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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여성국극, 여성 예술가의 전략과 성공 그리고 소리 내기(Voicing)
글. 권도희(한국음악학자, 경북대학교 국악학과 교수)

<사랑의 화원>에서 임춘앵(좌)과 장월중선(우)
제공: 김수미
당시 대중에게 전쟁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실에서 느껴지는 상처였다.
또한 대중들은 성장과 번영을 통해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 영웅과 그에 걸맞은 여성 간의 진솔한 사랑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여성국극은 당시 대중의 억압된 욕구를 다면적으로 해소시켜 주었다.
여성들이 만들어 낸 종합예술 ‘여성국극’
최근 드라마 <정년이>가 절찬리에 방영되었는데, 같은 이름의 웹툰 작품(서이레 글, 나몬 그림)을 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여성국극에 청춘과 미래를 건 용감하고 재능 있는 여성의 ‘분투기(奮鬪記)’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완성도나 김태리 등 여러 배우의 열연에 대중적 찬사와 감탄이 이어지면서 이 작품의 실제 배경이 되었던 여성국극도 우리 앞에 소환되었다.

드라마 <정년이>, 2024년 | tvN
이 드라마 방영 전후로 여성국극, 국극, 판소리 등과 같은 단어의 조회 수가 급등했는데, 이 중에서 여성국극을 검색하는 현상은 전에 없었던 일이라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여성국극은 출연은 물론이고 작창과 안무도 여성들이 담당해 만들어 낸 대규모의 가무극으로, 전 시기의 창극 예술 양식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출연자들이 판소리 어법과 창법으로 노래하고 또 전통적인 몸짓으로 춤을 추기도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만든 새로운 노래와 춤을 만들어 보여 주기도 했다. 여성국극 팀은 전 시기의 창극 작품인 <춘향전>을 공연하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이 새롭게 만든 이야기를 선보였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영웅과 이에 걸맞은 여성, 즉 공주 같은 권력층의 여성이거나 출중한 현명함이 돋보이는 여성 간의 이야기로, 전형적인 통속적 멜로드라마가 주를 이룬다. 특히, 화려하면서도 다정한 남장 여성과 미모의 여성들이 보여 주는 춤과 노래의 역동적 스펙터클은 당시 대중을 열광케 했다.

