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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일제강점기 시작품을 보는 관점
일제강점기는 자주적 생존권이 강탈당하여 민족의 유구한 역사가 단절된 질곡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우리 민족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일제강점 상태의 극복 및 국권의 회복이었다.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타민족에 의해 강제로 지배를 당하는 미증유의 사태에 대하여 거족적인 3ㆍ 1운동을 기점으로 세계만방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천명하면서 민족의식을 공고히 했고, 이후 일제강점 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민족 구성원 모두 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즉 노동자ㆍ농민은 삶의 현장에서 일제통치에 저항하였으며, 독립군들은 총칼로 맞서 적과 싸웠고, 교육자들은 학교 현장에서 후대에게 민족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처럼 일제에 대한 저항은 다양한 방향에서 전개되었고, 시인들도 이 시대적 소명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대체로 우리는 압제나 외국의 지배에 대하여 맞서는 것을 ‘저항’ 또는 ‘저항운동’이라고 하며 이런 의지를 표명한 시를 ‘저항시’라고 부른다.
따라서 압제가 있는 시기에는 언제나 저항시가 나올 수 있기에 1970년대나 1980년대의 작품들을 저항시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저항시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의 작품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이민족에 의한 강제침탈이라는, 우리 역사에 있어서 미증유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시작품을 살펴볼 때는 당대의 특수한 사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특수한 사정이란, 지식인들에 대한 엄격한 감시와 통제 그리고 철저한 원고 검열제이다.
이 경우 시인들은 절필을 하거나 미발표인 채로 작품을 숨기거나 검열에 통과할 정도로 완화하는 방식 중에서 택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표현의 여건이 심각하게 왜곡된 것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발표’된 작품들은 모두 일제의 검열에서 통과된 것들로, 보다 적극적이거나 과격한 표현은 삭제되거나 발표의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발표’된 작품들은 식민 지배자이자 감독관인 일제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자신들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어긋나지 않고 거슬리지 않는 것들 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할 때 우리는 당대에 발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더욱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표현방식을 택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일제강점 전반기의 시인들 - 이상화, 김소월, 한용운
일제강점기의 시문학은 파시즘이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1935년을 중심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서구의 자유시를 도입하여 이를 토착화하는 과정으로, 시어로서의 우리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특히 우리말의 운율을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한 때다.
전기의 시들은 ‘병적’이거나 ‘퇴폐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퇴폐적이고 우울한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었는데, 이는 3ㆍ 1운동의 좌절과 문명 후진국으로서의 고뇌 그리고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세기말적 기운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시들이 대체로 죽음이나 밀실, 동굴과 같은 곳을 노래하면서 퇴폐나 퇴행에 치우친 것은 그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 하에서 발표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그만큼 새로운 정신영역을 타개한 것으로 보아도 과하지 않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일부
1926년에 발표된 이 시는 그동안 밀실과 동굴, 죽음의 세계에 칩거하며 괴로워하던 시 세계에서 비로소 햇빛이 쏟아지는 바깥, 즉 현실과 직접적으로 조우하며 이를 강인하게 헤쳐나가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서 20년대 전반기의 시들과 대별된다.즉 이제 시인은 더 이상 이유 없는 슬픔에 젖어 있지 않고 그 슬픔과 비극의 근원인 현실에 맞닥뜨려 대응하는 것이다.
그 현실은 바로 다름 아닌 ‘빼앗긴 들’이다.
즉 환상과 몽환, 이유 없는 슬픔에 젖은 밀실에서 나와 바깥 현실로 나아갔을 때 마주친 것은 조국의 강토를 유린당한 ‘빼앗긴 들’이었으며 그 근원은 바로 일제의 강제침탈에 의한 것임을 직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에 오면 들은 빼앗겼지만 봄 이라고 하는 희망마저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김소월은 우리의 전통 민요조 가락과 향토적인 서정을 조화시켜 「산유화」, 「진달래꽃」 같은 절창을 낳았는데 그런가 하면 그는 「옷과 밥과 자유」, 「밭고랑 위에서」,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같은 작품도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은 일제치하의 비극적 현실을 인식하고 조국과 국토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 새라 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 김소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일부
일제강점기의 시인들은 나라 잃은 상실감을 떠나간 ‘님’을 노래하거나, ‘집’과 ‘길’을 잃은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님’은 떠나갔고 ‘집’을 잃었으며 ‘길’도 보이지 않는 형국이야말로 당대 현실에 느끼는 참담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집도 잃고 땅도 없는 암담하고 어두운 현실에 대해서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꿈의 세계를 빌어 표현하고 있다.
