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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방에 관한 기록과 다양한 명칭
조선왕조1392~1910가 건국된 지 20년이 지날 무렵인 1413년 태종 13년 이른 봄, 한양 한복판인 혜정교현재 광화문우체국 부근 거리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다.
“혜정교 거리에서 곽금, 막금, 막승, 덕중 등의 아이들이 타구打毬를 하고 있었다. 각각 공에 대해 이름을 붙였는데 하나는 주상태종, 하나는 효령군태종 둘째아들, 하나는 충령군태종 셋째아들, 뒤에 세종, 하나는 반인하인의 일종이라고 하였다. 서로 공을 쳤는데 공이 다리 아래 물속으로 굴러가 빠지니 한 아이가 이를 빗대어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라고 소리쳤다.” _<태종실록>
권25, 태종 13년 2월 30일 아이들이 즐기던 타구는 길 위에 구멍을 파놓고 긴 막대기로 공을 쳐서 넣는 놀이다. 아이들은 타구를 할 때 각자의 공에 이름을 정했는데, 왕・왕자・하인 등과 같은 인물을 공에 비유해 놀이에 흥미를 더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마침 이 부근을 지나던 효령군의 유모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른다. 효령군이 다리 아래 물에 진짜 빠진 줄 안 것이다. 이것이 장난인 줄 나중에야 안 효령군의 유모가 아이들을 혼내는 내용이 위의 사료 뒤에 이어진다. 이 기록은 타구가 역사 속에 아이들의 놀이로 등장한 첫 사례다.
타구와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1421년세종 3년 11월 말 궁중의 모습이다.
“태상왕이 왕과 더불어 처음으로 새로 지은 궁 뜰에서 타구를 하였다. 날씨가 추워서 교외에는 나갈 수 없으므로 이 놀이를 했는데, 이듬해 봄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왕을 모시고 함께 공을 친 사람은 효령대군 보세종의 둘째 형, 익평부원군 석근세종의 사촌, 경녕군 비세종의 이복동생, 공녕군 인세종의 사촌, 의평군 원생세종의 사촌, 순평군 군생세종의 사촌, 한평군 조연, 도총제 이징・이담, 광록경 권영균 등이다.” _<세종실록> 권14, 세종 3년 11월 30일 세종은 새로 지은 수강궁오늘날 창경궁 터에서 태상왕을 비롯한 종친들과 타구를 즐겼다. 태종과 세종을 중심으로 각각 편을 짜서 단체전 경기를 하는데, 한 번은 세종 팀이 이기고 한번은 태종 팀이 이기자 뒷날 잔치를 벌였다. 당시 궁중에서 왕과 신하들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타구를 했다 하니, 이 경
기를 얼마나 즐겼는지 짐작할 만하다.
위의 두 사례에서 보듯, 타구는 조선 초기에 아이들뿐 아니라 왕까지 몇 달씩 푹 빠질 정도로 신나는 스포츠이자 오락이었다. 그렇게 신나는 타구는 오늘날 골프와 비슷하게 막대기로 공을 쳐 여러 개의 구멍 속에 넣어 승부를 내는 경기였다.당시 골프 형태의 타구는 ‘격구擊毬’라고도 불렀다.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경기는 모두 ‘타구’ 또는 ‘격구’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말을 타고 공을 치는 폴로 형태의 격구와 분간이 어려웠다. 1441년세종 23년 골프 형태의 경기를 별도로 ‘격방擊棒’이라고 부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늘날 봉棒으로 읽는 이 글자를 당시 ‘방’으로 읽은 것이 <훈몽자회>(1527)에서 확인된다. 방棒으로 공을 친다고 하여 ‘격방’이라고 부른 것이다. 격방은 또한 ‘방희棒戱’라고도 했는데, 민간에서는 막대기杖로 공을 친다 해서 ‘장치기’ 또는 ‘공치기’라고 불렀다.