시간 흐름에 따른 관심도 변화
검색어: 여성국극
출처: 구글
여성국극의 찬란한 시기는 십여 년에 불과했다. 이들이 갑자기 주류(mainstream) 사회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로도 소생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또 지금도 지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어느 누구도 여성국극을 기억하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드라마 <정년이>가 여성국극을 오늘 우리 앞에 불러냈다. 왜, 하필, 이때?
여성 명인의 등장과 창조적 예술 활동
여성국극은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노래와 춤 그리고 연기, 그 어느 하나라도 부족할 경우 흥행에 성공할 수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가무극은 독주나 실내악과는 달리 대규모의 인원과 자원이 필요한 공연물이다. 그만큼 대중에게 인정받았을 때는 그 보상이 막대했다. 따라서 가, 무, 극의 표현력을 관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연 기획 및 흥행 사업 전 반을 주도할 수 있는 통제력 또한 요구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첫 여성 국극 작품이 등장할 때 당시 여류 명창이던 박록주(1905~1979)가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박록주
출처: 명창박록주기념사업회
여성국극은 1948년에 박록주를 중심으로 결성된 여성국악동호회로부터 시작되었다. 박록주는 1930년에 이미 판소리로 일가를 이루어 사회적으로 여류 명창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어 낸 인물로서 창극 공연을 주도했던 조선성악연구회(1934)의 발기인이자 이사로 활동하면서 가창력과 지도력을 두루 보여 주었던 인물이었다. 박록주는 당시 가무가 출중했던 후배 여성 예술가들, 예를 들면 임유앵(1913~1964), 박귀희(1921~1993), 김소희(1917~1995), 한영숙(1920~1989), 신숙(1911~1970?) 등을 앞세워 여성만의 공연 집단을 꾸리고 내실을 다졌다.
이상의 여성들은 분단 후 남북에서 모두 창악계·전통 무용계에서 맹활약을 했던 인물로, 임유앵은 진정한 여성국극의 시대를 열어 갔던 임춘앵(1923~1975)의 언니고, 박귀희, 한영숙, 김소희 등은 후에 가야금병창, 승무, 판소리 등에서 인간문화재(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던 여성들이었다. 그만큼 이들이 함께한 여성국극은 출발부터 출중한 가무로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여성국악동호회의 공연물 중 고전적 창극은 흥행이 부진했던 데 비해 <햇님달님> 같은 창작물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햇님달님>의 성공을 계기로 여성국극은 순식간에 대중 공연물로 입지를 다졌고, 이에 따라 여성 단체의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다수의 여성국극 단체가 속속 결성되었다. 그 결과 국극계는 순식간에 치열한 흥행 경쟁을 치러야 했다. 경쟁의 결과로써 흥행 성패는 매우 냉정한 현실이었다. 많은 여성국극 단체가 생겨났던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결성 후 얼마 안 있어 사라지고 만 단체도 부지기수였다.
개별 단체의 성공과 지속 그리고 실패와 해체가 숨 가쁘게 이루어질 만큼 치열한 경쟁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여성들은 처음으로 창조적 측면에서 매우 풍요로운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극악한 경쟁 상황이 여성의 창조적 역량을 무한대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소희, 박귀희, 박보아, 박초월, 신숙, 임춘앵, 장월중선 등이 <원앙새>, <공주궁의 비밀>, <충무공> 등의 작품에서 작창을 담당했고 김소희, 박옥진, 임유앵, 임춘앵, 한영숙 등은 <햇님과 달님>, <여의주>, <세 공주>, <연정칠백리> 등의 작품에서 안무를 맡기도 했다. 이들은 단지 공연자로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 과정에 관여하면서 창조적 예술가로 부상했다. 각종 창작물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흥행 성공은 이들이 창조적 본능을 다각도로 실험하여 단정한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내기까지 넉넉한 기회를 제공했다.
그 뿐만 아니라 흥행에 성공하면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예를 들면 초기 흥행에서 스타덤에 오른 여성들은 곧이어, 즉 1953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임춘앵과 그 일행’ (1953), ‘조금앵과 그 집단’(1954)이 대표적이다. 특히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건 여성들은 그 활동도 상대적으로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임춘앵은 가장 오랜 시간까지 해당 단체의 이름을 지키며 1963년경까지 공연을 지속할 수 있었다. 조금앵 역시 여러 여성국극 단체에서 참여를 제안받았고, 1960년대 초까지 여러 단체를 오가며 활동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여성국극은 사실상 긴 휴지 기간을 갖게 된다. 이들이 재기한 것은 1982년이었다. 그런데 이때 문화 산업계의 상황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따라서 여성국극은 전략적으로 살아남 아야 했다. 이들은 흥행보다는 전통의 재해석 혹은 예술적 다양성의 확보라는 명분과 목표로 공연 전략을 수정했다. 예술계에서는 이들의 재기와 성패에 항상 주목했지만, 사실상 흥행과 멀어지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로 최근의 <정년이> 이전까지는 여성국극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창극계의 여성 주도권 급부상
여성국극은 1948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불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광영의 불빛 밖에서 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현실은 매우 암울했다. 광복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대중은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서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했다. 동족 간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고향이 폐허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나마 이 어려운 상황을 함께 헤쳐 나갈 가족마저도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만날 수 없었던 난감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혼돈의 상황은 광복 이전부터 공고했던 질서를 의심케 했고, 특히 가부장적 질서에 균열을 만들어 놓았다.

여성국극 배우의 분장 모습
출처: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 제공: 영희야놀자
전근대적 이념과 제도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던 가부장적 문화는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했다. 일본은 이른바 내지와 조선을 제국주의적 위계에 따라 구분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조선의 전근대로부터 유전되던 각종 차별 구도를 근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따라서 광복 전에도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차별은 공고했다. 그러나 광복과 전쟁은 기존의 질서를 심하게 흔들어 놓았다. 제국주의적 차별은 물론이고, 전근대로부터 이어져 왔던 가부장적 질서에도 균열을 만들어 냈다.

