원총서5 채정례 진도씻김굿』 중
노랫말의 내용 구구절절 인생사가 담겼으니, 우리가 누구로부터 이 세상에 왔으며, 인생의 늙어짐과 흐르는 세월은 거스를 수 없음을 노래한다. 허망함과 슬픔의 정서가 느껴지지만,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세상의 순리임을 노래함으로써, 죽은 이의 떠남을 너무 애석해하지도 말 것이며, 나 또한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이별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어느새 씻김굿의 현장은, 죽은 이를 온전히 저승으로 보내 드리면서 살아 있는 자들의 공간인 이승에도 안 정이 찾아오는, 슬픔의 현장에서 위로와 축제의 현장으로 변화하게 된다.
진도 당골 고(故) 채정례(1925~2013)의 국가무형유산 진도씻김굿 전승교육사 고(故) 정숙자(1939~2001) 씻김 모습
사진: 정수미, 출처: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문보재, 2021.
굿판에서 놀이판으로
삶의 자리인 굿판에서, 보다 축제와 유흥의 현장으로 나아간 것이 민간 예인들의 놀이판이고, 그 놀이판에서 보다 전문적인 이야기 음악으로 발전한 것이 바로 판소리다. 민간의 예능이었던 판소리에 대해서는 정확한 문헌 자료가 많지 않아, 판소리의 발생과 과거 형태에 대해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개 17세기 무렵부터 판소리가 존재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안숙선
출처: 국가유산청 무형유산 디지털 아카이브
조선 영조 때의 선비 유진한(1711~1791)이 저술한 『만화집(晩華集)』에는 ‘가사춘향가이백구(歌詞春 香歌二百句)’가 수록되어 있고, 이에 대해 유진한의 아들인 금(琹)이 기록한 「가정견문록(家庭見聞 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아버지께서 계유년 호남을 여행하면서 그 산천 문물을 역람하셨다. 다음 해 봄 집에 돌아와 춘향가 1편을 지으셨는데, 이로써 또한 당시 유인들의 비난을 받으셨다.
이 기록을 통해 유진한이 호남을 여행하면서 판소리 <춘향가>를 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으며, <춘향가>의 내용을 인용해 한시를 지은 일로 유인들의 비난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 무렵 양반들 사이에서 판소리 향유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17~18세기 판소리는 서민층 사이에서 향유되었던 공연물로, 그 형성과 변화의 중심에 천민 예인들이 있었고, 서민들의 정서가 진하게 배어 있으며, 이들의 삶과 해학이 판소리에 두루 담겼다.
[엇모리] 골래종 들어온다. 골래종 들어온다. 좌편팔 창을 맞고 우편팔 살을 맞어 다리도 절룩 절룩 반생반사 들어와 “예~”
[아니리] 조조가 보더니 박장대소허며 “워따 그놈, 병신 부자로구나. 우리는 죽것다 살것다 달아 나면 저놈은 뒤에 느지막허니 떨어졌다가 우리 간 곳만 손가락을 똑똑 가르쳐 줄 놈이다. 너희들 여러 날 전쟁 불식에 소증인들 없겠느냐. 네 저놈 큰 가마솥에다가 푹신진케 대려라. 한 그릇씩 먹고 가자” 골래종이가 눈을 찌어지게 흘기며 “승상님 눈 뽄이 인장식 많이 허게 생겼소” “내 저놈 보기 싫다 쫒아내고 또 불러라” “우기병에 전동다리”
[중중모리] 전동다리가 들어온다. 전동다리가 들어온다. 부러진 창대 들어메고 발세치레 건조로 세발걸음 중띄엄 몸을 날려 껑청껑청 섭수있게 들어와 “예~”
[아니리] 조조가 보더니 “예끼, 웬 놈이 저리 성허냐?” “성허거든 어서 회쳐 잡수시오” “네 이놈 그게 웬말인고?” “아 승상님이 병든 놈은 대려 먹자기로 성한 놈은 회쳐 잡수라 하였소” “워따 이놈아, 너는 하도 성하기에 반가와서 허는 말이로다” “승상님 군사들이 미련해서 죽고 병신되지요” “네 이놈 그게 웬말인고?” “아 승상님도 생각을 좀 해 보시오. 쌈헐 때는 뒤로 딱 숨었다가 쌈 아니 헐 때는 앞에서 저정거리고 다니면 죽을 배 만무허고 병신될 배 만무허지요” “워따 그놈 두었다가 군중에 씨헐까 무섭구나. 저놈 보기 싫다. 쫓아내고 또 불러라” …
- 안숙선, <적벽가>(민속원, 2003년) 중
위 대목은 판소리 <적벽가> 중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퇴해서 도주하다가 화용도에 이르기 전에 따 르는 군사들을 점고하는 ‘군사점고’ 대목이다. 적벽가의 소재가 되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는 없는, 판소리에서 창작된 부분으로 판소리 특유의 골계적 극치가 잘 드러난다. 노랫말을 살펴보면, 전쟁 통에 팔다리를 잃은 병사들이 점고에 나서며 각자의 사연을 말하는데, 점고를 받는 군사들의 ‘병신 된’ 몸은 전쟁의 참상을 보여 주며, 장수가 아닌 병졸을 부각시키고 있는 점에서 그 자체로 서민 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조조는 그런 군사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가마솥에 삶아 고깃국이나 해서 나누어 먹자고 하거나 보기 싫으니 쫓아내라 하는데, 잔인하면서도 경망스러운 모습을 통해 권력자의 횡포를 고발한다. 이러한 판소리의 정서는 억압과 설움 속에 버텨 내고 있는 민중들의 한을 어루만지고 폭발시키는 역할을 했으리라.
