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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조선의 국가음악기관, 장악원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7-02-21 조회수 : 5763






 




장악원의 성격
장악원은 조선 건국 초기에는 기능별로 4〜5개의 기관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차츰 통폐합하여 장악서掌樂署라 부르다가 성종 대에 장악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연산군 대는 예외.
성종 대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장악원에 소속된 당상관으로는 장악원 제조提調 2명이 있고 당하관으로는 정3품의 장악원 정正 1명, 종4품의 첨정僉正 1명, 종6품의 주부主簿 1명, 종7품의 직장直長 1명이 있었다. 이들은 행정을 담당한 관리들이다. 실제 음악 연주를 담당한 사람은 체아직 녹관遞兒職祿官으로 정해진 급여 없이 계절마다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복무 기간 동안 급여를 받았다. 음악 전문인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는 정6품의 전악典樂이다.
<경국대전>을 기준으로 장악원에 소속된 음악인의 숫자를 보면 ‘아악악사 2명, 악생樂生 297명후보생 100명, 속악 악사 2명, 악공樂工 518명10인당 후보생 1명, 가동歌童 10명’이 속해 있었다. 후보생을 제외한 악사와 악생, 악공, 가동의 수만 합산해도 총 829명이고, 후보생을 포함한다면 981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다. 그 외의 여성 음악인 등까지 포함하면 1000명이 넘는 대규모의 인원이 장악원에서 활동을 하였다.




장악원의 음악 활동
장악원이 연주하는 음악은 일정한 의미와 계통을 지니는 것이었으며, 음악인들의 출석과 시험에 관한 규정은 법전法典에 기록되어 있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이들이 참여하는 의례는 제사, 연향, 조회, 군사 의례, 외국 사신을 위한 의례, 죽음과 관련된 의례 등 다양하였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행하는 종묘제향, 토지신과 곡식신을 제사하는 사직대제, 농사신을 제사하는 선농제, 양잠신을 제사하는 선잠제 등의 제사는 물론이고 왕실의 각종 연향에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정월 초하루와 동짓날에 군신이 대규모로 참여하는 회례會禮에서 장엄한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회갑연과 양로연이나 음복연, 각종 경사스러운 날과 여러 행렬에도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때에는 연주 규모, 용도, 목적에 따라서 전정 헌가, 전상악殿上樂, 등가登歌, 전후 고취殿後鼓吹, 전부 고취前部鼓吹, 후부 고취後部鼓吹 등 다양한 악대가 편성되어 연주를 담당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장악원은 궁중에서 벌어지는 각종 의례에 필요한 음악과 춤을 공급하였다. 이러한 의례에 수반되는 음악을 착오 없이 연주하기 위해서는 평소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했다. 실제로 왕의 연중행사 일람표를 펼쳐 보면 음악인의 연주 횟수, 연습 일정 등이 치밀하게 운영되어야 했음을알 수 있다. 장악원은 바로 이 모든 역할을 수행하였다. 음악인을 교육해야 했고, 평소 꾸준한 연습을 통해 각종 행사에서 다양한 음악을 소화하여 연주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음악 교육이 체계적인 틀을 갖추고 일정한 규모로, 일정한 내용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장악원의 책임자, 장악원 제조
장악원의 업무를 총괄하는 장악원 제조는 종1품, 정2품, 종2품 사이의 문신이 겸하였다. 이들은 국가 전례에서 쓰이는 악무樂舞가 제대로 연주되는지, 음악과 관련된 제도가 잘 운영되고 있는지 점검하였다. 장악원 제조는 음악 전문인이 아니라 행정관리자였으므로 그들의 음악 실력은 개인차가 있었다. 장악원 제조가 음악도 잘 알고 악기 연주에도 능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조정에서는 장악원 제조로 임명할 사람을 가능한 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선정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음악이 잘못되어 있다고 여겨질 때는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을 장악원 제조로 쓰기 위해 물색하였다. 성종 대에 장악원 제조를 지낸 성현成俔은 음률音律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조로 천거된 사례에 해당한다. 1493 성종 24년에 장악원 제조 유자광은 당시 경상도 관찰사로 근무하고 있던 성현을 장악원 제조로 추천하였다. 악공이나 악생의 연주에 대해 시험을 볼 때, 장악원 제조가 음률을 잘 알고 있어야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 실력을 구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성현은 장악원 제조로 일하기 위해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왔다. 유자광은 성종 앞에서 “경상 감사監司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장악원 제조는 성현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장악원 제조가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조선조 내내 유지되었다.




장악원의 음악 감독, 전악
전악典樂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음악 전문인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로, 품계는 정6품이다. 전악이 실제 담당한 일은 매우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업무로 궁중의 여러 의례에서 음악감독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 있다. 각종 제사에 쓰는 음악과 연향의 음악이 제대로 연주될 수 있도록 악공과 악생을 연습시킨 후 행사가 시작되면 각 절차에서 연주되어야 할 음악을 준비하여 각종 전례 음악 연주를 이끌었다. 악기는 물론 노래와 무용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음악을 연주할 무대의 전체 배치도 전악이 주관하였다. 악대가 음악을 연주할 때는 박拍으로 시작과 끝을 연주하는 집박 악사執拍樂師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국상國喪 때에는 악대를 벌여 놓고 자리를 지켜야하였다. 중국에서 들어온 악기의 연주 전승이 잘 이루어지지않을 때면 그 기법을 배우러 떠나기도 하였으며, 악기 구입을위해 중국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좋은 악기를 만들기 위해 좋은 재료가 있는지 여러 곳을 물색해 다니기도 하였다.
전악이 하는 일은 이처럼 다양하였다. 또 이들이 담당한 일에 따라 명칭을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였는데, 음악 연주에서 박을 담당할 때에는 집박 전악執拍典樂, 궁중의 여러 행사 때에 음악의 진행을 맡아 지휘하는 집사 전악執事典樂, 악기 제작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을 때에는 감조 전악監造典樂, 또 대오 전악隊伍典樂 등으로 불렸다.
전악은 궁중에서 열리는 여러 행사에 투입되어 조선의 음악을 이끌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음악인을 교육하는 업무를 관장한 일이었다. 장악원의 최전방에서 음악인들의 수준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데 가장 중요한 담당 자는 바로 장악원의 전악이었다.











