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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2013년 02월 - 우리의 몸짓과 소리 노래, 죽을힘을 다한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3-12-11 조회수 : 3596

 

 

위안과 희망을 주는 노래
‘신나게 원 없이 소리치련다’라는 일갈과 함께 등장하면서 ‘장사익 신드롬’의 주인공이 된 그는 내년이면 데뷔 20주년을 맞는다. 나이 마흔다섯에 신인으로 데뷔한 그는, 또래들이 은퇴할 나이에도 갈채를 받고 있으니 여전히 ‘세상에 나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여겨야 할 것 같다.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 것도 아니건만, 초겨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장사익 콘서트에는 어찌하여 그리도 많은 이웃들이 몰리는 것일까? 일곱 장의 음반을 선보이는 내내, 불황의 음반 시장에서 장사익의 음반만은 어째 그토록 사랑을 받는 것일까? 그에게 비결을 물었다. “나이 들어서 노래를 정성스럽게 하는구나, 진솔하게 하는구나를 느끼시는가 봐유. 유행가 부르는 사람들이 노래하면서 인생을 산다면, 지는 인생을 살다가 노래를 했으니 남들보다 곡절 많던 인생길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겄슈. 꽃 피고 눈 내리고 하는 사연 많은 내 노래에 공감하기 때문이겄쥬.” 듣는 이들이 공감한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의미다. 눈물은 참는 것이고, 울음은 숨죽여 울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이웃들 곁에 그들과 소통하는 장사익이 있다. 머리 한쪽이 시려오게 만드는 그의 소리는 참고 참았던 절망과 서러움을 후벼 파며, 저 깊은 곳의 슬픔까지 ‘투욱’ 건드려준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어느 틈엔가 뭉쳐 있고 맺혀 있는 것들을 눈물 흘리며 풀어내게 된다. 그런데 그가 읊조리거나 내어지르는 마디마디엔 절절함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따사로움도 들어 있다. 굽이굽이 인생길을 휘돌아오지 않고서는 낼 수 없는 소리다. 지난해 장사익은 콘서트를 열면서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반갑고, 가족, 친지, 친구를 비롯한 무수한 인연들을 만난 것이 고맙고, 뒤늦게 노래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그는 날마다, 일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장사익의 인생은 ‘노래하기 전’과 ‘노래한 뒤’로 대별된다. 노래에 목숨 건 마흔다섯, 그 이전은 늘 고단한 풍찬노숙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를 ‘밤과 낮’으로 표현한다. ‘칠흑 같은 밤’을 헤매며 살아왔기에 ‘행복한 낮’에 굽이굽이 들려줄 얘깃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목청이 좋아 시작한 웅변은 끝없는 발성연습의 장이었다. 그는 그 덕에 소리가 터졌다고 믿는다. 열댓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단소와 피리를 익히고, 태평소를 배웠다. 1992년 12월 31일, 앞으로 3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선언을 한 뒤 모든 것을 작파하고 국악에 헌신했다. 마침내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했고, 사물놀이패 ‘노름마치’에서 태평소 연주자로 활동했다. 그런데 뒷풀이 때마다 그의 ‘연주’보다 ‘소리’에 더 매료된 동료들이 ‘사익이 판 하나 내주자’고 했고, 그들이 주선한 첫 무대가 1994년 11월 홍대 앞 소극장 ‘예’였다. 이틀 연속공연이 대성황을 이루면서 태평소 연주자 장사익은 소리꾼으로 ‘새로 태어났다’. 첫 공연을 마치던 날, 뮤지션 고 김대환 선생이 ‘넌 인기 끌지 마라’ 하셨다.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삶’에 전념하라는 뜻으로, 그 한마디를 가슴팍에 새기며 산다. 눈이 펑펑 쏟아지면 먼저 달려 나가 집 앞길을 비질하는 것도, 자신의 콘서트 날조차 평소와 다름없이 7016번 버스를 타고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하는 것도, 삶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노래하는 이가 진솔해야 노래도 제대로 나온다고 믿는 장사익의 초심이자, 평상심이다.

 

죽을 힘을 다해 무대에 설 터
인생 90년 시대라고 한다. 장사익은 90의 딱 절반의 시기에 새 출발을 했다. 그리고 20년 세월 동안 ‘위안’과 ‘희망’을 주는 노래와 더불어 살았다. 노래를 재주로 삼지 않고 하루하루, 쉼 없이 노력하고 정진하며 오늘에 이른 그가 인생 90년 시대에 ‘진짜 내 인생’을 살기 위해 시도한 일, 몇 가지가 있다. 본디 장사익의 글씨는 유연하고 멋들어진 것으로 세간에 유명하다.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의 의상에도 그의 글씨체가 활용되었다. 틈나는 대로 먹을 갈아 붓을 드는 그는 최근에 오래된 필사본 천자문을 옮겨 적는, 좀 색다른 글쓰기를 시작했다. 손주들에게 주려고 시작한 작업인데, 나이 들어 읽는 천자문의 뜻이 가슴에 큰 울림으로 와 닿는다는 것이다. 그가 뜻을 새겨가며 쓰는 사경작업이 이후 어떤 결과물로 탄생할지 기대된다. 충남 ‘광천’의 질박한 사투리를 쓰는 그가 시작한 또 하나의 일은 ‘영어회화’다. 해외공연 때마다 몰려오는 외국인 팬들에게 ‘땡큐’ 같은 몇 마디 인사에 그쳐야 했던 아쉬움 속에서 그가 선택한 도전이다. 저들의 말을 십 분의 일도 채 못 알아들을지라도, 발음이 영, 토박이 충청도식일지라도 상관없다. 한류시대에 장사익이 영어회화를 시작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장사익의 소리는 ‘전율이 이는 절창’이며 ‘숨 막히도록 애절한 소리’이자,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소리’이기도 하다. 그런 장사익의 십 년 뒤, 이십 년 뒤 소리는 어떻게 변모할지, 궁금해서 그에게 물었다. 갑자기 그의 입이 함박 벙그러지고, 얼굴 가득 황홀함이 번져간다. “그때 어떻게 노랠 부를까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 뛰어유. 지금은 테크닉으로 부르지만, 나이 팔구십이 되면 가성을 쓸 수도 있을 테고, 소리가 갈라지고, 힘이 없을 수도 있을 거예유. 목소리가 쉬면 쉰 대로, 가래가 끓으면 끓는 대로 무대에 서지 않겄슈? 허리가 굽은 채로 바닥을 치면서 죽을힘을 다해 무대에 서면, 1분을 불러도 정말 좋은 노래를 들려줄 수 있겄쥬”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사십 줄의 패기 넘치는 소리와는 다른, 인생의 깊이가 담긴 노년의 소리는 그것이 들릴락 말락 한 소리일지라도 감동어린 무대를 만들 것이다. 우리 소리가 어디, 잘 부르는 것만을 으뜸으로 쳤던가. 무대 위에서 아흔 살 소리의 진정성을 보여줄 장사익을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살아온 세월만큼의 무게로 노래할 그와 더불어, 우리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글˚이윤수 (문화예술전문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