이후 19세기에 들어와 판소리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이름을 날리는 뛰어난 판소리 창자들이 대거 등장했고, 다양한 음악 요소들이 판소리 안에 삽입되었으며, 수많은 더늠(특정 창자의 장기를 살려 만들어진 독특한 대목) 개발로 인해 판소리가 음악 및 문학적 측면에서 전문 예술 음악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 따라 판소리의 향유층은 서민 계층에서 점차 양반층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양반들도 판소리를 향유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으로 증명되는데, 19세기 전반의 판소리 명창 송흥록은 철종으로부터 정3품 통정대부 직첩을 제수받았고, 모흥갑은 헌종에게서 종2품 동지 직첩을 받았으며, 모흥갑이 평양감사인 김병학에게 초청되어 소리했던 광경은 『평양감사 환영연도』(평양도)에 그대로 남아 전한다.
『평양도』 10폭 병풍 중 부분
출처: 서울대학교박물관
양반들의 판소리 향유가 일상화되면서 양반들이 꺼릴 만한 내용들, 양반에 대한 풍자나 지나친 성적 묘사, 거친 재담 등이 삭제되거나 다듬어졌다. 그리고 양반층의 취향을 반영해 한문 투의 사설이나 가곡 성음 등이 판소리에 담기게 되었으니, <춘향가> 중 ‘천자뒤풀이’ 대목은 이러한 양상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자시의 생천허니 불언행사시 유유피창 하늘 ‘천(天)’
축시의 생지허여 금목수화를 맡았으니 양생만물 따 ‘지(地)’
유현미묘 흑정색 북방현무 가물 ‘현(玄)’
궁상각치우 동서남북 중앙토색의 누루 ‘황(黃)’
천지 사방이 몇 만리 하루광활 집 ‘우(宇)’
연대국조 흥망성쇠 왕고래금 집 ‘주(住)’
오매불망 우리 사랑 규중심처 감출 ‘장(藏)’
부용 작약의 세우 중에 왕안옥태 부를 ‘윤(潤)’
저러한 고운 태도 일생 보아도 남을 ‘여(餘)’
이 몸이 훨훨 날아 천사만사 이룰 ‘성(成)’
이리저리 노니다가 부지세월 해 ‘세(歲)’
조강지처는 박대 못 허느니 대전통편의 법중 ‘율(律)’
춘향과 날과 단둘이 앉어 법중 ‘여(呂)’자로 놀아 보자.
- 성우향 <춘향가> 창본 중
단옷날 광한루에서 춘향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이몽룡은 온통 춘향 생각뿐이다. 책실에 앉아 글공부를 하려고 하나 머릿속에서 춘향이 떠나지 않자, 글 속에 춘향을 대입시켜 읽어 나가는 장면 이 바로 ‘천자뒤풀이’ 대목이다. 글공부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천자문’을 소재로 하고 있기는 하나 구구절절 한문 투의 사설이 활용되고 있어 이도령의 양반적 면모가 드러난다. 그러나 처음 점잖게 시작된 소리는 춘향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점점 양반의 체통도 내려놓고 자신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되는데, “춘향과 날과 단둘이 앉어 법중 ‘여(呂)’자로 놀아 보자”에서 절정을 이루며 끝맺는다. 즉, 판소리는 천민과 서민 계층의 삶과 정서, 풍자와 해학에 양반들의 지향까지 더해지면서 세련미와 깊이를 더해 전 계층을 아우르는 예술 장르로 성장하게 되었다.
판소리에 담긴 민요
한편, 판소리에는 판소리 이외의 장르가 삽입되어 불리기도 한다. <춘향가>에는 이도령이 어사가 되어 남원 땅에 들어섰을 때 들 녘의 농부들이 부르는 <농부가> 가 삽입되어 있으며, <심청가> 중 곽 씨 부인 제 지내는 대목에서 는 <상여소리>가 불리고, 심 봉 사가 황성 맹인잔치 가는 길에 아 낙들과 함께 방아를 찧는 대목에 서는 <방아소리>가 불린다. <농부가>와 <방아소리>는 농업 노동요로 농사의 과정 중에, <상여소리> 는 장례 절차에서 상여를 메고 행진하며 부르던 소리로, 민중들의 삶 가운데 불리던 향토민요이다. 그럼, 향토민요가 판소리 안에 삽입된 배경은 무엇인가?
