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기나긴 학습의 여정
조선 후기 대표적 석학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 중일 때 아들 정학유에게 여러 편의 서신을 보냈다. 그중 한 편에서 아들이 하늘로 솟구치는 기상을 갖기 바라면서, 비록 재난을 당하더라도 청운(靑雲)의 뜻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오를 기 상을 품고서 천지가 눈 안에 들고 우주가 손바닥 안에 있듯 이 생각하고 있어야 옳다
조선시대 청운의 꿈을 안고 관직에 나가는 경로는 다양 하였다. 문과나 무과를 비롯해 조부나 부친의 공적에 의거하 여 관직에 나가는 음서(蔭敍) 등이 있었다. 흔히 기술관이라 고 하는 사람들은 잡과(雜科)를 거쳤다. 이 중 가장 선망하는 것은 문과였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뒤에도 문과에 응시하 는 사례가 있는 것이 이를 대변한다. 그런 만큼 문과에 급제 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며, 상당한 학습 과정이 필요하 였다.
앞서 예로 든 다산 정약용은 4세 때부터 『천자문』을 배 우기 시작하였고, 7세 때에는 오언시(五言詩)를 짓기 시작하 였다고 한다. 그리고 9세 때 작품을 모아 『삼미집(三眉集)』이 라는 저작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10세 때부터는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에게서 경전과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런 모습은 비단 정약용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대부 분 사대부 가문에서 진행되었던 학습 과정이다.
가학(家學)에서 출발한 학습 과정은 이후 10대에는 주 변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선생님을 찾아가거나 사숙(私淑) 하면서 실력을 키웠다. 정약용은 16세 때 선배 학자인 성 호(星湖) 이익(李瀷)의 저서를 접하고 학문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를 시 작하였다. 과거 공부의 과정은 지난하였다. 정약용보다 후 대 사람인 서찬규(徐贊奎, 1825~1905)는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 친척 형과 함께 은적암(隱跡菴)이라는 암자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약 1년간에 걸쳐 공부한 내용을 보면 『시경』 『중용』 『가례(家禮)』 등으로, 읽은 책은 거의 암송하였다.
이렇게 공부하는 과정 후 이른바 소과(小科)라는 생 원·진사시에 응시하였다. 정약용은 18세 때 해당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떨어졌다. 지방에서 치러지는 생원·진사시 의 열기는 더욱 대단하였다. 1587년 8월 경상도 안음(安 陰, 현재의 함안 안의면)에서 행해진 향시(鄕試) 감독관으 로 파견되었던 권문해(權文海)의 기록에 따르면, 문예(文 藝)를 시험하는 진사시에는 1,600여 명이 응시해서 1,300 여 명이 답안을 제출하고, 경전에 대한 이해 정도를 측정 하는 생원시에는 1,400여 명이 응시해서 1,060명이 답안을 제출하였다. 이날 치러진 향시의 합격자는 진사시 7명, 생 원시 17명이었다. 진사시는 185대 1의 경쟁률을, 생원시는 62대 1의 경쟁률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적지 않은 경쟁률이다(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http://story. ugyo.net, 이하 출전 생략함).
머리에 어사화(御賜花) 꽂기
소과를 거쳤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과(大科)인 문과에 급제해야만 일단의 방점을 찍을 수 있는 것이다. 본 래 소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해서 공부를 더 한 뒤에 대과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교육 제도와 시험 제도를 일치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런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아서 생원·진사가 아닌 유학(幼學) 신분으로서도 대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조선의 문과는 3년마다 치러지는 정규 시험인 식년시 (式年試)와 부정기적인 별시(別試)로 운영되었다. 식년시 의 경우 3단계 시험을 거치는데, 첫 단계인 초시는 전국 8 도와 한성부·성균관 등에서 실시하고 1차 합격자를 선발 하였다. 이어 두 번째 단계인 복시(覆試)에서 33인을 선발하고, 마지막 단계인 전시(殿試)에서 이들의 등급을 결정 하였다. 이 과정은 응시자에게는 고난의 과정이었다. 1844 년 2월 박득녕(朴得寧, 1808~1886)과 그의 형이 과거에 응시하였다. 이때 박득녕의 형은 한성부에서 치러지는 시 험에, 박득녕은 대구에서 치러지는 시험에 응시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좋은 성적을 거두자며 격려를 하고 각각 한성 부와 대구로 향하였다. 그러나 대구에 도착한 박득녕은 출 발부터 좋지 않았다. 시험 일자가 며칠 남아 숙소를 정해야 하는데, 이미 마음에 드는 곳은 다른 사람들이 선점한 상태 였다. 결국 박득녕이 숙소로 정한 곳은 과거 시험이 치러지 는 곳 서쪽에 위치한 백정의 집이었다. 박득녕은 예전에 군 자들이 푸줏간을 멀리했다는 고사를 떠올리며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박득녕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 날에는 길 에서 미끄러졌고, 심지어 하도(下道)에서 올라온 사람들과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시험 당일에도 워낙 많 은 응시자들 때문에 시험 장소가 비좁아 처음에는 시험지 를 작성할 자리조차 찾지 못하고 누군가 제출한 뒤에 그 자 리에 가서 겨우 답안을 제출하였다. 성적이 좋을 리가 없었 고, 결국에는 낙방하였다.