김소월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산유화」나 「진달래꽃」 외에도 이처럼 일제하의 비극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조국의 열망을 구체적으로 노래한 작품들도 많이 썼다.
한편 한용운은 승려이면서 항일 독립운동가였고 광복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온몸으로 이를 실천한 실천가였다.
한용운도 그 시대의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잃은 깊은 상실감을 형상화하였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일부
집도 없고 민적도 없으며 인권도 없는 화자가 그와 대립되는 장군에게서 느끼는 능욕감과 그를 항거한 뒤에 찾아오는 슬픔은 그 근원이 결국 조국 상실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용운의 시에서 그 상실감은 상실의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듯이 그는 슬픔 뒤에 ‘당신’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즉 한용운은 항상 상실감과 슬픔 뒤에 새로운 희망을 보았으며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과 달리 미래지향적이면서 긍정적이다.
일제강점기 후반기의 시인들 - 이육사, 윤동주
1930년대 후반은 일제의 우리 민족 말살정책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기였고 한반도가 병참기지화되어 고향을 떠나는 유이민이 크게 증가한 시기였다.카프의 해산에서 나타나듯이 정치적인 저항문학은 원천 봉쇄되었으므로 이 시기 시문학은 민족과 민중의 삶을 전형적으로 반영하는 방향을 모색하면서 시적 형상화의 측면에서 도약하게 된다.
이육사는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투사로 17회에 걸쳐 검속, 투옥되었으며 1944년 북경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46년에 유고시집으로 『육사시집』이 간행된 대표적인 저항시인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絶頂)」 전문
이 시에는 간결한 시행과 압축된 언어로 극한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결단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화자가 처한 현실 상황은 ‘매운 계절, 채찍, 북방, 고원, 서릿발, 칼날’ 등 한 발 옮겨 디딜 수 없는 곳으로, 극한의 최대치에 내몰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일제 말 암흑기의 극악한 시대상황으로서 절체절명의 한계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 자 하는 냉철한 의지가 추상같이 드러나 있어서 미적 형상화의 측면에서나 정신사적 측면에서나 항일 저항시의 전범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육사 시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광야」나 「청포도」, 「교목(喬木)」 같은 작품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어서 처절한 시대, 냉엄한 시인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또 다른 저항시인으로 윤동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간도에서 태어나 연희전문과 동지사대학을 다니다가 사상범으로 피체되어 1945년 2월에 후쿠오카에서 옥사하였다.
1948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유고시집이 발간되었다.
윤동주는 다른 저항시인들과 달리 철저히 자기의 내면세계를 성찰하면서 식민지 지식인의 부끄러운 내면을 고백하는 것이 특징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전문
이 시는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염원하는 시적 화자의 소망이 잘 나타나 있다.
시대상황과 결부시켜볼 때 그 부끄러움은 곧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행동하는 지성이 되지 못하고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죄의식에서 연유한 것일 것이다.
따라서 섬세한 시인의 심성은 잎새에 이는 바람만으로도 괴로워하고 있으며 밤마다 별이 바람에 스치움으로써 거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별’이라는 영원한 아름다움의 상징을 통하여 이상을 향한 끊임없는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좌절로 매몰되지는 않는다.
「참회록」, 「자화상」 등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윤동주는 지식인의 고뇌를 순수한 자아성찰의 자세를 통하여 고백함으로써 시문학사상 뚜렷한 영역을 확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이라는 참혹한 현실에 맞서 시인들은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며 광복이라는 희망의 등불을 놓지 않고 내면에서 불타오르는 저항의식을 보석과 같은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것은 곧 길이길이 귀감이 될 우리 민족의 정신적 자산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