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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성리학의 국가: 백자를 왕실 그릇으로 삼다
성리학의 국가인 조선은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만큼 500년간이나 왕조를 유지한 건강한 나라였다. 조선의 선
비들은 외래문화를 흡수하면서도 고유문화 창달을 이루어 내었고 철학과 문예를 겸비한 당대 핵심적 문화그룹을 형성하였
다. 시서화詩書畵에도 능하여 실제로 산수·자연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통해 조선시를 짓고 훌륭한 문장을 남겼으며, 고유한 화법을 창안하였다. 이들은 꾸준히 학예적 역량을 키우며 선비가 지녀야 하는 아름다움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고려시대보다 더욱 검약을 강조하였고, 금은기보다는 사기와 칠기 사용을 권장하면서 검박함의 추구와 사치 배격의 강한 의지를 보였다. 세종시대 화려한 장식의 고려청자와 달리 장식을 최대로 절제한 순백자를 왕실용 그릇으로 선정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세계도자사를 주도하던 중국이 원나라 이후 청자보다 백자를 황실 그릇으로 주로 사용하고 명나라 초기 조선 왕실에 여러 청화백자를 선물한 것도 조선백자 탄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순백의 색상에 고려청자보다 훨씬 단단한 그릇인 백자
는 고려청자와는 다른 원료와 제작방법이 요구되었다. 그릇의 종류로는 장식 안료에 따라 청화백자·철화백자·동화 백자가 있으며, 이 중 청화백자는 주 안료인 코발트, 즉 회회청이 국내에 생산되지 않아 중국에서 사 와야만 하였다. 당연히 귀한 그릇으로 왕실 연회와 하사용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유교 성리학의 중심인 의례의 생활화를 중시하던 조선에서 제사그릇이 백자로 만들어진 것은 당연하다. 티끌 하나없이 완벽한 그릇보다는 간혹 휘기도 하고 점도 보이고, 움푹 파인 곳도 있는 평범한 우리 얼굴 같은 그릇이 제작되었다. 이는 우리 백자 원료가 중국이나 일본과 달라 완벽하게 하얗게 만들기 힘들고 불 속에서도 제 모양으로 버티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는 남에게 감춰야 할 우리만의 약점이었지만 이를 오히려 표면에 내세웠다. 조선 선비들이 지향한,즉 자신의 분수를 아는 지혜와 상통하는 ‘수분守分의 미’ 그자체인 것이다.
왕실용 백자 제작: 광주 관요와 분원이 도맡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각 지방 가마의 진상용 자기를 골라 사용하지 않고, 별도의 왕실용 백자 공장, 즉 관요를 한양 근교에 설치하였다. 설치 장소는 원료와 완성된 백자를 한양까지 운반하기 편리하고 전통적인 백자 생산 전통이 있던 경기도 광주였다. 관요의 운영은 사옹원의 분원에서 맡도록 하였고, 왕실 종친들이 경영에 관여하여 왕실의 미적 취향과 제작의도가 백자에 반영되도록 하였다. 관요에서 사용하는 원료와 제작을 맡은 장인들은 전국에서 수급·입역하였고, 연료는 광주 관요 인근 사옹원 땔감처에서 조달하였다. 광주 관요는 1752년 영조 중반까지는 연료 문제로 10년에 한 번씩은 사옹원 시장柴場 안에서 이전을 거듭하였는데 이전에 동원된 사기장들에게는 커다란 고역이었다. 장인들에 대한 대우도 충분하지 않았는데 왕조별 경제 사정에 따라 달랐다. 또한 분원 사기장은 국초 <경국대전>에는 380명이 등록되었고, 이를 좌·우번 둘로 나누어 190명씩 관리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수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사기장의 수와 근무 기간도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순조
33년1832 기록에는 분원 사기장이 500명이고, 연간 150명씩 번갈아 관요에서 작업한다고 되어 있다.