장악원의 연주자들 ; 악생과 악공
악생樂生과 악공樂工은 조선시대 왕실의 행사가 있을 때 실제음악 연주를 맡았던 음악 전문인이다. 각자 자신이 주전공으로 하는 악기 외에 몇 개의 악기를 더 연주하였다. 이외에도 부전공으로 노래나 춤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악생은 양인良人 가운데 선발하거나 악생의 자제로도 충당하였다. 이들이 담당한 음악은 아악과 일무였다. 또 악공은 공천公賤 출신으로 충원하였는데, 향악과 당악을 담당하였다. 양인 중에서 악공을 원하는 경우 지원이 가능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악공과 악생을 힘든 업종 중하나로 여겼다. 전쟁 때 흩어진 악공과 악생 가운데 다시 돌아오지 않은 숫자가 많은 것이 그 증거이다. 실제로 악공과 악생의 숫자를 충원할 때에는 늘 어려움이 있었고, 보통 예정된 숫자를 채우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런 경우 각 지방에 할당 인원을 부여하여 서울로 보내는 식으로 인원을 조달하였는데,해당 지역은 충원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악공과 악생이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는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지는 않은 것으로보인다.
조선시대 왕실 음악인들의 월급은 매우 적었다. 장악원의 생활을 기록한 <악장등록樂掌謄錄>에 의하면 1723 경종 3년에는 당시 악공의 월급이 베 한 필로, 이들이 장악원에서 지급하는 월급만으로 생활한다면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음을 알 수있다. 악공들의 이러한 현실은 조선시대 왕실의 음악을 담당하던 음악 연주자에게 음악에 대한 자긍심 같은 것을 요구할수 없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악공과 악생이 연주하는 제사 음악과 연향 음악이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하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악공과 악생의 연습일을 법으로 정하여 보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좋은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음악을 익히고 익힌 음악을 꾸준히 연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음악 이습音樂肄習’이라 하였다. 장악원 소속 악공과 악생의 정기적 음악 연습은 이륙회 혹은 이륙좌기와 이륙이악식二六肄樂式이라 하여 한 달에 2・6일이 포함되는 엿새, 즉 2일・6일・12일・ 16일・22일・26일에 출근하여 연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기본적으로 여섯 차례 외에도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더 많은 시간을 연습하도록 해서 음악 실력을 유지시켰다.
이와 함께 정기적으로 실기 시험을 치르도록 하여 그들의 실력을 향상시켰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에는 이들의 시험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시험은 음력 1월・4월・7월・10월에 정기적으로 치렀다. 기예가 일정 정도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과외 수업을 받도록 하여 연습 실력을 향상시켰다. 이들의 실력 향상은 국가 의례의 수준 향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 외에도 춤을 담당한 여기女妓와 무동舞童이 왕실의 여러 행사에 동원되었다. 무동은 보통 8세부터 14세 정도의 소년으로 뽑아 일정 기간의 연습을 통해 행사에 참여시켰다. 여성 예능인인 여기女妓는 여악女樂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연향에서 악무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궁중의 연향에서 여악을 사용하는 일은 늘 문제가 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심화되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성리학의 심화와 함께 여악 폐지론은 늘 현실화되었고, 결국 남성이 주축이 되는외연에서 여악을 사용하는 일은 1623 인조반정 이후 폐지되었다. 그 밖에 맹인으로서 악기 연주를 담당한 관현맹인, 등가에서 노래를 담당한 어린 소년인 가동歌童 등도 왕실 행사의 실제 연주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음악인이었다.





예악정치와 국가음악
이처럼 조선왕실에서 장악원의 음악인들은 여러 의례에 참여하여 왕실의 음악을 담당하였다. 조선왕실에서 음악인들이 이와 같이 필요한 것은 예악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조선시대의 특수상황이기도 하다. 예와 악은 상보적인 관계로서 서로 독립되어 실현된 것이 아니라 어우러지는 개념으로 존재하였다. 의례와 함께 연주되는 음악이 각 절차에 맞게 착오 없이 연주되려면 준비단계들도 간단하지 않았다. 왕실의 각종 행사 일정에 음악을 맞추려면 음악인의 연주 횟수, 연습 일정 등은 매우 치밀하게 운영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와 같은 왕실의 상황은 조선시대 장악원 소속 음악인으로 활동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시대 국가음악기관인 장악원은 이러한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장악원은 예악정치 구현을 위하여 작동된 기구로 다양한 법적 규정에 의해 작동되었으며, 그 안에서 활동한 구성원은 그와 같은 틀에 맞추어 치밀하게 움직여 조선의 예와 악을 담당하였다.
 

- 글. 송지원.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