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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이란 맺고 풀고 조이고 덜고 더하면서 이루어지는 신묘한 조화
판소리 고법(鼓法)이란 판소리에서 고수(鼓手)가 북을 치는 기예를 가리킨다. 소리판 고수는 장단 뿐만 아니라 북채로 소리를 끄집어내는 존재다. 추임새로 소리꾼과 청중 사이에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장단을 조절해 소리의 완급을 보완하기도 하고, 때로는 명창의 상대역을 맡아 고무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반주자이자 연출자이자, 지휘자이며, 배우이기도 하다. 적어도 창자가 최고의 실력발휘를 할 수 있도록 북장단으로 기운생동하게 만드는 일, 그게 바로 고수다. 그래서 소년명창은 있어도 소년고수는 없다고 했다. 명창은 어린 나이에도 이룰 수 있지만, 고수만큼은 경륜이 뒤따라야 제대로 된 장단을 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최고의 소리꾼도 좋은 고수를 만나지 못하면 명창되기 어렵달 만큼 고수가 으뜸이라 하여, ‘1고수, 2명창’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소리가 살(肉)이라면 장단은 뼈(骨)’라 할 정도로 고법의 중요성은 강조되었던 것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3월 14일, 고수 김청만(金淸滿) 명인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분야의 예능보유자로 발표했다. 고법분야에서 다양한 공연활동과 활발한 제자양성을 통해 전승의 맥을 잇는 탁월함을 인정받은 것이다. 1991년에 준보유자로 지정된 이래 무려 22년 걸려 예능보유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받게된 소회를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만 했다. 그러면서 연습실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키며, “저 두분 선생님을 모신 인연이 오늘에 이른 것”이라며 겸손해 한다. 한일섭 명인과 김동준 명인이 그 두분 스승이시다. 서울생활은 한일섭 명인 댁에 머물면서 시작되었다. 그 댁에서 아쟁과 고법을 배웠다. 유독 그를 어여삐 여기셨던 인자한 스승이셨다.
“선견지명이 있으셔서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는 고수가 드물 것이니 판소리 고법을 제대로 열심히 익히라고 강조하셨지요.”
김청만은 1982년 국립창극단에 아쟁주자로 입단한 이래 김동준 명인 문하에서 스승이 1991년에 타계하실 때까지 체계적인 고법을 익혔다. 김동준 명인은 본인이 소리꾼으로 활동한데다 천재적인 기량을 지녀서 소리에 어울리는 다양하고 화려한 북가락을 구사한 명인이었다. 소리꾼과 청중을 이어주는 ‘탁월한매개자’로 유명했던 김동준의 장단은 고스란히 김청만에게로 이어졌다.
연습에 몰두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장만한 명인
1946년 목포에서 태어난 김청만은 어려서 마을 걸립패의 장단에 반한 뒤 홀로 소리장단을 익혔다. 13세 때 광주의 최막동과 전경환에게 설장구와 꽹과리를 정식으로 배웠으며, 15세에는 또래의 아이들을 모아 달성농악단을 구성, 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할 정도로 ‘넘치는 끼’를 발휘한다. 이후 시대를 풍미했던 임춘앵 여성국극단에 머물며 객지생활을 했다. 아쟁 연주가 주된 활동이었지만 더러 장구반주와 판소리 공연 때면 탱자나무 북채를 잡았다. 매서운 단장으로부터 제대로 하라는 언성과 함께 누구라도 뺨을 맞는 게 일상이던 시절, 유독 그가 공연 마치고 내려오면 임춘앵 단장은 “오매 내새끼야, 너 대체 어디서 왔냐?”며 반겨 맞았다. 그럴 때마다 어린 김청만은 눈물이 핑 도는 감격속에 ‘아, 이 길이 내길이구나’라고 되뇌이곤 했다.
선한 인상의 김청만 명인에게도 견딜 수 없는 모욕에 ‘장구통을 두 개나 깨먹은’ 젊은 날의 전력이 있다. 반주하러 갔는데 ‘굿쟁이 왔다’며 참을 수 없는 갖은 수모를 당했다. 울분을 달래다가 마침내 북채를 내던지고 붙어버린 것이다. 객석이 인산인해를 이루던 악극단 시절엔, 연주자들이 앉을 방석위에 건달들이 앉아버렸다. 여성단원들과 건달 사이에 거세게 시비가 붙을 때, 그는 냅다 장구통을 내던졌다. 물론, 악기가 귀하던 시절인지라, 그날 밤 부서진 장구 조각조각들을 주워 모아서 다시 붙이느라 밤을 지새야 했지만...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김청만의 예술혼은 꽃을 피우게 된다. 창극단은 판소리 다섯바탕 무대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곳이라 판소리 고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었다. 공부욕심에 그는 가장 먼저 오토바이를 장만한다. 오전 10시 출근 대신 새벽 6시 출근을 택해 신새벽이면 오토바이를 몰아 남산길로 향했다. 큼직한 녹음기 하나 둘러메고 국립극장 경비를 깨우곤 연습실로 들어간 그때부터 출근시간까지 4시간은 오로지 가락에 몰입하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시간이었다. 1988년, 서초동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자 4대1의 경쟁률을 뚫고 민속악단의 타악주자가 되었다. 다양한 악가무 공연에 참여하고, 예술감독을 연임하는 세월동안 장구 장단에도, 판소리 고법에도 최고가 되었다.