백자의 변천: 시대를 반영하다
조선시대 백자는 왕실 전용으로 사용되었기에 왕실의 일상 생활 용기뿐 아니라 왕실 연회와 제례 용기 등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장식용 백자는 물론 왕실의 태를 보관하던 태항아리와 능묘에 같이 수장하였던 명기들과 묘지명도 백자로 제작되었다. 사대부를 표방하는 필통과 연적 같은 문방구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광주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는 시대마다 양식과 제작 특성이 달랐다. 조선 초기에는 상감백자와 순백자, 청화백자 등이 주를 이루었다. 양식적으로 중국 명나라 백자를 많이 참고하였지만 그 내용은 달랐다. 중국에서 코발트 안료를 사 와야 생산이 가능한 청화백자의 경우 화려한 당초문·화조문·어조문 등을 위주
로 사발·대접·접시와 항아리 등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조형적으로 중국이나 일본 그릇처럼 철저한 좌우 대칭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빈대떡 두 장을 마주 합쳐 놓은 듯한 편병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이다. 이는 조선백자의 원료 특성상 가마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변형으로 인위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7세기까지는 동궁용인 청자도 생산되었고, 산화철을 주 안료로 하는 철화백자 역시 조선 말기까지 제작되었다.
17세기 들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졌고, 엄청난 사회경제적 위기의 시기를 보내야 하였다. 왕실용 백자 생산도 여의치 않았고,고가의 안료를 중국에서 사 와야 하는 청화백자 생산도 중단되었다. 이를 대체하여 제작된 철화백자는 화려함은 청화백자에 뒤처지지만 대범한 필치와 파격적인 문양 등을 선보이며, 이 시기 중심 백자로 자리하였다. 매죽문이나 포도문 등에서 문인화를 보는 듯한 품격 있는 필치를 보여주었고, 한편으로는 왕실 표상인 용이나 호랑이 등이 해학적이고 파격적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나라는 극도의 긴장상태였지만 시국을 풀어 나가는 사람들은 당당함과 여유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17세 후반에서 18세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달항아리도 사실은 동그랗기보다는 어느 한쪽이 약간 크거나 작은 짱구였다. 구연부도 제대로 원을 이룬 것은 찾아보기 불가능하다. 배 한가운데는 영락없이 상하를 접합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공과 장식을 거부하고 소박함 그대로를 드러낸 ‘수분의 미’ 그 자체였다.
18세기 들어 숙종대 경제 부흥과 함께 광주 분원의 제도 정비도 이루어지고, 청과의 관계 회복에 따라 눈같이 하얀 청화백자 제작이 재개되었다. 민간에도 백자 사용을 허용하면서 수요층이 확산되었고, 이전에 보이지 않던 산수문과 길상문이 주 문양으로 등장하였다. 산수문의 경우 중국 동정호 부근의 여덟 가지 경치를 그린 소상팔경이나 각종 화보를 참고한 여러 산수문양이 항아리와 병 등에 시문되었다. 양반 수의 증가에 따른 문방구류의 제작 증가와 반상기를 비롯한 다양한 식기류의 등장은 문화 부흥을 이끌던 숙종에서 영정조를 잇는 진경시기의 그릇 문화를 더욱 화려하게 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북학과 청조문화淸
朝文化의 영향을 받아 중국 문물의 유입이 봇물을 이루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중국 그릇이 조선의 상류층을 유혹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선백자는 실용 기명의 제작 확산과 십장생이나 박쥐문 같은 다양한 길상문과 대범한 구도 및 배치 등 이전과 다른 양식을 선보였다. 반상기와 다양한 문방구·제기 등도 활발하게 제작되어 수요층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선비의 미: 21세기로 잇다
조선시대 임금을 포함한 선비들은 500년 역사를 이끌며 왕실을 표방하는 품격의 미를 지향하는 백자의 소비층이자 후원자였다. 당연 조선백자에는 이들의 사상과 미감이 녹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19세기 말 관요가 민영화되고 여러 백자 생산 공장들이 시장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점차 수요층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조선의 쇠망과 함께 조선백자는 긴 정체의 터널에 빠져들고 말았다.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맞아 다종다양의 세계 그릇이 우리 식탁과 장식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서양과 일본 자기들이며 전통적인 조선백자를 계승하거나 전승한 그릇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조선백자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소박과 장식성을 아우른 검박과 절용의 미,섬세함과 격조 높은 필치의 문양 등 조선백자의 장점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 현대화된 공간과 기호에 적합한 형태와 장식으로의 변용 의지가 있다면 새로운 조선백자는 세계인의 그릇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