여성국극 배우들의 모습
출처: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 제공: 영희야놀자
실제로 전후 복구 시기에 남성은 새로운 사회의 생산자로서 여성보다 유능하지 않았고, 또 전쟁에서 사망하거나 분단 후 월북했다. 폐허가 된 공간에 노출된 남성들의 무력함은 그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도처에서 발견되었으며, 창극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1930년대부터 조선성악연구회는 창극 활동을 주도했다. 또한 이후로 해방 직전에 몇몇 창극단이 생겨나 야심 찬 행보에 나섰지만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박동실, 조상선, 공기남, 정남희 등 능력 있는 남성 창극 인들은 대부분 월북했다. 당시 남한에 남아 있는 남성 창악인들은 광복 전에 그다지 명성을 얻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여성국악동호회가 등장해 흥행에 성공할 무렵 남성이 주도했던 창극단의 활동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조선성악연구회 말기에 합류해 이를 경험 삼아 창극단을 꾸렸던 남성으로는 김연수(1909~1974)가 거의 유일했다. 다만, 그는 여성국악동호회의 구성원들보다 늦게 상경했고, 노래 학습 역시 여성들 보다 충분치 못했다. 또한 춤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도 사실상 전무했다. 그럼에도 그는 중동중학을 졸업한 창악계의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연수의 창극 활동은 가무의 기량이나 지도력에서 기생조합에서 체계적 가무 학습을 받고 조직 생활을 경험 했던 여성들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물론 김연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혼성 창극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지만 여성국극과의 경쟁에서 이기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부인 강숙자를 내세워 우리국악단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51년에 대구에서 박황과 그의 동생 박후성(1922~?)도 창극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역시 여성국극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이들도 백도화를 앞세워 화랑여성국극단을 꾸렸다. 그러나 남성을 대리하던 국극 단체는 여성 주도의 단체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당시 남성 창악인은 배우의 가무와 작창 그리고 안무를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고, 또 국극으로 몰려들고 있는 여배우들의 관심을 자신들에게 돌릴 만한 능력도 없었다.
이러한 현실은 여성국극 단체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났고, 더 나아가 거의 여성혐오적 논리로 이들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창극 대본의 창작 등에 관여했던 박황은 여성국극 단체가 난립하는 바람에 혼성 창극단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해산되었으므로 여성국극은 창극계를 파탄시킨 속죄할 수 없는 죄과가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던 중 1960년대 이후 군부독재가 시작되면서 가부장적 질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이와 동시에 여성국극을 향한 혐오성 논설은 아무런 검증 없이 여성국극의 급작스러운 퇴장을 설명하는 정설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광복과 전쟁을 거쳐 군부독재 시절에 이르기까지 음악계에서 확인되는 남성 주도력의 급격한 몰락은 창극계의 공백을 초래했다. 이때 노래와 춤에 대한 체계적 학습과 뛰어난 역량을 갖춘 여성 예술가들을 결속시키고, 또 각각의 역량을 돋보이게 하고 더 나아가 창조적 산물로 만들어 내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던 여성 지도자들에게 창극의 주도권이 넘어가고, 국극이라는 대안물이 생겨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간파하고 기약할 수 없는 흥행에 대한 각 종 책임을 자발적으로 떠안고, 한편으로는 성공의 벅찬 영광을 기꺼이 즐기고자 했던 여성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기억해야 할 일이다.