“열번 공연에 한두번은 공연 마치고도 성에 차지 않아 걸릴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후회하기 보다는 왜 틀렸을까를 분석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지요.”
늘상 찬사만 들었던 것은 아니다. 박동진 명창으로부턴 난생 처음듣는 걸진 욕설들을 한번씩 들었다. 식은 땀이 흐르고 온몸이 ‘쫄아드는’ 느낌일 때마다 2시간 공부 할 것을 4시간씩 늘여가며 스스로를 채근했다. 끝없는 정진이야 말로, 김청만 명인의 지나온 일과였던 것이다.
고수들은 연습 때나 무대 위에서 허리를 곧추 세우고, 책상다리를 한 채 꼼짝 않고 오래도록 앉아있다 보니 척추와 관절이 성치 않다. 직업병이다. 젊은 소리꾼의 보성제 춘향가 완창공연을 앞두고 하루 어느날 5시간 내리 연습에 든 적이 있었다. 쉬지않고 지속된 강행군 속에 그만 척추가 내려 앉고 말았다. 척추수술을 받은 이래 허리보호대를 착용하고 무대에 오르면서도 김청만 명인은, 무대위에선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정자세로 고운 자태를 유지해야 하는 게 진정한 고수라고 믿는다.
“적벽대전에선 북통에서 불나도록 북을 쳐야 하고, 청이가 인당수에 빠질 땐 하염없는 슬픔의 장단을 맞춰야 합니다. 울리고 웃기는 청자를 따라서 추임새와 고법을 어떻게 쏟아붓는가가 고수의 몫이죠. 소리꾼의 비유를 잘 맞추는 고수가 가장 좋은 고수라고 생각합니다.”
명창마다 호흡이 달라 고수는 항상 명창의 입을 보며 박자와 강약을 조절해야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다. 사오십년 고법으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풀어주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무대에 오르면 호흡을 맞추지 않고도 그 사람 마음을 ‘단박에 척’ 알 수 있다. 꿰뚫어 읽게 된 것이다. 도당굿에 모듬북까지 한국의 장단은 이제 그의 손안에 있다. 특히 김청만 명인은 춤꾼의 춤가락까지 유파별로 꿰뚫고 있다. 자연히 춤 분야의 예능보유자들까지도 ‘김청만, 당신밖에 없다’며 찬사를 보낸다. 춤사위 또한 판소리처럼 늘어지면 늘어지는 걸 당겨주고, 분주하면 장단을 늘여주면서 춤꾼들이 최대한 편안하게 출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에도 귀기울이는 명인
한국의 장단이란 장단을 다 칠 줄 아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가 분주한 발걸음을 멈춘 채, 예의주시하는 때가 있다. 축제 현장이거나, 장터거나, 고속도로 휴게소거나 가위질 소리로 타악 연주를 하는 엿장수를 만날 때가 그 때이다. 그는 그들이 가위를 ‘어떻게 갖고 노는지’에 관심이 많다. 새로운 타법, 남다른 솜씨로 대중과 소통하는 면면을 살피며 장단 가락에 귀를 열고 서있는 고법 대가의 모습이란...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두고 우직하다고 했다. 순수하다고 했다. 인품을 닮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세속적인 권위나 지위라곤 다 내려놓은 스승이었다. 심지어 대중 캠프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강습생에겐 오히려 칭찬과 함께 용돈까지 챙겨주는 스승이었다, 이미 스물여덟명의 직계제자들을 위해 김청만 명인은 개인레슨을 안한지 오래 되었다. 대학강의나 강습회을 통한 대중강의는 맡지만, 찾아와 김청만 명인의 제자가 되길 꿈꾸는 이들을 스물여덟명의 직계제자들에게 적절히 연결해주고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 김청만 명인은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제자들에게 길을 터주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진 기량을 다 주고 가는 거”라고 했다. 이토록 하염없이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비우고 살아온 소탈한 한평생이야 말로, 김청만 명인이 이땅의 인간문화재로 존경받는 비결이 아닌가.
글˚이윤수 (문화예술전문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