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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 - 전통공예의 현대적 자화상 소반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3-12-12 조회수 : 5095

 

종손인 손자는 할아버지와 겸상
조선시대 궁중 도화원에서는 궁에서 거행되는 갖가지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을 남겼는데 그중 ‘봉수당진찬도’는 봉수당에서 열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무희와 연주자 등 대규모 공연단, 열병한 병사, 날리는 깃발과 휘장 등 잔치의 규모며 성대함이 첫눈에 들어오지만, 세밀하고 구체적인 묘사들을 보는 것도 참 재미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수많은 하객 앞에 하나씩 놓여 있는 독상(獨床)이다. 이런 대규모 행사에서 독상을 놓고 먹는다는 게 우리 눈엔 꽤 놀랍지만, 사실 궁중의 잔치를 그린 진찬도나 진연도에는 참석자들이 독상을 받은 모습이 꼭 목격된다.


민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집안 대소사를 치를 때면 어김없이 손님들에게 독상을 내어주었기에 행세깨나 하는 대갓집이라면 100~150개 정도의 소반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이것도 모자라 막상 혼례나 장례 등이 있을 때는 이웃에서 몇 백 개를 추가로 빌려야만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야 이렇게 많은 소반을 마련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마을 공동으로 소반을 구입해놓았다가 사용하기도 했다.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옛사람들은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독상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5첩 반상, 7첩 반상 등 작은 소반에 각자 상을 차리는 것이 일반인들의 법도였으며, 지체 높은 대갓집 정도가 9첩 반상으로 상을 차렸다. 구중궁궐의 임금님부터 행세하는 양반, 평범한 양민들까지 독상에서 밥을 먹었다.


요즘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식탁 앞에 빙 둘러앉아 한 상에 밥을먹고 찌개 그릇 하나에 이 사람 저 사람의 수저가 들락날락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과는 한참 동떨어진다. 누군가는 이런 장면을 놓고 비위생적이라고 폄하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한국인 특유의 정과 공동체 의식이라고 두둔하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한 상에서 밥을 먹는 문화를 보는 시각이야 다양하겠지만, 이것이 우리의 전통, 우리의 심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만은 바로잡아야겠다. 독상 대신 한 상에서 밥을 먹는 문화가 자리 잡은 건 일제 강점기 때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여러 가지 이권사업에 일본인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많아지면서 기생 문화가 크게 유행했는데, 기생집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한 상에 거나하게,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놓고 즐기던 것이 관습처럼 되어버려 한 상에서 밥을 먹는 문화로 변질된 것이다. 그 기원이 이렇다 보니 찌개며 반찬이며 나눠 먹는 모습을 보고 ‘비위생적’이라며 눈살을 찌푸리는 외국사람들에게 ‘함께 먹으며 정을 나누는 게 우리 문화’라고 항변하기가 어째 좀 옹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위생과 절제의 소반 문화
독상을 받을 때는 소반 위에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반찬 몇 가지만을 놓았다. 한편 전골과 같은 요리가 있을 때는 전골상을 따로 놓고 각자 먹을 만큼 그릇에 퍼서 자기 상에 놓고 먹었다. 이렇게 적당한 양의 음식을 독상에 배분하다 보니 남는 음식도 적어 검소한 생활에도 도움이 되었다. 또 여럿이 함께 밥을 먹으면서 맛난 반찬을 탐하거나 독점하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도 담겨 있다. 이런 본능을 경계하고 체통을 지키려는 마음이 독상 문화에 영향을 준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고(男女有別) 어른과 아이 사이에 순서가 있다(長幼有序)는 유교적 가치관도 한 상에서 여럿이 모여 밥을 먹지 않게 된 원인이다. 그래서 부자지간에도 겸상은 하지 않는 것이 원칙. 단, 종손인 손자는 할아버지와 겸상이 허용되기도 했다.


22+23한 상에 모여 앉아 푸짐하게 먹고 얽히고 설켜서 반찬을 공유하며 먹는 것이 우리네 심성이요 전통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오해가 아니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의 위생 관념, 절제된 생활을 보여주는 독상 문화의 상징이 바로 소반이다. 소반은 일일이 상을 들어 나르는 여자들을 생각해서 밥, 국, 반찬을 놓고도 들 수 있을 정도의 무게로 만들었는데, 소반이 얼마나 가벼웠는가 하면 구한말 외국사람이 찍은 시장 사진 중 소반을 몇십 개씩 메고 장에 팔러 가는 소반 장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크기 역시 여인들이 다루기 편하게 어깨 폭 정도로 만들어 들기에 좋도록 했다.

 

상판의 모양이나 다리 모양 등은 무척 다양했다. 상판 모양만 놓고 보면 동그란 원반, 네모난 책상반, 12각형의 열두모판, 8각형의 팔모판, 연잎 모양의 연잎반 등이 있고, 다리 모양으로 구분하자면 호족반(虎足盤), 마족반(馬足盤), 개다리소반, 학다리소반, 대나무 모양의 죽절반(竹節盤) 등이 있었다. 다음은 생산지의 이름을 딴 소반으로 다리 옆판에 여러 가지 문양으로 이루어진 판각으로 화려함과 장식성이 뛰어난 해주반과 화려함 보다는 간결함과 소박함으로 나무의 목리를 강조한 나주반, 안정적인 형태의 바닥(상판)에 자개를 놓아 외형적인 특징을 더한 통영반, 그리고 충주반 등도 유명했다. 재미있는 것으로 판을 돌릴 수 있게 만든 회전반이나 가운데를 뚫어 전골 냄비를 놓게 한 전골상 등도 있는데, 소반 문화가 얼마나 번성했는지 짐작이 된다.


위생과 절제의 미덕이 담긴 소반 문화야말로 다시 찾아도 될 만한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가 아닌가 싶다. 물론 예전처럼 일일이 각자의 소반에 밥, 국, 반찬을 따로 차려 먹기는 어렵겠지만, 반찬이나 찌개를 개인 그릇에 먹도록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닐까? 왜곡된 식생활 문화 대신 우리의 슬기로운 식생활 문화의 전통을 되살려야 할 때다.

 

글˚최웅철 (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