평양기생학교 관련 사진 엽서
소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출처: e뮤지엄
도시적 에로티시즘의 전담자
근대 이후의 대중 예술은 미디어 산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광복 직후 문화 산업에 투자되었던 자원과 자본은 거의 모두 빠져나갔다. 왜냐하면 인적 자본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일본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적 자원을 수습하고 부족한 자본을 모아 가까스로 문화 산업에 대한 재건 의지를 밀고 나가려 할 무렵, 전쟁이 터졌다. 따라서 그나마 재기하려 했던 미디어 산업은 주춤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후 음반계와 영화계가 차츰 소생하고는 있었지만, 음반계와는 달리 영화계의 성장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그런데 음반계에서는 전과 다른 변화가 있었다. 광복 전에 이미 서양식으로 조정된 노래가 주류가 되었고, 혹은 미국식 대중음악이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 양식을 지닌 음악은 음반 산업계에서 점차 밀리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럴 때 전통적인 음악 어법을 골고루 다루고 있는 여성국극은 점차로 주변부로 밀려나던 음악을 다시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여성국극에 인기가 몰리던 시절에 영화 산업은 당국의 이중 검열(사전 시나리오 검열 및 사후 필름 검열) 때문에 당국의 이념이나 기준에 반하는 작품은 생산할 수 없었다. 표현에 큰 제약을 받으면서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한 탓에 결과적으로 영화는 흥행에 부진했다. 예를 들면, 당국은 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을 거부했고, 또 일제강점기로부터 유전되었던 각종 모호한 단속 조항들, 예컨대 ‘미풍양속을 해치는 내용 ’ 등의 조항을 근거로 검열의 명분을 작동시켜 창작의 자유를 억압했다. 특히 애욕의 표현에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당시 대중에게 전쟁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실에서 느껴지는 상처였다. 또한 대중은 성장과 번영을 통해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 영웅과 그에 걸맞은 여성 간의 사랑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여성국극은 당시 대중의 억압된 욕구를 다면적으로 해소시켜 주었다.
여성국극에서 보여 주는 전쟁이란 신라나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역사극의 한 장면 같지만 실제는 사실과 무관한 설화적 공간이나 환영적 세계 속에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국극에서 보여 주는 전쟁이라는 주제는 이로부터 비롯된 슬픔과 처참함을 서서히 응시하고 치유할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필름 속에서 검열당하고 삭제당한 애욕의 표현들이 여성국극에서는 허용되었다. 비록 남장 여성과 여성 간에 이루어지는 에로티시즘이기는 했지만 여성국극에서 보여 주는 것은 내 좌석 바로 앞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기도 했다. 도시의 욕망이라는 양분으로 성장하는 것이 대중문화 산업의 본질인 한, 당시 대중에게 억압된 것들을 한 무대에서 보여 주는 여성국극은 대중들의 환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특히, 성애의 표현이 특정한 조건하에 허용되었던 점은 여성국극의 급성장을 뒷받침했다.

남장 여배우의 일상
출처: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 제공: 영희야놀자
특정 조건이란 여배우 간의 신체 접촉을 말한다. 창작품에 대한 검열을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남녀 간의 에로티시즘의 표현이 여성국극에서만 허용되었던 것은 배우들이 모두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다정하고 친밀한 신체 접촉은 적극 권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모성의 범주 속에서 크게 포용될 수 있는 신체 접촉, 즉 다정한 행위를 극적으로 보장하는 여성 배우들 간의 신체 접촉은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와 같이 그 당시에도 총명한 관중은 제도적으로 허용된 것을 다른 방식, 즉 억압된 것에 대한 긴장감을 해소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여성국극단 역시 이 점을 정확히 포착하고 남장 여성의 역할을 강화하고 관리했다. 이러한 특징은 혼성 창극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이었고, 엄격한 검열이 시행되는 영화에서도 보여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관객들이 긴 줄을 서가며 국극 공연장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국극이 다른 대중 예술에서 보여 줄 수 없는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여성국극은 당시 억눌려 있던 대중의 욕망을 판타지에 투영시켜 보여 주었다. 그러나 여성국극은 사실상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기도 했다. 왜냐하면, 여성국극의 남장 여배우들은 무대 밖 일상에서도 남성복을 입고 도시를 활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 국극이 제시하는 환상의 세계를 허물게 했다. 무대와 무대 밖에서 보여 주는 인물의 진정성은 에로티시즘을 원하던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에 적합했다.

남성 분장을 한 여성국극 배우 조금앵
출처: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 제공: 영희야놀자
여성국극의 가능성과 미래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은 미국을 시작으로 널리 확산되어 나갔지만 유독 한국 사회에서 강화되어 나타났다. 웹툰 <정년이>는 바로 이 무렵에 등장했고 이와 연속선상에 드라마 <정년이>도 나타났다. 다만, 드라마 <정년이>의 흥행 성공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고발하고 저항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적인 대안을 바라는 대중적 기대의 코드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수십 년간 잊혔던 여성국극이 호출되고 있는 이때에 감히 여성국극의 미래를 이야기해 본다면, <정년이>같이 꿈꾸는 여성이 있는 한, 박록주와 임춘앵 같은 강인한 지도력과 도전욕을 갖춘 여성이 활동하는 한 그리고 고된 수련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창조적 성과를 내는 것을 즐기는 여성 국악인이 있는 한 미래는 밝지 않겠는가. 여성 예술가들이여, 경쟁을 두려워 말라! 살아남는 자의 서사야말로 우리 모두의 꿈이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