한국 최초의 골퍼, 이성계
골프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 14세기경 양치기 목동이 토끼 굴에 막대기로 돌을 쳐 넣은 데서 유래됐다고 말한다. 기원전2000년 이집트나 아테네의 유적에서 공 치는 흔적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골프의 기원은 꽤 오래된 것 같다. 다만 골프가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유럽에서 근대 스포츠로 발전함으로써, 그 발상지가 서양이라고 인식되었다.
그런데 골프는 일찍이 중국에서도 크게 발달한 것으로 확인된다. 1990년대 초반에는 골프의 본고장이 중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미 원나라1271~1368 때 타구를 ‘추환毆丸’이라 부르며, <환경丸經>이라는 골프 이론서가 간행되었다. 또한 명나라 화가 두근杜菫이 그린 <사녀도士女圖>에는 추환을 즐기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궁중 여인들이 들고 있는 막대기는 골프채와 거의 비슷하다. 조그만 공을 구멍에 쳐 넣는 규칙마저 현대판 골프와 다름이 없다. 공을 치는 세 여인의 양쪽 곁에 타구채를 어깨에 든 채 바라보는 작은 두 여인도 눈에 띄는데, 요즘의 캐디로 짐작된다. 이 사실은 당시 골프 경기에도 여러 종류의 골프채가 필요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사녀도士女圖>는 중국에서 골프가 일찍이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틀림없다. 다만 골프의 발원지에 대한 진위는 비교사적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어떻든 13세기 말에서 14세기 말 사이 원나라에서 추환이 크게 성행한 사실은 고려 말에 타구가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타구라고 불린 골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말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마침 원나라에서 돌아온 도흥, 유운, 김사행이태조에게 “궁중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병이 생기니, 몸을 움직이는 데 타구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건의한데서 비롯되었다. 1392년태조 1년 9월 26일 태조가 개경의 수창궁 궐내에서 공을 쳤다. 이것이 곧 골프의 첫 사례로, 조선 최초의 골퍼는 바로 이성계였던 셈이다.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뒤, 1394년태조 3년 12월 7일 경복궁에서 3일간 골프 치는 것을 관람했다. 골프를 자주친 임금은 제2대 왕 정종이었다. 정치적 실권이 없던 정종은 무인 가문에서 자랐음을 내세우며 노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통하자는 것이라면서 타구를 멈추지 않았다.
격방은 이처럼 국왕의 건강을 위해 주로 궁궐 내의 스포
츠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격방은 정치적인 회동과 화합의 수단으로도 자주 이용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 계속된 왕위 계
승에서 승리한 제왕들은 권력투쟁 과정에서 소원해진 형제나 친인척들을 위무하고 공신세력을 결속시키고자 하였다. 격방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군주는 태종과 세조였다. 특히 세조는 계속되는 정치 불안 속에서 공신세력을 자주 불러 격방을 하고, 끝나면 연회를 베풀어 친목을 다짐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격방은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도 좋아한 운동이다. 흥미로운 점은 세종 때에는 야간 골프까지 즐겼다는 사실이다. 당시 사람들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 경신일庚申日에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지켜야 총명해지고 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도교의 이러한 풍습은 국왕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세종은 경신일에 종친들을 궁궐에 모아 횃불을 켜놓고 격방을 즐기며 밤을 지내기도 하였다.
타구는 이처럼 조선 초기에 궁중 스포츠로 성행하였으며, 서울 아이들의 놀이로 크게 발전해나갔다. 아예 세조 때에는 왕실의 계절 스포츠로 굳어져 봄과 가을에는 활쏘기, 여름에는 투호, 겨울에는 격방을 관례로 삼을 정도였다.
경기 방식과 규칙
격방의 경기는 몇 명이 치는 개인전과 10여 명 또는 수십 명이치는 단체전이 있었다. 격방의 채는 ‘구방毬棒’이라고 하는데,
손잡이는 두꺼운 대나무를 합해 만들었다. 공을 치는 방 부분은 숟가락처럼 생겨 오늘날 골프채와 비슷한데, 그 크기는 손바닥만 하고 가죽으로 감싸 공의 탄력이나 속도를 조절했다.채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방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그 명칭이 달랐다. 채는 붉은 색칠을 하고 수술을 달기도 하였다. 공의 크기는 달걀만 하고 나무로 만들거나 또는 차돌멩이를 썼다.