국가무형유산 남도들노래(南道들노래)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판소리는 극적인 구조를 가진 긴 이야기를 소리로 전달하는 장르로서 서민 계층에서 성장했다. 이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판소리에는 서민들의 정서와 지향이 투영되어 있고, 서민들의 삶이 그 안에 녹아 있다. 그리고 민요는 서민들의 삶에 함께 존재하던 노래였던 바, 민요가 판소리에 삽입된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판소리에 삽입된 <농부가>, <방아타령>, <상여소리>와 같이,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많이 불렸던 민요에는 어떤 곡들이 있을까?
전라남도 무형유산 영암 갈곡리 들소리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우리나라 서남부 지역은 광활한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호남평야는 전라북도 군산, 익산, 김제, 전주, 완주, 부안, 정읍, 고창 및 충청남도 논산, 부여, 서천군 일부가 포함되는 지역으로, 전국 최대의 곡창지대이며 벼가 주로 재배된다. 영산강 주류의 충적지를 중심으로 나주, 함평, 담양, 장성, 영광, 광주, 목포, 영암 일대에 펼쳐져 있는 나주평야(전남평야) 역시 논농사를 중심으로 많은 곡물이 생산되는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에 따라 전라도 지역에서는 논에서 일을 하며 부르는 논농사요가 다수 존재해 왔다.
나하하헤헤이 헤헤에이 헤에헤 오혼돌
히헤 헤에 헤에헤이가 산아지로고나 아하아
바람 부네 바람이 부네
농촌 한가에 풍년바람 부네 아하하
일락서산 해 떨어지고
월출동녘 달 솟아온다 아하하
산천초목 다 속잎 나고
이 논배미는 장잎이 날렸네 아하하
모악산 꼭대기에 비안개 돈개
우장 두르고 지심을 매세 아하하
일허세 일혀 어허어 젊어서 일허고
늙어지면 놀아나 보세 아하하
-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1』(돌베개, 2002) 중
위 소리는 1991년 전북 옥구군 대야면에서 채록된 소리로, 김제 만경평야의 대표적인 논매는 소리다. 후렴구 끝에 산아지로고나’라는 말이 붙어 <만경산타령>이라고도 하는데, 노랫말을 살펴보면 바람 부는 농촌의 들녘과 우장을 두르고 논을 매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고, 일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말도 담겨 있다. 1989년 전남 영암군 신북면에서 채록된 ‘풍장소리’에도 우리네 조상들의 삶이 담겨 있는데,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우리네 농군들 다 잘도 허시네
오늘은 이 집의 풍장을 마치고
내일은 뉘 집의 풍장을 할거나 / 아롱자롱
이렇게 저렇게 세상을 살면서
농사를 지며 세월을 보낸다
아이고 우리도 내일부터는
논 많이 사갖고 상머심 들이고 / 아롱자롱
소 타고 검정칠하고 들어를 올 때
이리도 자친 저리도 자친
풍년 노래를 불러를 보세 / 아롱자롱
-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1』(돌베개, 2002) 중
논매기 과정에서 불리는 ‘풍장소리’는 마지막 논매기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며 부르는 소리다. 이즈음이면 이미 벼가 다 자라 이삭을 패기 시작하는 시기로, 농사의 결과가 어느 정도 확인된다. 두레패는 마을에서 농사가 가장 잘된 집의 일꾼을 농사 장원(壯元)으로 뽑아 소에 태워, 마치 과거에 장원 급제한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삼일유가를 행했던 것처럼 풍물을 치며 마을로 들어가는데, 이때 불리는 소리가 ‘풍장소리’고, 일명 ‘장원질소리’라고도 한다. ‘농사장원례’는 한 해의 농사를 마치는 의식으로, 농사 장원으로 뽑힌 일꾼이 속한 논의 주인은 음식을 내어 일꾼들을 격려하고, 일꾼들은 한 해 농사의 고됨을 달랜다. 그야말로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노래와 춤을 즐긴 민족
우리나라 음악 문화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랜 문헌인 『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부여, 고구려, 예의 풍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공통적으로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적혀 있다. 그만큼 우리 민족에게 있어 소리란 매우 깊게 뿌리내리고 있고, 늘 가까이 존재해 왔다. 전라도의 굿 음악과 판소리, 민요 역시 우리네 선조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소리로, 그 소리를 통해 옛날의 나를 그리고 오늘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