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명칭
국궁은 우리 민족의 전통 활쏘기를 지칭하는 말로서 ‘양궁’과 구분하기 위하여 1960년대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호칭이다. 과거에는 ‘활쏘기’와 ‘궁술’이란 한자말이 병행되어 사용되었다. 그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궁도’라는 호칭으로 바뀌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광복을 맞은 이후에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현재 활쏘기의 공식적인 명칭은 ‘궁도’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양궁과 쉽게 구분할수 있고, 일본의 ‘궁도’와도 차별화되는 용어로 ‘국궁’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사례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국궁 장비의 특성
오늘날 개별적인 습사나 공식 대회에서 사용하는 국궁의 장비는 전통적 각궁과 죽시 또는 개량궁시인 카본궁弓과 카본시矢이다. 각궁角弓은 길이가 짧은 단궁이지만 다양한 재료를 합성하여 제작하는 복합궁이며, 또한 크게 휘어지는 만곡궁彎曲弓이기 때문에 복원력이 높아 사거리가 긴 특성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제작 재료가 물소뿔水牛角이기 때문에 각궁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각궁과 더불어 사용하는 화살은 보통 대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죽시竹矢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북방 한랭한 지역에서는 광
대싸리 등 나무를 이용해 만든 화살楛矢도 존재하였으나, 후기에 오면서 주로 온난한 남방에서 자라는 대나무를 이용한 죽시가 군사용 화살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전통이 계승되어 현재 국궁에서는 목전은 사용하지 않고 죽시만을 사용한다. 천연 재료만으로 만들어진 각궁과 죽시는 뛰어난 성능을 갖고 있지만, 다루기가 쉽지 않고 가격도 비싸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화학재료인 화이버그라스 카본을 이용하여 만든 개량궁시를 많이 사용한다. 전통 각궁을 모델로 개발된 개량궁은 성능도 좋고 다루기도 쉬워 국궁의 대중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있다.
소위 양궁은 전통적인 서양활을 스포츠용으로 개량한 것인데, 1960년대 초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었다. 양궁과 국궁의 차이는 우선 양궁의 경우 조준기를 사용하며, 최대 사거리를 70미터로 잡고, 과녁판에 맞는 화살의 위치에 따라 점수가 다르게 배정된다. 반면 국궁은 여하한 조준장치도 부착할 수없고, 145미터 고정 사거리를 이용하며, 과녁판의 어디를 맞혀도 명중으로 간주한다. 양궁이 국궁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사거리를 이용하는 것은 경기 규칙상의 차이만이 아니라 거의 직궁인 양궁활 자체의 복원력이 만곡궁인 국궁보다훨씬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궁의 역사
국궁도 초기에는 다른 민족들의 전통 활쏘기처럼 수렵용이자전투용으로 발전하였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시대마다 국가에 의한 궁술 장려책이 실시되었고, 그 결과 궁술은 우리나라의 전통 무예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무과제도가 확립된 조선시대에는 무과 준비를 하는 한량들의 학습기관이기도 하였던 민간 사정이 발전하면서 궁술의 보급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또한 사정을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국궁문화도 형성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갑오경장을 계기로 군문에서 궁시가 사라지면서 국궁은 일시 침체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 황제가 황학정을 경희궁 내에 설립하고 국민들의 체력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궁술을 부흥시킨 것을 계기로 국궁은‘근대적’ 성격을 띤 스포츠로 변화 발전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의 시련기를 겪으면서도 줄기차게 살아남은 국궁은 오늘날 전국 370여 개의 사정을 중심으로 3만~4만 명의 동호인이 즐기는 전통 스포츠로서 확실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국궁의 문화
황실 사정인 황학정 설립을 계기로 각 민간 사정들이 부흥한 것은 국궁문화의 중요한 요소인 전래의 사풍射風과 편사놀이가 끊이지 않고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풍은 민간 사정이 융성하였을 때 사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활쏘기 문화의 핵심이다. 그 안에는 사원들을 통솔하기 위한 조직의 규칙으로부터 활터에서의 예의, 다양한 활쏘기 내기, 사원 간 친목계인 사계 등 활터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원들의 풍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사풍은 좁게는 궁사들의 문화였지만, 넓게 보면 그 당시 유교적 사회문화의 일부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풍은 시대상을 반영하며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아직도 사정에서는 예를 중시하는 활쏘기의 유풍이 많이 전승되고 있다.
한편 편사놀이는 민간 사정이 한창 번성하였을 때 한량들이 자기가 속한 사정에서 습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평소 단련한 기량을 사정 간 혹은 지역 간의 시합을 통하여 서로 비교하며 승부를 겨루던 잔치판이었다. 오늘날 각 사정 간의 대회에서 경기가 끝나고 나면 먹거리를 풍성하게 준비하여 모든 참여 궁사들 간에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갖는 것은 종래의 편사놀이가 남긴 풍습의 일부이다. 이처럼 전래의 사풍과 편사놀이의 유제로 우리는 국궁 속에서 절제와 예의를 강조하던 엄격한 문화의 유습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던 조선시대 선비와 한량의 넉넉한 문화를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양궁을 키워 낸 국궁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국궁은 오늘날 올림픽의 효자 종목인 양궁을 키워 낸 주역이다. 우리나라 양궁 선수들이 세계를 제패한 배경으로 흔히 ‘대기업의 전폭적인 후원’과 ‘과학적인 연구 및 혹독한 훈련’ 등이 주요 요인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이런 양궁을 키워 낸 요람이 바로 국궁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1960년대 초 양궁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초기의 지도자들은 모두 국궁인들이었다. 이들 지도자의 연구와 열성을 바탕으로 대한궁도협회의 조직적 지원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양궁은 존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국궁계 전체의 후원을 받으며 쾌속 성장한 양궁은 20년 후인 1980년대 초에 이르러 대한 양궁협회로 분리 독립하게 된다. 이런 역사가 있기에 ‘양궁의 혈관속에는 국궁이라는 피가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서양 궁술에 뿌리를 둔 양궁과 우리의 전통 궁술을 계승한 국궁이 함께 발전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것은 세계 궁술사에 드문 사례로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사건’이다.
국궁의 미래
국궁처럼 전통 무예가 자생적으로 근대적 스포츠로 진화한 예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럼에도 국궁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그로 인한 무관심 때문에 오랫동안 국궁은 그 본래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국궁을 접한다는 것은 전통 스포츠의 ‘재미’를 발견하는 일이며, 그 고유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의미’있는 일이다. 최근 들어 궁사들을 몰입시키는 국궁의 매력을 발견하고 사정을 찾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국궁의 스포츠적 또는 문화적 가치가 재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반가운 현상이다. 우리나라 전통 스포츠의 상징인 국궁의 밝은 미래가 기대된다
- 글. 김기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