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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 역관을 조명해야 하는 이유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06-05 조회수 : 4578
조선의 역관 -  역관을 조명해야 하는 이유

역관은 의관, 율관과 더불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전문가 집단이다. 따라서 역관을 추적하는 일은 한 사회의 전문가 그룹의 의미를 탐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양성한 통사, 특히 어전통사는 중국 및 주변 국가들과의 외교업무를 통역하는 중대한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이색직업의 세계를 엿보는 일과는 무관하다. 그들의 공적인 측면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세종의 경우 그 자신이 중국어를 공부했고 세자에게도 중국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나라 사신이 방문하게 될 경우 전담으로 통역을 해줄 최고의 어전통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중국어를 공부한 이유는 뭘까? 세종 자신이 답한다.

“통역이 이뤄지고 있는 동안에라도 그 내용을 미리 알아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대답을 찾기 위함이다.”
그만큼 통역업무가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라 하겠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라의 명운과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재를 통해 일부 살펴보았지만 우리 조상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역관들은 참으로 자신들의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피땀흘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학계에서 역관들의 국가기여측면에 대한 조명이 활발해졌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즉 역관의 공공적 기능과 역할에 대한 올바른 조명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던지는 메시지가 적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조명해야 할 문제는 역관들의 국제적 기능이다. 요즘 하는 말로 글로벌리즘이다.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 하면 폐쇄적인 이미지만 떠올린다. 그러나 그런 조선에 동시통역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조선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조선을 미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보다 더 실상에 맞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주변 강국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그나마 국제 정세를 직접 체험하고 당시 수준에서 세계화된 시야를 갖출 수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사역원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역관(譯官)들은 주로 중인(中人)출신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학계에서 연행록, 즉 북경을 다녀온 사신들의 각종 기록에 대한 연구와 출판이 활발해지고 있다. 다만 이 경우 대부분 사신에만 초점을 맞출 뿐 그들을 실질적으로 도왔던 동시통역사, 즉 역관에 대한 독립적인 조명은 소홀한 편이다.

세 번째로 조명이 이뤄져야 하는 측면은 그들의 신분적 한계와 관련된 것이다. 즉 전문가를 전문가로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던 조선시대 신분체계에 대한 아쉬움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시대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물론 갈등하던 거란과의 관계 속에서 거란어 역관이 출세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고,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만큼 밀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말을 한다고해서 출세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몽골의 지배와 함께 역관의 지위는 완전하게 달라진다. 그러나 몽골 지배하 고려에서 몽골어 역관은 벼락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중인에서 귀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조선 초 개국공신인 조준의 집안이 전형적이다. 그의 증조부 조인규는 원래 무관 집안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몽골어 구사와 정치를 읽어내는 뛰어난 안목으로 충선왕의 장인이 됨으로써 고려의 대표적인 권문세가로 자리잡았다. 이런 사례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공민왕 때 반원정책을 택함으로써 역관의 벼락출세길은 다시 막히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역관들은 다시 신분적 모순의 벽에 갇히게 된다. 그 시절 외국어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특히 뛰어난 재능을 요구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은 중하층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 면에서 사역원 사람들은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누구보다 첨예하게 느끼면서 동시에 국제 질서와 우물 안 개구리 한반도의 엄청난 차이를 마음속으로만 삭혀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었다.

얼마전 한 국제대학원 원장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우리 아이들은 미국 명문대에 데려다 놓아도 손색이 없는데 이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도 자신들의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없을 것같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루트는 기존의 국내 엘리트들이 성장해가는 루트와 애초부터 구별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국내보다는 국제기구에서 새로운 활력을 찾으려 한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인데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 분의 말씀이 아무래도 틀린 것 같지 않다.

사역원 사람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거의 유일한 지식 장인(匠人)들이었다. 그들은 전문가였으며 늘 총론이 판치는 세상에서 각론에 충실했던 그들은 억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에 비해 사회의 평가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그것은 늘 울분의 쌓임과 삭힘의 삶으로 이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 글˚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