땅에 밥그릇 모양의 구멍을 파는데 ‘와아窩兒’라고 불렀다.
주로 전각 사이, 전각의 돌층계 틈 사이, 평지 등에 만들었다. 각 구멍에는 작은 깃발을 세워 위치를 표시하였다. 여러 군데 파놓은 구멍을 돌아다니면서 경기를 하였다. 구멍의 수는 정확치 않으나, 대략 10개 안팎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 제5대 황제 선종1426~1435이 궁궐에서 추환을 하는 모습은 <선종행락도宣宗行樂圖>에 묘사되어 있다. 황제가 양손에 두 개의 채를 잡고 고심하는 가운데, 앞에 서 있는 환관이 무언가 코치하는 듯한 모습이다. 주변에는 신하들이 다양한 채를 들고 서 있고, 정자와 뒤편 큰 탁자 위에 수많은 골프채가 눕거나 세워져 있다. 당시에도 골프를 치는 데 얼마나 많은 채가 필요했는지 짐작이 갈 만하다.
공 치는 자세는 무릎을 꿇거나 선 채로 공을 때리는데, 목표한 구멍에 따라 적당하게 친다. 아마 무릎을 꿇는 경우는 구멍 가까이에서 신중을 기하려고 취한 자세로 보인다. 공이 구멍에 들어가면 점수를 얻는데, 그 계산 방법이 좀 복잡했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한 사람이 구멍마다 세 번까지칠 수 있었다. 한 번 쳐서 곧바로 구멍에 들어가면 2점을 준다.
한 번에 들어가지 못하고 공이 멈춰 있는 곳에서 두 번 세 번쳐서 들어가면 1점을 얻었다. 일단 구멍에 들어가면 더 치지않고, 세 번까지 쳐 구멍에 넣지 못하면 죽는다. 이렇게 해서 한 구멍에 공을 넣으면 다른 구멍으로 이동하되 역시 치는 방법은 같았다.
처음 친 공이 다른 사람의 공과 부딪치면 죽지 않지만, 두번째 친 공이 다른 공과 부딪치면 죽는다. 상대방의 공을 일부로 맞혔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다른 구멍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얻은 점수를 합하여 승부를 내는데, 진 편은 이긴 편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복원 가치 높은 궁중 스포츠
격방은 조선 초기 100년간 아이에서 왕까지 즐기던 최고의 오락이었다. 이렇게 널리 행해지던 격방은 15세기 말인 성종대를 고비로 왕실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 까닭은 사림파 등장 이후 성리학적 질서가 정착되면서 왕도정치 이념이 확산되는 정치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성종 때에는 왕이 종친과 더불어 활쏘기를 하려 하자, 신하들이 ‘태양은 만물과 함께할 수 없고, 임금은 신하와 더불어 그 장단을 겨룰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한마디로 국왕은 모든 선비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국왕은 일거수일투족을 국가에서 정한 예법에 따라 하였고, 자유로운 신체활동은 자연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이후 성리학적 덕목과 윤리의식은 심신을 닦고 덕을 함양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자유로운 신체활동은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격방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민간에서 명맥이 유지되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현재 격방의 형태는 사라졌지만, 다행스럽게 막대기로 공을 치는 필드하키 형태의 ‘장치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조선 초기 성행했던 격방은 궁궐을 비롯한 생활 공간을 이용해 즐겼던 놀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과거 우리 선조들의 스포츠 문화를 보여주는 소중한 무형유산이다. 격방을 궁중 스포츠로 복원한다면, 한국의 개성 있는 궁중문화를 선보이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동시에, 골프 강국 한국의 문화적 저력을세계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한다.
- 글.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양학부 한국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