과거 급제에 대한 열망이 강렬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많은 부정이 일어났다. 시험장 밖에서 남의 손을 빌려 답안 지를 작성한 뒤 이것을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가 제출하는 일, 시험 문제(흔히 표제라고 함)를 당일 출제해야 하는데 시험 전에 미리 알려주는 일, 부정 채점 등이 다반사였다. 17세기 초 안동 출신의 김령은 이렇게 시험 부정에 들어가 는 일종의 뇌물이 베 100~150필에 이를 정도였다고 개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초시와 복시를 통과하였다고 해서 바로 급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최종 단계인 전시를 거쳐야 하였다. 복시 통과자는 대부분 전시에 응해서 테스트를 받고 성적 등급을 받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원(壯元)은 이때 1 등의 등급을 받은 자로, 합격증[홍패(紅牌)라 함]을 받아들 고, 국왕이 내리는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금의환향을 하게 된다. 그런데 피치 못할 사정 등으로 복시에 합격하였음에 도 전시에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1636년 김령의 아들 사례가 그러하다. 당시 김령은 서 울로 응시하러 간 첫째와 둘째 아들이 모두 복시까지 합격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마침 둘째 아들은 혼사까지 예정되어 있어 겹경사라며 무척 흡족해하였다. 그런데 전 시 합격자가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듣지도 못하였는데, 두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면서 그 이 유를 물으니, 당초 전시가 6일로 정해져 발표되었는데, 이 것이 13일로 연기되더니 다시 20일로 연기되었다는 것이 다. 이렇게 되면서 아들이 판단하기에 전시가 언제 치러질 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혼사에 참석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전시를 포기하고 낙향한 것이다. 이처럼 과거 시 험은 지방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리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부정기적인 별시가 많이 시행되다 보니 점차 서울 사람들의 합격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

과거 급제로 끝나지않는다
과거에 급제하면 1등인 장원의 경우는 6품직에 제수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성적에 따라 7~9품에 해당되는 관직을 받았다. 참으로 고단한 여정을 통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하여 무작정 공부에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하급 관원을 대상으로 특전을 주는 각종의 시험 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중시(重試)이다. 중시는 통상 10년을 단 위로 하여 실시되던 시험인데, 주로 하급 문관들이 그 대상 이었다. 국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행되며, 합격자 수가 일 정하지는 않았는데, 많게는 19명까지 배출하였다. 현직 관 원들이기에 중시에 합격하면 관직의 급수를 올려주는 특전 을 내렸다. 만약 1등 장원을 하면 4단계를, 2~3등은 3단계 등급을 주는 식으로 성적에 따라 등급을 올려주었다.
10년에 한 번 치러지는 시험이다 보니 하급 관원들에 게는 일종의 기회였다. 어떤 이는 중시를 통해서 그 어렵다 는 당상관(堂上官)에 오르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중시처럼
관원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은 이밖에도 문신정시(文臣庭 試), 등준시(登俊試) 등이 있었다. 이들 시험도 역시 하급 관원을 대상으로 하며, 급제자에게는 일종의 승진 혜택이 주어졌다. 이러한 시험은 한편으로는 관원들에게 계속적인 공부를 독려하기 위한 점도 있었다. 예를 들어 문신전강(文 臣殿講)은 그동안 경전 공부를 테스트하는 자리였다. 이것 역시 하급 관원이 주대상이었다. 먼저 각각의 관원들에게 전공해야 할 경서를 지정해 주고, 당일 국왕이 배석한 자리 에서 책을 펼쳐 놓고 돌아앉아서 왕의 물음에 답하는 배강 (背講) 형태로 시험이 치러졌다. 일종의 암송 낭독인 것이 다. 경전에 대한 숙련된 이해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 시험 에 합격하면 역시 관직 등급을 올려주었다.
그뿐 아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융성 하는 정책을 구사하는 한편 역시 하급 관원들의 교육도 추 진하였다. 이른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가 그것으로, 의 정부의 요청에 따라 선발된 37세 이하의 하급 관원들을 규 장각에 모아 놓고 교육을 시켰다. 선발된 관원들은 『대학』 과 『논어』를 비롯한 주요 유교 경전을 돌아가면서 익히는 한편 초열흘 전과 보름 뒤 두 차례 테스트를 해서 그 성적 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경전을 공부하는 것 이외에 문장 을 짓는 것도 매달 한 차례 테스트를 하였다. 이러한 테스 트 외에 국왕이 깜짝 친림(親臨)하여 테스트하기도 하였으 니, 시험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실천의 목표로 삼았던 조선의 사대부. 그들은 끊임없는 학 습 과정과 각종 시험을 통한 경쟁을 거치며 청운의 꿈을 실 현하기 위한 능력을 개발하고 키워 나갔다.











