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2013년 4월. 접해지는 소식들은 연속된 북한의 전쟁 위협, 보스턴마라톤 폭탄 테러, 스촨성 지진을 비롯해 서민들의 시름을 걷어주지 못하는 경제 상황들이다. 이와 같은 때에 전설의 관악기인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멋지게 연주하여 이 세상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든다. 용이나 봉황과 같은 상서로운 동물을 꿈꾸며 개인과 사회, 국가의 이상향을 꿈꾸었다면, 악기로는 만파식적을 통해 현실적 소망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만파식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이야기가 재미있게 실려 있다.
“신문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를 받들어 바치니, 왕이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용이,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께서 이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적(笛)을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적(笛)을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당시 신라에는 가야에서 넘어온 가야금과 고구려에서 전해온 거문고가 있었지만 만파식적이 보물창고인 천존고(天尊庫)에 국보로 삼을 정도로 신라에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악기로 인식되었다. 만파식적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괴이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였으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여러 유물 자료에 의하여 만파식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4월 초에 신라의 관악기를 보러 국립동경박물관 아시아관 한국실을 찾았다. 39cm가량 길이의 가로로 부는 횡적(橫笛)인데 꽃무늬가 그려져 있어 화문횡적(花紋橫笛)이라고 부른다. 신라 때의 유물로 전해지는 화문횡적은 우리나라에는 없고 일본 천리대학박물관에 1점과 국립동경박물관에 1점 등 2점만이 있다.

국립동경박물관 소장 화문횡적은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創武之助)가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수집한 유물을 오쿠라컬렉션보존회에서 1981년 기증한 것이다. 화문횡적의 취구와 지공 주위에 꽃무늬를 둘러 새겨놓은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고대 악기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하면서도 수준 높은 신라인의 예술성을 볼 수 있다. 또한, 악기 몸통 취구 상단부에 고리 모양을 붙여놓음으로써 악기 기능보다 신성과 권위를 상징함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학자 다케토니 토시오(竹谷俊夫)는 화문횡적이 신라 악사가 죽자 무덤에 함께 묻어둔 부장품(副葬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악지(樂志)에 의하면 신라의 관악기로 대금(大笒), 중금(中笒), 소금(小芩)의 삼죽(三竹)이 소개되어 있다. 현재 대금은 피리와 함께 관악기의 대표적인 악기로 전해지고 있으며, 소금은 서양의 피콜로처럼 작으면서 가장 높은 음역의 소리를 내고 있다. 신라의 대표적 악기로 자리 잡은, 가로로 부는 형태의 삼죽(三竹)은 사특함과 더러움을 씻어내어 우아함과 올바름으로 들게 한다는 음악적 관념을 안고 있었다.이와 같은 관점에서 신라의 불교 유적에서도 횡적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경북 경주시 감은사 터 서삼층석탑 내에 전각모양사리기 내함(內函)에 횡적을 연주하는 천인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경주시 안압지에서 발견된 동제주악천인상(銅製奏樂天人像)을 보면 적(笛)을 가로로 비스듬히 비껴 잡고 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양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신라인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아름다운 가락들을 펼쳐내고 있다.

일본에 전하고 있는 화문횡적이 『삼국유사』설화의 만파식적을 나타낸 것인지, 크기로 보아『삼국사기』의 소금(小芩)에 해당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인의 관악기임에는 틀림없다. 신라 당시 만파식적에 대한 소문은 일본에도 알려져 일본의 왕이 금 1천 냥으로 신라왕에게 “과인이 귀국의 신령한 물건을 한번 보고 돌려드리고자 합니다”라고 간청을 하였지만 신라왕은 3천 냥을 일본 사신에게 주고 사양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일본의 소원이 천년을 넘어 이루어진 것일까? 신라의 적(笛)은 이제 한국을 떠나 일본에 안착을 하였으니….
글˚주재근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